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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묵상글 ( 연중 제8주간 월요일, - 이대로 가면 나의 끝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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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대로 가면 나의 끝은?
오늘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어떤 부자의 답에 대견해하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점에서도 이 부자가 대견하지만
제 생각에 더 대견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잘 살아왔을 뿐 아니라 미래 그것도
영원한 미래에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는 이 부자의 나이가 나오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에는 젊은이로 나오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자는 젊은데도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저나 웬만큼 산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하고 그리 대견하다 할 것이 못 되겠지만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벌써 관심이 있으니 대단하지요?
어제 저는 계획된 연수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오랜만에 걷는 월 피정을 할 수 있었는데 걸으면서
오늘 부자 청년의 이 질문과 함께 내내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자주 저 자신에게도 또 다른 분에게도 던지는 질문,
이렇게 계속 가면 그 끝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에 대한 질문을 또 던졌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잘 산 것이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 살았어도 앞으로 잘못 살면 다 헛것입니다.
지금까지 아주 잘못 살았어도 앞으로 잘 살면 그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계속 가면 나의 끝이 어떻게 될지 물어야 합니다.
노망난 늙은이로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지지난 주, 제가 매주 미사 드리러 가던 수녀원의 수녀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제가 그 장례미사를 주례했는데 제가 처음 수녀님을 만난 7년 전,
암 수술을 하신 이래로 수녀님은 병치레를 내내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병과 싸우셨습니다.
병을 이겨내려고 무척 애쓰셨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병과 싸우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셨겠지만,
차츰 벗으로 그리고 천국 여정의 반려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작년 말 종부성사를 청하셔서 종부성사를 드릴 때는
거의 성녀가 되어 계셨고 이미 아버지 하느님 앞에 계셨습니다.
앞에서 노망난 늙은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노망이란 것이 늙어 망령부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망령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망령이란 영이 흐려진 것이고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일생으로 수도자로 살았어도 수도자답지 않게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못 견뎌 하고 이 세상 생명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수도자의 정신이 흐려지거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끝은 무엇일까? 노망일까 성덕일까?
초대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잘 따를까? 돌아설까?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런 질문을 얼마나 자주 던지며 살아가시나요?
한 번도 던져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아! 그런데 제가 너무 무례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드렸군요.
그랬다면 용서하시고 제 의도는 그것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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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 베스트셀러인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조건 3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지식을 훔치는 힘. 둘째, 요약하는 힘. 셋째, 추진하는 힘.
사실 일등이 아니어도 괜찮고, 꼴찌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3류로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주연이길 포기하고 조연으로 사는 인생이 3류 인생일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기보다는, 남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대신해 주기를 또 남들이 나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해 주길 바랍니다. 3류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몇 등이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3류 인생은 되지 말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 측면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일류의 조건을 새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은 타인의 지혜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하고, 또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둘째, 요약하는 힘은 생각을 정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알아야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삶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진하는 힘입니다.
이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나 자신은 신앙인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일류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삼류 신앙인일까요? 먼저 지식을 훔치는 힘에서 주님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할까요? 두 번째 요약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추진하는 힘에서 주님의 뜻을 삶에서 잘 실천하고 있을까요?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삼류가 아닌 일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일류 신앙인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다시 여쭙습니다. 여러분은 일류 신앙인입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 일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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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모든 기회에는 의무가, 소유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존 데이비슨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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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오늘 <복음>에서 어떤 부자 청년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 질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 질문은 “선하신 스승님”이 아니라, “주님”으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가 아닌, ‘당신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부자 청년의 이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본질적으로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타인과는 무관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대답은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율법을 지켰으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 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 자신의 결백을 넘어서, 자기를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 하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 곧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질문은 앞의 부자 청년의 질문과는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구원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이는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자신의 행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선사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느냐?” 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떠나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집과 고향을 떠나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습니다. 이제는 이미 떠나온 자기마저 버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수도자인 우리는 이미 집과 부모를 떠나왔지만, 떠나온 자신을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떠나왔다면, 오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안전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넘기고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주님!
약하지 않으려함이, 제게는 부족함입니다.
부족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부족함입니다.
