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로 거룩해지리라
사도 20,28-38; 요한 17,11-19 / 부활 제7주간 수요일; 2026.5.20.
종교와 신앙의 세계에서나 세속과 학문의 세계에서 다 같이 존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존중은 종교와 신앙에서는 최고의 흠숭지례로 높이고, 세속과 학문에서도 신과 같은 권위를 인정하며 그 가치를 높이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성과 속, 어디에서도 통하는 언어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종교와 신앙에서는 체험과 삶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도덕과 양심의 가치이고, 세속과 학문에서는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실용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응용되는 가치라는 점이 다릅니다. 즉 주관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는 종교와 신앙의 진리는 객관적인 차원에서 인정되는 세속과 학문의 진리는 이렇게 서로 보완적입니다. 그래서 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는 서로 통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고, 진리는 하나이며 이성은 신앙을 통해 정돈되고 신앙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 길을 밝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은 인간과 진리의 의미를 비추고 과학은 방법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진리의 길은 과학과 신앙에 모두 열려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보다 역사가 오래된 아시아의 여러 종교들도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정신에 있어서는 궤를 같이 하기에 진리 추구는 선교의 지평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진리의 효능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천함을 넘어 거룩하게 하고, 과학적인 차원에서 어리석음을 넘어 현명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고별사입니다. 독서와 복음 말씀의 공통적인 내용은 작별을 고하려는 스승이 사랑으로 가르쳤지만 이제 남겨질 제자들에게 남기는 유언입니다. 예수님과 바오로 모두 제자들이 겪게 될 고난을 예고하면서 이를 이겨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저 의례적으로 남기는 빈 말로써가 아니라 스승으로서 솔선수범했던 삶에 대한 회고를 바탕으로 진정성 있게 격려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의 복음선포 활동과 가르침 전반에 걸쳐서 당신께서 제자들을 위해 지녔던 지향에 대해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기도의 형식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속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이라고 가르치신 바에서도 나타나듯이, 진리를 삶으로써 솔선수범하며, 제자들도 따라할 수 있도록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이미 그 전에도,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한 8,31-32)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요한 14,19)이라고도 확인해 주셨습니다. 실로 예수님께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요한 1,14)해 있었고, 사도 요한은 이를 증언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지낸 기간이 3년이요,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원로들과 함께 선교한 기간도 3년이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치유와 구마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말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는데, 바오로의 경우에는 그 3년 기간 중 절반 동안은 감옥에 갇혀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면서 돌로 된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많은 편지들을 썼고 이를 그 동안 쌓아 놓은 선교 인맥을 통하여 보냄으로써 마치 자유로운 처지처럼 복음을 전했습니다. 코린토에 두 통, 갈라티아에 한 통, 필리피에 한 통, 필레몬에게 한 통 등 무려 5통이나 되는 편지를 썼고, 이 편지를 그의 제자들이 인편으로 각 공동체에 전해 주었습니다.
필리피서를 제외하면, 하나 같이 “여러 교회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짓눌리던”(2코린 11,28) 바오로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교회에 일치를 호소하거나(코린토 교회), 이방인 신자들에게 면제해 주었던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로 인해 혼란에 빠진 교회들에 굳건한 믿음을 당부하거나(갈라티아 지방의 여러 공동체들), 감옥에서 만난 죄수 오네시모를 자유로이 풀어줄 것을 필레몬에게 간청하는 등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더라면 찾아가서 했어야 할 사목적 행동을 글로 대신 하는 편지들입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 몸으로 했어야 할 행동 이상으로 여러 교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편지의 내용들이 저마다 구구절절 절실하고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리피서 역시 이런 편지로 하는 선교 사목적 행동을 가능하게 해 준 데 대한 고마움에서 사도 바오로가 쓴 편지들 중 가장 따스하고 감사의 정이 넘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편지들로 인해 이 공동체들은 사도 바오로가 직접 방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활력을 얻었습니다. 이 편지들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읽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미사의 말씀 전례가 되었습니다. 특히 필리피 교회에서는 수감된 바오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는데, 에바프로디토스라는 젊은이를 파견하여 수발을 들어 주도록 하기도 했고, 값비싼 양피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에페소 교회는 그럴 필요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오로를 수시로 찾아가 면회함으로써 에페소의 복음화와 관련된 일이나 에페소 교회의 활성화와 관련된 일들에 관해 상의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에페소 교회에는 상당한 수의 원로들이 한 몸처럼 활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밀레토스에까지 불러서 이런 특별한 고별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는 진리에 관하여 이렇게 강조한 바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에페 1,13; 4,15.21.23-24; 6,14). 과연 에페소 교회는 그 주변에 있는 여섯 교회들을 잘 돌보아서 이른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본산이 될 수 있었으니, 사도 요한이 바오로와 티모테오를 이어 받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묵시록의 형태로 써 보내기도 했던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바오로도 온 삶으로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적 권위를 차지한 자들이나 재물로 하느님의 축복을 삼으려 한 자들과는 뚜렷이 구분되게도, 하느님께서 당대의 징표로 보여주시는 바에 충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악으로 물들일 수 있는 시대의 불의를 날카롭게 직시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에 따라서 신비가로서, 예언자로서 살아갔습니다. 그 결과 당대의 인습적인 세태와는 뚜렷이 구분될 수 밖에 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요, 진리로 인한 거룩함입니다.
