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40
1월19일[연중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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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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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WtIPkJVCZs
[작은형제회 양두승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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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무렵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근사한 설렁탕집>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점심을 한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뺑뺑 돌아다녀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더군요. 아이들은 보채고, 큰 마음먹고 한번 쏠려고 했었는데...
"이를 어쩌나? 집에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근사한 설렁탕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우리는 로또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이 크게 떠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눈치 없는 한녀석이 "신부님!" 하고 크게 소리치다 보니 사장님이 제 신분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불쌍하게 생긴 아이들 얼굴과 그에 못지 않은 제 얼굴을 연신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크게 선심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 앞에 놓여진 음식을 보고 저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 식탁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밥도 꾹꾹 눌러 담아주셨지만, 설렁탕 그릇 밑에 깔린 고기의 양이 벌써 달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큰 파전까지 하나 서비스로 주셨는가 하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10000원이나 디스카운트를 해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했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해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신 다음, 당신의 구원사업을 협조해줄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셨던 사람들 명단을 몇배수로 뽑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사업에 잘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식별하기 위해 밤새워가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가련한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은 덕 중의 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덕 역시 측은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영육 간의 고통, 영육 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좌절과 한계,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십니다. 종일,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사업에 매진하십니다.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많은 사람을 단 한 명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대면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고 잘 해결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십니다.
당신 홀로 힘으로는 중과부적임을 절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똑같이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고 계심을 저는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의 두 손이 되어드리고, 두 발이 되어드리는 하루이길 빕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드리고, 주님 기적의 능력이 되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진 바를 기꺼이 내어놓고 나누는 하루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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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FEMju4aL9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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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없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열둘을 지명하십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입장에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 같이 출발했는데 어떤 이들은 진전이 있고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를까요? 당연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기하다 넘어지는 사람처럼 목적 없이 달리다가는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끌어내리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유튜브 지식인사이드에 ‘40년째 운동하는 80세 할머니’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남들이 먹는 혈압약이나 당뇨약, 고지혈약, 골다공증약 등의 성인병 약은 입에도 안 대는 것은 물론 “감기, 몸살 한번 없었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 걷기 힘든 증상을 느꼈고 병원에 갔더니 협착증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근육이 감소해서 그러니까 근력운동을 좀 하세요.”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근력운동은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한 달을 하니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이 절실함이 보디빌딩 대회에서 시니어부 우승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헬스클럽 관장님이 대회에 나가라고 했을 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도 도전하는 거 좋아하니 일흔다섯에 시작해도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엔 비키니를 입는 것도 창피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려고 마음먹고는 개인 트레이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세 시간 식당 알바를 하며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만약 이 할머니 보디빌더를 그분의 부모님이 보고 계시면 마음이 어떨까요? 기쁠 것입니다. 당신들이 준 몸을 끝까지 잘 가꾸고 누구보다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혼다 자동차 주식회사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는 자동차와 엔지니어링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도전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인내와 혁신, 끊임없는 비전 추구를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회복력과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으로 역경에 맞서 혼다를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혼다는 “꿈을 가질 것, 끊임없이 도전할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라고 충고합니다. 성공이 있기까지는 99%가 실패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다면 그건 근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해 보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명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소명이 나를 창조한 이가 있고 불러준 분이 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오르지 않고 타인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소명 의식이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특별히 나의 삶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입니다.
