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39
1월18일[연중 제2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hCxT4K7IcA
[서울대교구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국내수학)]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특별한 관계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가질 것 다 소유한 사울 왕에게 다윗은 가장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항상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했습니다. 왕으로서 손뼉을 쳐주고 상을 줘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큰 사람으로서의 넉넉함이 부족했습니다. 대신 그의 내면에는 뭐든 잘하는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도 반성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 더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배로서, 책임자로서 형제들의 일취월장과 장점에 대해 내 일처럼 기뻐해 주고, 손뼉을 쳐주고 있는가?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지지해주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무엘기는 사울과 다윗 사이가 갈라지는데 실마리가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아직 볼이 빨갛던 양치기 소년 다윗이 어느 날 보기만 봐도 겁에 질리는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골리앗 장군과의 일대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게임도 길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방의 돌팔매로 속전속결로 게임을 끝내버렸습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풍전등화 신세였던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개선 길에 올랐습니다.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왕이 다윗과 함께 돌아오자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지르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랫말 한 구절이 사울왕의 폐부 깊은 곳을 찔러버렸습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 사무엘 18,7) 사울은 그 노랫말 한 구절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했습니다. 순식간에 기분이 잡쳤으며 시기·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제대로 한번 빡친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고 인자하던 사울의 마음은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수시로 솟아오르는 시기·질투심을 그때그때, 틈나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야겠습니다. 누가 잘되면 시기·질투하지 말고, 마치 내 일처럼 크게 기뻐해 줘야겠습니다. 특별히 후배들, 젊은 세대가 떠오르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큰마음으로 넘겨주고 내려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마음 정화(淨化)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찬 미워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시기·질투심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같은 경우 수도 공동체 내 동료 자매들로부터 엄청난 시기·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시기·질투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상냥히 대했습니다. 더 기쁘게 냉대를 열심히 참아냈습니다.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동료 자매를 더 깊이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락 시간이면 일부러 가장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자매 곁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0u8PcN5nlE
++++++++++++++++++
<휘둘리는 사람이 휘두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나 악령에게 절대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얻으려고 그분 옷에 손을 대려 하자 예수님은 배에 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악령들도 그분만 보면 달려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악령 들린 칭찬은 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허락 없이는 칭찬도 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이유로 에덴동산에 선악과도 있었고 뱀도 있었습니다. 저절로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들이었습니다. 뱀은 특별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 3,1) 뱀은 타락한 천사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어떤 연유로 인간이 유혹받음을 가능하게 하도록 창조하신 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치 뱀을 밟은 성모님처럼 뱀의 유혹을 하찮게 여겼어야 합니다. 어쨌건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에게도 당신을 배신할 자유를 주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게도 휘둘리지 않으셨기에 사람들을 마구 휘두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야말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성경에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려 그 일을 합니다. 그런 헤로데와 같이 우유부단한 사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독재자가 됩니다.
차르 니콜라스 2세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입니다. 그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폭군이었습니다. 그의 제관식 때 3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압사당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도 유명합니다. 노동자와 그 가족을 포함한 평화로운 시위자들은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했습니다.
시위자들은 더 나은 근무 조건, 더 많은 개인의 자유, 선출된 국회의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황실 근위대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천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러일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는데 많은 군인이 죽는 것 외에는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폭군은 정말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라는 정교회 수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라가 낳은 유일한 아들이 혈루병을 앓자 신비주의에 빠진 아내가 폭력적이고 음란한 라스푸틴을 소개합니다.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도는데도 아들을 살리자는 희망으로 그들의 모든 뜻에 복종합니다.