27년 동안 교황직에 봉사하며(1978~2005년) 20세기 후반의 가톨릭 교회를 이끌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도 문명으로는 선진국으로 알려진 유럽에서 신앙이 쇠퇴하고 후진국으로 알았던 비유럽에서 신앙이 새로이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보고 나서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앞으로의 교회는 소수의 신비가들과 다수의 무신론자들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하는 ‘앞으로의 교회’는 보편 교회 전체를 상정하고 있는 듯 하지만, ‘소수의 신비가들’이 새로운 활력을 일으켜 주리라고 기대하는 교회는 단연 아시아 교회입니다.
“인간 이성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신뢰를 포기한, 진리의 위기 시대”(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 91항, 1998년)를 살고 있는 20세기에 대희년을 앞두고 1998년 로마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올린 건의문을 수용하여 반포한 문헌 ‘아시아 교회’에서 교황은 이렇게 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교회와 함께, 아시아 교회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신 모든 것에 경탄하면서, 그리고 ‘제1천년기에는 십자가가 유럽 땅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심어졌던 것처럼, 제3천년기에는 이처럼 광대하고 생동적인 이 대륙에서 신앙의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교 제3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1항)
예수님이나 바오로의 삶과 가르침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나침반이자 길잡이로 삼는 소수의 신비가적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교회의 희망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로 거룩해 지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시아 복음화에 대한 희망도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소수 신비가들의 몫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받아야 할 은사는 슬기와 굳셈의 은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주로서 세상 만물을 지어내시고 움직이시며 마침내 당신의 나라로 완성하실 것을 믿는 슬기는 으뜸가는 은사입니다. 우리가 부활 시기를 지내는 동안 내내 상기한 바와 같이, 이 시기에는 요한 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하신 그분이 이룩하신 놀라운 변화들 즉 제자들이 사도들로 부활되고 또 사도들이 신자들을 감화시켜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초대교회를 출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활의 은총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업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힘은 오직 슬기의 은사 덕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단과 만나는 자리에서, “순교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시대의 이상을 교우촌에서 실현할 수 있었던 기억의 지킴이가 되어야 하고,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 주는 희망이었으므로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며 남기신 메시지는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슬기의 은사를 발휘해서 기억과 희망을 지켜달라는 눈물겨운 당부였습니다.
이 기억과 희망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번영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겨내는 굳셈의 은사를 무엇보다 요청됩니다. 이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하는 마귀의 유혹이 닥쳐올 때나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부딪치는 역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이끌어 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죄의 뿌리인 칠죄종(七罪宗)에 대하여 이를 극복하게 해 주는 일곱 가지 덕행을 수양함으로써 마귀의 유혹을 용감하게 극복하게 해 주는 은사입니다. 이웃 종파와 교파들이 침체되고 이단들의 극성에 휘둘려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그 쇠퇴 현상을 걱정할 정도인 현실이라서 결과적으로 우리 교회는 어부지리로 현실에 안주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서 굳셈의 은사는 절박합니다. 칠극(七克)이 가르치는 바는, 하느님의 일에 부지런히 힘 쏟아 선행에 게으른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바야흐로 내년으로 다가온 세계 청년 대회가 무사히 치루어져 다시 힘을 얻은 청년 신자들이 내뿜는 활력으로 우리 교회도 새롭게 굳셈의 은사를 용맹하게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한편 하느님께서 한반도에서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아 주시리라는 희망으로 우리 교회와 신자들을 성령께서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