신학생 때 같은 반 학생에 저에게 “형, 다른 사람들은 쓰러지는데 형만 혼자 1등으로 도달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 ‘다른 친구들하고 왜 함께 오지 않았니?’라고 하지 않으실까?”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올라야 나를 보고 다른 이들도 오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절벽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빠르게 오르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장 아랫부분에서 서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도 오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진보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영성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 사명입니다. 무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을 주신 분께 대한 사랑의 보답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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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필라델피아에서 올라온 청년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청년들의 세례명은 ‘알베르토, 가브리엘, 미카엘, 루시아, 레지나’입니다. 모두들 성당에서 함께 지냈고, 청년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쁘게 지내고,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사자성어’는 잘 몰랐습니다. 저는 올해가 용의 해이기에 ‘화룡점정, 용두사미’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눈을 크게 뜨고 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끝으로 새해의 덕담으로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짧은 저의 식견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의 지평을 더욱 넓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은 용맹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 용맹함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제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해치려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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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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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 말 성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그리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고,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이 세 가지, 곧 예수님과 함께 있음, 파견과 복음 선포,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짐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문장의 논리상 파견과 복음 선포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는 목적은, 첫 번째 목적인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로 뽑으신 열두 명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글도 모르는 어부들과 세리, 열혈당원까지, 그들이 보기에 대부분 죄인들을 모아 놓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네.’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통하여 사도로 변화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증언합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함께 박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하는 복음 선포자로 변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사람들로 변합니다.(사도 5,16 참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는 은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봉사자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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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물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두 사도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에 관해서 말할 때에, 그들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만 강조하고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기준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두 사도의 직업 같은 것을 먼저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열정, 사랑, 헌신 등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추대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신앙인들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어떤 지점을 ‘구원’이라고 정해 놓고서,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마음대로 그 목적지를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사도로 뽑힌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셔야 하고,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주셔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책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교회의 모든 일에는 언제나 항상 성령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본당의 어떤 직책을 맡을 사람을 정할 때, 본당신부가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나 항상 교회를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사도들이 하는 일은 사도들 자신들이 마음대로 정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위임해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만 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적 없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신 일을(마르 6,8-9)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교회는 ‘돈의 힘’으로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세속의 회사들처럼 돈벌이를 하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다가는 교회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 말씀에서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라는 말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도들이 예수님 앞으로 왔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내가 있던 곳을 떠나야 하고, 내 삶을 떠나야 하고, 나를 떠나야 합니다. 사도 직무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원래 ‘버림’이고, ‘떠남’이고, ‘따름’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떠나야 할 곳을 떠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라는 말은, 사도들이 받은 특별한 은총과 임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익히고 깨달은 것들을 다시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임무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는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마다 충실하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만이 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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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성경에서 ‘산’은 지형적으로 평지보다 높은 곳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산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느님과 가까운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고, 산은 그분께 다가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은 모세가 하느님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산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 사건은 하느님의 뜻이 직접 전해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져 성경 전반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모세의 예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된 장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마르 6,46 참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이미 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산에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온전히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시고 제자들은 응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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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열두 사람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깊은 친교를 나눕니다. 열두 제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똑똑하지도 않고, 이른바 ‘스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을 성숙시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성격이 급하고 또 어리석으며, 어떤 때는 현세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하여 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가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주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어떤 합당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마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현실적 삶의 풍요로움과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신자들은, 미사 전례 때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통하여 매번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감사기에, 미사의 마지막에 하는 응답으로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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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3,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열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시며, 열두 사도의 이름을 불러 세우십니다. 예전 초등부 피정을 할 때, 저나 다른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잘못 부르면 정색하고, 자신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정정해 주는 아이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이름은 중요하고, 그 이름은 자신의 존재며 신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몇 년 전 K팝 오디션에서 ‘이설아’라는 친구가 불러 많은 엄마뿐만 아니라 엄마를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를 회상하게 한 노래, 「엄마로 산다는 것은」에 이런 노랫말이 나옵니다. 『엄마도 소녀일 때가 엄마도 나만한 때가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셨던 엄마』 그런데 정작 더 마음 아픈 것은 엄마에게는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엄마에게도 분명 엄마의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아마도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사셨던 분이십니다. 제 엄마는 제 아버지의 성을 따서 ‘긴상댁’, ‘민자 엄마’ 그리고 제가 신부가 되고 난 뒤에는 아오스딩신부 엄마로 불리면서 인간으로서나 여성으로써 이름없는 세월을 사셨고, 지금도 엄마의 이름보다는 전 아직도 ‘엄마’라는 호칭을 마치 제 엄마의 진짜 이름처럼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제 엄마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 줄 수 있나요! 사실 이 묵상 글을 쓰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하고 불러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늦게나마 제 엄마의 이름, 조규옥 모니카를 조용하게 혼자 불렀는데도 참았던 그리움의 눈물이 쏟아지네요. 제가 참 주책이지요! 자식이 나이 들어가도 엄마는 엄마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신 다음 마음에 새겨둔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습니다. 사도란 ‘아포스톨로스, 즉 파견받은 자’란 뜻입니다. 당신께서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비록 부족하고 나약한 그들이지만 그들을 불러 당신의 사람으로 선택하시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당신과 함께 머무는 존재이며,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로 파견되기 이전에 그들은 먼저 주님의 제자로 주님과 함께 살면서 듣고 배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의 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친교를 통해 파견(=선교)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기에, 친교를 전제로 하지 않은 파견은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며 아울러 파견이 없는 친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파견된 사도들은 자신들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예수님의 정신, 얼, 영과 일치하는 만큼 자신들의 일, 곧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실행할 것입니다. (마태16,23참조)
오늘 예수님은 주님의 영으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당신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제자들 열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주는 그 순간부터 그들의 이름은 사라질 세상에서 사라질 이름이 아니라 영원히 교회가 존속하는 한 남겨질 이름, 하늘에 새겨질 이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지금 여기에 늘 살아 있는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 그들의 이름(=존재)은 세상에서 사라질 이름이며 존재였었는데, 이 순간부터 영원히 호명할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처럼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불러 주시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아이의 이름을 잘못 부르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리라 희망합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선 당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사셨던 모든 엄마 또한 저세상에서 주님께서 다정스럽게 부르셔서 당신과 함께 머물도록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세상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 기억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거룩한 일입니다. 예전 ‘동상이몽’이란 프로에 보면, 최수종이 자기 아내를 ‘하희라 씨’ 하며 불러 주는 게 참 좋더라고요. 우리 모두 호칭보다는 오늘 하루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름을 불러 주도록 합시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기에 자주 인용하는 ‘김춘수’님의 「꽃」이란 시를 함께 음미하면서 이름이 지닌 깊은 뜻을 다시 마음에 되새기는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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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에 부러운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과연 어떤 친구를 부러워했을까요?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그림 잘 그리는 친구, 노래 잘 부르는 친구, 춤 잘 추는 친구…. 사실 이런 친구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부러웠던 친구는 모발이 얇은 친구입니다.
