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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묵상글 ( 연중 제8주간 화요일, - 욕망이 아니라 희망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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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욕망이 아니라 희망을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베드로 서간은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이 거룩한 것입니까?
앞의 말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희망을 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서간은 희망과 욕망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즉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희망은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이고 욕망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 우리에게 희망이 없으면 안 됩니다.
도무지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은 그야말로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경우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더 살아봤자 고통밖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더 살아야 할 의지,
곧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없겠지요.
이렇게 보면 욕망이라도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떻게든 사는 것이 목표라면 욕망이라도 있는 것이 나을 것이고
하다못해 세상 욕망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 많은 사람이 이런 욕망 때문에 세상 희망을 가지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신앙인의 희망,
영적인 희망과 다른 점이지요.
그렇다면 영적인 희망은 어떤 것입니까?
영적인 희망은 우선 세상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희망은 쇠가 용광로를 통과하듯
세상 욕망이 다 좌절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영적인 희망은 하나도 없고 세상 욕망만 있던 사람은
이때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밤을 경험할 것입니다.
욕망이 빚은 세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눈은 하늘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밝히던 모든 불이 꺼질 때
그때 하늘의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어두워지자마자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고,
한동안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어둠이 꽤 짙을 수도 있고 그 시간이 꽤 길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 절망의 고통이 너무 클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간은 세상 욕망이 쏙 빠질 때까지 필요합니다.
사실 아직 어둡고 여전히 어둡다는 것은
세상 욕망이 아직도 있고 여전히 있다는 반증이거나
어둠의 고통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조급증 때문입니다.
갑자기 빛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차츰 보이기 시작하듯
내게서 다른 것은 바랄 수 없고 어둠만이 나의 것이라고 인정할 때,
그때야 하느님만이 빛이심을 인정하게 되고 그 빛이 은총으로 비쳐올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얘기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나타난다는 것은 없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으로 가득할 때는 내 안에 없던 빛이신 주님이
욕망이 좌절되고 어둠으로 가득할 때 은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빛으로 거룩해지고
거룩한 희망을 지니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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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반에서 일등 하는 아이와 꼴찌 하는 아이 중에 누가 더 똑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일등이니 당연히 똑똑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600년대에 똑똑한 사람은 모두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동설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면서 결국 종교 재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똑똑한 사람들은 과연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제일 똑똑한 선구자로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멍청한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판단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정말로 똑똑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무엇 하나 못 하는 것이 없어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다른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중에 동창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남달랐으니,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범했고, 아니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판단 자체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삶 안에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삶을 따라야 했습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당시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도 아니고, 세상의 높은 지위를 인정받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바보 멍청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 안에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닌, 오히려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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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진정한 생활은 현재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려는 일에 온 정신력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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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부자청년은 재산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버리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님 또는 복음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그 소중한 것들을 버려야만 할까?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한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고 ‘진정한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내려놓아야 할 것들임도 알아갑니다. 사실,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그렇게 진정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는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과 ‘복음’과 ‘사랑’이 늘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온전히 당신의 것이오니,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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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위해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한 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불리하면 칼을 대고, 유리하면 줄을 대는 세상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 하였을 때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 명예, 내 권력,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나 명예든 지금 첫째라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내려놓는 작업을 통해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1독서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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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전(學田)에 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학전은 1991년 아침이슬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이 세운 소극장입니다. 