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1850년의 60년 간을 요약하면
좌익과 우익이 서로 밀고 당기느라 권력도 왔다리, 갔다리 한다.
대혁명으로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했다면
왕정복고는 다시 보수 우익쪽으로 권력이 이동한다.
프랑스는 이 시기를 결국 불안하게 보냈다. 문화 변천을 보면
루소의 계몽주의 --> 낭만주의로 – 다시 고전주의로
낭만주의는 현실을 도피하려 한다.
고전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들은 현실을 긍정하려 했다.
1815년 이후, 이들은 현실을 도피하여 과거로 돌아갔다. 역사를
따지고, 민족주의를 불러냈다. 민족국가가 나타났다.
* 이 시기에 발자크가 나온다.
1830 ~1848년
왕정시대이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상인시대(부르주아지)
자유방임 시대가 된다.
산업혁명은 노동자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나타난다.
프록코드에서 --> 일상의 노동복으로
중절모 ---> 캡으로
의상이 변한다.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사이에는 언어도 차이가 나타났다.
(부르주아지는 점잖은 말을 사용하고(가식이지만) 노동자는 상말을
마구 사용한다. 상말은 가식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19세기는 국가가 민족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민족국가가 나타난다.
**혁명시대를 거치면서
사회평등이라는 이념을 법으로 정했다.
법은 사회 관습을 이기지 못한다.
봉건제도가 사라지고, 봉건 귀족과 기사가 힘을 잃다
그렇더라도 귀족은 타성(관습)에 의해 특권과 오만을 유지했다.
시대의 흐름이 절대 평등을 요구했으나 이를 수용하는
용기 있는 왕이 없었다.
교회도 귀족과 같은 특권을 누렸으나 포기했다.
세금 면제, 직업(고위직) 세습 등
프랑스 혁명을 프랑스 역사에서 정당한 사건으로 수용한다.
교회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재판을 금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 --->교회가 경건해지면서
오히려 교회가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체제와 신정부(혁명정부)의 투쟁으로 무정부 상태가 나타난다.
프랑스 통일을 완성했다.(봉건영주 세력으로 쪼개진 프랑스가)
구체제의 제도들을 수정했다.
나폴레옹은 구제도를 수정했으나, 영웅주의 신념은 바꾸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자유를 부정함으로-->예술, 문화를 지원하지 않았다.
고전주의(나폴레옹의 영웅주의에 부합)가 나타나다.
유럽을 전쟁 속으로 --->징병제도가 나타나다.
(유럽인의 의식에 국가 개념을 심어 주었다. 군인에게 싸움을
독려할 때 우리의 위대한 조국을 위하여,라고 했다.)
자유, 평등, 박애 -->오히려 근대 전제주의가 나타나는 원인을 제공
자유, 평등, 박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독재국가가 나타났다.
프랑스는 전통이나, 통치제도가 영국과 달라서
영국이 걸었던 길을 걷지 못했다.
***혁명시대의 유럽 문화(요약)
낭만주의 — 계몽주의(이성주의)에 반발하면서
인간은 이성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인간에게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 – 낭만주의가 나타나다. 독일의 질풍노도 시대, 역사 소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
괴거로 회귀하여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
음악 — 민요(민족의 과거를 불러온다.)
대표적인 작곡가 -- 베토벤
4. 미술 낭만주의 --> 고전주의로
두 사조가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고 한다.
들라크로아, 다비드, 컨스터블 등등
5. 철학 -- 헤겔 철학
5) 나폴레옹 이후의 영국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 전쟁-->평화로 오는 과정의
여러 문제들을 겪는다.
(1) 평화가 오고
(2) 밀값의 대폭락(1쿼터 120실링이 60실링으로 폭락
소작료를 내는 농민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
흉년으로 60실링이 다시 130실링으로
값이 떨어질 때는 농민이, 값이 오르자 노동자가 폭동을 일으킨다.
(3) 기계로 만든 무기를 군에 납부하던 공장주들이
전쟁이 끝나자 일거리가 없어 죽겠다고 아우성 – 노동자 해고로
25만 명의 제대군인이 일자리가 없어 실업자가 된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뻬앗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4) 정부의 대책
폭동은 항상 선거권을 주장했다. 농민, 노동자를 선거권으로 달랬다.
예전에는 일정 이상의 자산가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5) 이때는 조지 3세 – 조지 4세 통치기로 국민에게 인기가 없었다.
특히 조지 4세는 점잖고, 신사이긴 해도, 내연녀와 바람을 피우고
왕비와는 이혼 소송 등으로(국민이 추문으로 받아들였다.) 인가 없었다.
(6) 국민의 저항(폭동) - 선거권 주장이 있었다.
*1811년에 만체스터 인근의 노동자 폭동 – 군의 진압으로 11명이 죽다.
(노동운동에서 유명한 사건이라고 한다.)
수습 -- 경제호황이 왔고, 국민이 조지 4세의 추문 사건에 푹 빠져서
폭동 등의 저항정신이 희석되었다.
(지금도 정부가 위기에 처하면 추문 사건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7) 인기가 없던 조지 4세가 죽고(1830)
프랑스는 샤를 10세에서 루이 필립으로 정권 교체가
프랑스 혁명 사상이 유럽에서 퍼져나가면서
유럽의 전역이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서 몸살을 앓는다.
(8) - 1830-32년
선거법 개정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선거법이 모든 걸 해결하듯이
지배층은 개정을 두려워 했고, 하류층은 갈망했다.
선거권 개정이 이루어 졌다.(선거법 개정은 역사에서 아주 큰 사건이다.)
(9) 1837년 —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다.
여왕은 오늘의 철의 여인이라는 여수상의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10) 자유무역
의회에서 자유 무역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런저런 구실로 무역에 간섭했다고 한다.
(11) 영국의 외교 노선은 강경했다. - 해외에서 전쟁을 벌여 식민지를 확대.
강경노선이 오히려 전쟁 억제 효과가 있었다.
러시아 남하 정책을 봉쇄한다 – 터키 편엥서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다.
====> 이후로 빅토리아 시대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