그렇게 러시아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라스푸틴은 물론이요 티콜라스 2세와 일가족은 모두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언가 잃을 것이 있으니 휘둘립니다. 잃을 게 없는 이만 자유롭고 자유로운 이만 자유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이는 자기 자유도 잃고 타인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아내와 아들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고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목숨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히려 타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귀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휘두르려 할 때도 ‘노’(No!) 하며 모든 결정을 자기 자유의지로 하는 사람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이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심성을 ‘시기’라고 말합니다.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예뻐했는데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자 둘째 며느리를 더 예뻐할 때 시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맏며느리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질투’라고 말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시기와 질투를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시기는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질투는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명언들이 있습니다. “시기는 증오보다 더욱 비타협적이다. 시기심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을 때 멈춘다. 우리들의 불행을 마음속 깊이 애통해 주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지만, 우리들의 성공을 마음속 깊이 시기하는 사람은 몇 천 명이나 있다. 녹이 쇠를 좀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질투는 휴일이 없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아담이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카인이 ‘시기와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는 공동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힘이 강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이민족의 침입을 잘 막았는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이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은 아버지에게 다윗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사울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옮겨 다녔는데 한 번도 강남으로 간 적이 없었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모두 강북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되어서 간 곳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성성당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대부분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사제생활을 했는데 저는 강남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강북에만 있었습니다. 강남에서는 지내지 못했지만 미국 뉴욕에서 5년째 지내고 있으니 저는 뉴욕스타일이 맞나 봅니다. 시기와 질투보다 약한 것이 ‘부러움’인데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도 애교로 봐 주실 것 같습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쥔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 명예와 권력, 자존심과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7-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같은 고백이지만, 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수많은 사람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더러운 영들의 고백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게 하여 주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처음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모두 지켜본 백인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15,39) 예수님의 진짜 모습이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기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드러나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더러운 영들의 고백에는 십자가가 빠져 있습니다. 기적만 있을 뿐입니다. 악은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로 향하지 않게 만듭니다. 십자가 없이 기적만 바라보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게 하고,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언제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좋아하고 편한 방법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교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합니다.
고통 앞에서,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 진짜와 가짜가 명확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탄의 우정이 진짜라는 것도 죽을 위협 앞에서 드러나게 된 것처럼(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진짜임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내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주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위한 진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거리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7-8)
동서남북 사방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온 일은, 앞의 1장 45절의 상황에 연결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5)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단단히’ 이르셨는데(마르 1,43-44), 그것은 ‘몸의 치유’에 관해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고 소문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다 잘 고치시는 분”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동서남북 사방에서 몰려온 ‘큰 무리’는 그 소문을 듣고서 ‘몸의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큰 무리’가 몰려온 일을,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이 ‘성공적’이었음을 나타내는 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나타난 것에 대한 일시적인 열광과 흥분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9-10)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말씀’을 전하는 일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입니다. (군중은 호숫가에 서 있고, 예수님은 배를 설교단으로 삼아서 배 위에서 설교를 하시는 상황입니다.)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라는 말과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이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마르 5,28; 마르 6,56)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과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간청하지는 않고, 예수님의 몸이나 옷을 만지려고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몸이나 옷을 만져서 병을 고치기만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치유의 은총은 예수님의 옷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행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지, 예수님의 몸이나 옷이 병을 고쳐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사도 19,11-12)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예수님)입니다. 바오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가 사용했던 수건과 앞치마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그의 수건이나 앞치마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룻배를 이용하신 일은, ‘군중을 밀어내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뒤로 물러나신 일이고, 그것은 일종의 ‘거리두기’입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당신 사이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당신이 주시는 것 사이의 거리두기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받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그것만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 거리는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받지 않고, 몸의 치유만 달라고 고집을 부리면,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좀 더 잘 전해 주려고 거리두기를 실행하신 일은,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치유는 나중에’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서로 밀쳐 대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한 사람들은, ‘치유를 먼저, 말씀은 나중에’라고 요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급한 일부터 먼저 하는 것이 맞다. 그러니 치유가 먼저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급한지 판단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목숨이 위독한 응급환자라면 예수님도 병자 치유를 먼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응급상황이 아닙니다.)
‘말씀 먼저, 치유는 나중에’라고 예수님께서 판단하신 것은, 말씀을 전해 주는 일이 더 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마치신 다음에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1-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마귀들의 말은 겉으로는 ‘진리’로 보이지만, 이 말을 마귀가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우리가(신앙인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하느님이신) 분”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일 뿐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겉으로는 똑같은 말인데,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 것은, ‘진리’를 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항상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마귀에게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자격과 권한이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시기심과 질투심은 인간의 마음을 옹졸하게 만들고, 사리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병입니다.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이겨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준 다윗의 치적과 비교당한 사울의 마음에는,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인물로만 보입니다.
