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준의 스포츠현장탐색' 열 번째 시간에는 지난번에 이어 우리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격동기인 1970년대의 젊은이들,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와 스포츠의 세계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3. 1970년대의 스포츠 - 한결 다채로워진 '스포츠코리아'
이제 1970년대의 스포츠세계로 들어가 보자. 1960년대에 국민체력증진과 체육을 통한 국위선양을 목표로 ‘국민체육진흥법’을 공포(62. 9. 17)한 이래 정부는 각종 체육육성정책을 실시해서 스포츠코리아의 기반을 다졌고,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엘리트스포츠에 대한 지원정책이 대폭 확대되어서 병역특례제(73. 3)와 선수연금제(74. 12) 등이 제정되었다.
그 당시는 중국이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이어서 스포츠코리아는 일본에 이어서 확실한 아시아의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1970년의 제6회 방콕아시안게임에서는 불모지였던 육상(백옥자)과 수영(조오련)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1972년 11월에는 훗날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국기 태권도’의 총본산인 국기원이 설립되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net%2Fimage%2F494%2F2015%2F12%2F23%2F144144827_%2525C5%2525B9%2525B1%2525B81.jpg%3Ftype%3Dw540) 엘리트 체육이었던 탁구가 생활 전반에 퍼지다 (출처 : 뉴시스) |
그리고 1973년 4월 스포츠코리아의 역사에 남을 엄청난 승전보가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날아들었다.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세계최강 일본을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 엄청난 우승의 여파로 전국에 수많은 탁구장이 개설되었으니 엘리트체육이 생활체육의 발전을 이끈 모범사례였다.
1976년 7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21회 하계올림픽에서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의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국적으로는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여 온 국민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지 정확히 40년만의 일이었다. 양정모 선수는 귀국 시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대환영을 받았고, 동아방송은 ‘몬트리올의 금메달’이라는 기념곡을 만들어서 이를 경축했다. 이와 동시에 국내에서도 주요 종목별로 본격적인 스포츠흥행시대가 개막되었으며 1970년대를 관통한 국내스포츠의 주요 키워드는 프로레슬링, 프로복싱, 국가대표축구와 고교야구였다.
이와 같이 1970년대에 국내외를 포함한 전반적인 기반강화기를 거친 스포츠코리아는 이어지는 1980년대에 들어서 민족의 대역사인 1988서울올림픽의 유치 및 성공적인 개최 그리고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비롯한 프로스포츠 시대의 태동을 이끌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net%2Fimage%2F494%2F2015%2F12%2F23%2F143756616_%2525B1%2525E8%2525C0%2525CF1.jpg%3Ftype%3Dw540) 그 당시 최고의 인기였던 故김일 선수 (출처 : 연합뉴스) |
별다른 오락문화가 없었던 그 시절,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귀국한 김 일 선수가 몰고 온 프로레슬링의 광풍은 온 나라를 뒤흔들었고, 프로복싱의 인기 역시 대단했다.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경기가 있는 날이면 시내의 다방에는 일찌감치 저녁에 있을 TV중계를 예고하는 안내문이 내걸렸고, 경기시간이 되면 길거리는 한산했다. 시민들은 좁은 다방이나 TV가 있는 집에 빽빽하게 모여 앉아서 너나없이 열광적으로 우리 선수들을 응원했다.
1963년 2월 1일에 국내 최초의 실내경기장으로 개장한 장충체육관이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의 주 무대였다. 김 일 선수를 비롯해서 천규덕, 장영철 등 프로레슬링 선수와 홍수환, 김성준, 유제두, 염동균, 박찬희 등 프로복싱의 영웅들이 떠오른다. 특히 머나먼 파나마에서 홍수환이 카라스키야를 이기고 세계챔피언에 오른 ‘4전5기의 신화(77. 11)’는 지금도 많이들 기억하는 최고의 명승부였다. 그리고 외국유명선수들의 프로복싱경기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1970년대의 세계복싱은 헤비급의 전성시대로 역대 세계헤비급 최고의 선수인 무하마드 알리, 인파이터의 대명사 조 프레이저, 쇠주먹 조지 포먼의 경기가 특히 인기였다.
국가대표 축구경기 역시 온 국민의 성원을 받았다. 1966년에 북한이 제8회 잉글랜드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는 엄청난 뉴스에 화들짝 놀란 정부는 국가대표 급의 ‘양지축구단‘을 창단해서 대항마를 키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전통적인 축구강국이었지만 그 때 보여준 북한의 축구실력은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장덕진 재무부 차관보가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금융단축구단의 창단 붐이 일어났고, 그 열기는 메르데카컵, 킹스컵, 박스컵 등 아시아권 국제대회에서의 우수한 성적으로 나타났다.
1979년에 당시 세계최강의 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선수는 이회택 선수의 뒤를 잇는 최고의 축구스타였고, 허정무, 조광래, 박성화 선수 등이 그 시대의 축구영웅들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net%2Fimage%2F494%2F2015%2F12%2F23%2F143756914_%2525C2%2525F7%2525C2%2525F7.jpg%3Ftype%3Dw540) 분데스리가에서 대활약했던 '차붐' 차범근(출처 : 연합뉴스) |
당시의 또 다른 인기스포츠는 고교야구였다. 전국규모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고교야구의 메카였던 동대문야구장(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은 이른 아침부터 그야말로 인산인해 사람의 물결이었고, 야구장은 고교동창회 모임이자 지역별 향우회가 열리는 것과 같은 열띤 분위기였다. 확실한 지역연고제로 출발해서 지금은 최고의 인기스포츠가 된 프로야구도 고교야구의 인기를 계승해서 출범하였다. 임신근, 남우식, 황규봉 선수로 이어지는 경북고 전성시대부터 시작된 고교야구의 황금기는 1970년대 후반에 박노준, 김건우 선수 등 원조 ‘오빠부대’의 주인공들까지 그 열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볼거리에 갈증이 많았던 당시의 스포츠팬들에게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간의 정기전도 인기였다. 정기전이 열리면 동대문운동장과 장충체육관 일대는 양교의 재학생과 동문들은 물론이고 일반관중과 경찰기동대로 가득 메워졌다. 오랜 전통을 가진 양교의 정기전은 그동안 수많은 우수선수들을 배출하면서 우리나라 엘리트스포츠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 당시의 또 다른 볼거리였던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도 질서정연한 응원이 무척 돋보였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보면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동기를 지나며 치열하게 1970년대를 살았던 지금의 중년세대들은 민족 최대의 변혁기를 직접 체험했을 뿐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디지털문화에도 어렵사리 적응하면서 앞과 뒤를 아우르는 중간 허리세대의 역할을 맡고 있다. (2015.12.)
<추신>
올해 7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최종준의 스포츠현장탐색’ 칼럼에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네이버스포츠의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내용으로 성원에 보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연말을 잘 마무리하시고, 희망찬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기사제공 최종준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