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소금쟁이의 연애 / 손택수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이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단풍나무 빤쓰 / 손택수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자기라는 말에 종신 보험을 들다 / 손택수
자기라는 말,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때고 꽃잎에 이슬이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을 들기로 한다 자기,사랑에 빠진 말 속에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장생포 우체국 / 손택수
지난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 사이는 고작 몇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아귀힘을 절반쯤 따라간 편지 물에 올랐던 파도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ㅡ 뱃고동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홍어 / 손택수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소가죽북 / 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아내라는 이름은 천리향 / 손택수
시골버스 /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목련 전차 /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있던 동업자
이 골목에 부쩍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감꽃 / 손택수
1 감꽃 핀다, 어디선가 소식 없는 사람들 편지라도 한 장 날아들 것 같다.
2 감나무 아래 들이 잠에 들고 깊다
- 2000년 제2회 수주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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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과연 우리 몸 어딘가에는 지금도, 과거의 몸들이 지녔던, 우주와의
교신용 안테나가 남아있을까. 그래서 무슨 별들이 어떻게 서면
"흙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날" 임을 알아 파종하고, 구름의 신음
소리에 사지가 감응해 "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구름의 가계'는 아직 멸문(滅門)하지 않고 남아 가녀린
그 혈통을 이어가고 있을까.
"별이 지상에 내리는 걸 저어하지 않도록/ 일찌감치 저녁상
을 물리고/ 잠자리에 드는 마을"('별빛보호지구')들은 자본의
빛에 쫓겨 하릴없이 사라지는 중인데.
손택수(36)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 발행)에는, 이미
낯설어진 '오래된 미래'의 풍경들이 시종 없이 등장한다.
문풍지 도배, 제비 부부 신접살림, 메주 곰팡이, 아기 업고 밭 매는
등 굽은 아낙…. 물론 그것들은, 책갈피 속 지난 계절의 꽃잎처럼,
이 젊은 시인의 기억 어느 대목에서 불거진 것들이다.
그는 그 '빛나는 통증'으로, 그 통증에 대해, 통증을 위해, 시를
썼다. 그것에 대한 그리움도 아쉬움도 깨달음도 아닌, 그냥 그대로
의 통증들. 그럼으로써 우리를 아프게, 그립게, 아쉽게 하는 통증
들이다.
그는 농사꾼 할아버지의 지겟작대기 가르침을 '최초의 받아쓰기'로 기억한다.
"지게작대기 끝에서 나온 자음(ㄱ)"의 자리에서 "씨앗 꽉 문 고추와/
입천장 데며 먹던 고구마 노란 속살이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그 자음
처럼 "허리가 펴지지 않은 채 땅에 묻히셨다/ 기름진 자음이 되셨다."
('자음') 할머니도 농사꾼이었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은 눈이 올랑갑다 꼭 이런 날 늬 할아비가 오셨구나"하시던 할머니도 "한마을 한집에서 일흔
해를 살고 한 몸에 여든일곱 해를 머물"('가새각시 이야기')다 가셨다.
구름의 가계, 시인의 가계다.
시인은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던
다윈의 말처럼, 시인은 자신이 흙의 가계임을 잊지 않고있다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그런 그가 올해로 등단 9년차 시인이다. 단풍나무 보고 얼굴 붉히는 시인.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
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단풍나무 빤스')
그가 염소를 보고 "쇠방울을 수족처럼 매달고 평생을 단조로운 소리 하나에 목졸려 살아온 염소들. 내팽개치면 내팽개치려 할수록 요란하게
치떠는 소리, 그 소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 한 생"을 보내고
"제 안에서 올라오는 신트림 같은 외로움"('염소 일가')이 '빛나는 통증'
이 아님은 자명하다.
시인에게 아버지가 그랬다고 한다. "시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시인은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라고 했다.
('시인의 말') 그 '쓸모없는 짓'이 이번 시집의 그에게는 '빛나는 고통'
을 환기하는 일, 우주와 교신하는 안테나를 복구하는 일일 것이다.
목련의 화신이 내달리듯,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나"('목련 전차')는 길을 닦는 일일 것이다.
그는 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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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