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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독일어: Franz Kafka,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5살의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독일어를 쓰는 꽤 부유층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정신적 폭력
콘골드(1972)에 따르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거대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업가'로 그리고, 카프카 자신에 따르면, '강하고 건강하고 먹성 좋으며 목소리가 크고 자기 만족감에 충만한, 우세하고 끈기있고 인간 본성과 지식을 갖춘 진짜 카프카'로 그린다. 헤르만 카프카는 야콥 카프카의 넷째 아들로 남부의 피세크(Pisek) 가까운 곳의 유대인 마을인 오섹(Osek)에서 프라하로 이주해, 외판원으로 몇 년간 일한 후, 액세서리를 파는 소매점을 열었다. 사업상 상표는 jackdaw(카프카의 체코어)로, 소매점은 곧 15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성장한다. 그곳에서 헤르만 카프카는 포데브라디(Poděbrady)의 양조업자 야콥 뢰비(Jakob Löwy)의 딸 율리(1856-1943)와 결혼하였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 헤르만에게 아들 카프카는 헛소리나 해대는 몽상가에 불과했고,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더구나 어머니 율리도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평일에는 부모 모두 집에 없었고, 카프카와 그의 형제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억세고 독선적이었던 헤르만은 틈만 나면 아들 카프카에게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몰아 붙였고,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1] 카프카가 부친의 말 때문에 느꼈을 감정은 열등감과 수모감이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동생들
카프카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만다. 여섯 살 때인 1889년에는 여동생 가브리엘레(엘리,1889-1941)가, 또 1년 뒤에는 발레리(발리,1890-1942)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리(오틀라, 1892-1943)가 태어났지만, 세 여동생은 폴란드 우치의 게토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흩어져 그곳에서 죽었다. 그 중 오틀라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교육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상인의 기질이 보이지 않자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킨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휴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오스카 폴락 등 평생을 두고 교우하게 될 몇 사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1901년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카렐 대학교)에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흥미를 보였으나,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택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프랑스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889년에서 1893년 그는 정육시장에 있는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지금 프라하의 Masná 거리이다. 유대인의 전통을 배우는 시간은 13세 때의 Bar Mitzvah 축제와 아버지와 1년에 4번 유대교 회당(시나고그, 신약성서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회당이 유대인 등의 종교적 공동체인 시나고그임.)가서 예배를 하는 종교 교육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엄격한 고전 지향적인 주립 김나지움(Altstädter Deutsches Gymnasium)에 입학한다. 이곳은 구시가지 광장(Stare Mesto)의 킨스키(Kinský) 궁전에 있다. 1901년 졸업시험(Matura exam)을 끝냈다.
직업
1907년 11월 1일 그는 제네랄리(Assicurazioni Generali)라는 공격적인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거의 9개월 정도 일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908년 7월 15일 관두고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보헤미안 왕국의 노동자 사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보험 담당관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밥벌이(Brotberuf, 브로트베루프)라고 불렀다. 1908년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로 자리를 옮긴 후로는 죽기 2년 전인 1922년까지 그곳에서 법률고문으로 근무하는 한편, 오후 2시에 퇴근하여 밤늦도록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에 무관심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이 그가 열심히 일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는 안전헬멧을 발명했다. 1912년 이 일로 메달을 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steel mill)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그는 연례 보고서를 직접 편집, 작성하는 일도 맡았으며, 그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낼 만큼 자부심이 있었다.
병행하여 카프카는 문학작업도 해나갔다. 가까운 친구인 막스 브로드, 펠릭스 웰치 등이 속한 그룹을 '친밀한 프라하 동아리(Der enge Prager Kreis)'로 부르기도 했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인 카를 헤르만이 카프카에게 석면공장(프라하 석면 헤르만 회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카프카는 처음에는 많은 자유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그는 이디시 극장(Yiddish theatre)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해 카프카를 염려했다. 그는 그 밖의 카프카의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었다. 이 공연은 카프카가 유다이즘과 관계를 키워 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카프카는 공무 출장과 노동자들과의 접촉 등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에서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통찰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년
프란츠 카프카의 무덤
1912년 그의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났다. 펠리체는 베를린에 있는 속기용 구술 녹음기 회사를 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그 후 5년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종종 만났다. 두 번이나 약혼하기도 했지만 1917년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1917년부터 카프카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회복을 위해 쉬는 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 자신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 같고 깔끔하고 꾸미지 않은 외모, 조용하고 멋진 태도, 꽤 지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1920년대 초반 그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á)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23년 그는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잠깐 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도라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줬다.
