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하-백신애
분야: 어문 > 수필 > 경수필/수필
저작자: 백신애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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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비는 초록색 비
산에도 들에도
초록물 들였네
우리 집 유리창에도
초록색 들였네
그래도
비야 비야 초록색 비야
우리 꽃밭에 장미꽃은
왜 초록색 못 들였네
희고 붉게 웃고 있단다
이 동요는 지난해 첫 여름에 그때 보통학교 육년생인 열두 살 먹은 나의 조카가 방 안에서 유리창으로 뜰을 내다보며 직경을 그려낸 것이다.
이즈음 거의 지루함을 느낄만하던 비가 개인 아침 종이 창문을 걷어 제친 유리창으로 선명한 햇빛과 함께 녹색(綠色) 공기가 풍겨 들었다. 벌떡 일어나 내다보니 산과 들과 나무의 빛깔이 놀랄 만치 짙어져 있었다. 나는 문득 이 동요가 생각나며 가만히 읊어보았다. 이 동요의 작자인 나의 조카는 올해 열세 살로서 서울×××여고의 여학생이 되어 거의 날마다 사진이라도 보내 달라고 홈씩에 우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의 이름이 장미(薔微)이라 날마다 ‘バラ, バラ, シロバラ’ ‘장미, 장미, 흰 장미’라는 뜻이라고 놀려대기는 하면서도 꽃밭에 장미나무에게는 ‘우리 장미 우리 장미’하며 비료와 물을 다른 나무보다 만큼 주고 귀애하여 붉은 것, 흰 것, 분홍 등 각색의 장미꽃이 늦은 봄부터 이른 겨울까지 계속하여 많이 피고 있다. 나의 조카인 장미도 꽃밭의 장미에게 못지않게 아름다운 정서를 가져서 가끔 고은 동요를 곧 그려내었다.
과연 요즈음에 오는 비는 초록색 비인지라 한 번씩 오고 나면 창밖에 녹색이 짙어져 간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재리 ─ 하여지며 장미꽃과 푸른 들판이 들려 있는 고향집을 그리어 어린 가슴에 눈물짓는 귀여운 그 얼굴이 무척 무척 간절하였다.
이 해 첫봄에도 조카가 서울서 시험을 치르고 들려왔을 때 나는 그를 데리고 들판으로 걸어 다니며 그에게 순박스런 정서를 길러주고 즐거운 추억이 됨직이 냉이 나물을 캐며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놀았었다.
그가 상경한 후에 나는 그의 어린 얼굴이 간절히 보고 싶어 들판으로 헤매며 ‘덕’을 즐기는 그를 위하여 ‘쑥’을 캐었다.
지금은 거의 큰 바구니로 하나 가득하여 이것을 정하게 말려 두었다가 여름 방학이 돌아오면 맛있는 쑥떡을 만들어 주려 한다.
그리고 채전(菜田)밭에 심어둔 여름에 먹는 옥수수도 자주자주 물을 준다. 이제 겨우 두세 치씩 잎사귀가 터져 올랐을 뿐이나 이것이 얼른 커서 옥수수가 열게 되면 장미가 그리워하는 이 집으로 돌아올 때이다. 나는 달과 날이 얼른 가주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옥수수가 얼른 커지기만 고대하며 자박자박 물을 주며 들여다본다.
이 옥수수가 더디 크면 그만치 우리 장미도 더디 올 것만 같아서 ─
나는 이제 벌써 장미를 위하여 그가 즐기는 쑥떡 만들 준비와 옥수수, 참외, 수박 등이 얼른 커지고 열매를 맺도록 자박자박 물을 주고 있다. 씨를 뿌리고 비료를 넣고 물을 주고 하는 이 동안 나는 이 열매들을 먹을 때의 가지각색 재미스럽고 즐거울 온갖 일을 상상하며 혼자 웃고 혼자 그리워 눈물짓기도 한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푸른 그늘을 지어주는 창 앞에다 재봉침 갖다 놓고 여름에 그에게 잘 어울리는 간단복을 지으려 한다. 벌써부터 옷감의 색깔과 무늬와 ‘스타일’ 등을 그려보며 이 옷을 입은 때의 그의 귀여운 온갖 동작과 표정들을 눈앞 가득 환상한다. 이러한 때는 내일 곧 장미가 돌아오는 듯한 착각도 가끔 일으킨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꺼림한 것이 있다. 동리 초동(樵童)들이 나무집 위에다 우리 집 창을 열면 안개를 점령하는 저 ─ 뒷산에서 진달래꽃을 꺾어 얹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맘에 걸리는 것이 있다. 장미가 벌써 몇 해 전부터 뒷산에 진달래 구경 가자고 집안에서 제일 만만한 나에게 조르고 조르는 것을 온갖 핑계로 가 주지 않았더니 올봄에 상경하며
"아주머니두 이제는 진달래 구경 영 틀렸지.“
하며 실망하였다. 나는 저으기 마음에 후회되어 금 년은 몇 번이나 갈 기회가 있어도 가지 않고 그가 졸업하는 해 봄에나! 하고 넘겨버렸다. 올해도 진달래는 벌써 다 ─ 떨어졌다. 나는 그와 함께 진달래꽃 구경 갈 때를 어느 때까지라도 기다려 나 혼자 가지 않으려 한다. 마음에 걸리면서도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기는 한다. 이것도 모 ─ 든 것은 기다리고 바라던 때가 가장 즐겁다는 것 중에 하나로 하여둘까.
─《조광》(1937. 6).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