약할 줄을 알고, 부족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하고 부족한지라,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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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족한 하나를 채워라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생활공간도 컨테이너로 꾸민 한 칸의 방입니다. 그 방은 주방이고 침실이며 기도방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시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평일 미사참례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방 기름을 절약하고, 쓰고 싶은 것을 절제하여 모은 돈이라고 하시며 꼭 필요한 곳에 써 달라고 봉투 하나를 주셨습니다. 너무 적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돈은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를 선택할 시점이 옵니다. 그리고 선택합니다. 이때 그 사람의 진면모를 알게 됩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선택한 것인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차선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계산이 갈려있다는 것을 본인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잘 지켰는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하나가 부족하였습니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보화 때문에 하늘의 보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 준비로 집도 장만하고 값비싼 보석을 비롯하여 혼수품을 다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으로 결혼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였는데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값진 보석이라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영생을 희망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다른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아름다운 보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족한 하나를 채워서 하늘의 보물을 차지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나에게 부족한 하나는 무엇일까? 자존심일 수 있고 체면일 수도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일 수 있고 명예나 지배하는 마음, 자식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으며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의 마음이나 눈먼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족한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내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용기 있게 믿음으로 선택하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분명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이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어떤 부자가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 ‘바늘귀’를 아주 크게 만들어 주시든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둘 중의 하나를 꼭 만들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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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아이에게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다이아몬드보다는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먹을 수 없지만, 과자는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에게 다이아몬드와 과자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과자보다는 다이아몬드를 선택할 것입니다. 과자는 먹으면 곧 없어지지만, 다이아몬드는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부유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축복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난민촌으로 봉사 갈 수도 있고, 유럽으로 여행 갈 수도 있습니다.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어떤 사람은 유럽 여행을 선택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떠나라’라는 말처럼 휴가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입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일하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난민촌 봉사를 선택할 것입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난민촌 봉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도 난민촌 봉사를 선택하였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게 가능하면 말려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따님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모님도 나중에는 딸의 선택을 축복해 주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도시 빈민 사목’을 선택한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삼양동, 금호동, 장위동, 봉천동(중앙동)에 둥지를 마련했습니다. 교구에서 신부님들이 거처할 집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집이 성당이 되었고, 그 집이 회합실이 되었고, 그 집이 친교실이 되었고, 그 집이 식당이 되었고, 그 집이 사제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동창 신부님들은 20년이 넘게 도시 빈민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용산의 철거민들의 모임에, 세월호 유족들의 모임에, 이태원 유족들의 모임에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들 무심코 지나가는데 한 친구는 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내어놓고 사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희생적이지 않았습니다. 사제 인사의 권한은 교구장님에게 있다며, 제게 주어지는 소임에 만족했습니다. 2018년 성소국을 마치면서 처음으로 주교님께 저의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는 인사 적체로 인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구청에서 일했기에 그 사정을 잘 알았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 주셨습니다. 저의 선택으로 저는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에서 5년 있었고, 지금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한 신앙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한 신앙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재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보존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넘어지는 유혹은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 유혹이 너무도 강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불로 단련을 받는 아름다운 금을 봅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들에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한 시간은 아름다운 과거가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할 시간은 희망찬 미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은총의 빛으로 순간을 충실하게 살면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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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자 청년이 말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이런 부자 청년의 자신감이 부럽습니다. 하나도 지키기 어려운 것을 그는 모두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실천할 것을 제안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제안은 사랑에 대한 실천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또는 말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명, 즉 사랑은 실천이라는 마지막 단계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허공에 대고 외는 작거나 큰 외침일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는 청년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기적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신다면 낙타도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방법이 바로 ‘나눔’이라는 실천입니다.
계명의 마지막은 나눔입니다.
사랑의 마지막도 나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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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저는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지 않습니다.
아주 가끔, 예를 들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한 후 후식으로 먹습니다.
누군가가 아이스크림 먹기를 원하면 그에 호응해 주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제는 제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이곳에 잠시 묵으러 오신 손님과 산책했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어둠이 깔린 밤길을 그간의 이야기로 채우며 걸었습니다. 한 시간쯤 걷고 난 후 다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이스크림을 집었습니다. 한 시간을 열심히 속에서 열이 났나 봅니다. 다른 때보다 아이스크림이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열이 나서 맛있었는지….