저의 머리카락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완전한 직모입니다. 별명도 머리카락에 관계되는 것뿐입니다. 돼지털, 빗자루 등입니다. 완전히 뻣뻣한 직모인 머리카락을 넘겨 가르마를 만들 수 없었고, 조금만 길어지면 사정없이 뻗치는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스포츠머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싫어했기에, 모발이 가늘어서 자유자재로 머리 스타일을 만드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너의 머리카락이 너무 부럽다.”라며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가는 모발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대부분 머리카락이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리곤 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장원에 가도 “머리카락 숱도 많고, 모발이 이렇게 튼튼하니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제는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 모습도 언젠가는 만족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실망할 삶이 아닌 감사할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할 제자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어부였고, 세리도 있고, 열혈당원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유능함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바로 뿔뿔이 흩어진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포기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자기를 이끌어 줄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포기와 좌절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기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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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가까이>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당신 가까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당신께 들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들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닿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닿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안길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안길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스밀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스밀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물들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물들 만큼
당신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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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에 오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는 말씀대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는데,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기도하시고 선발했습니다. 그런데 뽑힌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으며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내세운 사람인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제가 뽑는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 왔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의 관계는 적대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 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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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성화(聖化)의 여정>
“성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부름, 따름, 섬김, 배움, 닮음-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 51,12)
어제 목요일 저녁미사는 왜관수도원의 주세환 프란치스코 새 수도사제가 주례했습니다. 저와 똑같은 수도명 프란치스코입니다. 문득 35년전(1989년 7월11일) 사제서품식 미사때 만감이 교차했던 감동스런 입당성가 445장이 생각났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 모두가 너나할 것없이 주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따름의 여정”은 동시에 날로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도반 형제들과의 더불어 성화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제자 열둘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십니다. 목적은 그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사명을 위임받은 제자들이자 사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단 사도들뿐 아니라 세례성사로 불림받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신원이 안으로는 주님과 함께 지내는 “제자”요,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라는 하나이자 둘인 이중신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둘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공동체에, 교회공동체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혼자가 아닌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따르는 여정을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우선했고 우리는 그 부르심의 성소에 응답한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의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셨으니 우리는 몰라도 나름대로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소의 부르심은 은총의 선물이자 신비라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함께 하며 따르기에 가능한 공동생활임을 깨닫습니다.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라 했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평생 성화의 여정입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날마다 부름-따름-섬김-배움-닮음의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기에 저는 믿는 이들의 신원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인이자 주님의 전사라 칭하곤 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 합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내면의 얼굴입니까?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우리 내면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인지 말입니다. 참 소중한 내 얼굴이자 이웃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 저녁 거울에 비춰보는 내 얼굴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내면의 얼굴인지 주님의 거울에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얼굴인가 그렇지 않은 얼굴인가? 평생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얼굴이듯 내면의 얼굴도 그러할 것입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내면의 얼굴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하루하루 끊임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려는 분투의 노력이 우리 삶에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력히 권하는바 각자 삶의 성경책 “렉시오디비나”하기입니다. 믿는 이들 하나하나의 인생이 미완의 성경책입니다. 하루1쪽씩 써내려가는 내 삶의 성경책, 나이 곱하기 365일 하면 내 삶의 쪽수가 나올 것이고 마침내 죽는 날, 이 내 삶의 성경책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주 틈나는대로 신구약성서와 더불어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한결같이 잘 따르고 있는 삶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예외없이 성화의 여정중입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한 현시점을 살펴보는 것이요 주님의 거울에 나의 내면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얼굴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날마다 평생 바라보는 똑같은 얼굴인데 사진으로보면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가 놀랍니다.