시기심에 눈이 어두워져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다행히 그의 아들 요나탄의 설득에 마음을 돌리지만 한번 생긴 마음의 병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수많은 군중이 먼 지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병들고 지쳤으며 가난하고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오직 예수님의 치유만을 원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알아본 것은 역설적으로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쁨과 치유의 하느님이 아닌,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주변에서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본받고 싶어 하지만, ‘더러운 영’이 슬그머니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상대방을 헐뜯고 폄하하려는 교만이 생깁니다.
세계 교회는 오늘부터 25일까지 역사 안에서 가톨릭교회와 갈라진 형제들, 곧 정교회와 개신교인들과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보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하나의 세례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과거 역사의 상처로 생긴 오해와 편견의 벽을 허물고 복음의 기쁨 속에서 “하나가 되기를”(요한 17,21 참조) 기도합니다.
비록 종교 개혁이라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고 되새기는 법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일치시키는 것이 훨씬 크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고백하여도 “조용히 하여라.” 하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왠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살갑게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거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어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영광과 기쁨 가득한 자리를 꿈꾸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몸과 현실적 축복을 갈망하였던 군중은 십자가와 하느님의 아드님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군중과의 ‘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내던지는 우리 욕망의 투사만큼 깊고 먼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지향점은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모든 이와 함께 사랑을 이루는 데 쓰여야 합니다.(코린토1서 1장-2장 / 13장 참조)
제 이익과 신념만을 위한 기도라면, 그냥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침묵하기를 바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려는데, 우리는 십자가는커녕 제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도구로 삼는다면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기도를 하기 전에 침묵을 배웠으면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3,8)
여러 사정으로 지금의 한국 영화 산업은 많이 침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23년까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14편인데, 그중에서 1등은 단연코 ‘명량’이지만, 1,600만 관객을 동원한 ‘극한직업’에서,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라는 멘트가 한때 장안에 화제가 되었으며, 전국에 수원왕갈비 통닭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런 인기 비결은 한마디로 ‘입소문’을 탔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1,000만 관객 정말 대단한 숫자입니다. 관람할 수 있는 국민 중에서 거의 국민의 25% 넘게 보았다는 것은 영화 자체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입소문의 힘이 컸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여기 지방에서 몰려왔다고 전합니다. 몰려온 군중들은 7개 지방에서 왔는데, 이는 사방팔방에서 온 사람들이며 달리 말하면 온 세상의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물밀듯이 몰려왔을까요? 복음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3,8)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란 바로 ‘잡혀 있고, 눈멀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풀어주고 눈뜨게 하고 해방하신 일’(루4,18 참조) 곧 사람을 살리시는 일(=구원/속량)을 보고 예수님을 향해 몰려든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과 그 현존에서 드러난 놀라운 업적과 자비로운 사랑을 듣고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고, 자기 삶의 고통과 힘듦에서 치유 받고 싶어서 몰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그 활동을 통해서 이미 사람들 마음에 새로운 불을, 희망의 불을 지피시기 시작한 것이며, 이는 곧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생전에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 집 없음에서 오는 고통, 모든 질병에서 오는 고통, 그러나 이런 고통들은 물리적인 것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 옆에 아무도 없다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외받고 버림받았던 사람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셨던 분이셨기에 수녀님의 말씀엔 진정성과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시대는 물론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체험했고 지금도 체험하고 있는 가장 힘들고 몹쓸 병은 존재하고 있음에도 마치 없는 존재처럼 취급하고, 버려지고 잊혀진 채, 결국 외롭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양한 질병의 치유와 구마 활동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외롭게 자신 홀로 삶의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가면서도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빛을 찾을 수 있었기에 그토록 먼 곳에서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것이라 봅니다.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 당대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정치-경제-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너무도 어렵고 힘겨운 삶을 대다수 사람은 살아야 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이것이 숙명이려니 체념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의 복음은 새로운 꿈,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환기喚起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메시아 시대의 표징인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악령에 시달리고” (루7,22) 율법과 안식일 법으로 짓눌린 이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음으로, 새로운 희망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하늘나라를 향하여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의 각기 다른 요구에 시달리던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11)라고 더러운 영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더러운 영들의 등장을 통해서 복음사가는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 한 것일까요? 아마도 복음사가의 의도는 사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에 더러운 영들마저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복종한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그분에게는 모든 일이 다 가능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저희에게 보여 준 모습은, 우리 시대에 교회가 수행해야 할 역할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가지 육신적 혹 정신적, 영적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물론,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외로움과 소외된 삶의 무게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머물 수 있는 교회가,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예수님은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디 1,10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초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미국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성공을 바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행 배 승선권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 드디어 승선권을 사고서 배에 오른 그는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더는 쓸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아끼려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남긴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 조각을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식당 지배인이 그가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그렇게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승선권에 식당 이용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이 청년은 배에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굳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고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 주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님과 온전하게 함께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축복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은 큰 은총과 주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보여주셨던 사랑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병자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것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역시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이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
마르코 3,7-12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참사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8)
참사람을 모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이 모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따르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따르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을 품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이 품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믿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믿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바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바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사랑하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사랑하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을 살리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이 살리니 참사람일세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염불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꿀과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2) 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 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부하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모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만세!”>
-오늘 지금 여기 지상(地上)에서 천국(天國)을 삽시다-
여러 단상으로 오늘의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원의 식사는 대부분 침묵중에 말씀을 들으며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은 거룩한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깁니다. 수도규칙 독서 중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다음 구절입니다.