전 1991년에 서품받았으니, 학전의 역사가 제 사제 생활의 역사와 같습니다. 전 학전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1992년 봄에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습니다. 그때 게스트로 나온 가수가 강산에입니다. 그 뒤로 학전을 잊고 있었는데 이번 다큐를 보면서 예전의 기억이 소환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열정은 가득했지만, 방향을 몰랐던 새 사제였습니다. 예비자 교리는 학원강사 부럽지 않게 강당에 가득 찼습니다. 주일학교는 아이들로 성당을 꽉 채웠습니다. 교사들과 청년들은 성당에서 봉사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열정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본당신부님은 자상하시고 용돈도 잘 챙겨 주셨습니다. 사제 생활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학전을 세운 김민기 선생님은 저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1994년부터 2024년까지 지하철 1호선 뮤지컬을 공연했습니다. 그는 많은 무명 배우를 스타로 키워냈습니다.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윤도현, 안내상, 김대명, 황현희 이름은 잘 모르지만, 얼굴은 아는 배우들이 학전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무명의 배우를 발굴해서 11주 연습을 시킨 후에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렇게 다듬어진 배우들은 성공하였고 김민기 선생님은 주저 없이 그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날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학전은 말 그대로 배움의 터전이었습니다. 학생이 졸업하면 학교를 떠나듯이 학전에서 이름을 알린 배우들은 더 큰 세상으로 날아갔습니다. 학전은 배우들의 '못자리'였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일들을 추진했던 개척자였습니다. 배우들의 4대 보험을 학전의 이름으로 가입해 주었습니다. 배우들과 계약서를 만들어서 배우들이 월급을 받도록 했습니다. 학전이 성공하면 배우들의 수입도 늘어났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 은행에서 전세자금을 대출 해 주었고 한 무명 배우는 전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김민기 선생님은 자신은 뒷것이라고 했습니다. 배우들은 앞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키운 것은, 학전이라는 극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키운 것은 대한민국의 문화와 예술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에 우뚝 선 K Pop과 K Culture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면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 위에는 조용필 땅 아래에는 김민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나이인 둘은 언젠가 한 번 만났다고 합니다. ‘조용필은 김민기를 존경한다고 했고, 김민기는 조용필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난 내게 주어진 '학전'을 잘 돌보았는가? 난 뒷것이 아닌 앞것으로 나 자신을 내세운 것은 아닌가? 난 건물을 세우고 추억은 만들었지만, 나의 학전에서 만난 이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헌신과 열정을 다했는가? 돌아보면 부끄럽습니다. 이제 어쩌면 저에게 마지막 '학전'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뒷것이 되어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꿈과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로 인해 슬픔은 기쁨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되고, 두려움은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학전의 김민기 선생님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김민기 선생님의 '친구'를 나누고 싶습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나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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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도착지는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염원하는 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삶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처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해 들어가고자 하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에 도착하고자 오늘도 이 신앙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런 하늘나라는 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소멸이나, 끝남을 이야기합니다만 또 다른 죽음의 의미는 멀어짐과 갈라짐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멀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그렇게 인간과 하느님을 갈라놓았고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도 갈라놓았습니다. 이것에 죄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죽음과 반대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은 멀어짐의 반대이며 갈라짐의 반대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가까워지는 것이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멀어졌던 인간은 주님의 희생으로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가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런 영원한 생명은 그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고도 말씀하십니다. 그 순서는 사랑의 크기로 하느님께서 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꼴찌는 첫째가 되는 기적을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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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은 시골입니다.
집 뒤는 바로 산입니다.
1분만 걸어가면 바다입니다.
그래서 집에 벌레가 많이 들어옵니다.
자주 출몰하는 벌레는 이런 종류입니다.
돈벌레, 거미, 나방, 지네, 콩 벌레, 말벌….
살다 보니 유독 벌레가 많이 들어오는 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 어떻게 많이 들어오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날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날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꼭 힘든 일들이 뭉쳐서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냥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그냥 그런 날입니다.
그런 날이 있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벌레가 많이 나오는 날은 그냥 그런 날이고
벌레가 많이 나오지 않는 날도 그냥 그런 날이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저 살충제를 뿌리면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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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따름과 보상>
새벽 교황님 홈페이를 여는 순간 “거룩한 소식”에 감동했습니다. 어제 월요일 방콕에서 순례차 온 100명 불승(佛僧)들에게 “더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하자”며 하신 다음 취지의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1.상처받은 인류와 지구를 함께 치유하자.
2.어느 누구도 혼자 구원받지 못한다.
3.서로를 돌보고 환경을 돌보자.
4.가톨릭교회와 대화와 협력을 계속해 나가자.
어제의 행복했던 기분이 오랫동안 향기로 남아 있습니다. 거룩함의 향기, 사랑의 향기입니다. 오전 집무실에서 공부중 문이 열리며 환한 얼굴이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왜관 수도원의 사랑하는 블라시오 아빠스님이 방문했던 것입니다. 왜관 어느 수도형제의 모친 장례미사를 봉헌한 후 귀원 도중 요셉 수도원에 잠시 들렸다 제 집무실을 찾은 것입니다. 아빠스님이 함께 찍어 전해 준 사진을 이곳 원장수사와 나눔중 두고 받은 대화입니다.
