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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소명(부르심)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1:6)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제1부: 소명과 부르심.
대전제! 먼저 소명이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명’ 이란 희망과 달리 창조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서
부르심을 수용하면 도약을 위한 역동적 힘을 주신다.
부르심, 택한 족속! 우리는 이 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다면?
당연히 부르신 그분이 책임지실 것이다!!!
본 장에서는
이 세상에는 특히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가 있으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훈련시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사용하시고야 만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모든 고난은 부르심을 기억하면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부르신 그분과 연결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대에 하나님은 누구를 부르셨는가?
바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자,
정말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믿는 자
내 삶의 주도권을 그분께 맡기는 자를 말한다.
아!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요 부르심이다.
누가 제 정신으로 부활과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을 믿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이지,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가 전혀 아닌 것이다.
1.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를 부르신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는 주 예수는 주!
모두 무릎 꿇고 경배를 드리세 예수는 만유의 주님.
예수는 주 예수는 주 온 천하 만민 우러러
그 보좌 앞 영광을 돌리세 예수 예수 예수는 주!
나는 처음 교회에 나갈 때,
나와 하나님만 있으면 될 텐데
왜 예수라는 분이 끼어 있는가? 라는 의아심을 가졌다.
사실 이것은 꽤 오랫동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대 어느날 D.T.S 강의실로 가다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는 주!”
이 찬양이 흘러 나올 때마다 이상한 감동이 나를 감싸는 것을 알았다.
왜 예수라는 이름만 나오면 이 마음에 감동이 오는가?
왜 사람들은 예수, 예수 하는가?
내가 깨달은 계시는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
죄 문제! 하나님은 나의 죄를 예수에게 전가 시켰다.
나는 이사야 53장을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십자가)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의 손(예수)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내가 알아낸 하늘의 원리는 이런 것이었다.
성부: 나의 죄를 성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일을 계획하셨다
성자: 그것을 실재로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성령: 이 위대한 진리를 믿도록 내 안에서 계속해서 나를 설득 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나의 죄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나와 자신 사이에 예수를 개입하셔서
나의 온갖 더러운 죄와 허물을 그에게 뒤집어 씌우시는가?
여기에는 놀라운 은혜의 진리가 숨어 있었다.
이 논리를 믿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문이 열린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 능력,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 온다.
나의 죄로 인해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내게 전해질 때.
그때 치유와 회복의 은혜도 함께 내 안에 흘러 들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다!!!
이사야 53장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웠다.
예수는 그것을 감당하시기 위해 속건제물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내가 믿던 믿지 안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것이다.
다만 내가 믿으면
실재로 죄사함의 능력(두려움에서 벗어남)이
나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고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려면
공의의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죄가 드러난다.
바로 그 죄를 독생자에게 전가(뒤집어 씌우는)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은 나의 죄를 보지 않고 내위에 덮힌 보혈을 보시고
진노를 은혜로 바꾸시며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전가(Impute)의 진리를 믿으면,
그 다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우리 삶의 모든 주도권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주님께로 옮겨진다
이것은 자신의 희생의 대가로 하나님에게 받은 권세다.
따라서 주도권을 주님께로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를 나의 주로 진실로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주도권을 그분께 드리는 사람이다.
어쩌면! 다음과 같은 복음 성가가 있다.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삶의 주관자 되신 그분 앞에
나의 무릎을 끊어 경배하네,
나의 삶을 그 분께 맡길 때 비로소 나의 마음이 평안해!”
전가(뒤집어 씌움)의 참 목적은
단순히 구원에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삶에서 죄와 허물의 벽을 허물고
우리 죄를 감당하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흐르는 생명선을 타고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 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승리할 수 있도록,
고난이 올수록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강하여지고 담대해지며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며 생명이며 은혜며 사랑이며 복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 하셨던 것이다.
두번째,
부르신 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예수 이름만 부르면 묘한 기름부으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처음부터 우리안에 있었든 그분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 예수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이름의 능력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그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났다.
그렇다! 예수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지금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내가 깨달은 진리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영의 세계에 들어 가며 하나님의 영(성령)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창문이 열려지며 원수의 공격이 보이고
그 상황에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분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면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승리하신 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것이 부르신 자의 출발이다.
이제부터는 혹독한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재 창조 되어가는 과정이 내 앞에 열려진다.
그 훈련과정중 가장 힘드는 것이 바로 사랑의 결핍이며,
그것은 외로움으로, 두려워 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2. 사랑과 거룩
부르신 자가 얻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소유하고 이웃에게 부어 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가 있는데 그것은 거룩이다.
대부분의 정신적인 병은 사랑의 결핍이나 결함에서 온다.
현대인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정신병에 걸려 있다.
내가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녀야 할 자세가 있다.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이제 나는 내가 발견한 진리를 말해야겠다.
사랑과 거룩! 왜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이 되는가?
왜냐하면, 내가 바로 정신 치료 대상자 이기 때문이다.
내가 외로움의 주인공이며,
집착과 거절감에 시달리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정신을 온전히 치료할 수 있을까?
내가 받아야 하는 치료 과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거룩, 즉 거룩한 삶, 생각, 자세,다!!!
주님은 이 땅에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결코 거룩을 잃지 않으셨다.
거룩은 애착을 잘라내는 유일한 도구이며,
사랑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다.
인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거룩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만이 가질 수 있는 성분이다.
파도! 그리고 밀물과 썰물!