2009년 심은 애목들인 수도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는데 하루하루 볼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이렇게 거목이 되었습니다. 우리 내면의 얼굴도 그러할 것이며 주님은 한눈에 당신을 닮았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사울과 다윗의 일종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연속입니다. 둘 다 주님께 불림받은 거룩한 사람들인데 사울은 성소에 불충함으로 이미 하느님께 내침받은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충실해야 하는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필수적인 요소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늘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윗은 성소에 큰 위기를 겪습니다만 분별력의 지혜로 그 큰 유혹을 벗어납니다. 다윗을 쫓다가 다윗 일행이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뒤를 보는 사울을 발견한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성소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유혹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정말 아찔합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다윗이 뒤를 보던 사울을 비겁하게 죽였더라면 다윗의 성소 역시 위태했을 것이니 하느님께서도 다윗을 내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만약?”은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믿는 이들을 나름대로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저의 경우만 해도 다시 산대도 이렇게 살 수 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난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맡기고 하루하루 날마다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여 부름, 따름, 섬김, 배움의 삶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삶은 선택이요 행복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마지막날 주님께 봉헌할 “이야기(story;스토리)”와 “내용(contents;컨텐츠)” 풍부한 아름답고 거룩한 내 고유의 삶의 성경책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역시 다윗은 판단은 지혜로웠고 그의 인품은 참 멋지고 관대하고 훌륭했습니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 다윗은 부하를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은받은이가 아니시냐?”
새삼 성소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웃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주며 그들의 성소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각자 고유의 성소이기에 자칫하면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건방지고 교만한 어리석은 무지의 행위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지혜롭고 관대한 처사가 사울을 회개하게 했고, 그 감동적인 내용은 제1독서 후반을 아름답게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결국은 다윗의 영적 승리요 주님의 신뢰와 더불어 그의 성소도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형제 도반들과 더불어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정성을 다해 내 고유의 삶의 성경책을 잘 써가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은 나의 힘.
그분께서는 내 발을 사슴같게 하시어
내가 높은 곳을 치닫게 하시나이다."(하바3,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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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얇은 귀, 두꺼운 귀>
어제 사울은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요나탄에게 약속했지만 오늘 그 마음이 바뀌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마음이 자꾸 바뀌는 것인데, 사실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이 그리 항구하지 않고 자꾸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약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결심하지 말고 서약하라고, 서약도 인간에게 하지 말고 하느님께 서약하라고 강론에서 충고합니다.
그렇지요. 결심은 혼자 하고 약속은 둘이 하는 거지요. 그러니 혼자 한 결심은 언제고 자기 마음대로 깰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약속은 일방적으로 깰 수 없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깰 수 있는 건데 사람 간에는 혹 약속을 헌신짝처럼 깨어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과 약속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울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 항구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어제 결심한 대로 사울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면 죽이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게 되면 시기심과 증오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죽어버리고, 하느님이 죽어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되고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항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다윗의 말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다윗 주변에 인간적인 조언을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귀가 얇았고 다윗은 귀가 두꺼웠습니다.
귀가 얇다는 말이 있지요? 인간의 말을 걸러내는 기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만 받아들이고 인간의 말은 걸러내는 기능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의 말과 인간의 말을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확고한 식별 기준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니 내가 어찌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내가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 뜻대로 해야지 내 감정대로 하거나 내가 감히 어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과 기준이 다윗에게 있었던 겁니다.
귀가 뚜꺼워야지 얇아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인간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울과 다윗의 얘기에서 가르침 받고 교훈 삼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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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마르3,14)
<참사도!>
오늘 복음(마르3,13-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열두 명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도(apostolos)'라 이름하십니다. '사도'는 '파견된 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다니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먼저 그들의 직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그리고 마태오처럼 '어부와 세리'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 마태오와 반로마세력이었던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예수님의 인간 구원 활동의 정점(頂點)이 '십자가 죽음'이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배반도, 유다 이스카리옷 배반도 필요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태 26,56)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으로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당연한 모습처럼 다가옵니다.
떠나갔던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후부터는 '참사도의 모습'으로 대변신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참사도'가 됩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성령이 답'이네요. 우리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받고 참사도들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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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zltp3VHx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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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 13)
부르심과 머무름
이 모두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사건입니다.
부르심은
함께하자는
초대로 시작됩니다.
머무름은 서로를
알게 되고 나누게 되는
맞아들임의
가장 기쁜 사랑입니다.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분명
머무르는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머물러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머무름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이 있습니다.
사랑을 되찾는 길은
머무름입니다.
부르심과 머무름을
아우르는 것은
기도이며 감사입니다.
부르심은 봉헌이 되고
머무름은 내어맡기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질서는
부르심과
머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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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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