“사무실에 보름달이 두 개 뜬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니 참 반갑고 고마웠답니다. 떠난 후에도 이렇게 아쉬움 느끼기는 처음이네요. 마치 사랑의 향기, 거룩함의 향기처럼 느껴지네요. 예전 영혼의 고향집 같은 왜관에 대한 향수(鄕愁) 탓인 듯 합니다.”
이런 느낌은 이젠 고인이 된 예전 아빠스님이나 주교님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만나면서 그 반가웠던 느낌과 흡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거룩한 삶, 사랑의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서의 공통적 느낌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수제자 베드로의 단순성이 빛납니다. 어제 많은 재물로 인해 예수님 따름에 실패했던 어떤 부자와는 달리 오늘 베드로와 그 제자 일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음을 선언하며 보상이 뭣인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즉시 따름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초대교회 선교사들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음을 봅니다. 저 역시 나름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와 주님을 따르기 42년이 됩니다만 박해의 기억은 없고 받은 축복이 끝이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형제자매들이 되고 어머니가 되었는지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수도자들이나 사제들의 소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의 추종에 따른 사랑의 보상과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보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를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축복입니다. 비단 수도자나 사제뿐 아니라 각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모든 이들 역시 보상의 축복이 뒤따릅니다.
베드로의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제1독서 말씀의 권고가 정말 큰 축복을 받은 베드로 사도임을 깨닫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용기백배 더욱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토록 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죽어야 끝나는 “따름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참 고무적인 다음 말씀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는 “마음의 허리에 띠를 매고”, 즉 단호히 주님을 따르는 준비된 삶을 상징합니다. 이런 권고 자체가 베드로의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거룩한 삶은 그대로 사랑의 삶의 반영입니다. 사랑의 추종, 사랑의 보상입니다. 주님을 따를수록 사랑과 더불어 거룩해지는 삶입니다. 어제 읽은 거룩함에 대한 주석에서 크게 배웠습니다.
“거룩하다”(하기오스)라는 단어는 일종의 경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삶에 대한 비전과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그에 따른 행동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분명히 나타날 때 그것이 참된 거룩함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특정한 온전함, 즉 우리 자신, 우리 주변 사람들, 우리 환경 전체 및 하느님과의 완전한 조화를 의미한다.”
아가페 사랑과 함께 가는 거룩함임을 깨닫습니다. 9년전 쯤 이때쯤 제 자작시와 이에 대한 댓글을 반가이 다시 읽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사랑이 그리울 때 눈들어 바라보는 바다같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바다, 구름은 섬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라보는 하늘 바다, 구름 섬
나 하늘이 되고,
구름 섬의 바다가 되네
나 하느님의 사랑이 되네” <2015,5,23>
이 또한 주님을 따름에 주신 은총의 선물같은 깨달음에 시입니다. 이런 사랑의 깨달음이 알게모르게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라파엘라 자매의 오래 전 아름다운 댓글을 지금에서야 제대로 읽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수사님은 하늘을 보시는군요. 불암산이 유난히 수도원 가까이 내려앉았던 지난 달 어느 날(5월10일), ‘서로 사랑하라’는 수사님 말씀을 들었거든요. 우유에 담은 커피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향기로 남았어요.
그리고는 그 향기 다시 맡고 싶은 마음에 이곳 홈페이지를 자주 찾아오고,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를 사서 읽고 그 책을 다시 견진 대자에게 선물했답니다. 아마 그의 영혼도 수사님의 향기로 더 맑아졌을 거예요.
