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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문에서 보살이 성불에 도달하는 데는 모두 두 가지 심원(心愿: 발원, 염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상구보리(上求菩提: 위로 보리를 구함)이고, 둘째는 하화중생(下化众生: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입니다.
상구보리의 목적은 바로 아래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 바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상구보리는 널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보살은 그러한 무연대비와 동체대비를 지니고 있으며, 지혜와 원력과 방편과 훌륭한 솜씨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으로 참선을 하고 간경을 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독경을 하면 원만한 자력수행으로 삼대아승지겁이라는 무량한 시간이 걸리지만 구경에는 성불할 수 있습니다.
정토문의 보리심은 바로 원생심願生心이니,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마음(상구보리)과 왕생한 뒤에 다시 예토로 돌아와 인연 있는 중생을 교화(하화중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보리심을 발할 수 없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보살도를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토문 수행에는 반드시 삼심이 필요한데,
삼심이란, 첫째는 지성심이요, 둘째는 심심이요, 셋째는 회향발원심입니다.
이 삼심은 염불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왕생을 할 수 있는가 여부는 전적으로 삼심을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삼심을 갖춘 이는 틀림없이 왕생하나 하나라도 빠지면 왕생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보리심과 같지 않아서 하근기의 행자가 비록 보리심을 발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왕생할 수 있지만 삼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근기든 하근기든, 영리한 근기든 둔한 근기든 막론하고 모두 반드시 삼심을 갖춰야만 합니다. 만약 삼심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리 만행정진을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삼심은 극락왕생을 발원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중요한 조건입니다.
어떠한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이 반드시 진실하여 거짓이 없어야 하므로 먼저 지성심을 설한 것이고, 초심은 비록 진실하나 타인으로부터 파괴되어 동요한다면 역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으로 결정된 심심을 설한 것입니다. 진실하고 결정된 이 마음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가? 그래서 다음으로 회향발원심을 설한 것입니다.
즉, 최초의 일념이 자신을 버리고 부처님께 귀명하면 안과 밖이 상응하므로 지성심이라 말하는 것이고, 진실한 이 마음이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는다면 심심이란 명칭으로 바뀌게 되며, 진실하고 결정된 이 마음이 끊임없이 정토를 향해 나아가면 회향발원심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관경소』에서 해석하시길, ‘결정된(심심) 진실심(지성심)가운데 회향발원함(회향발원심)’이라 하셨으므로, 삼심은 단지 부처님께 귀명하고 왕생을 발원하는 한 마음일 뿐이며, 앞의 것은 뒤로 나아가고 뒤의 것은 필히 앞의 것을 포함합니다.
부처님께 귀명하며 왕생을 발원하는 이 한 마음은 그 체성體性의 측면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므로 진실심이라 설한 것이고, 그 형태의 측면에서 결정되어 흔들리지 않으므로 심심이라 말하는 것이며, 역용力用의 측면에서 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삼으므로 회향발원심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거짓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진실심을 설한 것이고,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 심심을 설한 것이며, 회향발원을 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회향발원심을 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심은 하나하나 모두 부처님과 중생의 두 방면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진실하고 결정된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있도록 죄업의 장애가 있는 중생들에게 공덕을 주기 위해 발원회향한 것이고, 범부가 부처님께 귀명하면 범부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 되므로 지성심·심심·회향발원심을 설한 것입니다.
중생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가로로 삼심을 갖춤(橫具三心)과 세로竪로 삼심을 갖춤(竪具三心)이 있습니다. 가로로 갖춤이란 차제(순서)를 거치지 않고 동시 단박에 삼심을 갖추는 것이고, 세로로 갖춤이란 차제에 따라서 먼저 진심을 갖추고 다음에 심심을 갖추며 그 다음에 회향발원심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혜로 삼심을 갖춤(智具三心)과 행으로 삼심을 갖춤(行具三心)이 있습니다. 지혜로 말미암아 삼심에 관한 문구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삼심을 일으키는 것을 ‘지혜로 삼심을 갖춤’이라 말하고, 삼심의 문구를 모르고 삼심의 의미도 모르지만 한결같이 염불하는 가운데 저절로 삼심이 갖춰지는 것을 ‘행으로 삼심을 갖춤’이라 부릅니다.