함께 걸었던 것이 즐거워서 맛있었는지….
아니면, 진짜 그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어젯밤의 아이스크림은 맛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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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부자의 구원도 가능하다”
“그지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시편18,2)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말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사람들 사이를 해친다.”<다산>
더불어 성 베네딕도의 ‘침묵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비록 좋고, 거룩하고, 건설적인 담화일지라도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완전한 제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드물게 허락할 것이다”라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또 논어의 공자 말씀입니다.
“임금에게 자주 간언하면 치욕을 당하고, 친구에게 자주 충고하면 사이가 멀어진다.”
모두 삶의 지혜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어제는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첫 ‘세계 어린이들의 날’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베드로 광장에서 어린이들과의 미사중 삼위일체 교리를 단순하게 압축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created),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saved), 성령님은 우리를 평생 동반하신다(accompanies).”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말마디는 ‘가난’이었고, 아주 예전 수도원 정문 옆 담벼락 넘어, 지금도 건재한 수녀원의 커다란 참나무를 보며 쓴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시이고 지금은 고인이 된 엘리야 수사의 모친 레나타 자매가 무척 좋아했던 시입니다.
“울타리 부근 쓸모없는 땅이라 관심도 없다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
참 넉넉한 자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이 행복이구나
볼품이 뭐 대수랴
너와 나 편안하면 그만 아닌가
내 맘껏 가지들 뻗어 하늘 자유 맛보니 대 만족이다
열매들 탐내는 나무아님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늘 나는 새들의 쉼터가 내 기쁨이다
흐르는 구름 은은한 별빛 부드러운 미풍
은자(隱者)의 가슴 떨리는 감동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내 이름은 정주의 참나무”-2001.3.23.
23년전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며 아끼는 시입니다. 자발적 가난의 기쁨, 가난의 자유, 가난의 행복을 노래한 시입니다. 생래적으로 가난과 고독, 침묵을 사랑했던 사막 수도승의 후예인 우리 정주의 수도승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결정적 문제점은 이 가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우상처럼 또아리 틀고 있으니 영혼은 여전히 목마르고 배고플 수 뿐이 없습니다. 참 부자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것이 적은 사람이요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 물으니 사막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마디를 바꾸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아주 절박한 물음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놔두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습니다. 이어 젊은 부자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 천하의 영적 명의(名醫)이신 예수님은 부자가 계명을 준수했는가를 확인시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긍정적 말마디 외는 모두가 부정적인 ‘안된다’ 라는 계명입니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젊은 부자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 말합니다. 아주 좋은 양심적인 신자입니다만 ‘안된다’는 계명뿐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주 소극적인 삶입니다. 외적인 최소한의 계명준수에 힘썼을 뿐 사랑의 나눔이나 삶의 중심인 주님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러니 내면의 허기(虛氣)는 여전할뿐입니다. 예수님의 진단이 정확했습니다. 극단적 처방같지만 부자 청년에게는 이것뿐이 없었던 것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과연 이 시험을 통과할 부자들은 몇이나 될까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줌으로 땅에 있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권고입니다. 그리고 와서 정말 참보물인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재물을 삶의 중심에 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 나눔과 따름이 없는 외적 계명들 준수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 포기를 거부함으로 구원의 시험에 불합격한 부자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합니다. 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부자의 삶에 큰 긍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어 넋두리처럼 제자들이 들으라고 말합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은 물론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이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물음이 나올수 뿐이 없습니다. 또 천하의 영적 명의이신 예수님의 기막힌 답변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께는 부자의 구원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구원의 보증 수표는 아닐 것입니다. 부자에 대한 증오나 질투, 탐욕이 내면에 존재하는 한 역시 무지의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부자라도 회개의 은총으로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들과 자유자재 나눌수 있는 무욕의 지혜롭고 자유로운, 참으로 청빈한 부자라면 재물을 소유하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자 기적입니다. 과연 이런 청빈한 부자들 가득한 세상이라면 참 좋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일 것입니다.
