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아름다운 기하성 총회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박승학
박승학 칼럼/ 일본의 독도 영유권주장과 원전 피해
명심보감 2편 天命篇(천명편) 첫 문단에 『순천 자는 존하고 역천자는 망하느니라.』했고, 일곱 번째 문단에는『악한 일을 하여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회죄어천)이면 無所禱也(무소도야)라.』고 했다. 이는 자고로 모든 인류의 필연적인 의식과 사고에는 하늘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1월 22일 작고하신 작가 박완서씨는 1988년 5월에 남편을 잃고 8월에는 스물다섯 눈동자 같은 외아들 원태를 교통사고로 잃고 난 후 부산 딸 집, 수녀원, 미국, 등지를 떠돌며 신을 원망하며 묻고 또 물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부당함을 항의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벌이거늘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사용하려고 그토록 준수한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나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나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며 십자가를 팽개치면서 신을 증오했다. 그리고 아들이 없는데도 살기위해 꾸역꾸역 먹을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구역감이 올라와 변기에 토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구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응답이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들려온 건 뭐였을까』라고 쓰고 있다. 목이 마른 이유는 물이 있기 때문이며 배가 고픈 까닭은 먹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 후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영혼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그 대가가 형벌임을 알기에 모든 인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죄를 의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존재와 죄의 보응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태양이 없다 함 같이 스스로의 몰상식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1 일본의 대 지진과 재앙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진도 9의 대 지진으로 일본 동북부 본토가 2.4m 이동하고 지면이 80cm 가량 낮아졌다고 한다. 10m의 해일은 6km 내륙까지 밀려들어와 가옥과 생활터전 모두를 휩쓸어 가 버렸다. 그리고 28,000명의 사망 실종자, 경제적 손실이 25조 엔이라 한다. 최근 일본 국가 부채규모가 눈덩이 같이 불어나고 경제 침체로 국가 부도 위기까지 언급되는 상황에서 이번 지진은 감당키 어려운 재앙이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인들에게는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화산폭발 등은 항상 준비하고 대비하는 일상화된 재앙으로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공포의 재앙이 일어났으니 이는 방사능 오염 확산이다. 지진 지역 해변에 있던 6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공급되던 전원이 끊기며 냉각장치가 중지되고 원자로의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인한 공포가 일본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냄새도 색깔도 소리도 없이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는 방사능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이 방사능은 원전 반경 40km 접근 금지지역으로 육지 뿐 아니라 바다까지 이 무형의 공포가 30년 이상 지속 될 것이며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니 이보다 더 무서운 저주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위기 극복에 익숙하고 재난에 침착한 일본인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치명적 저주의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일본에 대한 천벌(天罰), 저들의 죄(罪)를 추억해 보자 지진 피해가 시작된 후 3, 14일 이시하라 산타로 일본 도교 도지사가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에 천벌이 내린 것”아라고 일갈했다. 그는『일본의 정체성은 아욕(我慾)이다. 이번 쓰나미를 통해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탐욕을 쓸어버려야 한다. 미국의 정체성은 자유이고 프랑스는 자유와 박애, 그리고 평등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정체성이 없고 오로지 물욕과 금전욕이며 이와 같은 아욕에 속박된 일본 징치도 표퓰리즘을 이루고 있다. 이번 쓰나미로 오래 축척된 일본의 마음의 때를 씻어 버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모두 함께 공감해야 할 정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피해를 입은 지역의 당사자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흘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시비를 걸고 달려든다면 당신들은 그럼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단 말인가. 웃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일본인들은 이번 참사를 당하면서 인과응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무슨 죄가 많아서 이와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오는가. 여기서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반성하고 휴머니즘을 회복 할 수가 있다면 이 재난이 얼마나 아름다운 승화의 기회가 될 것인가.
3 일본인들은 지나간 역사 속의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도 반성도 없다. 세계를 향한 저들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악행들을 열거해 보자. 1) 먼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 할 때의 사건을 고증(考證)을 조회하여 언급하겠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범 낭인들의 일원이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시해 사건 후 조선 내무부 고문이 된 자)가 일본 본국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비밀리에 보낸 장문의 보고서에 의하면『일본의 낭인들이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히고(處刃傷).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하고 상해를 입은 황후를 20여명이 윤간을 하고 6번 째 부터는 죽은 시신에 시간(屍姦)을 한 후 증거를 없애려고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이를 말리는 조선 궁내 대신들의 팔과 다리를 잘랐다.』라고 보고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인들이 행한 악행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바다가 아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들이다. 일제는 1905년부터 조선 불법 강점 41년 동안 "범죄즉결령" (1910년), "조선형사령" (1912년), "치안유지법" (1925년), "신치안유지법" (1928년), "국가총동원법" (1938년), "국민징용령" (1939년), "개정치안유지법" (1941년), "학도병제령" (1943년) 등 수많은 살인 악법들을 연이어 조작 공포하여 수백만 명의 조선 사람들을 검거, 투옥하고 잔인하게 학살하는 등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조선 사람은 우리 일본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공언한 3대 "조선총독" 데라우찌(후에 일본 총리가 된 자)의 말은 당시 조선인에 대한 포악한 살인 "지령"으로 식민지 살인 통치의 기본 방식이었다.
