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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에게 주신 영원한 언약
창세기 17: 1~8
언약의 표인 할례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창12:2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창17:17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롬4:11-12, 16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느9:7, 롬4:17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갈3:17, 히11:16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레26:12, 시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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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온갖 시름을 잊고 지낸 것 같습니다.
사라가 임신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갈등도 사라졌습니다. 약속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에 아브람도, 사래도 체념했습니다. 그 13년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잊었습니다.
‘세월이 약이겠지.’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흘러가는 세월 중에도 시계를 보고 계십니다. 시간을 다 계산하고 계십니다.
깨우시는 하나님
1~2절입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 뿐만 아니라 사래와 하갈과 이스마엘도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여러분은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견딜 수 있는 인내의 시간은 10년이었습니다. 그는 10년이 되자 믿음을 잃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25년이었습니다. 바로 지금이 24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이제 1년만 더 기다리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년을 앞두고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다시 격려하시고 믿음을 주고 비전을 상기시키셔서 마지막까지 그가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람에게 주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절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 주는 첫번째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에게 조금이라도 불가능이 있거나 불완전한 것이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뜻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전능하다는 이 선언을 왜 아브람에게 하셨을까요? 아브람이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있었지만 실현 불가능하고 모든 것이 다 끝났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 당신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그렇지 않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휴면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잠을 깨우셨습니다.
‘아브람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이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나는 동일한 하나님이다. 나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하나님이다. 내 계획대로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는 잠에서 깨어나고 불신앙에서 깨어나라. 24년전에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지 말라. 네 태가 끊어져서 네가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지만 나는 분명히 약속대로 행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말씀만 하시지 않고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완전하다’는 뜻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회복은 거룩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완전해도 아브람이 이것을 받을 만한 거룩이 없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거룩하게 되어 다시 새롭게 믿음을 갖도록 그를 격려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것은 아브람 뿐만 아니라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40년간 자기 의에 취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결국 살인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버림받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잊혀 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으며 시간을 계산하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모세가 80세 때 여느 날과 똑같이 산에 오르는 길에 불꽃나무를 보게 되었고 그 앞으로 나아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께 다가가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더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호수아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여리고성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무너뜨리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칼을 든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 편입니까? 적의 편입니까?”라고 묻자 그 천사는 “나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오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 주여, 무슨 말씀을 하든지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너는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 온누리교회에 그와 동일한 요구를 하십니다.
‘너는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는 뜻은 ‘너는 이제 변해야 한다. 과거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너는 새로와져야 하며 거듭나야 한다. 너는 과거를 다 버리고 이제 새롭게 새 마음으로 내 앞에 서야 한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옛일이 다 잊혀진 줄 알았던 아브람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브람은 이 말씀을 듣자 숨을 죽이고 엎드려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3~4절입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 말씀은 24년 전에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그는 흥분했으며 기대와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걸어갔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잘 견뎠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년이 지나자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렇게 하나님께 투정했습니다. “하나님, 양자나 데리고 살지요.” 한 술 더 떠서 아내 사래는 자기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기를 갖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불신앙적 태도 때문에, 더 끝까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의 사이에는 상처가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원치 않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히려 상처만 낳습니다.
그런데 다 잊을만한 이 때에 다시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그 상처를 건드리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옛 이름과 옛 사람을 버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과거의 스타일로는 내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이전의 내 스타일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없으십니까? 능력이 없어서 여러분을 부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은 돈이나 능력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옛것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 불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동적이었습니까?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은 온 국민이 ‘당신은 우리의 국부(國父)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일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역경과 죽음에서 건져낸 사람이기에 우리는 당신을 국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하지만 한 개인의 아버지나, 한 민족의 아버지도 아닌 ‘온 열방과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감동적이며 감격스럽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이 아브람의 인생의 판도가 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던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기에 땅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비전이 생겼습니다. ‘한 가족의 아버지’에서 ‘온 열방의 조상’으로 바뀌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이 단순한 사실 때문에 엄청난 복을 받게 됩니다.
☛첫 번 째로 ‘번성의 복’을 약속하십니다.
믿음을 가지면 번성하는 복도 받습니다. 창세기의 축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축복은 번영과 번성입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겠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네 이름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은 24년 전에 약속했던 것이고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는 표현은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네 후손이 대대로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은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네 후손 대대로 유효할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축복
여기서 우리는 ‘축복은 계승된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주는 삼사대에서 그치지만 축복은 수천대에 이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대까지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축복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어지고 있습니까?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나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불교를 신봉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어머님이 얼마나 혼돈스러우시겠습니까? 본인이 편안하게 잘 살고 계신데 괜히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나서 교회 나가고 싶습니다. “
그래서 저는 조용히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말은 어머니를 지옥까지 잘 모셔다 드린 후에 저는 천국으로 가겠습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당신이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먹을 것, 입을 것보다 어머니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부모님을 볼 때 어떤 믿음을 기억하십니까?
아브람의 축복은 천대에 이르도록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믿음은 이삭으로, 이삭의 믿음은 야곱으로 전달 되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전달 될만 합니까?
‘우리 아버지는 내가 간혹 밤에 깰 때마다 기도하고 계셨어.’ ‘우리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갔지.’ ‘우리 가정에 그 어려운 시련이 있었을 때 하나님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셨던 것을 보았지.’
여러분의 자녀에게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서 기억할 만한 믿음의 유산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어줄 믿음의 유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여러분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자녀에게 이야기할 무엇인가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전승되며, 축복은 수천대로 이어집니다.
7절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시적인 것도, 시간이 지난다고 쇠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 강해지고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땅의 복’까지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땅은 축복의 통로이자 근본이었습니다.
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땅을 투기하는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땅으로 돈벌이하는 사람은 한 때 돈을 벌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땅 때문에 망합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 곧 그‘땅’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축복의 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옮겨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그 미지의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나 믿음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백년간 종살이할 때 애굽의 문화 속에 머물지 아니하고 그들을 이끌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 약속의 땅을 향하여 탈출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근도, 목마름도, 질병도, 원수들의 공격도 있었습니다. 기막히게 어려운 일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약속의 땅을 향한 멈추지 않는 행진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주의를 끌고 초점을 흐리게 하는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행진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성과 전쟁을 치른 것도 바로 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시려는 하나님의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영원한 기업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현재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의미에서의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약속의 땅은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영원한 땅입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약속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리켜 ‘영원한 기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보는 땅의 개념과 다릅니다. ‘영원한 기업’은 아브람의 자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당신의 나라가 이땅에 이뤄지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원하셨던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먹는 것과 입는 것, 쾌락을 느끼는 것,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것을 제한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영원한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업은 영원한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천국까지 이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아브람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살아나고 하나님을 만나면 잠에서 깨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성취를 1년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그의 믿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림은 고통스럽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시간을 계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이르게도, 너무 늦게도 오시지 않고 정확한 때에 오십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믿음의 실패를 경험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며 회복시키십니다. 믿음의 상처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서자가 태어난다고 해도, 13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잠에 빠진 자들을 깨우시고 체념한 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반복적인 갈등은 계속되는 것일까요? 갈등도 고난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의 성취가 1년 밖에 남지 않았듯이 갈등과 고난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다리게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는 그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고 3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해답을 얻게 되며 그의 기다림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모든 축복도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 모든 축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완성됩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