일단 삼심이 갖춰지면 자연히 퇴전하지 않게 되는데, 부처님의 자비로 회향해주시는 까닭이요, 부처님의 본원력이 주지住持하는 까닭이요, 부처님의 광명이 섭취하는 까닭이요, 중생과 부처가 한 몸인 까닭이요, 제불이 호념을 해주시는 까닭입니다. 선도대사가 말하기를, ‘광명에 닿는 자의 마음은 물러나지 않습니다.’‘마음은 금강과도 같다.’고 하였습다. 그러므로 만약 중도에서 퇴전을 한다면 애초부터 삼심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도대사는 ‘나무아미타불’명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나무’라는 말은 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의 뜻입니다.
‘아미타불’이란 말은 곧 그 행이다.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한다.
‘귀명歸命’은 지성심·심심이요, ‘발원회향’은 회향발원심이다. 귀명과 발원의 주체가 ‘나무’이고, 귀명과 발원의 대상이 ‘아미타불’이다. 주체와 대상이 일체一體이므로 삼심의 전체가 나무아미타불명호이며, 삼심이 곧 명호인 까닭에 경에서 ‘삼심을 갖춘 자는 반드시 저 나라에 왕생한다’고 설하신 것입니다.
삼심은 자리리타를 위한 대승의 마음이므로, 염불과 제행諸行을 전부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염불은 아미타불의 본원의 행인 까닭에 육자의 행체行體가 본래 진실하고 청정하여 범부들의 탐욕과 성냄으로부터 물들지 않으며,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왕생하는 것입니다.
제행은 본원의 행이 아니여서 범부들의 탐욕과 성냄으로부터 물들므로 독이 섞인 선·허망하고 거짓된 행이 되어 본래 진실하고 청정한 보토에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삼심을 갖추고 제행을 닦는다면 역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삼심이 명호를 본체로 삼고 삼심이 곧 염불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삼심으로 말미암아 제행을 거두어 염불로 귀속시키므로 본래 독이 섞인 작디작은 선은 청정하고 광대한 공덕으로 바뀌어 왕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신령한 강靈河에다 물을 부으면 오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한 방울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면 (바다와) 똑같이 깊고 넓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제행의 왕생은 제행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삼심을 통해 염불로 귀속되어 육자 자체 내의 공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도대사가 다음과 같이 해석한 것입니다.
‘모든 선악범부들이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아미타불의 대원업력大願業力을 증상연으로 삼았기 때문이다.’‘이 경의 정선定善과 산선散善의 글 중에 오직 명호를 불러 왕생함을 밝히고 있습니다.’‘지금까지 비록 정선과 산선 두 법문의 이익을 말씀하셨으나,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면 그 뜻은 중생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삼심은 왕생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이고, 명호는 실로 독을 제거하는 신비한 영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생각하고 입으로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심심이 갖춰져서 왕생의 대사를 성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도대사님의 ‘육자석六字釋’에서는 정토법문의 신원행을 모조리 그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귀명은 곧 신앙입니다. 완전한 귀명은 완전한 신앙을 뜻하고, 완전한 신앙은 자연히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것이며, 아미타부처님은 곧 우리의 수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원행이 다 있기 때문에 삼자량은 육자명호 속에 원만히 구족되었습니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은 “‘나무’란 말은 곧 귀명이요, 또한 발원회향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이 아미타부처님께 귀명할 때 아미타부처님은 우리의 공덕이 되고, 왕생에 필요한 공덕도 이미 구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이 돌아오면 기타 회향이 필요 없습니다.
왕생은 우리의 공덕에 의지하여 회향왕생하는 게 아니라 불력의 접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명을 하는 동시에 불력은 작용을 일으킵니다. 마치 우리가 배위에 오를 때 배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은 불력에 의지하는 법문입니다. 진정한 회향은 아미타부처님께서 당신의 공덕을 우리 중생에게 회향해주시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길, “중생들에게 진실한 이익을 베풀어주신다惠以衆生真實之利”고 하셨는데, ‘혜惠’란 곧 부처님의 공덕을 중생에게 혜사惠賜(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주다)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은 부처님의 공덕을 받아들이는 법문입니다. 중생이 부처님께 귀명하면 부처님은 당신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해주시는데, 이것이 진실한 회향입니다.
