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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교토 10 - 도시샤 대학에서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를 보고 시조 이자카야에 가다!
2024년 9월 19일 교토에서 긴카쿠지 (銀閣寺 은각사) 를 보고 철학의길 哲學の道
을 걸은 후에 아라시야마 를 찾아....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절과 아라시야마
치쿠린 竹林 の小經(죽림노소경) 을 보고는 킨카쿠지(금각사) 를 찾아 구경합니다.
이제 윤동주 시비 를 보기 위해 교토 고쇼(京都御所 황거) 앞에 도시샤 대학교를 찾아가는데,
우리 부부는 예전에 벚꽃철에 한번 왔으니 두번째인데, 이런? 도시샤 여자대학교 로
잘못 들어가서 헤메다가..... 직원의 안내를 받아 길 건너편에 도시샤 대학교 로 들어갑니다.
도시샤대학 직원에게 “윤동주 시비와 도꼬 데스카?” 라고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물어서 방향을
안내 받아 마침내 시비(詩碑) 를 발견하는데..... 윤동주 시비 (尹東柱 詩碑 ) 와 정지용시비
(鄭芝溶 詩碑) 가 나란히 있으니 태극기와 편지 등 먼저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물건들이 참 많습니다.
윤동주 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가 일제가 신사참배 를
강요하자 자퇴하고 돌아와 광명중을 거쳐 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해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1942년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에 입학합니다.
1943년 7월 귀향을 서두르던 중에 사촌 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 되었으니, 악형 속에서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는데 죄명은 독립운동 이었고,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 해야 한다” 는 일본 징병제에 대한 생각 이 옥살이의 원인 이었습니다.
1년후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시신을 수습하러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 를 면회했는데,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주사 때문에 동주
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 라고 말하고는 한달후 숨을 거두었으니 생체실험의 대상 이 된 것 입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을 맞아 교토(京都)부 우지(宇治) 시에 기념비 가 세워졌는데.... 일본인
학우들과 우지강변에서 야외 송별회를 하면서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찍었으니 이 사진이
1990년대 공개되면서 일본인 시민단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가 만들어 집니다.
12년만인 2017년 10월 28일 시인의 1938년 작품 ‘새로운 길’ 을 새긴 비석 제막식 을 진행
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여중생이 곤타니 노부코 에게 일본어로 작성한
e메일을 보냈으니..... “다른 나라 인물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해 멋진 결과를
낸 것을 존경한다. 윤동주 기념비가 한일 사이의 가교 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 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 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작 ‘쉽게 씌어진 시’ 에 나오는 싯귀 입니다. )
또 여기 정지용 시비 (鄭芝溶 詩碑) 에는 '압천(교토 가모가와 강)' 을 새겼는데....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정지용 은 1902년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에 입학해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과 이태준을
만났는데...... 3· 1운동이 일어나자 무기정학 을 받고 요람에 소설 “3인”
을 싣고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 에 입학해 시
“석류” 를 썼으며 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를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합니다.
일본 문단지 “근대풍경 (近代風景)” 에는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순간의 이미지 를 그린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 와 같은 작품들을 실었으니 지금 들여다 보아도 지극히 현대적 인데 1930년대
우리 문단의 총아였던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는 지용에게서 비롯되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지용 은 1929년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을 창간해 순수시 운동의 물길 을 텄으며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9인회” 를 만들게 되는데 문인탄압과 회유 에도 꺾이지 않은 민족시인 으로
1948년 “문장” 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 에서 “친일(親日) 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눕지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으니 그래도 버릴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첫 시집에 수록된 “향수” 는 모국어의 눈부신 개척을 이뤘거니와 조국광복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 빼앗긴
조국을 '고향' 의 이미지로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로 각인시키고 일깨웠던 것이니 “문장” 의 시 추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청록파” 라는 한국시사의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을 발굴 하였습니다.
두번째 시집 “백록담” 에서 정지용은 백록담으로 상징되는 조국의 자연을 내면의 언어로 형상화시켰
으니...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어린 송아지 는 움매―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
을 보고도 매여 달렸다” 라는 대목에서 이민족에게 말과 글을 배우게 되는 불행 에 대해 통곡했습니다.
