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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이야(이하영)
뱀장어들이다. 뱀장어들이야. 하늘이 금세 뱀장어 떼로 시커메졌다. 타다닥 타다닥, 난 이미 납작한 발에 5개의 동그란 엄지 발가락을 세운다. 뱀장어들의 매끈한 몸통을 곧게 뻗는다. 숨막히는 긴장감이 느낀다.
나의 목표점. 우리 집!
뱀장어들은 목표점이 있다. 충청북도는 청주시 금관리에 있다. ''탕탕탕!!!
다다다닥 나는 달려간다.
주룩주룩 주룩주룩, 모를 것이라는 뱀장어들 내려간다.
하지만 우리 집 문을 열 때쯤 난 이미 완패, 뱀장어들에게 잡혔다. 물리기도 했다. 홀딱 다 젖었다.
''흥!! 문을 쾅쾅쾅 닫는다. 뱀장어들은 팡파레!
''우르릉.', 쿵쿵쿵쿵.,
''응? 좀 이상한데요?"
' 드르륵 드르륵.,
'' 문을 긁어대는 소리?"
'' 누구지? 누구세요?"
'' 지.... 누구냐구?.,,
'' 누구시냐구요?,,
지네?"
나는 문에 귀를 바짝 대보았다.
'' 도와줘요.
작은 소리....
''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정말 작은 소리다. 나는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 빗물이 뚝뚝뚝, 소나기에 홈뻑 젖은 지네가 쓰러져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다리들이 공중에서 허우적 허우적. 나는 문을 쾅쾅쾅 화가나서 닫아 버렸다. 가슴을 꼭 쥐고 거실로 성큼성큼. 소파에 걸터앉았다.
'' 우휴! 지네라니..., 징그럽게."
'' 왜 하필 우리 집이야?''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도 찌글찌글해 진다.
이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난다.
학교 마치자마자 냅다. 운동장으로 집합을 하면서 달리기를 뛰었다. '' 날아라 슈퍼맨!, 가방을 망토 삼아 '부우웅 부우웅., 계단을 건너뛰다 넘어지고 무릎까지 까져서 피가 나고 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고 말았다.
''아얏!,,
무릎이 따끔따끔 거렸다. 찌르르 찌르르 아픔이 몰려왔다. 빨갛게 맺히는 핏방울처럼 울음 덩어리가 생겨났다. 찰랑찰랑 눈물 터지기 일보 직전.
''호인이 때문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호인이는 초등학교 2학년인 9살 우리 반 옆에 있는 유치원 7살 반이다.
''형아! 난 유치원에서 제일 큰 형아 반이다. 그러니까 형아랑 같이 놀아야 돼."
그리곤 매일매일 내가 끝나길 기다렸다.
'' 참! 아니거든? 넌 유치원. 난 학교거든? 그리고 형아가 아니고 누나라고 불러야지. 넌 여자. 난 남자라구."
아무리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집 바로 뒤에 산다고. 우리 엄마랑 자기 엄마랑 친하다고 조금 봐줬더니 막무가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헝아. 헝아.' 귀찮게 굴게 뻔하니까.
'호인이 때문이야, 호인이 때문이야.' 눈물이 고였다. 아이들은 이미 교문을 나서는데.... 일어날까? 조금 더 있을까?
울까? 고민 중인 바로 그때 달팽이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달팽이들은 잔잔한 호수 위에 둥둥둥 몸을 내맡긴 두꺼비 같은 눈을 꿈벅꿈벅, 더듬이를 흔들, 고개를 끄덕끄덕 하곤 말했다.
"괘앤찮아. 괘앤찮아. 얼른 일어나서 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와도 될 만큼 느리게, 목소리를 주우욱 주우욱 내리깔고서....
''형아!"
뒤에서 호인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바지를 툭툭툭 털며 일어났다.
''고마워 달팽아."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지네의 발들이 떠오른다.
''흐음 다리 한 개만 봐줄까?"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갔다. 문을 조금 열었다.
