|
감사의 고백, 믿음의 선포
□ 본문 : 민수기 13장 30절 - 14장 10절
다음주일은 2023년 한 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배당에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건강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입을 열어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오늘 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023년 한 해를 사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을까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좀처럼 감사하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생들에게는 매일 10가지 감사를 쓰는 숙제가 있습니다. 10가지 감사를 쓰자고 하면 훈련생들의 반응이 거의 비슷합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어떻게 10가지 감사를 쓸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저를 봅니다. 어떤 훈련생은 ‘어떻게 매일 10가지 감사를 적을 수 있나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제자훈련 받은 사람들도 감사제목 쓰는 숙제를 했는지 물어보기도 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에게만 이렇게 힘든 숙제를 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훈련받은 분들은 30개를 적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매일 10가지 불평을 쓰라고 한다면 너무 쉬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불평할게 너무 많은데,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10개만 쓰라고 합니까? 적어도 30개 정도는 써야지 속이 좀 후련하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매일 감사 10가지 쓰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불평 10가지 쓰는 것이 쉽습니까?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면 감사가 많았습니까, 아니면 불평이 많았습니까? 감사가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사하면 나의 기분도 좋고 상대방의 기분도 좋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압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불평하고 원망할 때 마귀가 역사하는 것을 압니다. 감사하면 내 영혼이 살고, 불평 원명하면 내 영혼이 죽는 것을 압니다. 감사하는 자가 복을 받고, 불평 원망하는 자는 심판받는 다는 것을 압니다. 아는데 감사보다 불평이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감사는 어렵지 않습니다. 감사하기 위해 특별 세미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드는 것도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할까요? 얼마나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명령까지 하셨을까요? 감사처럼 쉬운 것이 없는데 좀처럼 감사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굳어진 마음에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죄가 있으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 사는데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감사는 상황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의 지휘관 한 사람씩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민13:1-3) 12명의 지휘관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고합니다. 12명은 40일 동안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행동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0명의 보고와 두 명 즉,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정반대입니다. 먼저 10명의 보고입니다.
13장 31-33절 말씀입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들의 보고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사람을 삼키는 땅이다.
둘째,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다.
셋째, 우리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
10명은 가나안 땅을 악평했습니다. 나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보고를 했을까요?
14장 7-9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10명의 정탐꾼과 정 반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
둘째, 그들은 먹이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자.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다.
10명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왔는데 말입니다. 12명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었는데 말입니다.
12명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악평하고, 어떤 사람은 심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감사합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감사를 따라가지 않고, 10명의 악평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0절 말씀입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감사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했다는 것입니다.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사람은 가나안 땅을 악평한 10명의 정탐꾼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졌습니까? 10명의 정탐꾼들의 악평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따라 악평했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 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 지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자고 하는 사람이 밉습니다. 돌로 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를 만나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 정말 여러분을 아껴주는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들어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자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니 감사하자고 말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할렐루야 아멘이 나옵니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닙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집사님도 내 상황이 되어보세요. 감사가 나오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힘들지만 결국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멘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감사하자는 말에 화가 납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 위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4:27-30)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하는 말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망하는 말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자신들이 원망한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을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하는 대로 됩니다. 불평하면 불평하는 대로 됩니다. 원망하면 원망하는 대로 됩니다. 감사와 불평이 그들의 인생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원의 운명까지 갈라놓았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하는 대로 됩니다. 감사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불평하면 불평하는 대로 됩니다. 불평은 마귀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똑같은 가나안 땅을 보고 10명의 정탐꾼은 악평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감사했을까요? 왜 똑같은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불평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할까요? 보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불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28절에 10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가나안 주민은 강합니다. 성읍은 견고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낙 자손, 즉 거인 족이 살고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정확했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보고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31절을 보면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보고 온 가나안 땅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보고가 아닙니다. 싸우기도 전에 기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낙 자손이 크다고 해도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이 메뚜기이겠습니까?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습니다. 