며칠만에 이곳에 들어와서 ‘바다’를 읽는데 미소가 지어졌답니다. 어쩌면 수사님의 마음과 저의 마음이 이렇게 같은 걸까요? 저도 때로는 하늘이 바다로 보이거든요. 언제나 영혼도 몸도 유월나무처럼 싱그러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이 찌푸둥할 때 찾아와 씻을 곳이 생겨서 참 좋은 라파엘라 올림”<2015.6.3.>
9년전 이맘때의 글을 오늘서야 제대로 읽습니다. 뒤늦게 라파엘라 자매에게 거룩한 삶의 축복을 빕니다. 문득 생각나는, 만나는 이들마다 친구로 만들었다는 옛 베네딕도회 출신의 영국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은 진정 거룩한 분입니다. 엊그제 어린이들과의 문답식 강론을 하신 89세의 교황님은 참 거룩한 분이자 영원한 어린이입니다. 아이들과의 조화가 참 아름답습니다. 거룩함은 조화의 사랑으로 환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할 때, 우리 모두가 무엇이라 기도합니까?”
<우리 아버지요>
교황님은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고 부연 설명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할 때 주님을 모시며 그분은 우리 모두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것은 진실입니까?”
<예>하고 대답하는 어린이들입니다.
“성령은 평생 우리를 동반하십니다. 성령은 여러분들이 착한 일을 하라고 인도하시며 어려운 때에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어린이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후 성모님에 대해 나눕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이름은 무엇입니까?”
<마리아요!>
이어 어린이들과 함께 성모송을 바칩니다. 강론 끝 무렵 교황님은 어린이들에게 그들의 부모님들과 조부모님들, 아픈 아이들,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다음 마지막으로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모두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89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중 어린이들과 대화식 강론을 하시다니 놀랍지 않은지요! 그 사랑의 삶이, 거룩한 삶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 답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더욱 주님 추종과 더불어, 사랑의 향기, 거룩함의 향기 그윽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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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때문에>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마르 10,29)
나를
멈춥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하여
나를
비웁니다
당신으로
채우기 위하여
나를
버립니다
당신이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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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에게 주시는 복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멀리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이와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백배가 넘는 형제들과 가족들을 얻을 것입니다(참조: 마태 19,29; 마르 10,29-30; 루카 18,29-30). 한 사람 대신 더욱 강렬하고 놀라운 사랑으로 맺어진 수많은 아버지와 형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경험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마다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와 한 집을 떠나왔지만, 아무런 노력이나 보살핌 없이도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를 얻었을뿐 아니라, 집들과 땅들과 아주 충실한 종들까지 얻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어디를 가든 그들은 여러분을 자기 가족으로 맞아들여 환대하고 존경하며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 여러분을 돌봐줄 것입니다.
-요한 카시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이것이야말로 부유하신 하느님의 둘째 측면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을 주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선물을 원하는 만큼 많이 받게 하기 위해서다”라고 한 학자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최고의 천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내게도 주신다. 만일 내가 천사들이 받는 것만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는 천사가 풍성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것 만큼 받게 될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하느님이 영원 전부터 다음과 같이 행동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자신이 영혼을 기쁘게 하는 일에 푹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신다." 부유함의 셋째 측면은, 무언가를 주되 답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되돌려 받기 위해 준다면, 그러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자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이 실로 부유하심을 드러내는 증거는 그분께서 무심코 주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야훼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시면 16,2)라고 예언자가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한 분만이 “주님”이시고 “성령”이십니다.(17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주 예수님, 당신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나이다. 이른 아침 떠오르는 해처럼 모든 이의 마음과 영혼을 비추는 빛이심을 믿기에 당신을 환영합니다. 당신 앞에 나아가 제 마음과 영혼을 열어놓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제 영혼 구석구석, 특히 상처받고 죄와 나쁜 습관이 뿌리내리며 어둠이 집을 짓는 곳을 밝히시려고 빛이 되어 제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저의 존재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0 빛 중의 빛이신 예수님, 당신의 빛으로 제 마음을 감싸주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54)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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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10,29~30)
흔히 우리가 자주 쓰는 ‘때문에’는 의존 명사이므로 문장 맨 앞에 홀로 쓰일 수 없습니다. 사전적으로, 『 ‘때문’은 본디 명사나 대명사, 어미 ‘-기’, ‘-은’, ‘-는’, ‘-던’ 뒤에 쓰여, 앞에 오는 말이 뒤에 오는 일의 까닭이나 원인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나타낼 때, 때문에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언뜻 자연스러워 보여도 때문에란 표현이 자칫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배우자나 자식 때문에, 어떤 정치가 때문에, 어떤 교사와 학부형 때문에 등. 그런 점에서 어떤 분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덕분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과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입니다. 세 음절의 엇비슷한 말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덕분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의 표정은 밝고 둥근데, ‘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의 표정은 어둡고 모가 나 있습니다. 덕분에는 감사와 긍정과 포용을 낳고, 때문에는 불평과 부정과 분란을 낳으니 당연지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덕분에를 입에 달고 살면 감사와 자족감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불어나 삶이 즐겁고 평안합니다. 반면에 ‘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살면 작은 틈이 둑을 무너뜨리듯 일과 관계가 꼬이고 부실해져 삶이 힘들고 피폐해집니다. 똑같은 결과를 두고 어떤 이는 당신 덕분이라고 고마워하고 어떤 이는 당신 때문이라고 투덜댑니다. 저도 한때는 ‘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살아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잦은 수술 후, ‘이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제 삶은 온통 ‘덕분’이었습니다.