“모든 이는 모든 일에 있어 규칙을 스승처럼 따를 것이며, 아무도 이것을 경솔하게 위반하지 말 것이다. 아무도 수도원 안에서 사사로운 마음의 뜻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성규 3,7-8)
규칙을 스승처럼 따르라는 말씀이 참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사랑의 규칙이요 규칙중의 규칙이, 영원히 살아 있는 규칙이, 우리 모두의 중심이신 주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규칙의 준수를 통해 사랑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두 성인의 말씀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현재의 교회는 미래의 교회가 생겨나기 전까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 것이며, 의로운 이들은 그 안에서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초기 교회는 영원한 본향을 늘 목말라하며 절제된 삶을 살아갔으며, 마음을 흩어놓는 온갖 세속적인 것들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내밀하게 하느님의 법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시기를 기억하여 우리도 우리의 집을 떠나, 다시 말해 세상의 관심사들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천막에 살아야 합니다.”-존자 베다
일상의 내 삶의 꽃자리에서 평범한 성인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날로 거칠고 험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성인의 삶입니다. 2024년 2월호 생활성서의 특집은 “옆집의 성인들”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을 거룩하게 여기며 이웃의 아픔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우리 가까이 사는 옆집 성인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몇 해 전 누구나 옆집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교황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 행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성화되십시오.”
“성인이 되십시오.”
성인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성인이 되는 것이 더 빠를 것이요 지혜로운 대책이 될 것입니다. 성인 중의 성인이, 성인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바, 예수님입니다. 어제 미사 시 입당성가 61장도 새로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는 없네. 이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어제 오랜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공식 집무를 시작한 어느 정치인의 환한 얼굴로 수없이 고백했던 “새롭다”란 소박한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인들의 삶이라면 날로 새로워져 늘 새하늘과 새땅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즐겨 늘 자주 고백하는 고백기도중 일부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중 우리가 모시는 분과 똑같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온 힘을 다한 사목현장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군중이 호숫가 예수님께 모여드니 새삼 세상 모두의 중심이 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이 부재한 인류요 세상이라면 그 어둠은 얼마나 짙겠는지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길을 잃어,
방향을 잃어,
목표를 잃어,
빛을 잃어,
희망을 잃어,
중심을 잃어,
진리를 잃어,
생명을 잃어
무지와 죄악의 어둠중에 병들어 망가지고 무너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똑같은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길을 찾는, 방향을 찾는, 목표를 찾는, 희망을 찾는, 중심을 찾는, 진리를 찾는, 빛을 찾는 영혼의 근본적 욕구요, 이를 일거에 충족시켜 주실 분은 단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은 그분을 만나 치유를 받았고,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만 보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달아납니다. 인기의 절정에 있지만 예수님은 이를 지극히 경계하십니다.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 때문이며, 군중들이 미몽에서 깨어나 참된 메시아이신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없는 메시아가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을 신신당부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고백이 진짜가 아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입증됩니다. 감동적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마르16,39)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감동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고군분투하는 다윗의 삶도 인상적입니다. 충천하는 인기와 더불어 사울의 정적으로 부각되니 그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흡사 복음의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
사울은 강력한 라이벌로 부각한 다윗에게 쫓기는 기분이었을 것이며 그의 시기와 질투도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최선을 다한 다윗 곁에는 하느님이 예비하신 사울의 아들 요나단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길이 회자되는 요나단과 다윗의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적대자들의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중에도 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예수님과 다윗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평생 고난과 시련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아가신 두 분 예수님과 다윗과 모든 성인들이 우리 삶의 귀감이 됩니다. 온실속의 화초같은 삶을, 평탄한 꽃길같은 삶을 살았던 성인은 결코 없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다시 한 번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고 거칠고 험한 광야(廣野) 지상 삶중에도 주님과 함께 천국(天國)을 사시기 바랍니다. 바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 마지막 두연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여기 주님의 집 교회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주님의 가정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형제들과 더불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바다로>