''무슨 일이야? 다친 거야?"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지네가 비틀비틀 움직였다.
다리 들이 질질질 끌려왔다. 지네는 수북한 신발들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아! 의자!"
나는 의자를 잡아당긴다. 아니 아니 지네가 의자보다 바닥에 기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부엌으로 달려갔다. 싱크대 밑에 푹신한 매트가 보였다.
''아! 저게 좋겠어."
나는 매트를 가져다 지네 앞에 놓았다. 지네는 매트로 올라갔다. 마음에 드는 게 틀림없었다. 다리들을 쭈우욱 쭈우욱 뻗더니 가만히 있었다.
''물 줄까?"
나는 작게 말했다.
''아니."
지네가 젖은 몸을 가리켰다.
''빗물 먹었어. 근데...."
지네가 눈치를 살핀다.
''왜 그래?"
내가 물어보자마자 지네는 나를 한번 보고 현관을 한번 보았다.
''저기 나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혹시....''
지네는 신발들을 신을 수 있을까?''
''뭐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신발을 신는다구? 지네가? 신발을?''
지네가 고개를 떨어 뜨리더니 더듬이를 위로 아래로 까닥까닥 거렸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축 처진 지네에게 다가가 다리들을 살폈다.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었다. 어떤 다리는 까지고, 어떤 다리는 부어 있었다. 퉁퉁퉁퉁.
''흐음."
가슴 쪽에서 동그란 통증이 부풀어 올랐다.
'너 아팠구나. 알았어. 근데 몇 개나 필요하지?''
지네는 고개를 숙였다.
''실은 나도 몰라. 난 내 다리인데도 볼 수가 없어. 숫자도 모르는 걸."
나는 지네가 창피해 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어떻게 숫자를 모르지? 자기 다리를 볼 수가 없다고?"
속으로 엄청 놀랐다. 나는 최대한 지네의 다리를 세 주기로 했다. '하나, 둘, 셋... , 열다섯, 열어섯... , 스물일곱, 스물 여덟... , 마흔 하나, 마흔둘. ,
''우와 대단한데? 모두 42개야. 너 다리 부자다.''
나는 지네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엄마가 하시는 말투를 흉내 냈다. 지네가 살짝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동안 조금씩 모아 논 저금통을 떠올렸다.
''조금만 기다려 봐?''
나는 지네에게 말하고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꼭 쥐었다.
신발가게에 가 볼 작정이었다.
''금방 갔다 올께.''
신발가게 아저씨는 졸고 있었다.
''아저씨!''
나는 큰소리로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가 고개를 번쩍번쩍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는 아저씨. 나는 신발들을 주욱 들러 보았다. 샌들, 슬리퍼, 운동화, 구두, 나는 운동화 쪽으로 갔다.
''아저씨 똑같은 운동화 21켤레 있어요?''
아까보다 더 크게 눈을 뜨는 아저씨.
''뭐라고?"
나는 손가락으로 신발들을 가리켰다. 어느 왕국의 공주라도 된 것 같았다.
''21켤레? 똑같은 걸로?"
아저씨의 턱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게 얼마인지 아니?''
구석진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는 지렁이 목소리.
''얼마인데요?''
''아무리 싼 걸로 해도 20만 원 홀쩍 넘지."
아저씨가 나를 훑어 보았다. 갑자기 불판 위에 오징어처럼 몸이 움츠려 들었다.
''20만원이요?"
나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돈들을 꺼냈다.
''5만원도 안 되는데...."
나는 왕족이 아니었다.
''안녕히 계세요."
유리문을 닫는데 뒤통수가 화끈화끈
''휴우. 엄청 비싸네."
나는 터덜터덜 걸으며 고민했다.
''그냥 돌아갈까? 아냐. 아냐."
발걸음이 무거웠다. '간신히 고백한 왕자님 한테 퇴짜 맞았구나?' 오른쪽 머리에서 속삭였다. '아냐. 지네 장수가 은혜를 갚을 거라구.' 왼쪽 머리에서 펄펄 뛰었다.
''에휴!''
