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자격 없는 자,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오늘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밝히 보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본문 주해)
사도 요한이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은 이유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기 때문이다.(10:11)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신 내용과 같은 말씀이다.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면 고난이 오고, 구약이나 신약이나 말씀을 받은 자는 쓴맛을 본다.
11장은 구약의 증인들이 먼저 받은 고난을 말하고, 이것을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알려준다.
1~3절 : 성전의 박해와 두 증인에 대한 예언이다.
요한이 성전 측량의 명령을 받는데 이는 크기를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의 수를 계수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기에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한다.
성전 바깥마당이 마흔두 달 동안 이방인들에 짓밟힌다는 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말한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방 나라를 하나님의 몽둥이로 사용하시는데 그 나라들이 이집트, 앗수르, 아람,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성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이다.
마흔 두 달은 천이백육십 일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한때 두 때 반 때이다.(단12:7). 이 모든 기간은 구약 전체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할 것이라고 한다.
4~6절 : 두 증인이란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스가랴서 4장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을 보는데 그 두 감람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또 5~6절에서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삼켜버리게 한 것과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않은 선지자는 엘리야이다. 그리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며 여러 재앙을 내린 자는 모세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구약 전체의 증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선지자적 권세를 가지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수행한다.
두 촛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말한다(계1:20). 신약시대 교회 공동체(두 촛대)는 두 감람나무(왕과 제사장)의 지위를 부여받는다(벧전2:9; 계1:6).
7~8절 :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죽는 장소가 큰 성이라고 한다.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큰 성이라고 한다.
또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일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눅13:33).
그러므로 그 큰 성, 시체가 길에 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며 애굽인데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루살렘인 것이다. 그 예루살렘의 십자가에서 구약의 증인들이 함께 죽는 것이다.
구약의 증인은 두 사람 이상이어야 하기에 두 사람이라고 한 것이지만, 구약에서 구원받는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영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영적으로 소돔이며 애굽인 이유는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성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이들의 교훈을 따른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영적인 놀라운 일은 구약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게 하는 일이다.
9~10절 : ‘땅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자요, 영적으로 마귀에서 속한 자를 가리킨다. 동시에 이들은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다.
그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온전히 장사되지 못한 모습과 같다.(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급히 장사를 치렀을 뿐이다.)
땅에 사는 자들이 두 증인의 죽음을 보고 기뻐한 것은 두 증인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가 죽임당한 것은 그들이 심판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심판의 말씀은 그들을 괴롭게 하였다.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복되나, 거절하는 자는 도리어 선지자의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11~13절 :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
무저갱에서 나온 자들이 구약의 증인들도 죽이고 예수님마저 죽였다고 좋아하였지만 그들의 잔치는 삼 일만에 끝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 그들은 이미 패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원수들이 구약의 증인들이 구원받음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고 한다. 이것도 구약 불신자의 심판을 가리킨다.
그런데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을 보고 살아남은 자들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따라서 계시록에는 비그리스도인의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리고 또 남은 자들은 십자가 이후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14절 : 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까지 불고 나서 화, 화, 화가 있으라고 하였다(8:13).
여섯째 나팔을 불었으니 둘째 화는 지나갔다.
남겨진 셋째 화는 일곱째 나팔이 불면 시작된다.
그리고 그때 구약시대 십자가의 완전한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진다.
(나의 묵상)
두 증인과 두 촛대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 또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두 증인과 두 촛대가 ‘주님 앞에 서 있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4절)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믿는 자와 교회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이란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얼마나 대단하며, (그 받는 핍박으로) 얼마나 비참하며, (그 최후 승리로)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호수아, 스룹바벨, 엘리야, 모세.....이들처럼 대단한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나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신약의 사도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리고 내게 새 생명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임을 증거한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증인 된 삶을 무시하고, 많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죄악 된 인간이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꿈을 따라 부지런히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소원하건 간에 부지런히 하나님을 부르니 자기 믿음에 이상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을 배신해도 자기들은 잘 하는 줄 안다. 그저 한마음이 되어, 목회자는 가려운 귀를 긁어주고, 교인은 또 시원하다고 좋아하며 서로 칭찬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으로 가는 환상의 복식조일 뿐이다.
여신도 연합회 일을 하면서 몇 년 전부터는 자주 서울을 들락거리며 예배며 회의며 강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 기장이 예배며 회의며 강의에서 늘 강조하는 것은 ‘생명, 평화, 자유, 정의....’이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생태계의 생명이니, 자연보호에 머문다.
평화는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평화가 아니라, 인간들끼리 ‘손에 손 잡자’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정치 문제에 발이 빠르다.
자유 역시 죄에서 자유함이 아니라, 탈북자의 자유, 억압받는 여성의 자유....참으로 필요하고 자비롭고 근사한 생각이지만, 그들 자신이 죄에 묶여 있음을 깨닫지 못한 상태라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자유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이 땅의 참 정의되신 주님이 아니라, 인간들의 생각으로 가득한 각자의 정의로 가득한 생각을 끝없이 토론한다.
‘생명, 평화, 자유, 정의’ 성경에도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 아름다운 단어들인가?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 ‘생명, 평화, 자유, 정의’는 ‘우리 이름을 내자’ 하며 인간이 쌓아 올리는 바벨탑과 흡사하다.
예수님께 연합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착하고 선한 일은 할 수 있다.
타종교의 사람들의 선행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입으로는 예수 이름을 부른다 해도 그분께 연합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모든 기도와 구호는 다 인간들의 탐심과 자기 만족과 자기의와 연결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내버려두셨다면, 바벨탑 쌓기의 일인자가 되었을 나를 기적처럼 주님의 빛 안으로 들여주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린다.
어지러운 배경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선 감람나무와 촛대가 되게 하시니, 끝도 없는 비판과 한숨을 그치고, 이제 주의 능력으로 지혜롭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 되기만을 기도한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나는 복음의 증인이요, 영생의 증인이 되기만을 소원한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 앞에 선 증인과 교회 되게 하옵소서.
한편으로는 참으로 두렵고 떨리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든든합니다.
제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이 어떠하든
주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교회로서 생명의 구원선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