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갈등 도시」
갈등(葛藤)이란 오른쪽으로 감고 오르는 등나무 넝쿨과 왼쪽으로 감고 오르는 칡넝쿨을 말한다. 이들이 서로 엉켜 풀기 어렵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로 이런 갈등 도시가 바로 서울이라는 것이다. 저자 김시덕은 일본에서 문헌학을 공부한 역사학자로 작년에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란 저술을 읽으면서 그를 알게 되었다. 그는 7∼80년대 서울이 한창 개발될 때 10대와 20대로서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개발을 우리는‘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서울이 발전하는데 방해가 되고 보기에 좋지 않다고 간주 되는 수많은 시설들과 서민들은 경기도로, 서울 곳곳의 빈민촌에 살던 사람들은 성남이나 광주로 밀려났고 서울 시민이 사용할 화장장은 고양시로 옮겨졌다.
서울을 터전 삼아 살아온 서민들의 문화는 물론 역사까지도 송두리째 지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역사가 지워진 자리에는 조선 시대 왕과 사대부의 문화(지명,기념비,건축물)가 소환되고 새로운 역사의 미화가 벌어지곤 한다고 한다. 이것은 "기억의 전쟁이자 계급의 전쟁"으로 저자는 서글픈 전장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것을 또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민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은 지우고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잘 정리해 보여 주는 모범적이고, 정결하고, 청결한 답사 코스를 벗어나서 무작정 대서울*을 걷다 보면,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지난 백 수십 년간 시민들이 갈등하며 살아가고 또 죽어 간 이야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 p7~8
이 책에서는 조선 시대 국왕·양반의 공간, 독립운동·친일 인사와 관련된 공간, 건축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빌딩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공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이들 공간들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책을 쓰는 동안, 대서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나머지 공간은 재개발·재건축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p.10
불교·유교·기독교만이 대서울의 종교가 아닙니다. 대서울 곳곳에서 널리 확인되는 부군당, 도당신앙, 제갈량과 관우 신앙, 녹번 고개 산골(山骨)판매소의 토지신 신앙, 그리고, 대서울은 아니지만 경상남도 창원시의 가포 마을 신사도 현대 한국시민의 당당한 신앙 형태입니다. --- p.57
문헌학이라는 연구 방법을 가지고 대서울을 바라보면,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처럼 [세계는 거대한 도서관]으로 다가옵니다. 대서울에는 제가 읽고 해석할 대상이 무궁무진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간판, 머릿돌, 마을 비석, 공덕비, 추모비, 벽보, 플래카드, 전단지, 깃발 등에 특히 관심을 두고 대서울을 걷습니다. --- p.64
건물에 붙어 있는 머릿돌을 통해서 그 건물을 짓고 소유한 한국 사회 상층의 특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슈퍼마켓이나 이발소·미용실 등의 간판을 통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계급의 특성, 그리고 그 지역이 언제 만들어지고 번성했는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 p.68,69
[굴다리 마─트]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원효로 3가 51-9의 [Q마─트], 역시 부평의 일본군 군수 공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산곡동 조선 영단 주택에 자리한 [뉴─백마 슈퍼] 등에는 장음 부호(─)가 보입니다. [다이야─몬드]와 같이 이런 장음 부호는 슈퍼마켓 주인분이 비교적 연륜이 있고 그 지역에 오래 거주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 p.93,98
아주 잠시 동안만 대서울의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제가 미처 보지 못한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무수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무수한 순간들의 아주 약간만이라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사진으로 찍고 싶다는 필사적인 안타까움을 품고, 저는 대서울을 걷습니다. --- p.137,141
80~90년 전에 식민지 당국이 만들어 낸 도시 구조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 있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나 일식 가옥 같은 건물 몇 채를 철거하고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146~147
대서울을 답사하다 보면 곳곳에서 재개발·재건축을 둘러싸고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현대 한국 초기의 개발 방식이 21세기 초에도 답습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 p.152
느릅나무 출판사의 대표 드루킹씨 등은 『송하비결』* 및 천부교(전도관)에서 초기에 이용하던 『격암유록』* 이라는 예언서에 의거하여 파주 교하 지역을 자기 집단의 정착지로 선택했다고 이야기됩니다. 천부교를 창시한 박태선 씨에게 『격암유록』과 부천 소사라는 선택받은 땅이 있었다면, 드루킹 씨에게는 『격암유록』과 함께 『송하비결』이 추가되었고 파주 교하라는 선택받은 땅이 있었다고 하는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p.205,206
서울시와 대서울의 관계는 좁은 의미의 런던과 그레이터 런던Greater London의 관계와 같습니다. 서울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정구역인 서울시만 봐서는 안 되고, 서울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서울 근교 경기도 지역을 함께 들여다봐야 합니다. --- p.213
