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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 |
문의 | 051)240-2671 |
종별 | 국보 제69호 |
지정년월일 | 1962년 12월 20일 |
시대 | 조선시대(1397) |
소재지 |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3가 (동아대학교 박물관) |
이 녹권은 1397년(태조 6) 10월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왕명을 받아 개국원종공신인 사재부령(司宰副令) 심지백(沈之伯)에게 내린 것이다. 녹권의 내용은 심지백이1395년(태조4) 11월에 황주목사 최사용 등 수십명과 함께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1397년9월 11일에 왕지(王旨)로이녹권을 하사하여 포상의 은전을 내린다고 되어있는데, 이러한사실은《태조실록》에는 누락되었으나 이 녹권에 의하여 비로소 알려지게되었다. 개국원종공신은 1392년부터 1397년까지 1,400여명이 책봉되었는데, 이 때 내려진 은전은 대장군 이화영(李和英)의 전례에 따라 각기 전(田) 15결(結)을 하사하고, 공신의 부모와 처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손은 음직을 수여하며 후손에게도 은전과 천역에 처하지 않게 하는 신분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공신이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으로 구분하는데, 공적의 내용과 직위에 따라 정공신은 1등에서 4등으로, 원종 공신은 3등까지로나누었다. 조선초기에는 정공신에 한하여 교서와 녹권을 함께 주었으나 원종공신에게는 녹권만을 주었다.
이 녹권은 조선 초기의 문서라는 점 뿐아니라 내용이 이후 원종공신제도의 법제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당시의 이두문이 많이 사용되어 문체와 내용도 사료적가치가 높다. 더욱이 이 녹권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랜 목활자본 실물이란 점에서 우리나라 활자인쇄사상 매우 중요한자료이며, 우리나라에 전해지고있는 녹권 중 으뜸으로 꼽히는 유물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문의 | |
종별 | 국보 제151의 2호 |
지정년월일 | 1973년12월31일 |
시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부산 연제구 거제동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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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에 의하여 편년체로 편찬한 기록이다. 이 실록은 원래 경상북도 봉화군의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보관되었던 태백산본으로 1539권, 848책으로되어있다. 조선조에서는 1413년(태종 13)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을 시작으로 철종실록 15권까지 편찬하였다. 그러나 고종, 순종의실록은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것으로, 내용중에는왜곡 또는 허위가 많아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하면태조에서철종까지의실록을말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실록을 서울의 춘추관 및 충주?성주?전주의 사고(史庫)에 각 1부씩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때모두 불타 없어지고, 전주사고의 실록만 내장산으로 옮겨 후세에 전하여지게 되었다. 1603년(선조 36) 실록의 재간행 사업을 시작하여 3년 동안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3부씩 간행하였다. 이때에 인쇄한 3부와 전주사고에 있었던 원본, 재출판시의 교정본 등 5부의 실록을 1부는 전과 같이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신설하여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이후 묘향산 사고는 무주적상산에, 마니산사고는강화도정족산에 사고를 새로 지어 옮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정족산,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적상산사고의실록은 장서각으로 이관하였으며,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다가 1923년의 관동대지진때 거의 불에 타 없어졌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 해방 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수장되어 왔는데, 그 중 태백산본이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로 이관된 실록이다. 그리고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때 북한측에 넘어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경제등 각 방면의 방대한 자료를 망라하고 있어서 한국사 연구의 기본자료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기록으로 인정되어 1997년 10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동보살입상
문의 | 051)610-7111 |
종별 | |
지정년월일 | |
시대 | |
소재지 |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 |
이 보살상은 보관(寶冠), 대좌, 광배가없어지고 천의 (天衣)의 일부가 결손되었으나, 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높이가 34cm나 되는 큰 보살상으로 비교적 잘 보존된 작품이다.체구는 다소 뻣뻣한 느낌이 있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풍만한 가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은 한결 부드럽고 탄력성과 중량감이 넘치는 듯 하여 전체적인 자태는 품위가 있고 당당하다.얼굴은 원만한데 아래턱은 살이올라 풍만하고, 치켜 올라간 가는눈과 오뚝한콧날, 작은입 등 표정은 자신만만해 보이면서도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서려있어 보살의 자비로움을 느끼게한다.특히, 양팔에 장식되어있는 2쌍의 팔찌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것이 이 보살상의 특징중의 하나이며, 풍만한 가슴에서 가는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이 아름답다. 하반신의 아름다운 옷주름과 천의의 율동적인 곡선은 장부와도 같이 당당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조화시켜 보살의 성스러운 정신을 표현하는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전체적으로 표현이 사실에 충실한 편이며, 균형과 입체감도 충분하여 보살의 위엄과 자비로움을 함께 갖춘 보살상으로 당당한 신체표현을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시대초기의 뛰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보살상은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내부는 비어있으며, 도금은 거의 완전하여 아직도 금색이 찬연하다.