내가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사람들이 내게 오지 않고 하느님께 몰려가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하는 거라고 칭찬하고 여전히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업적을 숨기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업적을 소문내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겁니까? 꼭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심이 주님께서 겸손 떠시거나 당신을 더 높이시려는 인기 전술이거나 괜히 그러시는 것이 아니고 진심이라면 사람들의 사랑을 아버지께 돌리기 위해 당신께는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사랑을 숨기는 이유는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께만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을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정이 들었지만 좁은 고향을 떠나야 하고, 더 큰 스승을 만나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넘겨야 하며, 자식이 평생의 짝을 만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날 수 있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만일 아들을 너무 사랑하여 마마보이가 되게 하고,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겠지요?
만일 이렇게 한다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며 결국 참사랑이 아니라 욕심이요 애욕이겠지요.
이런 애욕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도 불행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랑 안에 가둘 뿐 아니라 자기도 그 사랑에 갇히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랑만큼 지옥도 없습니다.
옛날 노래에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수 없네’라는 노래가 있는데 애욕이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또 다른 사랑 욕심에 관한 얘기입니다. 여인들의 사랑이 자기한테서 다윗에게로 향하자 사울이 시기 질투하는 얘기입니다.
어른이고 왕인 자기가 그 어린애를 두고 시기 질투하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그 마음은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감정이 오죽 복잡하고 지독하면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하겠습니까?
요즘 데이트 폭력이니 스토킹이니 하는 말이 무성하고, 그런 사랑에서 비롯된 살인이 빈번한 것이 다 이런 사랑의 현상입니다. 애욕이란 시기 질투하게 하고 가질 수 없으면 죽여 없애버리게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이 다 넓은 사랑의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마치 사랑이 수족관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면 인간의 하찮은 사랑에 매이지도 갇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두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너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도록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가두지 말 것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1)
<함구령!>
오늘 복음(마르3,7-12)은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을 때, 여러 지방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아보지 못하는데, 놀랍게도 악령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더러운 영이 고백한 예수님의 신원이 널리 알려져야만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아직 이때, 곧 십자가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고통과 기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부활'은 죽음 그 너머에 있고, '참기쁨'은 고통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믿는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고통 없는 기쁨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HZqVxdX2Ws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 12)
예수님께
침묵의 주파수를
고정합니다.
예수님을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 수 있도록
우리자신을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해답처럼
가장 정확한
고백이
가장 멀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자신에게
진실한 마음이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여태껏
예수님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가까워지려는
믿음의 마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삶의
구원자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할
우리들의 진실한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이어진
사랑을 받으면서도
수천번 수만번
마음을 바꾸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자신을
보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첫시작입니다.
입을 다물면
더 깊어지는
우리들
내면입니다.
사납고 독한
우리의 혀를
다스리는 것이
모든 치유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참된 변화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뜨거운
이 여정은
가장 좋은
침묵의
여정입니다.
고요한 침묵을
모르는
우리들을
측은히
바라보십니다.
고요한 침묵은
순서를 앞지르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할
목숨보다
소중한 이 여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우리의
날카롭고
사납고 독한
혀를 봉헌합니다.
사랑 속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다른 사람의
침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침묵이 오늘을
이끕니다.
빈말이 아닌
침묵이
가장 진실한
고백이 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