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者羅網 狗被象皮 道人戀懷 蝟入鼠宮
수행자가 비단옷을 입음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덮어쓴 꼴이요
도를 닦는 사람이 세속에 연연하면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격이다.
■수행자는 코끼리가 되라(1)■
세상에는 격식이 있고 구색이 있다. 이것을 벗어나면 사람들이 삐죽이고 웃는다. 이런 단순한 사람들 외에 또 어떤 특별한 중생이 있어 그들을 제도한단 말이가. 한번 돌아서면 다시 내 편으로 돌리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 세상사 인심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욕 얻어먹을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계율은 전부 다 사람들의 소문과 진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황색가사에 머리를 깎고 돌바루를 든 부처의 제자라는 작자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이러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비난과 원성을 퍼뜨리면, 부처님은 그때마다 그들을 불러 사실 확인을 하시고 난 후 그에 합당한 계율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것이 모아져 바라제목차인 계목들이 된 것을 보면 부처님이 불교를 일으키시던 초기에 얼마나 민심의 여론을 민감하게 살피셨는지 자못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계율은 크게 내면적 계율과 외면적 계율로 나눈다. 내면적 계율은 자신의 수행에 장애가 되는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고, 외면적 계율은 불교 전체에 대한 비방을 차단시키고 그 바르지 못한 행위를 제지시킨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욕을 먹는 짓은 많고도 많다. 일차적으로 사람들은 불교의 계율이건 아니건 출가한 스님들이 세속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면 먼저 욕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삶은 정신적인 여유 없이 늘 힘들고 빠듯하다. 그래서 그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스님들을 동경하며 예의주시한다. 그런데 출가했다는 스님들이 세속에 살고 있는 자기들과 같이 욕심 많게 행동한다면 실망과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속 사람들은 다섯 가지 목표를 두고 움직인다. 재물과 이성, 미식과 명예, 그리고 육신의 안락함이다. 하지만 수행자들은 이 다섯 가지 오욕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출가한 사람들이다. 서로 삶의 목표가 다르고 지향하는 방향도 다르다. 그런데도 출가자들이 세속인들처럼 오욕락에 목적을 둔다면, 이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덮어쓴 꼴과 같다.
개와 코끼리는 격이 다르다. 개는 개다워야 하고 코끼리는 코끼리다워야 한다. 개는 집에서 살고 코끼리는 밖에서 산다. 집에서 살아야 하는 자는 세속의 집에서 살면 되고, 밖에서 사는 동물은 집에 들어가면 죽는 것이니 코끼리처럼 숲 속에서 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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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스님들은 대체적으로 무채색인 감회색 옷을 입는다. 이것은 제3차의 색이고 괴색이다. 괴색이라는 말은 죽은 색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특별한 색깔이 없다. 모든 색들을 하나로 섞으면 회색보다 조금 더 진한 검은색이 나온다. 이 색을 검회색이라고 한다. 이 색으로 모든 중생을 아우른다. 그래서 스님들은 검회색 옷을 입는다.
검회색을 제일 싫어하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유교와 도교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었다. 그러다 보니 검회색을 혐오했다. 그런 색상은 죽음의 색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천이나 황천 같은 명계를 표시할 때 깜깜한 땅 밑을 말하였고 그 색상은 모두 검은 색으로 표시했다. 저승사자가 검정색 도포와 검정색 갓을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외롭고 쓸쓸할까 싶어서 가족 전체가 검정색 옷을 입고 상주노릇을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불교를 좋게 봐줄 수 있었겠는가. 우선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고 해서 부모에게서 받은 머리털 한 올도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효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불교라는 것이 들어와서 첫 번째로 머리칼을 싹둑 잘라버리고 다니니 그들의 반응이 과연 어떠했을까.
둘째는 입신양명이다. 그들은 출세를 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죽어서도 가문에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삶의 모토를 삼아왔는데, 반대로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 성은 물론 부모가 지어준 이름조차 바꿔버리는 무리를 보았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셋째는 후손이다. 그들은 가급적 많은 후손들을 거느려 조상의 혈통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불교라는 자들은 고자도 아니면서 아예 후손을 생산하지 않으니 반응이 정말 어떠했을까.
넷째는 일이다. 건전한 사회를 이루려면 자기에게 주어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불교를 믿는 스님이라는 사람들은 직접 논밭을 가꾸지 않고 남이 수확한 양식을 탁발해서 먹고 살려고 하니 그들 눈에는 정말 어떻게 보였을까.
다섯째는 부모봉양이다. 그들은 부모를 하늘처럼 모시고 봉양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왔는데, 불교 스님들은 아주 매정하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불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불교는 정말 외도 중의 외도였을 것이다. 유교 사회의 기본적 덕목인 삼강오륜을 받들지도 않고 인간이 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 기본 도리인 오상을 따르지 않는 불교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얼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불교를 잔인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가 한국의 조선시대까지 내려와서 불교를 이 땅에서 아주 말살시키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도덕과 도교의 문화를 받아들여 치세와 안민을 다 하고자 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상갓집에 상문을 갈 때 중국처럼 검은색 옷을 입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은색을 입으면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대단히 터부시 했다. 대신 평민의 옷인 흰옷으로 상주복을 만들어 문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세상도 사람도 그 민심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금기시되던 검은 옷들이 언제부터인가 상갓집에 갈 때 예절 옷이 되어버리고, 흰옷은 반대로 금기시되어버렸다. 그것은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미친 영향이었다. 중국이 종주국으로 있을 때에도 한국은 끝까지 한국만의 상주복을 고수해왔는데 기독교 문화가 들어오니 바로 검은색 상주복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중생세계에는 일정한 법도가 없다. 형편과 사정에 따라 법이라는 것을 만들고 또 버리고 또 만드는 것이기에 절대성과 영원성이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만법이 다 유식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목숨을 걸고 자기주장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바뀌었거나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 가지 법들이 만들어지고 바뀌어가고 그냥 사라져버리고 있다. 사람도 학문도 이론도 계속 바뀌어가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천지에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ㅡ계속ㅡ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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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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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者羅網은 狗被象皮요
道人戀懷는 蝟入鼠宮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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