카프카가 임상적인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앓았음은 정설로 이해된다. 또 편두통, 불면증, 변비, 부스럼과 불안정증도 있었는데 보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세들이 나타났다. 그는 채식이나 멸균되지 않은 우유(이 우유는 아마 결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의 대량 음용 등 자연요법 처방을 통해 여러 병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결핵은 악화되었다. 그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 다음 비엔나에서 가까운 결핵요양소에 갔고 그곳에서 1924년 6월 3일 사망했다. 굶주림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목은 음식을 먹으면 너무 아픈 상태였다. 정맥영양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영양공급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과 닮은 운명이다.)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졌고 1924년 12월 31일 지즈코프(Žižkov) 구역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개인적인 면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생전에 카프카는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발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를 꺼렸으며, 발표된 작품들도 대중의 몰이해 속에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을 만큼 쓰는 것 외의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타계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카프카는 공식적인 종교에 대해 전생애에 걸쳐 무관심했다. 그의 글에서 유대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코 나타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대인 뿌리를 당황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적으로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의 하나)이 그의 맘을 강하게 끌었다. 특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험 같은 면 때문에 그랬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판결', '화부', '단식광대', '시골 의사' 등에 나타난 윤리적 절차적 진퇴양난의 상황은 법과 정의 같은 것에 관련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담고 있다. '가수 요제핀'에서의 논쟁적 해설자의 웃길 만큼 세심한 스타일은 랍비들의 수사적 관습을 은근히 나타낸다.
카프카의 문학 세계
카프카의 동상
카프카는 생전에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며, 발표된 작품은 그가 작성한 작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으로 마감되었으며(예외는 《변신》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하였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인 도라 디아만트 또한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변신』 외에 대표작으로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문체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 독일어로 저술했는데,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 독일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아주 긴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번역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독일어: Verkehr→교통,교류,성교'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란 단어를 쓴 이유는 카프카의 고백에 따르면 이렇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는 "격렬한 사정'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카프카는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 (Felice Bauer)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아가씨 F.C. 내가 8월 13일 브로트집에서 식탁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식모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난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녀의 존재에 대해 곧바로 나름대로 정리를 하였다. 블라우스를 걸쳐 입은 모습이 아주 가정적으로 보였으나, 잠시후 그녀는 이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울퉁하고 빈 얼굴은 공허 그대로였으며, 삐뚤어진 코, 약간 무디고 매력없는 금발, 거센 턱. 식탁에 마주 앉으면서 그녀를 처음으로 자세히 눈여겨 보면서 나는 그녀에 관해 확고한 판단을 내렸다. ”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 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이었다.
https://naver.me/xEg8gz04
프란츠 카프카
1. 개요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1913년 8월, 연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책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1904년 1월,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쓴 유대인 소설가.[3]
예술적 감각이 시대를 앞서간 천재 중의 천재로 평가되며 독어권의 대문호라고 볼 수 있다.
2. 일생
2.1. 유년기
1883년에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4](Hermann Kafka, 1852–1931)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그가 집필한 단편소설 <선고>에선 현실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아버지가 그려져 있는데 그가 원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그는 걸핏하면 프란츠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고 폭언을 일삼으면서 키웠는데 이는 프란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문학사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그러면 헤르만 카프카가 자주 언급될 정도다. 헤르만이 이런 식으로 아들을 기른 것은 현실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출세한 자신과는 프란츠가 매우 달랐던 데다 세 아들 중 두 명이 일찍 죽고 남은 프란츠에게 건 기대가 크기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를 쓰는 학교 대신 당시 프라하의 약 10%의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냈다. 카프카가 독일어로 소설을 쓴 배경이 여기에 있다.
2.2. 작품 활동
프라하에 보존된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라하에서 직장 생활을 했으며 죽어서도 프라하에 묻힌 '프라하 토박이'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창작 활동을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이 저작 활동을 이어가 영감을 받고 하룻밤 만에 변신을 완성하기도 했다.