산골이란 [산골짝의 다람쥐 아기 다람쥐] 할 때의 산골(山谷)이 아니라, 뼈를 다쳤을 때 먹는다고 하는 광물질인 산골(山骨)입니다. 이 산골은 녹번(碌磻)이라고도 불려서 이 지역을 산골 또는 녹번이라 부릅니다. 서울시가 광업 도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장소입니다. --- p.231
1968년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지어진 유진상가의 필로티는, 북한군이 청와대를 공격하려 할 때 이를 폭파시켜서 길을 막을 수 있도록 일부러 얇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말산과 포방터 시장, 유진상가 모두 서울이 군사 도시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 p.233
고양시와 서울시의 경계에 자리한 이말산에서 전근대의 무덤과 군사 시설과 은평 신도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들 시설을 서울시 외곽과 서울시 바깥의 경기도 곳곳으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국의 다른 지역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혐오 시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청결]하고 가난한 자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계급적으로 [균질]해진 서울[특별]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 p.238
삼문화 광장이란 개념은 아스테카 시대, 스페인 식민지 시대, 멕시코 시대의 세 건물이 한눈에 보이는 멕시코시티의 [삼문화 광장Plaza de las Tres Culturas]에서 빌려 온 것입니다. 사대문 밖 서울시 대부분 지역에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유적을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식민지 시대인 20세기 전기, 광복 이후부터의 20세기 후기, 21세기 전기의 세 시대가 이들 대부분 지역의 시간의 지층, 즉 시층을 이룹니다. --- p.249, 250
이미 망한 지 100년이 지난 나라의 왕족 사당에 대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시민이 왜 신성함과 존엄성을 지켜 주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조선 왕조가 망한 뒤에도 조선의 왕족들은 새로 마련된 이왕직관제(李王職官制)에 따라 비교적 우대받았으니,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은 민중들과는 그 처지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랬기에 1919년 3월 1일의 독립 선언을 거쳐 4월 11일에 수립된 조선인들의 임시 정부는 그 이름을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한 것입니다. --- p.267,268
지난 군사 정권 시절 영등포와 구로 공단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장의 소유자와 정부는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사이비 역사학의 신봉자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설파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근로자와 사용자가 협력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이 쌓아 올린 공포의 탑(재개발)이 무너지고 재개발의 잔치 빚은 늘어만 가는 위중한 이때 우리 조합의 대의원들은 지금 북한의 핵이나 경주 지역의 지진을 두려워할 때가 아니다. 자신의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 (…) 한국 시민이 북한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외국인들이 이상하게 여긴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만, 그러한 한국 시민의 심리를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벽보를 발견하게 되어 감탄했습니다. --- p.350
마석가구단지에 답사 갔을 때 그곳의 화장실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정약용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정약용은 흡연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지요. 한문학자 안대회 선생은 『담바고 문화사』에서 정조와 정약용이 담배를 매우 사랑한 사람들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남양주시와 다산 정약용의 관계를 행정구역의 이미지가 원래의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지는가를 잘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p.395
식민지 시대에는 대서울 동남쪽의 용인 지역이 이른바 [대일본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될 뻔했고, 6·25 전쟁 때에는 대서울 서부의 부평이 새로운 수도가 될 뻔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용인 역시 신도시·택지 지구가 잇따라 개발되어 [확장 강남]의 일원이 되기 100년 전부터 대서울의 일부였다고 하겠습니다. --- p.455
현대 서울의 역사는 서울이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되고 서울 시민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간주 되는 수많은 시설과 사람들을 경기도로 밀어낸 역사입니다. 청계천변 등 서울 곳곳의 빈민촌에 살던 10여만 명을 지금의 성남 원도심인 광주 대단지에 보낸 것이 그러하고, 서울시에서 사용할 화장장을 고양시 덕양구에 세운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이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부채 의식과 책임감을 지녀야 합니다. --- p.459
용인시 기흥구 어정의 한센인 정착촌 [동진원]이 가구단지를 거쳐 신도시가 되자, [동진원]이라는 이름은 떨어져 나가고 공원 가운데에는 조선 국왕 세종을 기리는 비석이 섰습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 미화, 역사 만들기가 이렇게 분명하게 이루어진 현장을 보니 감탄스러울 정도입니다. 근현대의 가난한 자, 약자들은 지워지고 봉건 시대의 지배층은 끊임없이 소환됩니다. --- p.463,464
*대(大)서울 : 행정구역상의 서울특별시뿐만 아니라 집은 서울시 바깥에 있지만, 학교나 직장이 서울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까지를 포함한다는 의미