'지조를 지킨 윤동주와 정지용' 이 대단한 것은 당시 문인들은 대다수가 변절 했으니.... 이광수 는 “조선인을
천황폐하께서 적자로 거두어 주시는 은혜에 감읍하여 뼈와 살과 혼도 일본인 이 되어야 한다” 고 말했으며
윤치호, 장지연, 최남선, 박영효, 이용구, 우범선, 김동인, 주요환, 김동환, 모윤숙, 김활란, 홍난파가 그들이라!
훗날 1948년에 대한민국 국회가 만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에 수백명이 체포되었는데 하나같이 자기
변명 으로 일관했지만 오직 한사람 이광수 만은 자기 죄를 인정 했으니 남자라 할수 있겠는데.... 일본이
저리 빨리 망할줄 몰랐다고 말했으니 일제 치하에서 무한 고통을 받느니 협력하는게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난때 베이징을 점령한 서양 8개국의 일원이고, 1904년 러일전쟁시 영국과 동맹 이었으며
1914년 1차 세계대전시 미국, 영국과 같은 편 이고 1918년 볼세비키 저지를 위해 미국과 함께 시베리아에
출병했으니, 5번째 2차대전에서 중국에서 물러나 미국편으로 참전했으면 승전국 이니... 한국이 독립 하자면
자력으로 1954년 부터 8년간 프랑스와 싸워서 150만명이 죽고서야 독립한 알제리 의 운명을 걸었을 것 입니다?
“국화 옆에서” 를 쓴 시인 서정주 의 가미카제 병사 송가 (松井俉長 頌歌 ) 입니다.
아아 레이터만은 어데런가. /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 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를
노래한 노천명 의 황군을 찬송하는 詩 “軍神頌(군신송)” 입니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 남방 거친 파도 위에 /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
싸움하는 나라 거리다운 / 네거리 지나며 / 12월 하늘을 우러러본다 / 어뢰를 안고
몸으로 /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 성좌처럼 솟는다.
또 정지용은 “문장” 의 추천평에서 ‘소월의 톡톡 불거지는 삭주 구성조 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아니 아기자기 섬세한 맛 이 좋다’ 고 평했으며 1948년에 37편
의 시, 수필, 기행문이 수록된 “문학독본” 을 출판하는데.... 6· 25전쟁시 납북 되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인 도시샤 대학교 교정을 거닐다 보니 이 학교의 교수 를 지낸 사람 중에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유종열) 라는 분이 있는데, 일본의 민예 연구가
이자 미술 평론가로..... 도쿄에 민예관을 설립하여 공예 지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경복궁에 조선 총독부를 짓기위해 광화문 철거 가 논의될때 적극 반대 하는등 한국의 민속예술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 1924년 조선 미술관 을 설립했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 와 이조 미술전람회 를
열기도 했으며 저서로 '조선과 예술’, ‘종교와 그 진리’, ‘신에 대하여’, ‘차(茶)와 미(美)’ 등이 있습니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이 벌어졌을 때 야나기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 예술을 사람하는 사람으로서
일본 식자들이 조선을 욕하고 괴롭히는 것을 걱정했으며, 또 '조선인을 생각한다' 는 글에서 조선인
에게 자유로운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걸 비난하고 조선 문화재를 파괴한건 왜구와 일본 무사 라 말합니다.
그의 광화문 파괴 반대는 남대문을 철거 하고자 했을때 재경성 일본 거류민장 나카이 기타로 가 반대한
일과 유사해 보이지만..... 남대문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가또 기요마사가 서울을
점령할 때 남대문으로 입성 ( 고니시는 동대문 ) 했으니, 조상(?) 의 유적 이기 때문에 반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광화문의 경우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이 문화재적 가치 가 크다고 반대한 것이니..... 일본 신문에
"동양의 옛 건축물의 무익한 파괴에 대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라면서 부서질 운명에
처한 광화문을 생각하며 처절한 눈물을 흘리자 이 글로 인해 일본에서도 철거 반대운동 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야나기는 조선 도자기 수집에도 열심이었는데 우리 美 의 특징을 '비애의 미' 라 했으며 '조선의 공예를
조선 사람 보다 더 사랑' 했다는 일본인으로.... 조선예술의 위대함을 극찬 하면서 총독부가 석굴암
보수공사를 하려 했을 때 '섣부른 보수 공사가 비극' 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 조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현명하지
않고 깊이도 없고 또한 따뜻함도 없다는 걸 알고.