어제 복음의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과 대화가 원인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그 결과, 보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과 만남에서 밝히신 대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1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10,28) 하고 자랑하듯 표현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10,29-30) 라고 응답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라고 강조한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시련과 박해을 겪을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라고 원망하며 살아갔거나 떠났을 겁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를 입에 달고 원망하며 살았던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한 현세에서 누릴 상급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보상을 믿지 못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며 꼴찌가 되었을 겁니다, 반대로 ‘주님 덕분에’라고 입에 달고 살았던 제자들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 세상에선 성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내세에선 분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내세에서 첫째가 되어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를 재차 강조한 의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우고 깨닫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8, 36.35) 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란 표현의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사용을 희석시키고, 승화해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사용의 가장 압도적인 표현은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에’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절한 가수 ‘유재하를 유재하’로 만든 「사랑하기 때문에」란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리고 비우며 목숨까지 바친 것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순교를 애덕의 완성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의 성인 성녀들이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사랑하면 비록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 때문에 ‘당신의 나’이길 바랄 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사를 음미하길 바랍니다.
『 (...)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조용히 따르리 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를 대신해서 아빌라는 데레사의 기도를 보냅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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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본문에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담을 느끼고 떠나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 문장에서 “버리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아피에미’는 ‘어떤 것을 두다’, ‘용서하다’, ‘없는 것으로 하다’ 등,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옮기는 낱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버리다’ 또는 ‘포기하다’에 해당하는 낱말을 쓰지 않고 ‘아피에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 문장을 극단적인 ‘포기’나 과장된 ‘비움’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합니다.
독서에서는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고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거룩함과 사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고, 거룩함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녀원에 입회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녀님이 자기가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여기저기 발자국을 내버렸습니다. 수녀님은 불같이 화를 냈고 사람들은 민망해졌습니다.
철저히 버리고 포기하며 살려고 애썼지만 정작 자신의 완고한 자아는 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버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집과 형제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범적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하 자료 추가 보관 ------------------------------------------------
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 세상 모든 것을 100배 누리는 법
오늘 복음은 어제의 부자가 예수님의 뜻대로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어놓지 못하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간 다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과 당신 복음을 위해 내어놓는 것은 100배로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아버지께서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면 어땠을까요?
사제가 되어 만나는 수많은 아버님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집문서나 땅문서, 혹은 호적에 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제관에서 잘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의 황창연 신부는 잠비아에 엄청난 크기의 생태 마을을 조성 중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조달할까요?
그분은 유튜브에 잠시만 필요한 액수만큼 모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단숨에 20억이든, 30억이 모입니다.
그러면 바로 계좌를 닫아버립니다.
돈을 기부하고 싶었어도 기회를 놓친 이들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신부님이 투명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돈이 모이는 법칙은 단순히 종교적인 자선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초밥 도시락을 팔아서 수천억대의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은 이러한 원리를 ‘수각 이론’이라 하여 가르칩니다.