*송하비결(松下祕訣) : 조선 말기‘송하노인’이 썼다고 전하며, 2003년경 출판되어 IMF, 월드컵, 노무현 대통령 당선 등의 높은 적중률을 자랑한 바 있다. 강원도 원주에 살던 역학자 김성욱(39)에게 필사본 형태로 전해져왔다 하며 〈송하비결 난세의 국운 대예측〉이라는 책도 김씨가 보관 중이었던 필사본 중 하나로 김씨와 함께 통일연구원의 황병덕 박사(아호 남송)가 해석하기도 했다.
*격암유록(格庵遺錄) : 1977년에 처음 소개되고 1987년 번역되어 출간된 한국의 역사서이자 예언서로 총 6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예언가 격암 남사고(1509년~1571년)가 젊은 시절 ‘신인(神人)’을 만나 전수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역사학계는 검토 가치가 없는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977년에 이도은(李桃隱, 본명 이용세, 1907년~1998년)이 필사하여 기증한 것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책에서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이 있다. 100년도 더 전에 망한 조선을 우리는 왕조의 역사로, 양반의 문화로, 서울과 한국을 대표하는 존재로 배워 알고 있다. 그 시대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우리가 정말 지켜야 하는가? 조선 시대 성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한 노비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노비의 ‘신분해방운동’을 기념해 진주시민들이 〈형평운동기념탑〉이라는 것을 만들어 진주성에 세웠다. 그러나 탑은 얼마 전에 진주성 밖으로 밀려났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일반시민은 여전히 평등하지 못하다. 조선 왕궁과 양반들의 기와집은 보존되고 있는 반면, 평민·서민들의 공간이던 을지로 골목길은 철거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이라고 낳하지만 정작 역사적 장소는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옥에 간 사람들만 중요하단 말인가? 서대문형무소만 보존하면 되는가? 옥바라지하던 사람들은 여성이었을 테고 그렇게 여성의 서사敍事 하나가 사라지고 지워지고 있다.
*2017.12.10자 경남일보 : 진주시 칠암동 소재 경남문화예술회관 앞 조각공원에서‘형평운동기념탑’이전 제막식이 열렸다. ‘진주형평운동기념탑’은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1996년 12월 10일 진주성 입구에 세워졌다. 하지만 진주대첩광장 조성사업이 추진되면서 칠암동 조각공원으로 이전이 결정됐다. [출처: 경남일보] (http://www.gnnews.co.kr)
오늘날 대한민국은 모든 시민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임에도 나라의 의사결정 층은 여전히 옛 지배층과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구성하고 그것만을 기억하도록, 그 외의 평민과 노비의 역사는 기억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주입되고 있다. 군사 정권 시절 영등포와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본가와 정부는 『한단고기』로 대표되는 사이비 역사학의 신봉자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설파하게 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근로자와 사용자가 협력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기억의 전쟁이자 계급의 전쟁’이다. 기억 전쟁에서는 조선 왕족·남성 중심의 관점을 지닌 집단이 시민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일제 잔재 청산〉을 내세웠다. 지난 100년간 우리 평민과 시민들이 살아온 공간이 대부분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적산가옥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가옥뿐 아니라 〈조선 시대의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북촌과 서촌의 기와집들도 20세기 전기 식민지 시대에 세워졌다. 서울에 존재하는 기와집의 절대다수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개량 한옥이라 불리는 기와집이 조선 시대 양반들의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비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청계천 남쪽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서 서민이 살 수 있도록 보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식 가옥과 개량 한옥 모두 단순한 식민 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옛중앙청)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 이용된 기간(1926∼1945)보다 대한민국의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된 기간(1946∼1995)이 더 긴 것을 비교하면 이 건물과 공간을 철거한다는 것은 〈식민 잔재의 청산〉이 아니라 〈시민의 역사, 시민의 기억〉을 지우는 파괴행위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런 기억의 전쟁은 2019년 현재까지 을지로 등 서울 곳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2019년 을지로 뒷골목 모습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는 ‘비석마을’이란 데가 있다. 그런데 여기도 그렇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비석이 아닌 다음에야 한글이 새겨진 비석은 없다. 전부 다 한자로 써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비석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서울 중랑천 건너 동쪽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곳은 노원구 하계동·중계동·상계동 지역으로 초안산 아래에 있다. 여기에〈한글비석길〉이라는 도로명이 보이는데 이는 하계동에 자리한〈한글고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비는 1536년 한글로 무덤 훼손을 금지한다는 문구를 새긴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이다. 당시 평민들도 한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인 것이다.