복음의 부자는 재물 포기와 예수님 추종에 실패했지만,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는 성공하여 “희망에 대한 감사가”를 신바람나게 부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감사찬미가입니다. 재물을 소유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따름과 나눔의 삶에 충실할 때 함께 부를 수 있는, 참으로 우리를 아름답고 자유롭게 하는 희망과 기쁨의 감사 찬미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상속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를 더욱 고무합니다. 주님을 따르고 나누는 삶에 최선을 다할 의욕을 심어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더욱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따르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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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비길 데 없는 아드님의 선하심
아드님 안에는 아버지 안에 있는 선과 다른 또 하나의 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자 몸소 복음에서 이렇게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루카 18, 19).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아버지 안에 있는 유일한 선과 다른 부차적인 선이 아드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다른 원천이 아니라 이 최초의 선에서 나오셨으니 당연히 모상이라 불리십니다. 아드님 안에 있는 선이 아버지 안에 있는 선과 다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드님 안에는 아버지 안에 있는 선 말고는 없으며,, 그 선에는 어떤 치이도 다름도 없습니다(요한 10,30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 18 ; 루카 18,19)라는 말씀에 일종의 신성모독이 들어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 말씀을 아드님과 성령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 아버지 안에 최초의 선이 있고, 아드님과 성령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선의 본성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시는데, 이 선의 원천에서 아드님이 나시고 성령이 발하신다고 믿어야 하겠습니다(참조 요한 3,16 ; 15,16). 성경에서 선하다고 말는 다른 모든 것, 예컨대 천사, 인간, 종, 보화, 착한 마음, 좋은 나무 등은 정확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여 ‘선하다’고 일컬어진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실체적 선이 아니라 우연적 선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리 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주님의 성령”이라고 했는데, 왜 그분의 이름을 “주님”이라고 했을까요? 그렇게 해야 그분이 우리를 잉태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분의 이름을 “성령”이라고 했을까요? 그렇게 해야 그분이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을 세 가지 방법으로 인식합니다. 첫째로, 주님은 부유하십니다. 부유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궁핍을 겪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그는 단지 한 사람으로 남을 뿐입나다.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을 에워싼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을 천사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사임과 동시에 사람일 수 있다고 해도, 그는 하나의 천사일 뿐이지 모든 천사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부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자신 속에 모든 것을 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끊임없이 내줄실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17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르 1,9-20
세례를 받으시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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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10,21)
젊어서 보다 나이 들면서 가끔, 나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다, 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율곡 이이 선생이 남긴 글이 마음에 와닿더군요.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 마음을 알겠습니다. 당연한 부모의 도리,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부모로서만 바라보았던 그때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때의 부모에게 왜 나는 바라기만 했을까요. 지금의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부모가 되어보니, 지금의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라는 표현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때는 자식의 시선에서 부모를 보았지만, 이제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 심정을 알게 되고, 그로써 새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잖습니까? 참으로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고 했지만, 저는 살아오면서 제가 깨달은 사실은, 저의 부족함이 하나둘이 아니라 참으로 많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젠 부족한 저를 받아들입니다. 저의 자질과 인격 면에서도, 지적 영적 수준에서도 참으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런 저를 통해서도 위로를 느끼고,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부족한 저를 자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를 당신 자녀로 불러주시고 당신의 사람으로,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며 살고자 합니다. 이제 ‘부모가 아니고 어른이 되어보니’ 하느님 보시기에 모든 면에서 부족함을 많이 깨닫습니다. 이젠 ‘한 가지 좋은 몫을 누리며 나날이 생명을 얻고 더 얻도록’ 일깨워 주시고, 그렇게 살도록 안배해 주심에 감사하며 살려고 합니다. 부족한 것을 부족하다고 보시지 않은 하느님 안에서 저의 부족한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채우지 않고 부족한 것을 부족한 대로 봉헌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전개는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전 단계에서, 인간관계의 가장 본질적인 관계, 곧 참된 부부 관계와 가족 구성원인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다음에 일어난 해프닝입니다. 이전 맥락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은 진정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그에 따른 소유와 존재, 달리 말하면 구원 곧 하느님이냐 재물이냐는 문제를 직시하고 직면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수난 예고와 거룩한 변모를 통해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시고 예루살렘을 향한 길로 들어선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어떤 부자 청년이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17)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청년은 오래도록 이 문제를 고심해 왔으며 나름대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기 때문에, 이런 거창한(?) 문제를 언급했다고 봅니다. 