말이 적었지만 불친절한 성격은 아니어서 직장에서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재정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종종 친절과 선의를 베풀었다. 실제로 노동자 실태 파악을 위해 출장을 다니고 노동 조건 개선 등에 힘쓰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던 이웃집 소녀를 위해 여행을 떠난 인형이 쓴 편지라며 자신이 쓴 편지를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5] 이는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생전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평생 전업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글은 돈벌이나 인기몰이 대신 사람과 예술을 위해서만 써야 한단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별도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힘겹게 작가의 꿈을 이어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글만 쓰며 사는 삶을 모색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7월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뒤 친구와 함께 덴마크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부모에게 편지를 썼는데 프라하를 떠나 독일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의향을 묻는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고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카프카 보고서
▲ 카프카가 조사하여 보험공단에 제출한 산업재해 보고서. 목재 가공 중 벌어지는 손가락 절단 사고 양상에 대한 보고서이다.
노동 보험 공단은 박봉이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보람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인 짧은 근무 시간 때문에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 회사 홍보나 기업 변호를 주로 맡았다.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는데 하루에 두 번 잠을 잤다는 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징병 대상자였고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 영장을 발부했으나 그의 직장이었던 보험공단에서 그가 공단의 필수 인력이라고 보호해주어 전장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그는 귀향한 전쟁 부상자들 및 러시아 제국령에서 들어온 아슈케나짐 유대인 난민들을 상대하는 일에 종사했는대 이때 동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만난 경험은 그의 유대인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속하고 또 만났던 프라하 유대인들은 사실상 거의 독일화된 유대 전통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수준이었으나 동방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모습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
아인슈타인 평전에 따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프란츠를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다른 여자들과 여러 번 연애를 하나 결국 결혼하지는 못했다. 바우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부유한 남성과 결혼했으며 카프카가 그녀와 쓴 편지를 모두 태워 버린 데 반해 그녀는 평생 카프카의 편지를 간직했다. 살아생전 바우어는 그 편지들을 출간하라는 제의도 받았으나 거부했다고 한다. 참고로 매컬리 컬킨과 친분이 있는 미국 뮤지션 애덤 그린이 바우어의 증손자다. 이와 관련해 2013년 독일에서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무명작가였다고 많이 알려져 있고 실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설가는 아니였지만 <성>, <실종자(아메리카)>, <소송(심판)> 같은 대표장편들이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고 단편들만 발표했음에도 1915년 폰타네상을 수상하고 20세기 독일 모더니즘 대표작가 로베르토 무질이 그를 만나고 싶어 직접 프라하를 찾아왔고 독일 여행중에 <유형지에서> 낭독회를 갖는 등 독문학계에선 주목받은 작가였다. 역시 생전에 무명이었다는 오해를 받는 에드거 앨런 포, 허먼 멜빌도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생판 무명이었던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2.3. 죽음
신경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던 그는 1924년 6월 3일 폐결핵으로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는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사는 바람에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아버지란 지위의 폭력성이 언급될 때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그가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양육 방식부터 시작해서 원망이 가득하다. 소설 대부분의 절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론도 있으며 <소송> 같은 소설은 대놓고 억압적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의 여동생들은 나치 정권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두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는데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는 숨을 거두며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7]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그 소설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브로트는 유언을 어기고 원고를 모두 보존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재출판했다.[8] 현재 프라하 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서점이 되어 있고 그 곳에서 집필한 <시골의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카렐교 근처에는 카프카 박물관도 있다.
물론 처음에 출간된 장편들도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초기 판본들은 원문을 브로트가 편집한 형태로 나왔다. 브로트의 말로는 카프카와 나누었던 논의를 더듬어서 수정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이 신빙성과 적합성을 항상 의심했다. 브로트의 사후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고 다음 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의 요구대로 영국 독문학자인 M. 패슬리의 중재 하에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본이 아닌 순수한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의 일이었다. 아무튼 브로트에게 작품 일부가 간 것이 행운인 셈이다.
그는 <성>, <소송>[9], <실종자>[10] 등 총 3편의 장편을 썼으나 <소송>은 결말은 썼지만 부분적으로 미완, <성>과 <실종자>는 결말이 없다. 특이하게 이 3편 중 <성>, <소송>의 주인공의 이름이 K이며 <실종자>에서는 카를 로스만(Karl Roßmann)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리하여 음악사의 K는 모차르트, 문학사의 K는 카프카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는 훗날 작가들의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장편들이 모두 미완이기는 하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평론가들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완벽한 작품'으로 카프카의 장편들을 꼽는다.
