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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6일 연중 제8주간 수요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마르코 10,32-45
뒷짐 진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한 예고 다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느냐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실 영광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무엇이든 당신 때문에 버릴 수 있다면 그 백 배의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블랙홀에 상장을 던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먼저 버려서 또 다른 자신인 하느님을 선물로 받지 못한 상태라면 그 사람은 무엇을 버리든 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 자신을 위한 것이니 버린 것이 아니라 투자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버린 것에 대한 상의 무의미해집니다.
연예계에서는 소위 ‘배우 병’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예능 촬영 도중 정준하 씨에게 “배우병 걸렸다. 자기가 배우인 줄 안다.”라며 폭로한 적이 있습니다.
정준하 씨가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무려 5명이나 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한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배우 병’이란 개그맨, 가수, 배우 중 배우들이 다른 직업의 연예인을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거의 매년 나오는 뉴스이지만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최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유재석 씨가 ‘TV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상을 받으러 나갈 때는 동료 개그맨들을 제외하고는 시큰둥한 모습이었습니다.
수상소감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더 싸늘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이 상을 받을 때는 모든 배우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물론 수상소감을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아무도 자리에 앉지 않고 손뼉을 쳐 주었습니다.
그러니 ‘배우 병’이라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저는 왜 배우들이 그런 거만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그렇게 다른 연예인들과 급을 두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들을 자신들도 모르게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개그맨이나 가수들은 뼛속까지 개그맨, 뼛속까지 가수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말은 개그맨들이나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남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자신의 재능을 사랑을 위해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에서도 이어질 수 있는 직업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배우들도 촬영장에서는 말 그대로 연기로 자신을 바칩니다.
영화를 보는 이를 위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연기는 일상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미친 사람 연기를 하거나 살인자를 연기하는데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따라서 배우가 연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그 배역에 내어놓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관객을 위해 카메라가 찍을 때만 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지키려 하는 마음이 강한 것입니다.
직업상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하지 않으면 다른 연예인들보다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교만’인데, 나로 돌아오려는 마음이 강할 수밖에 없어서 자신들도 모르게 거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봉헌하면 100배의 상은 분명히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봉헌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상을 주려고 해도 자기가 살아있다면 마치 뒷짐 진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는 즉시 땅에 떨어집니다.
겸손은 상을 받을 때 내어놓는 하늘을 향한 두 손과 같습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교황은 한 수녀원에 성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필립보 네리를 감시관으로 파견합니다.
그 성녀는 환시를 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필립보 네리는 그 성인이 상을 받을 손이 있는지부터 알아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으로 변장하고 수녀원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폭우가 쏟아져 온몸은 비로 젖고 신발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수녀원에 도착한 필립보 네리는 그 수녀를 오라고 하여 자신의 신발을 벗기고 발을 씻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는 깜짝 놀라며 자기에게 어떻게 그런 천한 일을 시키느냐고 팔짝 뛰었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교황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수녀에 대해서는 더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수녀원에는 성녀가 없습니다.”
우리는 연기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나머지 사도들에게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남을 행복하게 하려는데 진정으로 종이 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선행을 하더라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유재석 씨는 무명시절에 만약 자기가 다른 사람들처럼 유명해졌다고 거만해진다면 세상 모든 고통을 다 주셔도 달게 받겠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절실함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연기를 잘한다고 소문난 어떤 배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유명해지자 술좌석에서 후배 배우들에게 거만한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배우에게 대한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진짜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 또 만약 그렇다면 다시 겸손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항상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사제로 하는 모든 이런 일들이 연기가 아니기를 바라고 뼛속까지 내어주는 군고구마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바친 모든 것들의 100배의 상을 받을 손을 겸손하게 무릎 꿇고 내어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뒷짐 진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봉헌하지 못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봉헌한 것에 대한 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마르코 10,32-45
나의 하느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16세기 가톨릭교회는 안팎으로 다양한 도전에 시달리며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당하는 교회와 당신 양떼를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허락하시지만, 이겨낼 힘과 위로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탁월한 성인성녀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필립보 네리(1515~1595) 성인입니다.