다들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하고 인간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런 세상적인 문제를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유심히 보면서 예수님은 새삼 기특하고 대견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청년의 태도와 느닷없는 질문을 한 그의 고민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어느 정도 그 청년은 알고 있었고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무엇을 행함으로써 얻고 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셔야 받는다는 것쯤은 이미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의 준수 곧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10,20) 하고 즉각 대답함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 보기 드문 열심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음을 예수님은 통감하시면서 한 편 그에게서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는 가진 게 많았고 행하는 것이 충분했지만 그런 만큼 역설적으로 빈 곳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족한 부분, 곧 그의 결핍을 찾아내십니다. 그의 부족함은 바로 ’비우고 채워야 할 곳‘ 곧 그의 존재 심층에 하느님의 자리보다 인간적 의지와 노력, 자만과 재물로 꽉 들어차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하느님이 머물 자리가, 여백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말하지만, 그의 속은 바로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실천과 소유로 가득 차 있었기에, 타인이나 하느님께서 들어갈 틈이, 자리가 사실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그를 향해,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10,21)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렇게 어느 날 길에서 예수님이 보기 드문 청년과의 만남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0,22) 결국 자신의 천적은 바로 자신이었고, 가장 큰 디딤돌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인간 행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요 은총입니다, “선하신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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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에는 훌륭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와, 무릎을 꿇고” 질문할 정도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도덕성에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대견히 여기시며, 그를 더욱 성숙한 삶으로 이끄시고자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완성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추는 데에 있지 않고, 온전한 자유로 그분을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자유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놓을 때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부와 권력은 본디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허락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게 될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무겁고 불편해집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불안하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돈과 권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워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이 나를 전능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고 거짓 행복에 빠지게 한다면, 부자가 되고 권력을 쥐는 것보다 더한 구원의 악조건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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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부자'의 의미>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말고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힘내라며 5파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 걸... 10파운드라고 할 걸...”
우상은 내가 지배를 받는 대상이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내가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하느님의 뜻이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대로 할 수 없다면 그 재산은 나를 지배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섬기는 우상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분명 양심에서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목소리가 진리이고 그게 옳은 일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소리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이 그 자신의 것이고 그래서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섬기는 대상, 즉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옳은 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되었을 때 ‘슬픔’이 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기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이집트의 노예 살이 할 때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지배를 받아 우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에는 하느님의 뜻 외에 어느 것도 두지 말아야합니다.
스스로 노예가 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는 ‘어떤 농구 시합’이라는 소제목으로 이런 어린이들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케빈’이라는 아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어린이 농구팀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농구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케빈이 속한 농구팀은 경기에 나가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케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케빈은 계속 슛을 연습했습니다.
한 번은 공이 골대를 스쳤습니다.
케빈은 너무나도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상대는 어린이 농구팀 중에 한 번도 저 본 적이 없는 가장 강한 팀이었습니다.
예상대로 3쿼터까지 점수는 30점차 이상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4쿼터도 거의 끝나갈 무렵 케빈이 속한 농구팀의 한 아이가 타임을 불러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감독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지금까지 경기해 오면서 케빈은 단 한 번도 슛을 성공시킨 적이 없어요.
이번이 마지막 경기입니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도 없으니 케빈에게 한 번만이라도 슛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모두가 이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동료들은 케빈에게 평소에 슛 연습하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을 잡으면 케빈에게 무조건 패스를 하였습니다.
케빈은 계속 공을 던졌지만 골대를 맞추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대팀에 빼앗겨 점수 차는 점점 벌여졌습니다.
그런데 상대팀 한 아이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채고는 자신이 몰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케빈에게 공을 패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골대 밑에 있던 상대팀 선수가 공을 잡아 다시 케빈에게 패스하였습니다.