- 고분을 파헤쳐 옛 예술품을 모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의 칼이 아니다.
- 사람들은 일본의 사상을 심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 금전이나 정치로는 마음과 마음을 서로 맞닿을 수 없다.
- 이웃간에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깨끗이 하고 동정으로 따뜻하게 하는 길밖에 없다.
- 조선예술은 정이 낳은 아름다움이다. 중국처럼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일본의 칼처럼 에리하지도 않으니 속으로 가라앉은 '곡선의 미' 이다.
또 조선에서는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 유의 그림을 俗畵(속화) 라고 했는데 이는 유학자인 조선 고위층들의
천시하는 마음 이 담긴 표현이니.... 야네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풍속화를 일컬었던 俗畵(속화) 라는
이름 대신에 "民畵(민화)" 라고 처음으로 불렀으니..... 오늘날에도 이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예품의 아름다움 을 인식하고 보급하여 새로운 생활 공예의 발전을 꾀하는 민예운동 의 창시자인 야나기는
1936년 "도쿄에 민예관” 을 세웠는데.....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 민예품 1만 5천점 중에 3천점 정도가
조선 민예품 이니.....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조선 민예전을 할때 이곳 도쿄민예관에서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운동을 시작한 배경에는 조선 백자에 대한 이해 가 있었으니 아사카와 다쿠미
의 영향으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 가 일본에 소개해 야나기가
접했기 때문 이라는데.... 그가 조선 백자를 수집해 설립한 조선민족 미술관 소장품 은 대한민국 국립
중앙박물관 으로 계승됐는데, 3천점 중에 10여점은 전시 중이고 나머지는 지하 수장고에 보관중 입니다.
또 아사카와 다쿠미 는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하며 조선의 민둥산 산림녹화 에 힘썼으니
2년 걸리던 한국 잣나무를 그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 으로 단축할 수
있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을 거듭하여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 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 도 개발 합니다.
야나기에게 조선백자와 미를 알게 해준 다쿠미 는 조선의 공예를 좋아해 형 노리타카에게 조선의 도자기 파편
을 구해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 을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 을 주장했는데 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 ( 道〜白磁の人)” 가 개봉됐습니다.
에미야 다카유키의 소설 “백자의 사람” 이 원작 인데.....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 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라고 적혀있으니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 을
했으며 한국의 산을 푸르게하는데 헌신했고 한국 백자와 공예품을 사랑하고 수집했습니다.
유명한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공예에 눈 뜬 것도 아사카와 형제 덕분 이었으니 1916년 형
아사카와가 야나기에게 조선의 청화백자 를 선물했고 이를 계기로 야나기는 한국 공예에 빠져들었다는데,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는 조선 도자기와 목공예품, 금속공예품을 모아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 을 세웠습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관심을 가진 것 중에 소반(小盤) 이 있으니 소반을 수집 조사 연구했고 그 결과
를 담아 1929년 ‘조선의 소반(朝鮮の膳)’ 이라는 책을 냈으니 국내 최초의 소반 연구서 입니다.
‘지금 하지않으면 더 많은 소반이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 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한국의 소반을
한국인 보다 더 사랑했던 그였으니 ‘조선의 소반은 순박한 아름다움 에 단정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 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아취를 더해가니’
그때까지 소반은 그저 평범한 일상용품 이었는데 아사카와 다쿠미는 거기서 아름다움 을 발견해 냈으니 사람
들은 박물관에서 소반을 감상하며 미적으로 감동하기 시작했는데... 일상용품이 미술품으로 바뀐 것
으로 요즘 우리가 오늘날 소반을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아사카와 다쿠미 덕분 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31년 그는 서울에서 식목행사 를 준비하다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국식으로 장례 를 치렀고,
한국 사람들이 앞다퉈 그의 상여 를 멨는데.... 서울 망우 역사문화공원 (옛 망우묘지공원) 에 가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무덤이 있고 무덤 앞엔 항아리 모양의 돌 조각 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그의 형이 조선백자를 모티브로 삼아 조각한
것이라는데 묘비엔 이렇게 써 있습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야나기 무네요시 와 아사카와 다쿠미 를 생각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목화와 소금 의
아버지인 와카마쓰 우사부로 인데.... 목화는 고려말에 문익점 이 중국 원나라에서
씨앗을 붓통에 숨겨 들여온걸 재래면 이라고 하는데 섬유가 짧아 방직 원료로는 부적합 합니다.