단지 우린 성불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이니,
성불한다면 어찌 중생을 제도하는 설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는 성불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가 바로 성불의 경계이고 열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당연히 성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아주 아주 빨리 성불할 수 있습니다.
시방제불께서는 비록 모두가 위로 보리를 구하는 원을 일으키셨지만, 아래로 중생을 다함없이 교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미타불의 제18원(본원칭명왕생원)뿐입니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의 대의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는 아미타불의 비원悲愿인 제17원으로써 이 세상에 오셨는데, 아미타불께서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는 제18원을 널리 설하러 오셨으며, 아미타불의 출현하심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결론
참선 등 성도문 수행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보리심을 갖추는 것이고,
정토문에서는 삼심(지성심,심심,회향발원심)과 삼자량(신,원,행)은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에 삼심(삼자량)을 지니고 본원칭명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면 반드시 극락왕생하여 2대아승지겁을 뛰어넘어 속초성불합니다.
성도문 및 정토문 수행시는 사띠(알아차림)의 힘이 중요하니 이 뭐꼬 화두를 들시나 나무아미타불 염불시 귀로 또렷이 듣도록하고 가끔은 망상을 피우고 있는지 지켜봅니다.
이 마음이 지극해지면 염불삼매에 들어 아미타부처님과 감응을 이루고 임종시에는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여 극락왕생후에 속초성불하니 이런 돈중의 돈법이 시방세계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 법미는 무궁무진합니다. 불법은 진실로 이러합니다. 불교를 처음 접할 때 ‘무량수경’에서 시작하면 틀림없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배우고,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며, 나아가 장래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어도 여전히 ‘무량수경’을 배울 정도로 그 법미는 무궁무진합니다. 이 경을 독송할 때마다 매번 맛이 다르고, 매년 경계가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입니다. 진정으로 의미에 깊이 들어가야 이런 힘이 생깁니다.
‘무량수경’의 의미만 무궁할 뿐만 아니라 한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도 의미가 무궁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을 맛볼 수 있을까요? 일심으로 전념(專念)하면 무궁한 의미를 맛보게 됩니다. 법미를 맛본 후에는 그만 두려고 해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학습하는 동안 환희심이 일어나고 용맹정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염불을 해도 법미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아미타불을 염할 때 다른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부하여 득력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계속 노력하여 착실히 염불하여야 합니다. 일심에 장애되는 것을 모두 버리고 성심 청정심 공경심으로 일년 반 동안 염불하면 법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법미를 맛본 후 극락세계에 왕생할 자신이 생기고, 염불할수록 신심이 단단하고 강해지면 미리 가는 때를 알고 왕생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더 깊어지면 자재하게 왕생할 수 있고, 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어 진정으로 생사에 자재한 경지에 이릅니다. 이는 우리들 각자 다 해낼 수 있지만, 문제는 전념하느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각명묘행(覺明妙行) 보살께서는 ‘서방확지(西方確指)’에서 매우 또렷이 말씀하셨습니다.
“염불시 가장 금해야 하는 것은 뒤섞는 것이다. 뒤섞으면 마음이 전일하지 못하다.”
[허만항 작가]
또한 한결같이 칭명을 하는 사람은 저절로 삼심을 구족하게 된다. 이른바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움’이란, 다른 행으로부터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행으로부터 반드시 왕생한다는 믿음을 세우는 것이다.
[원문:정전스님]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나모아미타불 나모아미타불 나모아미타불_()_
항상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_()_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선·밀·천태·화엄도 모두 돈교라고 부르지만 전부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요구하므로 여전히 점교에 속합니다. 이른바 ‘법에 있어서 비록 돈頓이라 하나 근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점漸이 되고 맙니다.於法雖頓,望機成漸’는 것입니다. 오직 정토법문만이 미혹을 끊지 못한 범부들이 곧장 삼계를 벗어나 퇴전하지 않고 성불을 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돈 중의 돈頓中之頓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성도문 중에도 역시 돈교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부정적으로 논한다면 성도문 전체가 점교가 되므로, 오직 정토법문만이 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