역시 성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양 팀 선수들은 서로 뒤섞이어
케빈을 둥그렇게 둘러싸고는 공을 계속 케빈에게만 던져주었습니다.
경기 마칠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역시 케빈은 골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감독님은 전광판 시간을 보았는데 시간은 40초를 남겨놓고 멈추어 있었습니다.
심판들도 이 상황을 눈치 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노력한 끝에 케빈은 생애 첫 골을 성공시켰고 모든 이들은 케빈과 함께 기뻐 뛰었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던 모든 사람 중 우울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승부욕도 있었겠지만 케빈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좋은 마음에 모두가 동의하였습니다.
그렇게 승부의 우상에게 억눌리지 않는 자유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에게 승부의 우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른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나라의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부자’라고 말씀하시고, 그 부자들은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곧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걱정되고 두렵고 우울하다면 우리는 무언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슬픈 마음으로 돌아간 부자청년처럼 되지 말고 자유롭게 그분 뜻을 따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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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부자 청년의 이야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율법을 잘 지켰다 해서 교만해진 젊은이가 율법의 주님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행동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젊은이는 믿음이 없이 율법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절) 하셨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여겨 그렇게 불렀다면 ‘선하다’라는 표현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명으로 나아가고 싶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고약한 악의와 사악함을 버려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리하여 ‘마른 땅’(느헤 9,11; 시편 66,6)이 드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19절 참조)이 싹트게 하라고 하신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20절)고 그는 대답하였다.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킨 것처럼 보이던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다. 계명들을 잘 지켰다고 하는 그의 대답은 진실이라기보다 교만이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짓눌리는 일이 없이 높이 솟아오르는 가벼운 날개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주리고 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열어 주시면서 선의 책무를 실현하셨고, 몸소 거기에 이르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 청년은 떠나갔고,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묶인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 자기 탐욕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져서 말한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부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의미한다. 진정한 부자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재물이라는 말 자체가 ‘소유하다’라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이차적인 선(善)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를 돌아보아야겠다. 그리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채워 나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일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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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오늘 부자 청년과 관련된 복음 말씀을 들으시고 나서 고민이 큰 분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이자 전제 조건으로 모세를 통해 건네주신 십계명에 대한 준수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계명에 대한 충실한 준수 외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소유한 부를 혼자 독식하지 말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라는 권고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들 살짝 혼동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권고라기보다는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권고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고 오랜 기간 더 챙겨야 할 여우 같은 부인과 토끼 같은 자녀들이 있는 경우, 말씀 그대로 실천하다가는 결론은 패가망신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부를 창출하고 절약하고, 재정 관리를 잘해서 가족들을 잘 챙기셔야 마땅합니다. 자선을 베풀더라도 현실을 잘 파악한 후에 적정선에서의 자선을 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큰 뜻을 품고 삶을 대대적으로 전환하고 싶은 분들, 이제 달릴 곳을 원 없이 달리시고, 인생에 있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셔도 무방합니다.
혹시 나는 여유로운 재물이라든지 풍족함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오늘 복음과 나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시면 큰 오산입니다.
이 세상에 나눌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재물이라는 표현은 광범위하게 적용됩니다.
비록 재물이 부족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산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할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돈보다 훨씬 소중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 측은지심, 기도, 희생, 미소...베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서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애야,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이하 정리를 위해 22:00 추가----------------------------------------------
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함이 곧 당신을 따름이니까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당신을 따라나선
설레는 길에서
기꺼이 멈춰
외로운 벗에게
곁이 되어줍니다
그리함이 곧
당신을 따름이니까요
당신을 따라나선
설레는 길에서
기꺼이 멈춰
쓰러진 벗에게
손발이 되어줍니다
그리함이 곧
당신을 따름이니까요
당신을 따라나선
설레는 길에서
기꺼이 멈춰
배고파하는 벗에게
밥이 되어줍니다
그리함이 곧
당신을 따름이니까요
당신을 따라나선
설레는 길에서
기꺼이 멈춰
죽어가는 벗에게
살림이 되어줍니다
그리함이 곧
당신을 따름이니까요
당신을 따라나선
설레는 길에서
있어도 없는 벗에게
그가 되어줍니다
그리함이 곧
당신을 따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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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어떤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계명은
단순히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지키면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었던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철저히 그 계명을 지켰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 더 물어보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줄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생명도 보장했지만
재산도 보장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도 허락해 주시면서
많은 재산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즉 이 사람도 계명을 지키면서
생명과 더불어
재산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서
가난은 극복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예수님께서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빈곤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가난이 행복하다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의지할 재물이 없어서
결국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그래서 하느님을 선택하게 되는 그 상태가
복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경우도
하느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재물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선택했다고 해서
모두가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초점은
하느님을 선택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를 추구하다가
하느님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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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1-27)”
1)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10,17-19).