반면에 미국에서 개량된 육지면 은 섬유가 가늘고 길며 강하고 질겨 광택 이 있으니....
육지면은 1904년 목포 일본 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 가 정유재란때 이순신 장군이
머물며 병선을 건조해 노량해전을 준비했던 섬 고하도 에 407년 후에 들어와
목화를 시험 재배 한 것이 효시니 고하도는 국내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된 발상지 입니다.
목포 영사 와카마쓰 는 1903년 1년간 목포 고하도 기후조건 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맑음 264일, 구름 60일, 비 36일, 눈 6일 로 육지면의 파종 부터 수확
까지 기간인 5월 ∼10월까지 목포 지방의 정오 평균 기온이 21.7℃ 로 조사되었습니다.
면화 성장기인 7월은 27.8℃, 8월은 30.6℃, 9월은 29.4℃ 로 높아 최적의 조건을 갖춘지라
와카마쓰는 기후· 토질 등 생육환경 면에서 고하도가 목화 재배의 적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 농무성으로 부터 미국종 면 종자 13종 을 교부 받아 목포에 살던
266세대 1,045명의 일본인 중에서...... 야마자키 도사부로 에게 위탁해 시험 재배를 합니다.
또 와카마쓰 는 솥에다 바닷물을 부어넣고 장작 으로 불을 때서 끓여서 만드는 조선 재래의 소금인 자염
(煮鹽) 이 너무 비싼걸 보고는.... 고하도 등 목포 인근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만든 천일염 을 대량
보급하니 목포는 “삼백(목화, 소금, 쌀)의 도시” 가 되어 일제시대 3대항 6대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러고는 다시 렌터카 차를 몰아 교토의 고조 거리 에 있는 호텔로 돌아와 마눌과 아이들은
쉬면서 숙소 키친에서 저녁을 해서 먹으라 하고는 사위와 둘이서 호텔을 나섭니다.
가와라마치 거리 를 따라 북쪽으로 10분을 걸어서 시조 거리 에 도착해서는 이자카야 를 찾아 뒷골목
을 구경하는데...... 여긴 매우 비좁은데다가 서서 먹는 집 도 많으니 요리를 하는 불로 뜨겁습니다.
그래서 골목을 나와 큰 네거리에서 한큐전철 정류장 건물 로 올라가니 여기 5~6층에는 고기와 횟집 등
식당들이 많이 있기는 한데.... 가격이 너무 비싼지라 도저히 감당이 안되기에 포기하고 내려 옵니다.
그러고는 한블록 떨어진 옆 골목 으로 들어가니 여기도 식당들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 밖에 게시된 요리들의 사진을 구경하다가 한 재래식 이자카야 로
들어가니 여긴 방에 식탁이 있고 아래를 파서 발을 내리도록 되어 있으니 좋습니다.
생맥주 나마비루 는 바로 직원에게 주문을 하면 되지만 우리 저녁을 겸한 안주
는 모니터로 주문 을 하도록 되어 있어.... 여러 가지를 시켜 실컷 먹고
마시고는 다시 거리를 구경하며 걸어서 고조 거리에 있는 숙소로 돌아 옵니다.
시조에서 가와라마치 거리 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리 딸이 손녀를 데리고 올라오는
걸 마주치는데.... 쇼핑하러 간다기에 되돌아 올라가 한큐 가와라마치 맞은편에 OPA
라는 건물로 들어가서는 7층 으로 올라가니 100엔숍으로 유명한 세리아 SERIA 매장 입니다.
6층은 니토리데코 이고 8층은 북오프이며 7층이 세리아로 여자들이 좋아할 소품 들이 많은데 100엔 숍 에
특히 토끼 가위 가 인기라고 하며..... 딸이 말하기를 오빤 츄우사키 캐릭터 굳즈, 사이즈 보냉백,
키친템 도시락 싸기, 산리오 컬렉션, 텀벌러 커버가 유명하다지만..... 내 눈에는 그릇 들이 참 예뻐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