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회 정기답사)
추억의 스위치백트레인, 이색기차여행
(강원 삼척, 태백)
2016년 3월 9일(수)
‘돌아온 스위치백 트레인’ 추억의 증기기관차 칙칙폭폭
국내 유일의 뒤로 가는 열차 ‘스위치백 트레인’은 과거
스위치백 구간(흥전역~나한정역)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증기기관차다.
스위치백은 경사가 가파른 산간지역을 ‘갈 지(之)’자형으로
철로를 연결해 운행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과거 도계역에서 통리역으로 가는 열차는 해발 315m 나한정역에서 멈춰,
해발 349m 흥전역까지 거꾸로 올라갔다.
말그대로 역주행하는 열차였다.
스위치백 구간은 2012년 6월 동백산~도계역을 잇는 솔안터널이 뚫리면서 폐선됐다가,
2014년 철도체험 리조트 ‘하이원 추추파크’가 관광 노선으로 개발하며 부활했다.
지난 1월 9일부터 스위치백 트레인은 도계역에서
스위치백구간(나한정~흥전~심포리)을 거쳐
추추스테이션(구 심포리역)까지 총 9.2㎞를 운행하고 있다.
도계역에서 매일 오후 12시30분과 3시40분 열차가 출발한다.
추추스테이션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60분이다.
스위치백 트레인의 객차는 난로 객차, 대통령 전용객차,
오픈형 객차 등 3량이 각기 다른 테마로 꾸며져 있다.
(중앙일보 2016.1.13.)
국내 최고 속도를 자랑하는 산악형 레일바이크
태백준령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720M 정상에서 최고 25km의 속도로
산기슭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는 레일바이크로 짜릿한 속도감과
스릴을 만끽할 수 있으며 레일바이크 운행구간에 있는
12개의 크고 작은 터널마다 테마가 있는 색다른 빛과
조형물의 연출을 통해 흥미 가득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스카이스테이션 → 추추스테이션까지 7.7km
편도운행하며, 평균속도 20km/h, 체험시간은 약30~40분 소요된다.
아직 기억한다, 산골 탄광마을의 흔적을
태백에서 석탄이 발견된 것은 1920년경. 장해룡이라는 사람이
금천골 먹돌배기의 개울가에서 처음 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곳은 석탄이 발견되기 전에도 땅이 검었고 비가 오면
계곡물도 검게 물들어 예부터 ‘거무내’라고 불렸다.
석탄을 알아본 일본인들은 태백에 탄광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였다.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 발발한 6·25전쟁으로 광산산업은 발전할 틈이 없었다.
탄광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 등의 산업발전과 맞물리면서 부터였다.
태백뿐 아니라 정선·삼척·영월·보령·문경·화순 등의 탄광도시가 태어났다.
탄광산업이 활성화되자 ‘한 밑천’을 꿈꾸는 이들이
전국에서 작은 산골 마을로 몰려들었다.
화전민들이 흩어져 살던 태백은 무려 13만 명이 넘는 거대한 탄광도시가 되었다.
그 주역은 탄광노동자, 광부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광부들은 함백·태백·연화·백병산 등을 파헤치며
불을 품은 검은 돌을 캐내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했다.
물질적 풍요와 생사를 건 노동을 오가며 위태롭게 반짝이던
태백의 호황은 1990년대 들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정부의 석탄합리화정책으로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일터를 잃은 광부들 역시 태백을 떠났다.
한때 13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던 탄광도시에 남은 이들은
5만 명 안팎. 가파른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사택들이 시끌벅적하던 한때를 증명할 뿐이다.
주인 잃은 빈집은 폐광마을의 쓸쓸함, 그 자체다.
물론 여전히 이름을 유지하며 채탄작업을 지속하는 탄광도 있다.
한보탄광, 대덕탄광 등 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
한때 화려했던 쓸쓸한 폐광마을, 철암
한때의 위용을 증명하듯 제법 큰 역사를 자랑하는 철암역은
태백의 흥망성쇠를 오롯이 품고 있다.
1930년대 말, 철암에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채굴한
석탄을 모아 동해나 내륙으로 반출할 선탄(탄을 골라내는 작업)장이 들어 섰다.
탄을 전국으로 운송할 목적으로 산업철도가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묵호와 철암을 잇는 철암선이 열렸고,
1955년 철암과 영주를 잇는 영암선까지 열린다.
이들은 모두 영동선에 속한다.
철암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탄광마을의 호황기는 길지 않았다.
1993년, 철암 최대 탄광이었던 강원산업이 폐광하면서
철암은 다시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로 돌아간다.
‘노다지의 꿈’을 품고 찾아든 사람들이 떠난 폐광마을은 그렇게 희미해진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그리는 이들에게 발견되지 전까지는.
탄광마을의 시작과 끝을 품은 철암에서는 탄광마을의 속살을 엿볼 수 있다.
가파른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이며,
일제강점기 세워졌으리라 추정되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언젠가 사람들로 벅적거렸을 철암시장이며 상가들이 마른 숨을 내 쉬고 있다.
폐광마을의 쓸쓸함이 차가운 공기 사이를 부유한다.
희망을 그리다, 상장동 남부벽화마을
1970년대까지 4000여 명의 광부들이 몰려 살던 상장동 남부마을.
이곳 출신 허강일씨는 탄광마을의 추억을 벽화로 기록하며 새로운 숨을 불어 넣고 있다.
상장동 남부마을은 1970년대만 해도 함태탄광, 동해산업 등의
광부 4000여명이 거주했던 대표적인 광산사택촌이었다.
저탄장이 있던 문곡역 주변에 자리 잡은 광부들의 생활터전으로
집과 대폿집이 줄지어 있던 번화가였다고.
다른 탄광마을과 마찬가지로 석탄산업합리화로
폐광이 늘면서 사람들이 떠나갔다.
한창때의 1/10 가량인 400여명의 주민들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굴뚝에서 피어나던 연기 때문이었을까.
노랗게 회칠한 담벼락에 그려진 광부들 덕분일까.
대다수의 광부들은 떠났지만 남은 주민들과 벽화에 새겨진 광부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광부들이 막장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탄을 캐고 도시락을 먹는 모습까지
탄광마을의 소소한 일상들이 벽화에 새겨져 있다.
전설의 개 만복이는 정말 만 원짜리를 입에 물고 있다.
이 벽화는 남부마을 출신인 허강일 문화예술산업 그림벽 대표를 주측으로 진행되었다.
(2014. 5.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기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