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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사사 삼손의 출생이야기
사사기13:2-7
지난 4일 충북 괴산군에서 출산장려금 1억 원을 받는 가정이 탄생했다는 기사를 인터넷으로 봤습니다.
문광면에 사는 임완준. 이애란 씨 부부인데 이들은 지난 1월 5일 쌍둥이 아들을 셋째 넷째자녀로 출산하였습니다.
셋째부터 5천만 원을 주는 출산장려금으로 이들은 한꺼번에 1억 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받는 일억 원은 5년간 10회에 걸쳐 분할 지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청년인구가 줄어들고 아이들을 낳지 않아 인구가 감소하자 고육지책으로 출산장려금을 지급하기에 이르렀는데요,
정말 출산 문제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낳으려고 해도 낳을 수 없었던 부부가 임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부부인데요,
아이를 갖기 원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던 이들에게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아내에게 나타나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아들을 임신하였을 때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줍니다.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태에서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아이의 장래까지도 알려주는데,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큰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고 남편이 다시 한 번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기를 간구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때 마노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그 아이에게 어떻게 행하면 좋겠습니까? 질문을 합니다.
이것이 마노아 가정에서 태어난 사사 삼손의 출생이야기입니다.
사사삼손의 출생은 조금 특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든지, 아이가 나실인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게 특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삼손이 사사로서 크게 쓰임 받은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의 출생도 특별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특별하게 일하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하게 태어난다는 선입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사 삼손의 출생이나 우리 자녀들의 출생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대동소이합니다.
삼손의 출생이 귀하였다면 우리 자녀들의 출생도 똑같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삼손의 출생에 담겨있는 의미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삼손의 출생이야기는 우리 자녀들의 출생이야기이고 사사 삼손의 출생의 의미는 우리 자녀들의 출생의 의미와 같습니다.
오늘은 5월 첫 번째 주일로서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귀한 어린이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인데요,
오늘날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생각은 극단적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녀를 내 자녀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키우려고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서 대리 만족을 하려는 부모들의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녀를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너무 되는대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가 됩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실망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다 잘못된 자녀 양육인 줄 압니다.
오늘 귀한 어린이 주일을 맞아 올바른 자녀 양육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에게 맡겨준 자녀 손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키우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사 삼손의 출생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먼저, 삼손의 임신과 출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삼손의 부모가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함으로 출산하지 못하더니”(2절)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돌계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돌계집, 석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얕잡아서 하는 말입니다.
마노아 부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석녀, 돌계집이었습니다.
그런 여자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했을 때 얼마나 기쁘고 놀랐겠습니까?
마노아 부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삼손의 출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임신과 출생이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임신도 잘 됐고 자녀들을 잘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출생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삼손의 출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자녀의 출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임신할 수 있고 출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139:13∼14 말씀에 보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했습니다.
이 고백은 나를 지으시고 나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내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어도 자녀의 임신과 출생은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키워야 합니다.
내가 났으니 내 아들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 삼손의 임신과 출생에는 부모의 책임이 따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4절)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임신을 한 어머니가 태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임신을 한 후에는 먹는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부정한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면서 길을 걷다 보면 젊은 남녀가 함께 담배를 피우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언 듯 보기에 부부같이 보이는데 자기 아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아 보일까? 그런 생각이 우선 들고요.
저들이 아이를 가졌을 때에도 담배를 피우면 아이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 담배는 없었겠지요.
그러기에 태아에게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술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독주는 더욱 안 좋았기에 여호와의 사자는 이런 것을 조심하라고 경고를 주었습니다.
삼손의 어머니에게 이런 것을 금하였다면 당연히 오늘 부모 된 우리에게도 금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자녀를 위하여 먹는 문제나 행하는 문제에서 절제할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아이를 임신했을 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하는 것에도 크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이들은 결국 부모의 모습을 배울 수밖에 없고 그 부모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렇게 자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일에 더욱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육아컨설턴트이자 교사인 도로시 로 놀테 여사가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을 위해 지은 시 ‘아이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배운다.’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꾸지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비난하는 것을 배우고
미움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싸움을 배우고
두려움 속에 자란 아이들은 근심을 배우고
칭찬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자신감을 배우고
너그러움 속에 자란 아이들은 인내심을 배우고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고마워하는 것을 배우고
사랑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고
정직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진실 된 삶을 배우고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정의를 배우고
친절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남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다정함 속에 자란 아이들은 세상이 살기 좋은 곳임을 배운다.”
여러분, 자녀들은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에게 배웁니다.
부모들이 하는 말, 행동, 가치를 그대로 배우고 따라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녀들을 잘 키우기에 앞서 내 행동과 삶을 바르게 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세 번째, 삼손의 출생은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네가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말합니다.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난 아이이기에 머리를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했으면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아이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 아이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했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이 사명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비 된 자들에게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인데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춰보면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잘못하는 것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녀를 내 자녀라고 생각하여 내 마음대로 키우는 잘못입니다.
이런 부모에게는 이미 자녀의 인격이나 가치는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는 어리기 때문에 무조건 내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생각은 용인되지 않고 무조건 내 생각과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주장을 펼치면 아빠에게 따지고 대든다고 야단을 칩니다.
내 것을 강요하고 요구하고 내 것을 따라야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자녀는 노엽게 되고 그 노가 쌓이게 될 때 아이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는 정말 위험한데요,
심지어 자녀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잘못을 범하기까지 합니다.
자녀들을 내 자녀라고 생각하여 내 마음대로 키우려다가 자녀들을 노하게 하면 안 됩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는 농부로 태어나서 광산업주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무지하고 품위 없었던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듯 루터에게 상류층 교육을 시켰습니다.
부유한 특권층만 다니는 라틴어 학교에 보냈고 아들을 법관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폭력을 주로 사용 하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호두 한 알을 몰래 훔쳐 먹은 죄로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았던 기억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억눌렸던 과거 때문인지 루터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낙 전까지 불안감과 두려움을 늘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녀들은 내 자녀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여러분의 가정에 맡겨주신 것뿐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자녀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여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자녀들에게 끌려 다닙니다.
자녀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자녀들 마음대로 행동해도 그것을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고 방치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방식대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사람들 가운데 세우고 안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린이들을 대할 때 나를 대하듯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어린 아이는 정상적인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된다고 어린아이를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아이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습니다.
주님의 방식은 어린 아이를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하면 자녀들은 노여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귀한 종으로 성장하게 되고 삼손처럼 귀하게 쓰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자녀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02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