고개가 푹 떨어졌다. 아침에 급하게 신었던 양말이 신발 위에 축 쳐져 있었다.
''아! 양말! 양말이 있었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양말 가게는 신발 가게 옆이지., 나는 단숨에 유리문을 열었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허겁지겁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것 같았다. 곧이어 커다란 양말처럼 생긴 헝겊 모자를 쓴 아줌마가 나오셨다.
'' 으응? 우리 꼬마 손님이 오셨네."
나는 인사를 꾸벅했다. 아줌마가 활짝 웃으셨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저어... 양말 사려고요."
''으응."
아줌마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리신다.
''편하게 구경해."
나는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목이 긴 양말, 목이 짧은 양말, 목도리 도마뱀처럼 레이스가 달린 양말, 앙증맞은 아기 양말.... 나는 아기 양말들 앞에서 멈추었다.
''동생 생기는구나."
아줌마는 축하한다는 표정이었다.
''저어 그게 아니라...."
나는 새끼 손가락에 딱 맞을 듯 작은 양말들을 가리켰다.
''이거 얼마에요? 21켤레는요?"
아줌마는 물건들을 정리하시다가 나를 바라 보셨다.
''으응? 21켤레?"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글쎄다. 아기 양말들이 조금 비싼데, 한 켤레에 3천원 이니까 21켤레면 가만 있어보자. 6만 3천원이구나."
'' 네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머니 속에 돈을 다시 만져 보았다.
''뭐가 이렇게 다 비싸지?"
눈물이 핑 돌았다. ' 꼭 사고 싶은데.' 지네의 상처 난 발들이 떠올랐다. 아줌마가 조용히 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내 손 위에 있는 돈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셨다.
''얼마 동안 모은 거니? 오래 모았겠는 걸? 자 그럼 이거 아주 소중하게 모은 거니까? 내가 비싸게 비싸게 쳐줄게. 아이구 오히려 아줌마가 거슬러 주어야 되는 거 아냐?"
아줌마는 주머니 뒤지는 시늉을 하셨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가 오랫동안 장사를 해서 짝짝이 아기 양말들이 많은데.... 어때? 그것들을 좀 가져가 주겠니?"
아줌마가 손을 내저으셨다.
''아이구. 버릴 수도 없구 참 골치 아파요. 골치가 아파."
아줌마는 다시 한번 나를 보셨다. 내가 그걸 가져가주면 고맙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래? 정말? 고맙다. 고마워."
아줌마는 돈을 내 주머니 속으로 다시 넣고는 꼭꼭 눌렀다. ''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가 쌩 뒷문으로 나가셨다. 곧이어 부스럭 부스럭 냥말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안고 오셨다.
''마음껏 골라봐."
불룩한 봉지를 매고 나는 산타처럼 살금살금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네는 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양말을 꺼냈다. '부스럭, 지네가 눈을 떴다. 알록달록 양말들 앞에서 지네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이렇게 많이?"
지네는 감탄의 눈초리로 양말들을 보았다. 내 어깨가 끔틀 꿈틀 조금씩 솟아올랐다.
''가만 있어봐."
나는 쑥쓰러움에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곤 양말들을 하나씩 신겨 주었다. 하나, 둘, 셋, 넷... 마흔둘. 휴우....
땀이 뻘뻘뻘.
''고마워."
지네가 입을 딱 벌리고 양말들을 보았다.
단풍잎 같은 빨간색.
고추잠자리 콕콕 찔러대는 하늘색.
애기똥풀 꽃 노란색.
깜깜한 밤하늘 검은색.
지네는 자랑스러운 듯 발들을 움직였다.
''얼른 걸어 보고 싶어"
''그래? 그럼 나가보자!"
우리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 이게 뭐지?"
노란색 양말이 이상했다.
''괜찮어. 참을 수 있어."
지네가 발을 숨기며 말했다.
''휴우. 이런 발로 어떻게 나가려고?"