수각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너무 빠르게 흐르지 않게 파 놓은 구덩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수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롭게 하도록 물을 잠시 모아두는 수각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한 물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식당 요리사가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주인을 망하게 하려고 양념을 팍팍 넣고 양도 많이 주었더니 장사가 더 잘 되어 주인이 더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 이로움이 더 모이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창조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면 무엇이든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한 일을 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면 돈을 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Enron)은 1990년대에 급성장하며 혁신적인 기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엔론은 재생 에너지와 같은 선한 일에 투자하는 기업으로 홍보되었으나, 실제로는 경영진이 회계 부정과 사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2001년 엔론의 부정행위가 폭로되면서 회사는 파산했고, 많은 투자자와 직원들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이 도와달라고 할 때 만약 그 사람의 통장에 많은 액수가 들어있고 고급 승용차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임을 안다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왠지 모기에 피를 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을 쓸 때 물건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듯이 좋은 일에 쓰이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의 배를 불려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기에 피를 빨리는 느낌을 돈 주고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에 집착을 버리고 좋은 일을 향해 모든 것을 흘려버릴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하늘에 두지 않으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가난하게 죽게 된다.
내 것은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면서 더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가져도 가난하게 삽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거룩한 이를 통해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재물과 지식과 사랑이 충만히 지나가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십시오.
내가 흘려보내는 것을 백 배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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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청년은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준비할 줄 모르고 재물에다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시면서 슬픈 얼굴로 돌아가는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재산의 번영,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축복의 표지라고 믿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고, 번영하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는데 놀랐다.
여기서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을 견디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이 쉴 수 있는 집들과 교우 형제자매들과 어머니 같은 여교우들, 자녀들을 대신하여 대자 대녀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만나게 되었다. 토지를 버린 사람은 교우들의 토지에서 필요한 것을 얻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살게 해 주시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고 있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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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깊이 파묻힐 때
씨감자를 묻은 지 벌써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번듯한 텃밭이 아니라 짜투리 땅에 남은 씨감자를 대충대충 심었습니다.
정말 볼 품 없는 씨감자를 묻으며 다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 비가 오고, 쨍쨍 해가 뜨고를 반복하면서 다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싹이 올라오고, 쑥쑥 자라나, 이제는 푸른 잎으로 무성한 제대로 된 감자밭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뜻밖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머지않아 풍성한 결실을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눈에 비친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정말 부족해 보이는 ‘나’이지만 하느님께 ‘푹’ 잠길 때, 온전히 그분께 깊이 파묻힐 때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축복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아주 자신 있게, 무척이나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보시다시피’란 어떤 말입니까?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스승님께서 잘 파악하고 계시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처럼’
그만큼 베드로 사도의 자기 버림과 예수님 추종은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적당 선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열렬히, 7-80%가 아니라 120% 투신하는 적극적 버림이요, 적극적 추종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적인 버림이 가져다준 충만한 자유였습니다.
전적인 투신이 가져다준 원초적이며 근원적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주머니 속에는 땡전 한 푼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 온 천지를 다 얻은 충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현세적 삶은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순간들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일상은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눈은 벌써 이 세상 그 너머에 자리한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잘 버림으로, 그분께 푹 잠김으로, 120% 투신함으로 인해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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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말 가운데에 있는 ‘버리고’ 라는 말은, “버려두다. 그대로 놓아둔 채 떠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사도들의 ‘마음’이
‘세속의 일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에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은, 세속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또 세속의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따라나섰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완전한 비움, 완전한 이탈과 자유’를 나타냅니다.>
필리피서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그 ‘버림’과 ‘비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허무한 것’을 모두 버리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4ㄴ-38).”
이 말씀에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3)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버림’ 자체보다 ‘버리는 이유와 목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버리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또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맹목적인 무소유는,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과 이유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인간 세상의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4) 30절의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이 말씀의 바로 뒤에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씀을 붙여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내세에서는 모든 것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백배’ 라는 말은, 풍성함,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31절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처럼 처지가 바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그처럼 이쪽 세상에서 돈과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심판,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나라의 밖에서’ 그 나라의 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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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하는 삶
<2024.5.28> 아침을 여는 묵상(행 13:1~12절)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하는 삶❞
❚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할 때에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성령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사역해야 합니다(1~3절).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란 두 직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이고, 또한 성령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 다섯 명이 소개됩니다.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이들은 출신도 사회적 지위도 달랐지만 합심하여 금식과 기도로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 안에서 사역들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2절). 말씀에 순종하여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구별하여 파송합니다(3절). 성령께서 이 일을 하게 하셨고, 앞으로 이방 선교 역시 성령의 주도하에 진행되어 나갈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보다는 내 경험, 내 감정,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내 마음과 몸이 움직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선택받은 우리는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성령께서 모든 일을 주도해 가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오늘 하루의 일정 가운데도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 성령 안에서 나아가고, 성령 안에서 협력해야 합니다(4~5절).
