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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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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거미줄 외 / 손택수
동산 추천 0 조회 79 09.08.22 2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거미줄 / 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소금쟁이의 연애 / 손택수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 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지른다
간지름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이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단풍나무 빤쓰 / 손택수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travelling in mountains

            

 

 

 

자기라는 말에 종신 보험을 들다 / 손택수 

 

 

자기라는 말,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때고

꽃잎에 이슬이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을 들기로 한다

자기,사랑에 빠진 말 속에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장생포 우체국 / 손택수

 

 

지난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 사이는 고작 몇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아귀힘을 절반쯤 따라간 편지

물에 올랐던 파도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ㅡ 뱃고동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홍어 / 손택수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소가죽북 / 손택수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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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내라는 이름은 천리향 / 손택수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 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 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속아 주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 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Ruralidades

 

 

 

시골버스 /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목련 전차 /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으련지 모른다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 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 온천이 나온다.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있던 동업자
장철문형이 감자꽃을 딴다
철문형, 감자꽃 이쁜데 왜 따우
내 묻는 말에
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꽃에 신경쓰느라
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평소에 사형으로 모시는 형의 말씀을 따라
나도 감자꽃을 딴다
꽃 핀 마음 뚜우 뚝 끊어낸다
꽃시절 한창인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
조카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
화장품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
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를 등에 업고
형이 감자꽃을 딴다
딸이 생기고 나선 그 좋은 담배도 끊고
술도 잘 마시질 않는다는 독종
꽃핀 마음 뚜우 뚝 분지르며
한 소쿠리 알감자 품에 안을 날을 기다린다
 

 

 

 

 

 

Ruralidades

 

 


앙큼한 꽃 / 손택수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감꽃 / 손택수   

 

 

1

감꽃 핀다, 어디선가 소식 없는 사람들 편지라도 한 장 날아들 것 같다.
사람도 짐도 땟국물이 흐르는 기차깃 옆 오막살이
기우고 기웠지만 어딘지 정이 헤퍼 보이는 철망을 달고
옥수수 한 줌 쌀 한 줌 가난을 폭죽처럼 터뜨리던
뻥튀기 할아버지, 잠들어 계신 언덕일까
아지랑이 아지랑이 마술의 주문이 오르고
햇빛에 달귀진 선로 끝 아득히 멀리서 부터 기적이 울리면
뻥, 튀긴 희망에 주린 배를 달래 본적 있나, 설사를 하며 속아본 적
속을 줄 알면서도 튀밥이 튀면 허천나게 달려든 적이 있어!
꽃이 튄다, 저만치 떨어져서 귀를 막는다.
나를 묻는 땅속 꽃씨 한줌도 성급하게 피어날까
튀밥처럼 뻥 하고 튀어오를까, 귀청이 다 떨어지도록
치밀어오는 그리움, 아그데 아그데 감나무 굶주린 꽃이 핀다

 

 

2

감나무 아래 들이 잠에 들고 깊다
떨어진 풋감처럼 떫디 떫은 잠이라도
헤 입벌린 채 빠져들고 싶다
밭일 간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쐐기가 떨어진다.
이파리로 다독다독, 잎바람을 일으켜
자장가를 불려주던
유모의 품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
헤 벌린 입에 젖을 물려주기 위해
받아먹지 못하는 젖을 넣어주기 위해
아래로 축 처져 있던 감나무 가지 아래
 

 

 

- 2000년 제2회 수주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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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

과연 우리 몸 어딘가에는 지금도, 과거의 몸들이 지녔던, 우주와의
교신용 안테나가 남아있을까. 그래서 무슨 별들이 어떻게 서면
"흙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날" 임을 알아 파종하고, 구름의 신음
소리에 사지가 감응해 "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구름의 가계'는 아직 멸문(滅門)하지 않고 남아 가녀린
그 혈통을 이어가고 있을까.
 
"별이 지상에 내리는 걸 저어하지 않도록/ 일찌감치 저녁상
을 물리고/ 잠자리에 드는 마을"('별빛보호지구')들은 자본의
빛에 쫓겨 하릴없이 사라지는 중인데.
 
손택수(36)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 발행)에는, 이미
낯설어진 '오래된 미래'의 풍경들이 시종 없이 등장한다.
문풍지 도배, 제비 부부 신접살림, 메주 곰팡이, 아기 업고 밭 매는
등 굽은 아낙…. 물론 그것들은, 책갈피 속 지난 계절의 꽃잎처럼,
이 젊은 시인의 기억 어느 대목에서 불거진 것들이다.
그는 그 '빛나는 통증'으로, 그 통증에 대해, 통증을 위해, 시를
썼다. 그것에 대한 그리움도 아쉬움도 깨달음도 아닌, 그냥 그대로
통증들. 그럼으로써 우리를 아프게, 그립게, 아쉽게 하는 통증
들이다.

그는 농사꾼 할아버지의 지겟작대기 가르침을 '최초의 받아쓰기'로
기억한다.
"지게작대기 끝에서 나온 자음(ㄱ)"의 자리에서 "씨앗 꽉 문 고추와/
입천장 데며 먹던 고구마 노란 속살이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그 자음
처럼 "허리가 펴지지 않은 채 땅에 묻히셨다/ 기름진 자음이 되셨다."
('자음') 할머니도 농사꾼이었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은 눈이 올랑갑다 꼭 이런
할아비가 오셨구나"하시던 할머니도 "한마을 한집에서 일흔
해를 살고 에 여든일곱 해를 머물"('가새각시 이야기')다 가셨다.
구름의 가계, 시인의 가계다.
시인은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
다윈의 말처럼, 시인은 자신이 흙의 가계임을 잊지 않고있다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그런 그가 올해로 등단 9년차 시인이다. 단풍나무 보고 얼굴 붉히는
시인.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
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단풍나무 빤스')

그가 염소를 보고 "쇠방울을 수족처럼 매달고 평생을 단조로운 소리
하나에 목졸려 살아온 염소들. 내팽개치면 내팽개치려 할수록 요란하게
치떠는 소리, 그 소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 한 생"을 보내고
"제 안에서 올라오는 신트림 같은 외로움"('염소 일가')이 '빛나는 통증'
이 아님은 자명하다.

시인에게 아버지가 그랬다고 한다. "시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시인은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라고 했다.
('시인의 말') 그 '쓸모없는 짓'이 이번 시집의 그에게는 '빛나는 고통'
을 환기하는 일, 우주와 교신하는 안테나를 복구하는 일일 것이다.
목련의 화신이 내달리듯,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나"('목련 전차')는 길을 닦는 일일 것이다.
그는 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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