3. 사후의 영향력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들이라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 토마스 만
카프카는 20세기의 어떤 작가보다 문학계에 더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 해리 슈타인하우어 (문학교수)[11]
그가 독문학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로 올라서게 만든 이들은 실존주의자들이다. 프랑스의 지성 장폴 사르트르도 극찬했고 <백년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온 장편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도 했고 이 작품은 체코에서 프란츠 카프카 상을 받았다. 현대 문학의 최고봉 중 한 명이라고 불리오는 밀란 쿤데라도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프카에게서 따온 소재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저명한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세 명으로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프란츠 카프카를 꼽았다.
그에 대한 연구는 국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사실 이것도 현대의 국가를 소급할 경우에) '체코 문학'의 세부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독문학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독일에서 출판된 <독일 문학사>에도 독일 작가로 기술이 되어 있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기본적으로 작가론 연구에서는 그 작가가 사용한 언어를 기준으로 문학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쓰였는데 어떻게 체코어 문학으로 간주하겠는가?
그는 현대 체코 출신이지만 프라하 이주 후 독일계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과 독일계 대학을 나왔다. 게다가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독일 문화권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12] 하지만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므로 '독일인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독일어권 작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편 체코에서는 지금도 체코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 오스트리아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유대인인 데다 독일어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20세기 전반기에 중국계 화교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경성에서 활동하며 일본어로 작품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이를 타인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온갖 유럽 민족이 섞인 나라였다.
4. 이스라엘의 역사 왜곡
한 술 더 떠 이스라엘에서는 그의 혈통이 유대인이므로 이스라엘의 작가라고 주장하는데 당연히 이는 이스라엘 외부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 그 논리 자체도 궤변이기 짝이 없거니와 이들이 순수하게 그를 존경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오니즘을 정당화려는 불순한 정치적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13]
상술했던 대로 그의 유품을 관리하던 브로트와 사귀던 여성 에스터 호페(1906–2007)와 이스라엘 정부 측에서 브로트가 공개하지 않은 그의 여러 유품 및 친필 원고의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여 국제적인 논쟁이 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1988년 소더비 경매에서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이 198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소송> 친필 원고를 구입하자 그것을 이스라엘에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린 탓에 독일과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독일 정부에서는 이러한 억지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해당 원고는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텔아비브의 도서관장 다비드 블룸버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인 카프카의 자료는 이스라엘이 소장하는 것이 옳다"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가 당시 뉴욕 도서관장이 대놓고 카프카 본인이 그런 유서라도 남겼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국제 도서관계에서도 카프카는 혈통만 유대인일 뿐 그가 생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반론이 쏟아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브로트가 이스라엘에 카프카와 관련된 모든 유품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호페는 생전 브로트의 유서를 공개하며 자신에게 카프카의 유품에 대한 상속권을 넘겼다고 반론했다. 호페가 사망한 후에는 그녀의 딸들이 계속 논쟁을 이어가다가 2012년 10월에 이스라엘 법원에서는 카프카의 모든 유품은 이스라엘이 소유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호페의 유족들은 이에 항소하며 계속 맞서고 있다. 당연히 이 판결은 국제적으로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그나마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미국조차도 이 판결은 국제적인 효력이 없다며 무시하고 미국 유대인들조차 진성 꼴통 시오니스트가 아닌 한 크게 비판하고 있다.
영국의 작가 윌 셀프는 데일리 미러 지에 이런 글을 기고해 이스라엘의 추태를 직설적으로 비꼬았다.