두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보냄을 받아 실루기아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부터 배를 타고 구브로로 건너갔습니다(4절). ‘성령에 보내심을 받아’... 그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파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일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인 실루기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섬입니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며, 청동 수출 지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그들은 구브로 섬에서도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인 ‘살라미’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5절). 아울러 이들의 사역을 잘 돕는 역할을 감당할 마가 요한이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5절b).
하나님의 사역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돕는 자로서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훼방꾼이 아닌 기도와 때론 물질의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돕는 조력자(helper)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마음과 결단을 가질 때, 교회 공동체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더 나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감당해야 하는 일도 여기지 말고, 지금 바로 내 자신이 그렇게 협력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아름답게 사역이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해야 합니다(6~12절).
그들이 그 섬을 다 돌고 바보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바예수라고 하는 거짓 예언자인 유대인 마술사를 만납니다. 그는 총독 서기오 바울 곁에 늘 붙어 있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속적으로 마술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거짓된 마술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예수는 자신의 생계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씁니다(8절). 헛된 욕망과 양심을 버리고, 오직 말씀만을 좇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9절). 누가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시키면서 앞으로의 선교 사역이 바울을 중심으로 진행 되어 갈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의 악행을 지적하고, 소경이 되게 함으로써 복음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총독은 바울이 전한 주의 복음을 영접하게 됩니다(12절).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할 때, 승리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기에 날마다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이끄심대로 따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늘 사탄의 방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바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 안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므로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성령 안에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 어느 누구라고 품을 만한 넓은 마음으로 영혼들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삶의 자리에서 온전히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13:1~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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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8 주간 화요일-묵상과 기도
베드로 사도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계시되었고, 복음 선포자들에 의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그 영광이 교회에 선포되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그리스도의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라. 무지의 욕망으로 살지 말고 하느님께서 부르신 그 목적에 따라 거룩하게 사십시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 와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 아버지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반대로 집과 가족 그리고 토지를 백 배 받을 것이고 내세에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회상과 성찰
-.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봅니다. 어제 등.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대화 등 나의 모습과 말, 행위를 바라봅니다.
-. 사랑과 자비, 진리와 선을 중심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함께 자선의 길을 찾습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의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나의 다짐과 실천의 내용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받을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탐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안에서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께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에 가르쳐 주신 구원의 시간과 방법을 두고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 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일들이 하늘에서 파견된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이들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베드 1,10-16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르 10,28-31
말씀 실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둡니다. 그분께서 주님이시고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구원의 가치에 따라 살면서 너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줍니다. 진리와 선과 거룩함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먼저 찾고 실행합니다.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됨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집, 형제 자매,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들을 복음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을 복음화 길로 인도합니다. 그 복음 때문에 그 생명의 길 때문에, 집과 토지와 소유도 나와 가족의 세속적 이익과 부의 가치에 따라 보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가난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필요와 도움과 사랑의 도구로 바라봅니다.
그렇게 하여 토지와 소유와 부도 하느님으로 부터 유래한 것이며 그분께서 몸소 만드셨다는 것을 실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뜻을 깨닫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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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린 사람이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보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도 따라옵니다.
박해를 옛날의 모습처럼
종교 때문에 죽어간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막는 모든 행위
선을 실천하려는 것을 막는 모든 행위를
박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런 대단한 삶을 살아간다면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위선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선을 행하는 사람도
복음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혼란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진 것을 버리고 살기도 쉽지 않은데
주위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말을 하면
더 힘들어져서
그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박해의 상황을 마주하기는 쉽지 않지만
박해의 상황은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신호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맺게 되는 열매에 대해 질투해서
박해를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의 선행이 열매 맺고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질투에서 오는 박해에도
우리의 선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음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더 기쁘게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 길을 막는 사람은
더욱이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지지받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사람에게 의지하기 보다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버리는 것을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합니다.