그러자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하는데(마르 10,20), 그의 말에는 십계명만으로는 무엇인가
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마태 19,20).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것은, 십계명을 다 잘
지켜 왔다는 그의 말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가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를 바라는 그의 지향이 올바른
것임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는 말씀은,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전반적으로 잘하고 있지만 원하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 부족한 것 하나를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부족한 것 하나를 채우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부족한 것 하나’는, 그가 실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일’입니다.>
2)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그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가진 것을 팔아”는, 재물을 모두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재물 자체를 버리는 것이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재물을 그냥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게 대단히
어려운 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을 그냥 포기하고 버리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버림’은 ‘사랑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속 재물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부족하다.’ 라는 말은, 사랑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안 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그 사람의 사랑은, 두 방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사랑이 갈라져 있는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는 “네가 원하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바로 당신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3)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간 것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또는 재물을) 버릴 수도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겪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말로 둘 다 가질 수는 없는가?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가?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도 사랑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뜻으로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입니다.
부자들만 그렇게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큰 것은 아닙니다.
가난해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큰 경우가 많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의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만’ 사랑한다면,
낙타 같은 사람도 바늘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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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병을 고치거나 음식을 배불리 먹거나 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일반적인 군중들과는 사뭇 다른, 나름 ‘구도자’적인 태도이지요. 그런 그의 마음 자세를 좋게 보신 예수님은 우선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충실히 지키라고 그 일차적인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랬더니 그는 사뭇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런 기본적인 계명들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충실히 잘 지켜왔노라며 당당하게 답하지요. 그는 아마도 유복한 바리사이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겁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왠만해서는 율법을 어길 일이 없었을 것이고, 율법을 어기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분위기 속에 자랐으니 작은 계명 하나까지 더 충실히 지키기 위해 애썼겠지요.
그러나 그의 율법 실천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벌 받지 않기 위해 율법을 어기지 않았을 뿐이고, 자신이 구원 받기 위해 계명을 지켰을 뿐인 겁니다. 자기 이웃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요. 그러니 당연히 이웃에게 선을 베풀 일도, 사랑을 실천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반쪽 짜리 신앙생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보다 완전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나’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우리’를 향할 수 있도록, 그가 작고 약한 이들에게 사랑과 자선을 실천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알려 주신 것이지요.
그동안 신앙생활을 충실히 잘 해왔으니 이제 한 단계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 ‘하느님 나라’가, ‘영원한 생명’이 거의 눈 앞에 있는데, 그는 그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못 믿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소유하고 누리는 그 많은 재물이 영원한 생명보다 더 소중했기에 그걸 내려놓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도저히 따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성경에서 부자는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돈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돈에 집착하는 마음이 커서 하느님 뜻을 외면한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돈을 좋아하면 스스로 지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 그 자체가 아무리 채우려고 노력해도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쁨은 그 돈에 대한, 세상이 주는 물질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을 끊을 때 비로소 누리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 부자가 지닌 부족함은 바로 ‘빈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내 마음 안에 빈 자리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셔서 섭리하시고 이끄실텐데, 그 안에 세상 즐거움을 찾는 욕망이,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이 꽉꽉 들어차 있으니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 상태로 계속 살다가는 욕망과 집착에 잡아 먹히게 됩니다. 목 마르다고 콜라를 마시면 더 큰 갈증을 느끼다가 탈수 증세에 빠지는 것처럼, 세상 것들을 벌컥 벌컥 들이키다가 영적인 탈수 증세에 빠져 하느님과 그분 뜻을 찾을 힘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른 바 ‘영적인 혼수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노력하여 얻은 것들을 ‘다 필요 없다’고 부정하시거나 폄하하시는게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 안에 빈 자리가 나야 하늘의 섭리가 들어갈 공간이 생기니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그 자리를 좀 만들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좀 누려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이지요. 각자가 비워내야 하는 항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내가 집착하는 그것이 바로 내가 비워내야 하는 것이기에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나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알아서 채워 주신다는 전적인 신뢰와 의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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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묵상과 기도
베드로 사도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주님의 제자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음에서 되살아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소멸되지 않은 상속 재산을 하늘에 마련해 주셨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얼마동안 그들은 시련을 당하겠지만, 그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 밝혀지고, 그들은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된다. 고 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겠습니까? 묻자, 그분께서 율법의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어려서 부터 다 지켜왔다.하자. 예수님께서 그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 그러면 보물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분은 재물을 많이 가진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봅니다. 어제 등.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대화 등 나의 모습과 말, 처신과 행위를 바라봅니다.