나는 진물로 얼룩진 노란색 양말을 잡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옷장으로 달려갔다. 미어캣처럼 주루룩 주루룩 걸려 있는 옷들 속으론 손을 뻗었다. 상자가 나왔다. '내 보물 상자!, 내 목소리는 모기 소리가 되었다. 당연하지. 보물 상자는 비밀이어야 하니까. 난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물들을 확인했다. 할머니가 주신 종이돈 오만 원.
엄마가 뜨개질하던 실뭉치.
뽑기에서 모아 둔 꽃반지들.
그리고 엄마가 자연관찰 전집을 사고 받았던 퀼트 손수건이 깔려 있었다.
극세사 헝겊이라 아이스크림이 통째로 쏟아지는 것만큼 부드러웠다. 나는 크게 숨을 쉬고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지네에게 말했다.
''이리 올라와. 병원 가자"
헝겊에 싸인 지네를 보자마자 의사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셨다.
''흐음."
나지막한 신음소리.
''니가 말하는 환자가 이 지네니?"
''네."
나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허어. 흐음."
한숨이 가슴에 매달린 청진기처럼 의사 선생님의 입에 달랑달랑.
''얘야. 미안하구나."
그리곤 ''다음 환자!"라고 외치셨다.
''에휴."
나는 병원을 나와 등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걸었다. 헝겊에 싸인 지네가 무겁게 느껴졌다.
''에휴."
자꾸 나오는 한숨.
''솜이 아녀?"
누군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도 솜이라고 부르는 것도 호인이 할머니다.
''안녕하세요. 솜이 아니고 소민인데요?"
나는 힘없이 말했다.
''어이구 왜 이리 기운이 뻐진겨? 배고픈겨? 교회 가서 달걀 찐 거라도 먹고 가. 얼른 들어가."
호인이 할머니는 들고 있던 교회 전단지를 팔랑이시며 나를 상가 2층에 있는 교회로 밀었다. 교회 권사님들은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호인이가....
''네에? 네에."
난 얼떨결에 계단을 올라가며 언젠가 보았던 목사님을 떠올렸다. 목사님의 얼굴엔 항상 햇살 같은 미소가 가득했다. 성전 입구에서 목사님은 두 손으로 가지런히 감싼 성경을 한 손으로 옮기고 내 손을 잡았다.
''소민이구나."
반가워 하시는 목사님. 딱딱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어서 와, 어서. 어쩐 일이니?"
''저어.... 저어기."
나는 망설이며 지네를 가리켰다. 목사님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익? 이게 뭐야? 얘야. 곤충은 여기서 예배를 못 드린단다."
목사님은 대나무 숲을 날아가는 도인처럼 휘익 안으로 들어가셨다.
''휴우."
기대했던 마음이 푸욱 꺼졌다.
나는 지네를 보았다. 알록달록 양말 신은 지네는 무지개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무지개?, 할머니가 생각났다. 우리 집은 읍내에 있었지만 할머니 댁은 구불한 신작로 건너 옛날 동네에 있었다. 그래서 텃밭도 있고, 염소도 닭도 있었다. 나는 할머니 댁이 좋아 매일 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퍼. 우리손녀는...."
하지만 할머니의 깊은 눈에는...., 나뿐만 아니라 세상도 다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말엔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길가에 풀도 지 세상이 있는겨. 거 함부로 하지 말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근사했다. 엄마가 힘들다고 하년 할머니는 조용히,
''다람쥐도 살고, 토끼도 살고, 개구리도 개굴개굴 걱정 없이 사는디....
더불더불 순하게 살면 되지. 뭔 대수여. 걱정 말어."
멋지게 힙합을 쏟아냈다. ' 우리 할머니 짱이다!, 나는 지네에게 눈을 찡긋. 이제 걱정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네는 온몸이 빨개지도록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지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나는 부리나케 달렸다.
''할머니...."
할머니는 밭에 계셨다. 역시나. 나는 어린이 백과 표지를 살펴보듯 발을 휘익 둘러보았다.
방울토마토 :
빨간 치마 살랑거리며 동요대회 나간 아이처럼 붉은 입을 방울방울.
