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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 호조판서 이덕량등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낙타를 사라고 명하셨는데,신들은 그 값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니 ,적당히 헤아려서
세포(細布)30필을 보내어 사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순찰사를 시켜 손실을
다시 살피게 하라 또 낙타는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 갈 수 있으니,군사를 일으킬 때에 양식을 나를만 하다. 베 60필을 보내어 사오도록 하라"하였다.
(성종실록 1486(성종17)9월19일
(낙타를 탄 몽골인...단원 김홍도)
그러나 대사헌 이경동 등이 낙타 수입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먼 지방의 기이한 짐승을 비싼 값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과
🍬(고려 태조가 낙타를 죽인 사례)가 있다는것,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운 상황에서 콩400석에 해당하는 베 60필을 쓸 수 없다는것등 크게 세가지였다.
성종은 결국 이경동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낙타 수입을 포기하였다.
숙종은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낙타를 궁중에 들이려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 저녁에 임금이 액정서의 하인에게 명하여 낙타 한마리를 궁중에 끌어오도록
하였는데 승지 박세준등이 간하니 임금이 즉시 내보낼것을 명하였다.
그전부터 청나라 사신이 올 때 낙타나
호마(胡馬)를 몰고 와서 의주에 떨어뜨려 두었다가 돌아갈 때 도로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앞서 청나라 사신이 낙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가 여위어 먼 길을 달리는 것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내버리고 갔는데 마침 한 궁노(宮奴)가
서도(西道)에 가서 사오니 성중(城中)의 사족과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구경하느라 길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은밀히 끌어 오도록 하였는데 박세준등이 '이상한 짐승을 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뢰니, 임금은 '그것을 잠시 궁중으로 끌어오도록 한것은 다만 한번 그 동물의 모양을 보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어찌 궁중에 두고서 기를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
숙종실록(1695년.4월14일.숙종21)
위의 실록의 기록에는 '신기한 동물'낙타를 구경하기 위해 백성들이 몰려나온 상황과 숙종임금이 낙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물러선 정황이 나타나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거란족들이 화친을 위하여 사신30명이 낙타 54마리를 끌고와 상납하자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킨데 대한 반감으로 사신들은 섬에 가두고 낙타는 다 굶겨 죽였다는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