-. 사랑과 자비, 진리와 선을 중심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죄와 악습 등도 바라 봅니다. 회개와 함께 자선을 찾습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의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나의 다짐과 실천의 내용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베드1,3-9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르 10,17-27
말씀 실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위한 선의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자기 것을 선호하고 움켜 쥐고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 선한 일. 자비와 사랑의 일을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공동선을 위한 진보와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부자 청년인 종교 생활과 개인의 신심, 가족에 대한 자비, 사회 생활에서의 폐끼침 없음 등으로 남보기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로 부터 "참 바르게 산다"는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의 길에서 더 온전한 삶을 바라셨고, 그가 부족한 공동체를 위한 나눔과 실천. 곧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그 부족한 것을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인간을 세속적 기준에서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제자들은 그 기준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보편적 구원,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한 사랑과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길을 온전히 따릅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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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연중 제8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으로 이끄는 가난과 사랑>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방향착오를 하며 산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원하는 길을 추구하려고 공을 들이고 열성을 다한다 해도 엉뚱한 길을 선택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어떤 이는 무엇을 하고 성취하고 소유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삶의 이유를 두기에 사랑하고 나누며 사는 이들도 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최대의 존경심을 드러내면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0,17)라고 묻는다. 그 부자는 하느님 나라(마르 9,43-47 참조) 곧 종말 구원을 원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하느님의 계명 외에 다른 조건을 내세운다(10,19-21). 곧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먼저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어야 한다.
예수의 이 요구는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보충이나 보완이 아니라 그 부자에게 하느님의 뜻을 열어주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곧 소유의 포기는 그 부자가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제시된다(마태 6,19-21; 25-34 참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계명을 실천하는 것(행위)만으로는 부족하며, 가진 것을 다 팔아(무소유의 상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다음에야 가능함을 가르치신다.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은 스스로 가난해져서 지상의 소유에 위안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예수 자신과의 인격적인 유대를 뜻한다(8,34-38 참조). 그런데 그 부자는 예수를 추종하느냐 아니면 재물을 소유하느냐의 갈등 속에서 결국 추종을 거부하고 재물을 택했다(10,22). 이리하여 그 부자는 물욕 곧 재물의 마력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그의 선택은 명백히 방향착오였다. 그는 존재가 아닌 소유를 선택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되고 이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거듭 강조하신다(10,23-24). 예수님께서는 재물 속에 구원을 가로막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신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도 더 불가능하다고 하신다. 물론 재물 말고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많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신다(10,27). 이런 구원의 길이 다름 아닌 예수 추종 바로 그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잘 보여주듯이 영원 생명, 곧 행복에 이르려면 무엇을 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하느님 앞에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부자 청년과 같은 방향착오를 해서는 안 되리라!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 구원, 행복은 무엇을 행하여 얻는 것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 앞에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은 곧 성취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만 의존하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행복으로 가는 디딤돌은 소유없는 가난한 자 되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의탁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과 친교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내가 지니고자 애쓰는 것들이 나를 넘어뜨려 행복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됨을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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