"이스라엘이 카프카를 시오니즘의 성인으로 둔갑시키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카프카 본인이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스라엘 측의 이런 억지 논리는 제대로 자승자박이 되었는데 구스타프 말러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펠릭스 멘델스존 등의 유대인 혈통을 타고난 예술가들도 많은데 이들은 왜 이스라엘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며 거꾸로 비아냥을 받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핏줄만 유대인일 뿐 유대교를 믿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흔하다.[14]
이스라엘의 이런 식의 주장은 바로 자신들을 그렇게나 탄압했던 나치 독일이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을 분류하던 방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나치 독일 역시 개개인의 정체성을 철저히 무시한 채 조상이 유대인이면 그 후손도 유대인이라는 기준 아래 그들을 억압하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유족이나 직계 후손이 없어서[15] 2019년 7월에 스위스 취리히 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친필 원고는 스위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으로 이송되었고 8월 7일 예루살렘에서 공개되었다. 이번에 도서관이 넘겨받은 카프카와 브로트의 유고는 약 수백 편으로, 서류철 60개 분량에 이른다. 대부분은 이미 출판된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브로트의 자필 원고도 함께 받았으며 원본 컬렉션들을 디지털화해 전세계 독자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이 자료들은 공식적으로 소유주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져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타국에서 정식 소장 중인 자료들은 이스라엘 측에서 구매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다는 것 정도다.
4.1. 반론: 카프카는 정말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적 없는가?
유대인의 자기 증오(jüdischer Selbsthass)로 인해 스스로를 부정하게 된 많은 동시대인들과 달리, 카프카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음 자체보다 이 우연한 출생으로 인해 자신이 원숭이 시늉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불평했다. 삶도 생식도 불가능한, 분류할 수 없는 잡종. 두 종의 교배의 산물이면서 어느 종에도 속하지 않는, 그리하여 죽지도 못하고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에서 영원히 헤메게 된 존재. 그 당시 가장 진보적이라 여겨지던 일부 유대교에 대해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그였지만, 반유대주의 편견을 지닌 자들 편에 서서 유대교를 진보에 의해 소멸될 운명에 처한 가치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는 반기를 들었다. 암암리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실질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이웃들에게 동화된 자는 유대교적인 것 일체를 배척하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 유대교 신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만 되므로 그는 이 신앙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반대로 카프카는 서방으로 넘어오며 변질된 유대교와 진짜 유대교를 구분짓는다. 이 진짜 유대교는 외부인을 곁눈으로 훔쳐보지 않으며, 자체 내의 법으로만 가늠된다는 점에서 모범적으로 보였다. (중략) 이를테면 자살을 통해 유대교 신앙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던 바이닝거의 작품 속에서 찾아지는 순전한 폭력과는 반대로 카프카의 증오에는 유대 민족 전체를 향한 불행한 사랑, 동정, 인간적인 경건이 너무도 내밀히 뒤섞여 있어 여기서 유대인은 천시된다기보다 묘하게 고양되고 확대된다.
자신이 유대인으로 태어났음을 증오하면서도 - '나의 출신, 교육, 성향, 환경'이라고 그는 말하게 된다 - 카프카는 그의 민족에 대한 애정의 솟구침과 생생한 유대감, 더없이 강한 공감대를 느끼게 되는데, 이는 반유대주의자 유대인(본인 자신이 공언하든, 아니면 조심스럽게 숨기든)의 감정과는 도저히 부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마르트 로베르,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105~106p
그를 시오니스트 투사로 표현하거나 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측에서 그를 '유대인 예술가'로 받아들이며 연구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저명한 작가들 중에서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꽤나 명확히 표현하는 편이었으며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점점 더 유대교적인 신념에 크게 이끌렸다.