이 책에는 화신그룹 창업자로 우리나라 최초로 직업병이라는 것을 낳은 원진레이온의 박흥식 선생과 천부교의 박태선에 대해서 양주와 남양주를 답사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박태선은 장준하, 함석헌 등과 같은 〈서북 출신〉으로 그는 한때 대한민국의 설계자였다고 한다. “1957년 내가 신앙촌을 건설할 당시 우리나라는 빈곤에 허덕이며 다른 나라의 구제만을 바라고 있을 때였다. 농촌에서는 1년 양식을 채우지 못해 풀뿌리를 캐어서 보릿고개를 견뎌 나가는 정도였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외국의 원조가 끊어지면 살 수 있겠냐고 질문하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외국에 구걸하고 동냥하는 썩은 정신을 버리고 다시는 원조를 받지 않도록 10배, 20배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여 신앙촌을 건설하였다. 외국의 원조나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신앙촌을 건설했고 신앙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핍박을 받아 옥중에 들어가기 전까지 만 3년 동안 전국적으로 전도관 교인이 100만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 시기에 만여명이 거주하는 소사 신앙촌을 건설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나오자마자 4개월 만에 덕소 신앙촌을 건설했으며, 기장 신앙촌은 수출을 계획하여 생산시설을 소사 신앙촌과 덕소 신앙촌보다 큰 규모로 건설하였다”(하략)
박정희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 박태선은 이 무렵 최태민이 기존에 자신이 주장하던 영세교라는 신종교를 버리고 목사안수를 받은 뒤 1975년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었고, 박태선의 아들 등 재벌가 2세 일곱명이 〈7공자 사건〉이라는 것을 일으켜 6월 21일 열린 ‘대한 구국 십자군 창군식’에서 – 선량한 교인을 우롱하는 전도관 등 사이비 종교 일소 – 퇴폐 풍조 일소 – 사회 부조리 제거를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천부교는 결국 한국사회의 주류에 편입하는 데는 실패했다.
박태선의 성공과 실패를 옆에서 지켜본 최태민은 영생교 같은 독자적인 종교의 교주가 되기보다는 기성 프로테스탄트 교단 안에서 활동하는 방법을 택했고, 그가 설립한 ‘대한 구국 선교단’은 ‘새마을 운동’의 정신 운동 버전이라고 할 ‘새마을 봉사단’으로 이어졌고, 그의 딸 최순실은 박근혜와 연관돼 국정농단이라는 비극을 낳고 둘이 아직도 옥살이를 하고 있는 비극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책이란? 무슨 책이든, 그것을 읽다 보면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내가 대서울에 살지 않기 때문에 「갈등도시」라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의심도 하고 또 너무 길어서(507쪽) 읽기도 버겁다는 생각을 했는데 - 상당부분 건너뛰기는 했지만 –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첫댓글 청풍명월님!~오랜 세월의 수도서울과 인근 경기도 간의 문제를 지켜봅니다!
정말 갈등(葛藤)의 관계로군요!
즐감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