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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의 신앙도 성모님의 신앙처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의 대화는 너무나 많은 복선과 의미가 깔린 내용이기에 잘 새겨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께 드린 청부터 좀 이상합니다.
성모님은 평소 아들 예수님의 성숙한 동반자로서 부담을 주거나 분위기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합니다. 꽤 부담스러운 청을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성모님의 은근한 압박에 맞선 예수님의 대응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버지로부터 공생활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세상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직 공개석상에서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부탁을 넌지시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성모님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결국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완전한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계속 진척시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셨기에, 예수님께 또 뭐라 한마디 하면 서로 난감해질 것이 뻔하니, 이번에는 일꾼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어찌 보면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성모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 우리는 부단히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오늘 내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향해 사용하신 호칭, “여인이시여”라는 표현이 꽤 마음에 걸립니다.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성모님에게 사용해 오셨던 호칭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성모님께서도 꽤 당혹감을 느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인이시여” 라는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제 예수님과 성모님 사이는 서서히 새로운 관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육의 관계를 넘어 영의 관계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모자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영적 여정 역시 가야 할 길이 꽤 남아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 역시 더 쇄신되고 더 깊어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아직도 세밀한 하느님의 계획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많게 하시는 기적을 통해 일단 성모님의 인간적 체면을 살려주시지만, 진정한 의도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기적이나 체면을 살리기보다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일이라는 강조하십니다. 성모님의 완곡한 청을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을 통해 살짝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모습은 성모님에게는 새로운 하나의 초대입니다.
‘어머니, 그간 저를 돌봐주시느라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떠나갈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준비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어머니의 신앙이 한 차원 승화될 순간입니다. 이제 인간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 육적인 관계보다는 영적인 관계, 세상적인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이런 의미를 함축한 표현이 “여인이시여”가 아닐까, 하는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의 신앙처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처럼 역동적이어야 하고, 진취적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속박하고 자신 안에 가두어두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고, 서로를 키워주는 그런 관계여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이타적인 행동을 시키는 대로 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
복음: 요한 2,1-11
오늘 복음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내가 누가 되어야 행복해질까요? 예수님도 나오고 성모님도 나오고 종들, 혼인잔치를 맡아보는 관리인도 등장합니다. 오늘 가장 행복해진 주인공은 바로 종들입니다. 자신들은 그저 물을 떠 놓고 다시 가져다준 것뿐인데 과방장에게 대단한 칭찬을 듣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대해 복습해봅시다. 사람 대부분은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돈이 행복입니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생존에 필요한 이상의 재산이 쌓이면 오히려 행복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타인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자존심은 있는 대로 부리면서도 더 큰 좌절을 느끼는 것입니다.
행복은 결국 ‘자존감’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상관없이 자존감이 높으면 행복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돈 많은 부자야!’라고 아무리 자랑해도 자존감은 높아지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쓸모가 없다고 여겨질 때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자존감을 높이려면 쓸모를 높여야 합니다.
쓸모는 ‘유익한 존재’입니다. 유익한 존재가 되려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눈다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해 일부러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예를 높이라고 명령한 대상은 ‘자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더 가지라고 한 뱀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선행으로는 ‘나는 쓸모있는 존재다’라는 자존감을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자아의 명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만약 자동차가 인간이라면 자동차는 누구의 명령에 따를 때 쓸모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만든 이에게 순종하는 게 자존감을 가장 높이는 일이 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이타적인 행동을 수행하면 그 사람에게는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에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종들이 됩니다. 거기서 얻는 자존감은 멈추지 않는 기쁨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제작하기 전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영적 위기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안네 카타리나 에머리히라는 신비가 수녀님의 환시를 바탕으로 한 책인 ‘주님의 고통스러운 수난’(The Dolorous Passion of Our Lord Jesus Christ)이란 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에 기록된 그대로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합니다. 하늘의 명령으로 여긴 것입니다.
깁슨은 이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적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논란이 많았고, 주요 영화사들은 종교적 주제와 아람어, 라틴어, 히브리어 사용 때문에 지원을 꺼렸습니다. 깁슨은 약 3천만 달러(약 450억)의 자기 재산을 투자해 영화 제작과 마케팅을 진행했으며, 사실상 자기 경력과 재정적 안정을 모두 건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6억 달러(약 9천억) 이상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재정적 성공을 넘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수많은 사람의 삶에 감동을 주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기쁨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라고 한 성모 마리아의 명령을 따릅니다. 신자들이 십일조로 바치는 빵과 포도주를 제대 위에 올려놓고 다시 신자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럼으로써 신자들이 참 포도주를 마셨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사제는 자신도 모르게 빵과 포도주를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사는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자존감에서 오는 행복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이런 카나의 기적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정결례 항아리에 물을 부을 것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첫 번째 기적
오늘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부부관계처럼, 당신의 교회를 아내처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다. 여기서 또한 마리아의 역할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키루스의 칙령(BC 538/37) 후에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건되는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혼례식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다.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 이야기는, 혼인에 대한 축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맺으실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하셨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아버지의 뜻을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열려 있다. 원문에 보면 그때는 본래 사흘째 되던 날이다. 사흘째 되던 날은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적인 것이 있다. 또한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에서, 그 포도주가 그때까지 마셨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사실에서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의미를 알 수 있다. 많은 예언서에서 이 종말에 대해서 모든 결실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쳐흐르게 되리라고 한다(참조: 아모 9,13-14; 호세 14,7; 이사 25,9-10; 55,1). 카나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는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그 카나 혼인 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없구나.”(3절)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이 신뢰심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 믿음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는 것은 거절의 의미로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가 있다. 당신이 끝까지 따르고 일치해야 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5절). 이 말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 19,8).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구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메시아적 포도주를 얻는다.