우선 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작가였는데 자신의 작품이 '일종의 종교적인 것'이라고 종종 일기에서 표현했으며[16] 이 '종교'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대교 역시 그 범위에 포함됐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그의 신앙은 명백하게 유대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도 꽤나 섞여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작업을 종종 유대교 신앙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했으며 그가 남긴 일기나 편지의 여러 대목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던 말년에 그는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했다.[17] 이것은 그의 혈통적 뿌리로서 유대인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특히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던 1920년대에 들어서면 시오니즘에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곤 했다. 그를 시오니스트로 표현하는 이스라엘측의 주장이 반드시 왜곡인 것만은 아닌 셈이다. 1924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의지까지 드러냈으나 익히 알다시피 그 해는 그가 사망한 해였으며 당연히 이주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가 한두 해만 더 살아남았다면 국적 기준으로는 정말 '이스라엘 작가'[18]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의 정체성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체코에서 태어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작가'라는 관점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체성은 혼란스럽던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국적, 언어, 종교의 세 가지 측면 모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5. 작품 목록
장편소설
소송[19](Der Prozess)
성(Das Schloss)
아메리카(Amerika)[20]
중/단편소설 및 기타 작품
변신(Die Verwandlung)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
시골의사(Ein Landarzt)
학술원에의 보고(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굴(Der Bau)
법 앞에서(Vor dem Gesetz)
판결(선고)(Das Urteil)
단식 광대(Ein Hungerkünstler)
작은 우화(Kleine Fabel)
돌연한 출발(Der Aufbruch)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Wunsh, Indianer zu werden)
승객(Der Fahrgast)
회랑 관람석에서(Auf der Galerie)
황제의 전갈(Eine kaiserliche Botschaft)
화부
선고
튀기
콘도르 독수리
만리장성의 축조 때(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6. 기타
그의 작품들이 갖는 특성을 빗대어 "카프카스러운"(Kafkaesque)이라는 용어도 존재한다.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케임브리지 단어사전을 비롯한 세계적인 사전에도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이는 단어다. "매우 혼란스럽고, 불쾌하며, 충격적인 상황"을 뜻하는데[21] 그의 작품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반영한 듯하다.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가 노동자용 안전모를 만들었으며 당시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던 카프카는 이 일로 1912년에 미국 안전 협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어떤 증거자료도 없어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체코 출신의 또 다른 유명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도 카프카처럼 체코어가 아닌 다른 언어(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체코어가 모어가 아니었던 반면 쿤데라는 체코어를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모어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사실 쿤데라는 처음에는 체코어로 소설을 썼으나 1970년 이후부터 2006년까지 그의 책의 출판이 금지되었고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후 줄곧 프랑스어로 집필했으묘 그의 책을 외국에서 번역할 때도 프랑스어판을 원본으로 여긴다.
'카프카'라는 성씨는 '검은 까마귀'를 뜻하는 체코어 단어 Kavka의 이표기로 추정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kavka가 가리키는 것은 일반적인 까마귀보다는 작으며 비둘기 정도의 크기인 목 부분이 회색으로 칠해진 까마귀의 일종으로, 서울에서 까치 보기 쉽듯이 프라하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성씨는 당시 카프카가 유대계의 독일어 구사자라는 상황 속에서도 체코에서 별 차별 없이 사는 데 도움이 되었던 존재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프란츠 카프카의 명성 때문인지 다양한 곳에 적용되는 이름이기도 하며 만화가 이우일은 고양이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7. 각종 매체에서
1992년 스티븐 소더버그에 의하여 영화 『카프카』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주인공이 카프카[22]이긴 하지만 줄거리는 카프카 소설들의 소재로 꾸며진 허구의 내용이다.
바이오하자드 레벌레이션스 2에서 카프카의 격언이 자주 인용된다.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변신>을 모티브로 피아노 곡을 썼고 <유형지에서>와 <소송>을 오페라로 작곡했다.
일본의 만화 도쿄 구울에서 카프카의 작품들이 인용되며[23] 에토는 타카츠키 센으로서 데뷔할 때 쓴 책의 타이틀이 《친애하는 카프카》였다.
The Franz Kafka Videogame라는 게임이 있는데 프란츠 카프카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게임이라고 한다.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의 로디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 88주기를 기념하여 출시됐다.
안녕 절망선생의 등장인물 후우라 카후카 등 여러 만화의 인물 이름으로도 쓰였다.
한국에서 카프카와 브로트, 그리고 에스다 호페를 소재로 다룬 창작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 제작되었는데 초연한 해에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온갖 부문의 상을 휩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2024년 오스트리아에서 그의 인생을 그의 작품과 엮어 다루는 미니시리즈가 방영되었다.
7.1. 오규원의 시
제목은 카프카, 내용 자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적인 시이다. 공식적으로는 1987년 오규원이 출판한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처음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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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샌드버그[24] 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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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종[26]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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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내로라하는 인문학계 저술가들의 이름에 가격을 매기고 그것을 메뉴마냥 나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파격적이기 그지없는데 그들 중에서도 특히 문학가들은 싸구려로 취급되는 데서 인문학, 그 중에서도 문학이 현대에서 얼마나 찬밥을 받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으며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미친 제자로 표현한 것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장 비싼 1200원짜리 학자 4명은 철학자 내지는 사상가이고 그 다음 1000원짜리 두 명은 근대(20세기 후반) 문학 작가, 그보다도 싼 800원짜리들은 20세기 초반 이전 문학가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오규원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87년이다. 이미 그 시절에도 인문학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