가지 :
얼굴색이 보랏빛이 되도록 할머니 말씀에 집중. 집중.
고추 :
초록 망토 햇빛에 비벼 비벼 빨간 망토로 변신 중.
''우리 강아지 왔구먼."
할머니가 활짝 웃으셨다.
''아니 근디.... 우리 애기 얼굴이 왜 그려? 무슨 일 있는겨?잔뜩 구름이 꼈는디?"
내 얼굴이 하늘인가 보다. 할머니에겐. 나도 할머니를 보자 꼭 쥐고 있던 가방끈을 내려놓듯 스르르 목소리가 풀어졌다.
''할머니이...."
할머니 미소는 부드러운 깃털. 나는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러 다니던 말들을
''에취!"
'재취기처럼 숨길 수가 없는걸 뭐., 주르륵 쏟아 놓았다.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할머니는 수북수북 돌판 위에 쑥을 쌓으셨다.
''쑥으로 사람도 되는 겨. 동굴 속에서 몇 날 며칠 쑥 내를 맡으면 온 몸에 시커멓게 붙어있던 짐승 털도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겨. 그러니 상처엔 이것만 한 게 없지. 아암."
할머니는 쑥 뭉치를 봉지에 담으시곤 일어나셨다.
''가자."
'우와와. 전진. 전진이다. , 마음속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할머니 최고!"
나는 씩씩하게 할머니를 따랐다.
''어이구. 어이구."
할머니는 허리를 두드리며,
''헛둘. 헛둘."
나는 허공을 두드리며, 우리는 태권도 시범단처럼 걸었다.쑥 봉지가 할머니의 허리춤에서 신비한 마법의 자루처럼 달랑거렸다. 그때 갑자기.
''할머이...."
옆집 경자 아줌마 소리.
''염소 줄 끊어졌씨유."
할머니와 나는 동시에 멈췄다. 할머니는 나를 한번 보고,염소 매어 놓은 기둥을 한번 보았다.
''뭐여? 아이구 이놈의 염소가 또...."
할머니는 마법의 자루를 나한테 던졌다. 마지막 작전을 넘기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시곤 염소가 도망간 곳을 향해 달려가셨다. 마법의 자루가 덩그러니 내 손 위에 놓였다. 현관문이 보인다. ''지네야. 지네야. 너 거기 있니?
양말 신은 지네야. 예쁘게. 예쁘게. 다리들을 쭉쭉쭉. 나는 태권도를 할 거야. 너는 벌레. 아니 히힛. 발레를 하렴."
나는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지네가 들으라고....
문을 열자 '' 허걱." 거실에 엄마가 떡 버티고 계셨다.
''이소민!" 엄마는 바닥을 가리켰다. 지네가 기댔던 담요가 널브러져 있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담요는 왜 꺼내 놓은 거야? 좀 치우든가." 엄마가 펄럭펄럭 담요를 접으셨다. ''툭." ''응?" 엄마는 작은 양말 한 짝을 집어 들으셨다.
''이게 뭐지?" 나는 슬금슬금 양말을 잡았다. 노란색 양말이 바나나처럼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자네가 흘렸던 진물이 얼룩으로 축축하게 남아 있었다. ''지네 거예요. 다리 아픈 지네 거란 말이에요." "응?" 엄마가 담요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양말을 들고 현관문으로 달렸다.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대문을 나가 뒷산으로 뛰었다. ''지네야! 지네야!" 양말을 흔들자 나뭇가지 속에 숨어있던 바람이 물려나왔다. 하지만 지네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네야. 지네야." 산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리 불러도. 다음 날, 나는 늦게까지 잤다. 토요일이라 딱히 할 일도 어린이집에 처음 가는 동생인 듯 지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네도 42개의 발을 흔들었다. 반은 징그러운 지네. 반은 예쁜 무지개가 아수라 백작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무지개를 볼 때마다 널 기억할게. 알았지?"
"나도. 헝아!"
호인이도 따라 중얼거렸다. 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