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개[편집]
2.1. 4월 14일, 역부족의 제승방략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관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이상징후를 느끼고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를 했다.
성 주변에 나무가 많으면 공격 측 입장에서 기병 운용이 힘들며 대규모 공격과 성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를 비롯한 공성 무기의 사용,
그리고 진열의 정비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던 탓에 이런 준비들은 생각보다 효과가 적었다.
송상현은 성벽 위에도 목책을 쌓았으며
일본군 역시 조선군의 활 공격 때문에 생기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1592년 4월 13~14일, 부산진 전투와 다대포진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했다.
그동안 동래부사 송상현은 긴급히 주변 일대의 병력을 불러모았다.
2.2. 4월 15일 오전, 죽음을 각오한 필담
1592년 4월 15일 오전 10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동래성에 도착했다.
한 부대는 동래성 동쪽 황령산 기슭에, 한 부대는 동래성 서쪽에, 한 부대는 동래성 남쪽에, 3면 포위하였다.
전투에 앞서 양측 지휘관은 필담을 주고받았다.
고니시는 동래성 앞에 이런 내용이 담긴 나무편을 내보였다.
이에 송상현은 다음과 같이 쓴 팻말을 밖으로 던졌다.
이를 본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동래성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병사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래성 동문(인생문)을 집중 공격해서 결국 돌파하고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밀양부사 박진, 경주판관 박의장이 뒤늦게나마 근처까지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동래성이 포위되어서 합류하지 못했다.
2.3. 4월 15일 오후, 성이 함락되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동문으로 들이닥치는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이후 송상현은 다시 무장하고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이름의 일본인이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영규도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동래 백성인 김상은과 그의 처와 딸이 기와를 깨뜨려주면 이를 던져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송상현의 소실 금섬은 송상현이 관복을 가지고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나가자
담을 넘어서 까지 그를 따라 갔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고
사흘간 일본군을 꾸짖으며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으며
또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끝내 절개를 지켰다.
송상현과 함께 싸운 관군인 송봉수, 김희수, 향리인 대송백, 소송백, 관노인 철수, 매동 중에서 김희수, 대송백은 전사했으며
이 전투에서 송상현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은 신여로, 김섬, 노개방, 문덕겸 등이 있다.
이 때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각지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한 경우도 있었으며
훗날 임명된 선무 원종 공신 중에서 이 지역 출신인 인물이 66명이 되었다.
이들 중 뛰어난 24명을 선정한 명단으로 별전 공신 또는 24 공신이라고 했는데
김정서, 정승헌, 문세휘, 정순, 김일개, 김일덕, 송창문, 김근우, 강개련, 김흘, 이언홍, 김대의, 오홍, 박인수, 김달, 송남생,
김기, 황보상, 이응필, 송계남, 이복, 오춘수, 김복, 송의남, 철수, 만동 등이 있다.
2.4. 4월 15일 저녁, 군민이 학살되다
일본군 장군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미는 있는 결말인 것 같지만...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와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일본군의 이런 습성은 직전의 전국시대로부터 이어진 것인데 당시 일본의 공성전에선 전투 개시 전에 항복하면
성주 이하 전원의 생명을 살려주고
전투 중에 항복하면 성주 및 가신 급만 처형했으며
끝까지 저항하면 성주와 가신들, 병사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가망이 없는 상황이면 끝까지 저항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물론 자기들끼리 싸우는 내전과 국가간 전쟁은 차원이 다르다.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없던 을묘왜변 당시 항복한 병마절도사와 군사들,
백성들이 학살 당한지라 조선인들이 더 처절히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17년 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라는
시에서 전투 당일이던 4월 15일 새벽만 되면 집집마다 곡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하였다.
동래 주민 중 생존자는 천 명 중 한두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전해주는 기록은 숱하게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