이 메시아적 포도주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오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신비가 오늘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즉,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인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각자가 받은 성령의 크고 작은 은총의 선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1코린 12,7).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가나에서 예수님이 잔칫집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은총을 사용한 마리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치르실 거룩한 혼인 잔치에 합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총을 잘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아이와 노인의 기억력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아이는 기억력이 탁월하지만 회상 능력이 없고, 노인은 기억력이 감퇴했지만 회상 능력이 있다.’
아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겪은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하지 못합니다. 회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방금 전의 일은 잊어버리기 일쑤이지만, 긴 시간적 맥락 안에서 한 사건이 갖는 깊은 의미를 읽어냅니다. 회상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기억은 가까운 것을 끄집어내는 활동이고, 회상 능력은 먼발치에서 대상을 지켜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전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단순 기억 능력은 떨어지고 회상 능력이 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이 든 분은 단순 기억이 없어진다고 한탄하고, 또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의 단순 기억 능력의 떨어짐을 보고 무시합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저 역시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 회상 능력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순 기억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단순 기억만 쫓는 사람은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는 말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 첫 번째 기적이 모든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도, 중병을 고치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기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목격했던 것은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웠던 일꾼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기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단순 기억을 떠나 회상 능력으로 그 안에서 새로움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즉, 기쁨의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혼인 잔치의 삶처럼 당신과 일치해서 기쁨의 자리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삶이 매번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흥을 돋우는 포도주가 있어야 하는데, 포도주는 없고 물만 가득합니다.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초대하고 또 함께해야 우리의 삶을 흥이 가득한 기쁨의 자리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그렇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물이 주님을 통해 훌륭한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물독 속에 물을 채우듯이, 주님 마음에 우리 죄를, 우리 미움을,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의 이기심을, 우리의 상처와 저주와 분노 등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사랑의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꾹 간직만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남들도 그렇게 한다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면서 주님 마음에 우리의 부정적인 그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단순 기억으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회상 능력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일꾼들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오늘의 명언: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쉬지 않고 미세하게 균형을 맞춰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들에 얼마나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일레인 스캐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김건태 루카 신부님 - 성사담당사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삶
[말씀]
■ 제1독서(이사 62,1-5)
고통스러웠던 바빌론 유배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계약 백성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갈라놓은 행위가 어떤 행위였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반성과 속죄의 시기가 지난 다음 활동을 전개한 익명의 제3이사야는 주님께서 회개하여 되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몸소 당신의 아내로 삼으러 오실 날을 예고합니다. 이날은 평화의 날이 될 것이며, 기쁨과 영광이 함께 할 구원의 날로 다가올 것입니다.
■ 제2독서(1코린 12,4-11)
성령에 의해 새로이 탄생한 교회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각자 자기 고유 기능을 간직하며 행사하는 하나 된 인류의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이상적인 교회상을 소개하면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열의 유혹을 경계하고 단죄합니다. 바오로의 독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고 계신 참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 복음(요한 2,1-11)
복음저자 요한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 가운데 제일 먼저 소개되는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포도주로 변한 물을 통하여 복음저자는 거저 주어질 선물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할 종교적 율법주의의 상징을 봅니다. 당신의 ‘때’ 곧 파스카를 향해 걸어 나갈 그리스도의 여정은 결국 이와 같은 근본적 교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남녀 사이의 단순한 혼인 관계를 넘어서, 하느님과 인류의 궁극적인 관계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께서 아드님께 요청하고 계신 봉사는 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은총의 시기를 예고하는 가치를 지닙니다.
[새김]
인간이 처음으로 인간관계를 배우고 익히는 기초 공간은 물론 가족 공동체이나, 이 기초 공동체도 실은 혼인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계를 통하여 성립됩니다. 혼인으로 부부관계가 맺어지고, 자녀의 탄생으로 가정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쉽게 설명하고자, 혼인이라는 비유법을 자주 사용해 왔습니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서 인간은 신뢰로 응답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저자 요한이 혼인 장면을 배경으로 그리스도의 첫 기적 이야기를 전하고 있음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동이 난 잔칫집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 이를 아드님께 알리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예수님의 응답은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이나,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마치 동문서답과 같은 분위기가 읽힙니다.
예수님은 분명 아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성모님은 당신의 바람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리라 확신하며, 일꾼들에게 지시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모님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직접 들어 주실 수는 없으나, 들어 주시도록 아드님께 전구(轉求)하는 분이 우리의 성모 어머님이십니다.
나아가, 성모 어머님의 부탁으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준의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저의 때가 가리키는 구원의 때를 향한 하나의 표징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혼인관계처럼 상호 사랑과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는 구원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인간성은 본디 천주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항상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거저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가는 신앙생활로,
하느님 그리고 이웃과 끈끈한 구원 관계를 이루어나가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삶이라는
기쁨의
잔치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더 좋은 것만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변화의 때를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를
마련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끄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어느 순간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우리의 믿음이
변화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변화된 삶은
더욱 깊어지는
고유한 맛
고유한 빛깔로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어머니도
모두 변화의
산증인들이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믿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첫 기적은
변화된 삶의
기쁨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성장하는
변화이며
한계 속에서도
한계를 돌파하는
용기입니다.
채워야 할 것은
믿음이며
나눠야 할 것
또한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성모님이 계시고
제자들이 있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믿음을 떠나
맛볼 수 없는
믿음의 참된
맛입니다.
믿음의 맛은
가장 좋은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믿음으로
변화되어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영광의
삶이길
온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모든 변화의
첫 시작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믿음의 주일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2,1-5
1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2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
3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면류관이 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되리라.
4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다시는 네 땅이 ‘버림받은 여인’이라 일컬어지지 않으리라.
오히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2,4-11
형제 여러분,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1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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