영태2년명 납석제호(永泰二年銘 蠟石製壺)
문의 | 051)610-7111 |
종별 | 국보 제233호 |
지정년월일 | 1986년 10월15일 |
시대 | 통일신라시대(766) |
소재지 | 부산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 |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석남사 절터의 석불대좌 중대석에서 발견된 곱돌항아리로 그릇의 안밖에 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어깨에 한줄, 아랫배에두 줄의 쌍선을 음각하였다. 뚜껑의 윗면에도 두 줄의 동심원을 음각하였고, 그 안에 간결하게 새긴 세 겹의 연화문이 유일한 장식이다. 이 그릇의 몸통에는 한줄에 8 - 11자씩 15줄 136자의 비로자나불상조상기(毘盧遮那佛像造像記)가 새겨져 있고 그릇의 밑바닥에도 4줄 22자의 이두문이 초서로 새겨져 있는데, 이명문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공양승과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들의 업이 소멸되기를 비는 일종의 기원문이다. 처음 이 항아리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속에 청동으로 만든 장방형의 작은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산화되어 재가 된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던 석조불상은 1947년 석남리에 사는 주민이 반출하여 보관하였다가, 1959년경에내원사(산청군삼장면 내원리)에 양도하였다. 이와 같이 불상대좌중대석에 법사리를 봉안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사례로서 복장(腹臟)의 초기양식으로 보이며, 영태 2년( 7 6 6이 ) 라는 절대 연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또 항아리의 형태나 몸통 표면에명문을 새기는 방식도 그 뒤 동화사(桐華寺) 석탑에서 나온 석합 등으로 양식적 계통이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곱돌 항아리로 인해 내원사 석조비로자나 좌상이 우리나라에서가장 오래된 것 임이 밝혀져 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의조성 연대를 8세기까지 끌어올리게 됨으로써, 불교사와 미술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동궐도(東闕圖)
문의 | 051)240-2671 |
종별 | 국보 제249호 |
지정년월일 | 1989년 8월 1일 |
시대 | 조선시대(19세기) |
소재지 | 부산 서구 동대신동 동아대학교 박물관 |
이 동궐도는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그림이다.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으며 이와 똑같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동궐도 등과 비교해 볼 때 원래 16개의 화첩으로 되어 있었던 것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대학교 소장품의 표면에 동궐도 인(人)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동궐도는 본래 천(天)·지(地)·인(人)의 3본이 작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작품과 고려대학교 소장본 외에 한질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비단에 먹과 채색을 써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수많은 건축물과 조원, 그밖의 시설물 등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 모습을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궁궐 주위의 산과 언덕들은 남종화풍의 필법으로 그려졌으나, 건물의 표현과 원근처리 등에는 서양화법의 영향도 엿보인다.이 그림은 궁궐의 배치, 건축물과 각종 시설, 조원의원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 파괴되거나 훼손되어 없어진 건물이나 시설물 등을 그림을 그릴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고증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그림은 당시 유행했던 화풍을 알 수 있는 회화사 연구자료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건축·조경·과학기술사·궁궐사 등 궁궐의 역사를 비롯한 각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이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제작 연대는 궁궐 건물의 소실이나 재건 연대 등으로 보아 1826년에서 1831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이 그림은 조사 결과 고려대학교 소장본과 동일본으로 인정되어 1995년 6월 23일 보물 제596호에서 국보 제24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출처 : http://tour.busan.go.kr/k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