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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기 유물이 대체로 옛 백제시대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해요~
특히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은 사비시대 백제 화장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됐는가 하면, 그 뒤처리용 나무막대도 여러 점이 출토돼 화장실 고고학의 총아로 떠올랐죠.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공동 화장실 구조물인 왕궁리 유적 화장실 유구는 좁은 수로를 통해 석축배수로와 연결되어 있어 화장실 내부의 오수가 일정하게 차게 되면 수로로 배출되는 정화조와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해요.
화장실 내부의 하층인 유기질층에서는 화장실임을 알려주는 기생충과 뒤처리용 나무막대가 확인되었구요.
왕궁리 유적 발굴터 왕궁리 유적 전시관
왕궁리 유적 화장실 유구
뒤처리용 나무막대
‘화장실 고고학’은 화장실 터의 토양분석으로 고대인의 배설물을 조사하여 그 결과로 당대인들의 건강 상태와 식생활 환경 등을 추정할 수 있는데요.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궁리에서 발굴된 기생충 알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 채소를 섭취할 때 감염되는 회충과 편충의 알인 것을 확인하고 백제인은 고기보다 주로 채소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어요~^^
연구소쪽은 왕궁리 변소터가 구덩이 위에 나무 판재로 배변 발판을 대고 그 위에 풀과 기와로 지붕을 올린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일본 고대 도성의 분뇨처리 구덩이론’을 발표한 일본 나라 문화재연구소의 이노우에 가즈히토 부장은 “왕궁리 변소 유적은 지금껏 발굴된 고대 한일 유적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수세식 변소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분석을 내놨어요~!
1400년전 백제인들은 수세식 변소를 사용할 정도로 뛰어난 생활수준을 가졌던 것 같아요~
백제인들의 뛰어난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휴대용 변기'에요. 남자용과 여자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찌나 신체적 구조에 알맞게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었는지 사뭇 흥미로와요~^^
여성용 변기
남성용 변기
변기 모양을 자세히 잘 보면 여성용은 큰 대야의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모양을 잘 보면 현대의 좌변기 모습과 흡사하고,
남성용 변기는 예쁜 동물이 재미있게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이 변기들은 외출을 나갔을 때 급한 용무를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토기 용구로 주로 소변용이라 할 수 있죠~!
◇신라변소
아래 사진에 보이는 돌들은 대변소(大便所) 위에 걸쳐놓은 바닥돌이에요.
판석의 크기를 보면 한사람이 들어가기에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크기이며 파낸 홈의 크기도 적당하고 쪼그리고 앉았을 때 두 발이 놓여지는 위치도 적당한 것 같아요.
2개의 돌을 대칭이 되게 파낸 뒤 맞붙혀 놓은 형태로 되어 있어요.
발이 놓이는 옆으로 돌을 ㄴ자로 파내어 각을 지어 놓았는데 칸막이용 나무를 세워놓기 위함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면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많이 쓴 신라인들의 석공기술이 놀랍죠?^^
변기돌은 한 개의 돌에 알맞은 크기의 구멍을 뚫은 것도 있고 두 개의 돌을 사용하여 반쪽씩 파내 붙여둔 것도 있는데요.
이것은 한개의 통돌로 만들어진 것인데 다른 변기돌과 달리 사방의 모서리를 세우고 바닥은 약간 안쪽으로 비스듬히 각을 지어 깎아 놓았어요.
아래 사진은 소변기(小便器)에요.
네모난 통돌 중앙에 소변이 튀지 않게 깊게 타원형의 홈을 파고 홈의 아랫부분 바닥에는 소변이 빠져나가게 돌의 아래쪽까지 구멍을 뚫어 놓았어요.
밑 바닥은 소변이 잘 빠지도록 약간 비스듬하게 경사를 지어 파놓았구요.
여러 가지 변기돌들의 모습을 보니 새삼 신라 석공들의 신묘한 손기술이 느껴지네요~
중세 유럽에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서 길거리에 오물이 흘러넘친 것과 대조적으로
백제, 신라인들의 화장실 문화를 보니 굉장히 자랑스럽네요~ 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물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깝기도 하구요.
출처: 욕실문화선도기업
로얄&컴퍼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