이탈리아 중부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필립보 네리는 음악과 시와 예술과 사람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낙천적인 성격에다 경제적으로도 탄탄했으니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필립보 네리는 로마 여행을 하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 카타콤바를 순례하게 되는데,
거기서 받은 감동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하 무덤에서 그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비로운 황홀경을 체험하게 됩니다.
당시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나의 하느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흘러넘치는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한 필립보 네리는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빨리 전해주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즉시 중환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노동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찾아갔습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다가섰습니다.
세상 친절하고 다정다감할뿐더러 유머 감각이 흘러넘치는 필립보 네리의 모습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필립보 네리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편안하면서도 영성적인 필립보 네리의 모습에 반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제의 길을 추천했습니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따라 1551년 서른 여섯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순풍에 돛을 단 필립보 네리 사제는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12~15 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집전했습니다.
필립보 네리의 다정다감한 모습은 중죄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순식간에 녹게 만들었습니다.
크게 회심한 사람들을 모아 ‘오라토리오’라는 영적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이 보여준 사목자로서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넘치는 인간적 매력과 탁월한 유머감각이었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다들 조금이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수많은 명사들이 찾아왔는데, 대표적인 인물 몇만 꼽으라면 이렇습니다.
이냐시오의 로욜라 성인,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노동자든 추기경이든, 가난한 사람들이든 부자이든, 노인이든 청소년이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필립보 네리는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청소년들이 마음껏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장소나 기회를 조성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모이면 간단한 교리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놀이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버릇없고 개념없는 길거리 청소년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예의도 갖추지 않는 청소년들의 행동 앞에 화가난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놓아 두십시오.
그들이 죄만 짓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를 몽둥이로 때린다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했으며, 늘 친절하고 다정다감했고, 그 어떤 사람도 거절하지 않고 환대했던
기쁨의 사제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모습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존재와 모습이 왜 파격이고 도전이 되었는지 보여 주십니다.
"자비, 용서, 표징, 기적, 불쌍히 여기심, 영광, 성취, 보답, 호의 ... "
제1독서 안에는 인간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바가 담긴 단어들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한 기도 내용으로 짜여진 집회서 36장에 백성의 바람과 간청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에서 구약의 백성이 바라보는 전형적 하느님관이 드러납니다. 크고 위대하시며 징벌하기도 하시고 용서도 하시는 하느님, 하늘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분, 세상 모든 권력을 쥐고 영광을 떨치시는 분이 이스라엘을 소유하신 하느님이시지요.
그런데 그러한 기대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복음 속 예수님은 상이한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마르 10,32)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미 두 차례나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데 이어 세 번째로 다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순간으로, 이 배경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예루살렘은 사형선고와 수난, 죽음의 도시이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나아가고 계시지요. 그분은 뒤에서 "진격!"을 외치며 부하들의 등을 적진으로 떠미는 장수가 아니라, 몸소 앞장서서 본보기가 되어 주시는 스승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43)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첫 자리를 달라고 청탁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을 불쾌히 여기는 동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마치 철부지들을 붙잡고 타이르듯 간곡히 당부하시는 스승의 마음이 느껴지지요.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전형적인 하느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라서 그런 소망을 가졌을 겁니다. 전능하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측근인 자기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기대했겠지요.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낸 이유는 그들 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이 숨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은 전형적인 신관에 파격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하느님은 기존의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신, 종의 자리로 내려간 신,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약의 백성이 섬기는 하느님과 다른 신이실까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으로서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행하는 분이시지요. 비움과 섬김과 죽음은 인류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고 완성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도와 군림, 권력과 영화를 꿈꾸었다면 지금부터는 멘붕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앞으로는 그 바벨탑과도 같았던 꿈이 차근히 혹은 처절히 무너지는 체험의 과정을 밟아가게 되겠지요. 그 안에서 자신의 바닥을 체험하고 다시 자비의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영성생활이 이제 시작인 셈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어떤 모습의 주님을 따라 나섰는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꿈이 하느님의 꿈과 이어져 있는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파격과 도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가 있는 자리보다 더 낮고 비천하고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 우리를 지탱해 주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내어, 앞장 서신 그분의 뒤를 따라, 믿고 희망하며 나아갑시다. 이 길은 결국 사랑의 완성이신 주님과의 일치로 이어질 것이니 이 여정 안에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