2) 중국에 대한 만행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로 전쟁 배상금으로 은 1억 3천만냥(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5배) 금액의 몰수해 간 천문학 적인 돈으로 군사 대국으로 발돋움 한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손쉽게 정복하면서 3개월 안에 중국 대륙 전체를 점령하겠다고 큰 소리 쳤으나 상하이 상륙작전에서 장개석 군대에 3개월 이상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1월 겨우 상하이를 점령하고 난징을 향해 진격했으나 12월 13일 정복 할 때 까지 입은 상당한 피해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무차별 중국인들을 학살 했다.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으로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일본군들은 군인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 되는 어린이부터 60,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에 보이는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하고 죽였다.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된 기사가 있었다. 종전 후 무카이, 노다 두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최후까지 100인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라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했다. 이 한 사건이 일본의 수많은 악행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의 마루타 생체실험 등 언급을 그만두겠다. 3) 진주만 공습과 인류 최초의 원자탄 세례 1941년 12월 7일 새벽 태평양 하와이 진주만에 접근한 일본 항공모함에서 7시 55분 183대의 폭격기가 진주만에 미 해군기지와 공군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 2,403명의 군인,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진주만 폭격 2년 6개월 후 1944년 6월 16일 미군 B29기의 일본 본토폭격이 시작되었다. 45년 3월 10일에는 B29기 47대가 334회 출격하며 동경 시내에 소이탄을 퍼 붙는 대 폭격이 시작되었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인 동경시내는 불바다가 되었고 사망 83,000명, 가옥 26만호 소실, 이재민 100만의 피해를 입고도 항복하지 않자 45년 8월 2일 히로시마 상공에 모든 시민들은 20키로 밖으로 대피하라는 경고 삐라가 뿌렸고, 8월 6일 아침 구름이 낀 하늘에 B29기에서 ‘리틀 보이’란 이름의 원자폭탄 하나가 투하되었다. 그 결과 히로시마 34만 인구 중, 피폭지역 1,2km 내의 시민 50% 사망, 12월 말까지 나머지 14만 사망, 부상자 37,000명, 그 밖에 방사능에 의한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3일 후 나가사키에 또 한발 투하되면서 무조건 항복한 것이 일본이었다. 여기서 원자폭탄 투하로 멸망한 일본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천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4 이와 같이 항복한 일본은 독일 같은 철저한 전범에 대한 단절이 없었다. 아니 변명하고 부인하고 오히려 미화하고 지속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게 문제이다. 2차 대전의 전법으로 처형된 수괴들의 유패를 자신들의 성역이라 여기는 신사에 모셔 놓고 매년 국가 수상과 각료, 국민들이 거기 가서 분향하고 추모하고 기리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시인도 반성도 역사의식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인 척하며 변명하면서 탐욕적인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지진피해를 입은 일본을 돕자는 한국인들의 따뜻한 온정을 무시하듯 적반하장으로 독도가 자기들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있다는 주장하고 이와 같은 거짓말들을 어린 세대들에게 교과서에 합법화하고 가르치겠다고 하고 있다. 역시 일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야만적 탐심의 근성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시하라 산타로 일본 도교 도지사의 말처럼 일본인들의 내면에 가득찬 더러운 아욕(我慾)의 속물근성은 이번 쓰나미보다 더한 재앙으로도 씻어 낼 수 없는 것 같다. 일본은 아직도 인과응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일본 열도가 침몰해도 그때가 되어야 변할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와중에도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 괴변을 지껄이는 뻔뻔스런 행위를 보면서 저들과는 공존이나 평화란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하여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2011년 4월 3일 박승학
|
|
첫댓글 일본정부가 진행하는 일과 일본인들은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이 싫고, 일본정부의 자세와 극우파들의 생각과 행위는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천벌이라기 보다 자연재해이고 종교적 이념과 논리는 배재하고 국제복지 차원에서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을 더욱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은 감동을 주기도 하는 영상을 본 기억이 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