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입항
〈미항(美港)의 새벽〉
I. 수평선 위의 이정표 — 경계와 희망의 빛
수평선 너머의 빛,
새벽 네 시.
닻보다 먼저 울리는 도선사의 발소리.
오랜 항해에 지친 젊은 항해사는 잠을 접고
선창에 기대어 있었다.
창유리에 맺힌 소금 자국은 밤의 기억처럼 반짝였고,
수평선은 어둠 너머에서 길게 숨을 쉬었다.
섬도, 등대도 없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그 선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날들.
그 선 위의 작은 흔들림은 경계이자 희망이었다.
그날 새벽,
그 흔들림은 빛으로 다가왔다.
먼 곳의 희미한 기운이 색을 띠며 떠오르고,
어둠 속에서 마천루의 실루엣들이 하나둘 솟아났다.
“여기, 또 다른 세계가 있다.”
1970년대,
시골 골목과 가까운 하늘을 기억하던 시선은
이제 수평선 너머로 하늘을 찌르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 대비는 내면에서 불꽃처럼 번졌고,
부러움은 곧 경외로 바뀌었다.
바다는 조용히 도시를 향해 다가왔다.
그 빛은 단순한 유리나 대리석의 반짝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자부심,
전쟁과 흉년을 견디며 일어선
사람들의 의지의 반사였다.
그 풍경은 현실과 꿈의 문턱처럼 서 있었다.
II. 의지의 증명 — 금문교와 알카트라즈
수평선 너머로 드러난 금문교—
붉은 선이 대지를 가르고 하늘을 잇는다.
백 년을 내다본 손길이 그 다리를 세웠다는 말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믿음의 무게였다.
다리 아래로 들어가는 거대한 선박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손님처럼 차분히 움직였고,
그 모습은 마치 이 도시가 바다를 위해 준비한 환대 같았다.
좌현으로 흘러드는 알카트라즈—
거센 조류에 둘러싸인 고립의 섬,
그 위의 묵직한 건물은 침묵으로 말하는 증인 같았다.
섬을 왼편에 두고 항로를 틀자,
도시의 윤곽은 한층 확장되어 솟아올랐다.
콘크리트의 무거운 얼굴을 가진 도시들과 달리,
이곳의 건물들은 빛으로 포장된 보석 같았다.
도시가 말없이 선언했다—
“여기가, 미국이다.”
그 선언은 전시의 함성도,
교훈의 장광설도 아니었다.
도시가 자기 자신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 위엄 앞에서 작아진 존재는
오히려 마음의 여백을 넓혔다.
III. 부의 노래 — 결핍에서 풍요로
그 빛을 보는 일은 마음의 등불을 켜는 일이었고,
전쟁과 굶주림 속에서도
앞만 보고 달려온 역사의 흔적을 떠올리게 했다.
부러움은 경외로,
경외는 가장 순수한 감사로 바뀌었다.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 찬란함이 진정으로 노래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무엇이 부(富)인가?
황금인가, 명예인가, 아니면 저 마천루인가?
나는 오랜 항로를 걸으며 깨달았으리라.
진정한 부란 갖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임을.
가득 찬 창고보다,
비워진 마음의 평화가 더 넉넉하고,
거대한 저택보다,
깊은 밤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 줄기 신념이 더 크다.
부의 첫걸음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었다.
세상은 끝없이 채우라 하지만,
영혼은 속삭인다.
“너의 손이 가득할수록,
너의 마음은 빈다.”
나는 손을 펼친다.
욕망의 조각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비워진 손바닥 위로,
새로운 바람이 지난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공간’을 느낀다—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
기적이 스며들 자리.
주는 자가 곧 가장 풍요로운 자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이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IV 마음의 왕국 — 충족의 좌표
나의 진정한 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 쌓여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한 희생,
세상에 알리지 않은 선의,
홀로 흘린 눈물 속의 다짐—
그 모든 것이 나의 보물이다.
내가 쌓은 부는 금전이 아니라,
시간이 닳아도 닳지 않는 ‘의미의 결정체’였다.
한마디 진심,
한 번의 용서,
한 줄의 감사.
그대의 영혼에 새겨진 그 모든 순간이
그대의 마음의 금고를 채운다.
진정한 부는 충족에서 비롯된다.
더 바라지 않아도 행복한 마음,
더 얻지 않아도 감사한 순간.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작은 빛 하나에도 미소 짓는다면—
그대는 이미 부자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그 한마디가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선언이 된다.
그때 비로소 나의 삶은 결핍의 싸움이 아닌,
풍요의 노래가 된다.
샌프란시스코—
이 항구는 ‘미항(美港)’이라는 이름을 넘어
삶에 또 하나의 좌표를 찍었다.
그 좌표는 단순한 지도의 점이 아니라,
오랜 항로 위에 새겨진 이정표,
앞으로 걸어갈 침로를 비추는 불빛이었다.
V. 역사의 그림자와 새벽의 후광
샌프란시스코의 불빛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
내 마음은 단순한 항해자의 감동을 넘어,
한 나라의 기억을 껴안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
무너진 집과 굶주린 아이들,
그 속에서 어렵게 자라던 나의 세대는
늘 결핍과 싸워야 했다.
빵 한 조각,
연탄 한 장,
교과서한권이
곧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와 도움으로
조금씩 경제가 살아나던 무렵,
우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을 통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바닷가에 솟은 빌딩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31층 건물이 세워졌을 때조차,
그것을 보며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에게,
바다 너머로 다가오는 샌프란시스코의 후광은
단순한 도시의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인간의 의지,
그리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좌표였다.
마천루들이 하늘을 찌르며 솟아오르는 모습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우리 민족의 꿈과 겹쳐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부러움은 단순한 열등감이 아니라,
경외와 감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샌프란시스코의 빛은 나에게
“너희도 할 수 있다”는 속삭임이었다.
그것은 물리적 건축물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세운 기념비였다.
VI. 영원한 출항
샌프란시스코의새벽은
내게 단순한 항구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가난과 결핍 속에서 꿈을 키워온
한 세대의 눈에 비친 새로운 세계의 약속이었다.
황금은 녹슬고 이름은 사라지지만,
그날 본 빛은 내 마음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미국의 도시가 아니라,
인류가 서로 돕고 일어서며 만들어낸
희망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새벽을 떠올린다.
선창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손의 온기,
알카트라즈의 고요,
금문교의 당당함,
그리고 멀리서 다가오던 마천루의 후광.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쌓여,
한 사람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빛나게 한다.
젊은 항해사에게 건넬 말이 있다면—
그 빛을 보라.
그것은 단순한 도시의 불빛이 아니라,
역사의 어둠을 뚫고 나온
인간의 의지와 희망의 왕국이다.
물리적 거리 너머에 놓인,
마음의 왕국을 보라.
그곳에서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부자였고,
이미 충분히 자유로웠다.
첫댓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2월에도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謙虛님께서도 언제나 건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