나는 위도에서 끝없이 해안을 때리는 파도를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끝없이, 반복적으로 밀려드는 파도!
무엇이 저를 그렇게 밀어 붙이는가?
나중에 내가 발견한 이치는 이렇다.
파도! 이 힘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외부의 힘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다. 무엇일까?
내부가 정화된다. 이것이 거룩해지는 과정이다.
세계와 바다를 사랑하는 어떤 힘이,
바다 내면의 퇴화현상을 역행하는 하도록 일하고 있는 것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의 마음속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내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죄적인 생각과,
그것을 싫어하고 반항하는 힘과의 싸움!
휴유! 나는 여기서 유일한 희망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그리고 무섭고 두려운 파도의 세력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사랑과 거룩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하시는가?
먼저, 사량을 보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요일4:7)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절)
명심하라! 진짜 참 사랑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아! 이것을 내 힘으로 이루려 하면 애정과 집착으로 변하며 죄로 변형된다.
다음 거룩:
레위기에서 요한복음(요17:17-18) 까지 일관된 내용은,
물과 기름처럼.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다.
사랑과 거룩! 이 세상에 있으면서 속하지 않고
이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유일한 방법은 거룩이다.
주님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에게 창조주의 사랑을 부어주는 것,
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하여는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은 내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거룩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내면의 소리를 들음으로 거룩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거룩하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아들아! 이제는 담대하라! 두려워 말아라!
인간적 이기심에서 과감히 벗어나라!
그 까짓 것이 나보다 더 귀하겠니? 너는 내 아들이다!!1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강하고 담대하여라!!!
큰일을 하려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영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고 책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사랑과 거룩이다.
가정을 비롯해서 모든 조직의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흘러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자 안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만 온다.
너는 거룩하다! 그러니 힘을 내라!
그러면 이 말씀은 언제 들을 수 있는가?
아! 다른 경우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예배 때!
어린 양의 보혈이 하나님과 나를 연결할 때 들을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보혈을 통해 흘러오며
그때, 너는 거룩하기 때문에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오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어둠의 권세도 힘이 없네, 보혈의 능력으로
난 더 이상 정죄함 없네, 난 주 보혈 아래 있네!!!
아! 나는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비밀을 말하리라!
의지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사랑과 거룩을 이루려 하지 말라.
오직 그분이 내 안에 계셔서 이일을 해낼 것을 믿고 그분께 매달려라!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요17:17)
3. 무화과의 비밀! (막11: 12-24)
(*. 이것은 손기철 장로님의 강의를 듣던 중 받은 은혜다.)
부르신 자에게는 믿음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11:21-22)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길 가에 서 있는
무화과를 저주하신 장면!
다음날 아침!
배드로가 랍비여! 정말 무화과가 말랐습니다!!!라고 감탄 한다.
주님의 대답은
“봤냐?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알겠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믿어라!’ 라고 말씀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곧바로 하신 말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바다에 던 지우라! 하며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이 산더러 바다에 던 지우라?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라!” 이 말씀에 주목하라!
믿음이 보이지 않는 분(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내려 놓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분을 믿어라!!
무슨 말인가?
너희(부르신 자)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예수께서 길을 여셨고
그래서 구하면 주실 것이라는 가능성을 그 마음에 심어 주시고
결국 기도하면 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 자! 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양평 금식기도원에서
(이건 실제 있었던 사건임)
금식을 잘 하려면 샤워를 자주해야 한다.
3층 샤워실!
찬송가를 부르며 신나게 목욕을 하시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와! 다리가 뼈만 앙상한 새 다리와 같다.
나는 그분에게 슬며시 말을 건넸다.
목사님! 40일 금식을 마치고 보식하시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평신돈대유!
목사님이세유? 제 간증을 들어 보세유.”
나는 그 집사님에게서 정말 기가 막히는 간증을 들었다
혈당 120이 정상인으로 한계점이란다,
만약 4백을 넘으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와우! 7백을 오르락 내리락!?
“하나님! 다리를 잘라내느니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그는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고 여기서 남몰래 금식을 결심했다.
울면서 예배를 드리는 중!
갑자기 ‘고쳐지리라!’ 는 믿음이 왔다.
그 확신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그는 울면서 외쳤다! 오! 하나님! 믿습니다.
그리고 일주일간 금식과 보식을 3회에 걸쳐 했다.
와! 과연 혈당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의사들이 한결같이 이건 정말 기적입니다!!! 라고 했다.
여기를 보세요! 지금 이 다리가 살아나고 있답니다!!!
그는 지금 자칫 잘라야만 했던 다리,
그래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다리를 씻으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그 분은 평범한 평신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진 것이다.
그분이 믿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려고 그 분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어느날 ‘아! 그렇게 되겠구나!’ 라고 믿어지는 것이 있다.
다시 무화과의 비밀!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 믿어졌던 것이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셨던 것이다!
그리고 전혀 의심치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절)
‘너희’ 는 바로 제자들임을 기억하라.
부르신 자는 간절히 기도하면 내 안에 믿어지는 부분이 있다.
아! 이것은 이루어 지겠구나! 성령님이 주시는 확신이 온다!
과연 그렇다! 그러면 받은 줄로 믿으면 된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5:14-15)
믿음이라는 말에는 ‘충성’ 이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나의 주인 되시는 그분께 주도권을 드릴 때
그분에 대한 신뢰감에서 오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치는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
그래서! 우리는 부르심에 따라 갈 수 있다.
보이는 것을 붙잡지 말고 부르신 자 앞에 서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