미련이 남아 있는 인간 관계가
조금은 쉽게 정리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
그것이 쉽지 않기에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삶을 선택하는지
끊임없이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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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제가 범한 모든 죄를 전능하신 하느님과 신자분들께 고백합니다. 사제생활 한지 25년 되었습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은 점점 작아지시고 저는 자꾸 커져만 갑니다. 더불어 고해소에서 제가 내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예전에는 존경했던 선배 신부님들이 '일'로 부딪히다보니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신경써서 사목하는 대상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고 대우해주는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갑니다.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으면 누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가장 좋은 가운데 자리에 먼저 가서 앉습니다. 어르신들이 무릎을 꿇고 술을 주셔도 이제는 앉아서 잔을 받는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만나뵈러 가정 방문을 갔는데, 이제는 제가 예수님이 되어 가정방문을 다닙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는 불평과 비난, 지시의 말이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제가 말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집니다. 신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무조건 내 말이 맞고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하루라도 기도를 빼먹으면 큰일나는 줄로 알았는데, 지금은 기도를 안해도 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 모두 용서하여주십시오."
올해로 사제서품 받으신 지 25년이 되는 어느 선배 신부님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고해성사의 형식으로 써내려간 글입니다.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지금 사제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많은 항목이 저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습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제로서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지금 제가 사는 모습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가 버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채워주신 것 같습니다. 2년간 빌려쓰는 신세이긴 하지만 혼자 쓰기에 차고 넘칠 정도로 넓은 집이 있고, 사는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많은 가재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를 가족처럼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수많은 명일동 성당의 신자분들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부모님도 되어주시고 형제도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풍족하게 누리고 있으면서도 감사하며 살지 못한다면, 버리고 포기했다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과한 욕심일 것이고, 그런 욕심을 부렸다가는 나중에 하느님께 혼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눈 앞에서 바라보는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가족과 재산을 포함한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따름'과 보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을 더 잘 따르고,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자신이 버린 것보다 수백배나 더 귀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상급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급이 주어지는 방식이 좀 특별합니다. 성과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는 인간 사회의 방식이 아니라,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하느님 나라의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포기한 것은 내 삶의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할 뿐, 나머지 90퍼센트는 여전히 우리 손에 있습니다. 또한 포기한 그 10퍼센트 마저도 수백배의 은총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하느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이 '꼴찌'의 모습이더라도 불평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내가 받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면, 지금 부족한 부분은 주님께서 훨씬 더 크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또한 당신 나라에서는 우리를 '첫째'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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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8.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과 버림을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 ♣
우리는 날마다 어딘가를 향해 떠나며,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씁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몸짓 안에 담겨 있는 생각과 의식은 무엇일까요? 이 움직임 안에 행복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면 삶을 한번쯤 깊이 되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떠나지만 왜 떠나며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나는지, 시간과 돈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의 선을 위한 것인지 복음에 비추어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0,28)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현세에서 백배의 보상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29-30). 이처럼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고, 늘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보상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며 항구히 추종하라는 새로운 부름인 셈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고통과 박해가 따르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지요. '예수님 때문에’(10,29) 자신을 떠나서 지혜이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만이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제자들이 부모와 형제, 토지를 모두 버렸듯이 어려움과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법적인 포기가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애착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떠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자체가 영성생활의 종착점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요 하나의 매듭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에 어긋나는 온갖 애착을 버리는 갓입니다. 그러려면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떠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보상은 이런 떠남과 떠남에 따른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맺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의 뜻을 따라 죽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 떠나셨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포기하셨지요.
자기 것에 애착하고 소유의 끈을 놓지 못하며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을 맞으면 그 누구도 티끌 하나도 지니지 못한 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사람답게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죽음을 위해, 지금 여기서부터 애착을 버리고,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해가는 삶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것만 챙기는 옹졸함, 재물에 대한 집착, 하느님의 주도권을 무시함, 악에 동조하고, 불의에 가담하는 삶,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무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떠나 모두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그분 안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꼴찌 인생이고 바보짓이고, 박해까지도 각오해야 하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최고로 행복한 인생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진정 소중하고 값진 것을 얻으려면 자신을 떠나 모두를 버리고 되돌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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