객관적인 보고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을 객관적으로 본 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에 객관적인 사실에서 시작한 이들의 보고가 악평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이스라엘을 보고 메뚜기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향해 메뚜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10명의 정탐꾼들처럼 됩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을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결론이 악평으로 끝납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이 사람은 이래서 문제고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고 … 객관적으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불평과 원망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것이 점점 더 커 보입니다. 좋은 것은 보이지 않고 안 좋은 것만 보입니다. 주신 것은 보이지 않고 없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시작한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악평으로 끝났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이와 같이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4:8)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 아무리 강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애굽의 장자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애굽 군대를 한 순간에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기적입니다. 가나안 주민이 아무리 강해도 애굽 군대보다 강하겠습니까? 세계 최강의 애굽 군대도 한 순간에 멸하신 하나님이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가나안 땅은 반드시 이스라엘의 땅이 됩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가나안 땅을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감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10명의 정탐꾼처럼 문제만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문제 때문에 불평하게 됩니다. 10명의 정탐꾼처럼 환경만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환경 때문에 불평하게 됩니다. 10명의 정탐꾼처럼 사람만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 때문에 불평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평하는 대로 되고 맙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10명의 정탐꾼처럼 악평으로 끝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믿어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데 왜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왜 우리가 이 문제와 고난과 시험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넉넉히 이깁니다. 이기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상황 어떤 문제 앞에서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결국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감사한 대로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심히 아름다운 땅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의 고백대로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주민들은 그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문제를 바라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환경을 바라보면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사람을 바라보면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악평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악평합니다. 그리고 그 악평대로 됩니다.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론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없는 결론은 불평과 원망으로 갑니다. 하나님 없는 결론은 악평으로 끝납니다.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지금도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이해 못해도 감사입니다. 알지 못해도 감사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감사입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분명 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고난은 변하여 영광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감사하면 부활의 아침이 옵니다.
한 가지 더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다음 세대를 향해서 감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다. 너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살 거다. 누가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냐? 너는 이 세상에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를 메뚜기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직접 이런 말을 듣지 않았어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거짓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악평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가슴아픈 것은 이런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확인 도장을 찍습니다. ‘맞아, 너는 그런 사람이야.’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믿음으로 선포했던 것처럼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셔. 그러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 세상은 너의 먹이야. 그들은 너의 먹이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서.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해.’
※ 어느 사모님의 간증입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해서 등교를 거부합니다. 학교가 무섭고 친구들이 무섭습니다. 친구들은 다 잘났는데 자신은 잘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정말 한심합니다. 무능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거인인데 자신은 메뚜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 싫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상황을 보니 이렇게 학교에 나가지 않고 집에 숨어있다가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 올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학교에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패배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무서워서 숨지 말고 당당하게 싸워서 승리하도록 사모님이 매일 했던 일이 있습니다. 학교에 가기 전에 아이를 현관문에 세워놓고 아이에게 ‘반드시’ 라는 찬양을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쓰리라
천지는 변해도 나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 낙심하며 실망치 말라 실망치 말라
네 소원 이루는 날 속히 오리니 내게 영광 돌리리
네 소원 이루는 날 속히 오리니 내게 영광 돌리리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쓰리라
세상의 소망이 사라졌어도 온전히 나를 믿으라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인내하며 부르짖으라 부르짖으라
영광의 그 날이 속히 오리니 내게 찬양하리라
영광의 그 날이 속히 오리니 내게 찬양하리라
뽕짝 분위기의 빠르고 경쾌한 찬양입니다. 아마도 이 찬양의 가사가 아이의 상황과 딱 맞았던 모양입니다. 이 사모님이 학교 가기 전에 아이를 향해 군가를 부르듯이 아이를 향해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누가 보면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향해 믿음으로 선포하며 이 찬양을 불러주는 사모님의 마음은 말 그대로 눈물입니다.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아이의 상황을 바라보았다면 낙심했을 것입니다. 아이가 싸워야 할 현실을 생각하면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우리 아이들이 마귀의 거짓에 속아 세상을 거인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메뚜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들은 나의 먹이다!’라고 외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믿음의 용사가 되어 승리할 때까지 부모세대가 다음세대를 향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선포해야 합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번 한 주간 정말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났던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할지라도, 아무리 힘들고 아픈 관계 속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심히 아름답다는 감사의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먹이다!’
이 감사의 고백, 믿음의 선포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감사대로, 우리의 믿음의 고백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