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 집에 갈 때마다 우리 부부를 맞는 외손녀의 환영 의식이 좀 요란스러운 편이다. 우리가 자리에 앉으면 우선 율동을 넣어서 곰 세 마리 노래를 부른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살아요. 엄마 곰, 아빠 곰, 아기 곰…” 엉덩이를 실룩거리고 손발을 열심히 놀리며 재롱을 떨어 기쁨조 노릇을 제대로 한다. 그다음 순서는 ‘재산자랑’이다. 조그마한 손수레에 장난감과 그림책을 두어 번에 걸쳐서 싣고 와서는 나와 아내에게 번갈아 하나씩 준다. 그리고는 바로 다시 달라고 한다. 만져만 보라는 것이다. 그다음 순서는 우리가 앉은 소파를 오르내리며 곤두박질을 친다. 대개 이런 순서로 환영의식이 진행되는데 그날 기분에 따라 부르는 노래나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는 환영의식이 모두 끝나면 좋아하는 책을 들고와서 읽어달라고 내민다. 먼젓번에 갔을 때는 올리비아(Olivia)라는 고양이와 프랜신(Francine)이라는 강아지가 나오는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몇 줄 정도 읽었는데 외손녀가 중단시키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노우, 할아버지. 올리비아. 올리비아.” ‘올리비아’의 ‘리’에 걸리는 악센트가 약하니 강하게 발음하라는 지적인 듯싶어서 다시 고쳐서 읽었더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몇 줄 더 읽어 내려가는데 외손녀가 다시 중단시켰다. 이번에는 강아지 이름 프랜신에서 걸렸다. “할아버지, 프랜신, 프랜신”이라며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누르며 ‘에프’ 발음을 제대로 하라고 하는 듯했다. 두어 차례 그러고 나니 책 읽기는 시들해지고 외손녀는 저희 엄마에게 달려가서 뭐라고 쫑알거리는데 할아버지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흉보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내 영어도 미국에서 그럭저럭 통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로 이것저것 일보는 것도 별로 불편함이 없고 이웃 사람들과의 대화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어로 글을 쓰는 것도 제법 잘 쓰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외손녀에게 발음 문제로 지적 받고 나니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싶었다.
나이 30이 넘어서 주재원으로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그놈의 영어’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영어 잘한다고 주재원으로 선발된 것도 아니고, 대학교 졸업 후 10년 동안 영어 회화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었고, 회사 업무상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국 현지 법인에 오게 되어 뱃속에서부터 영어를 배워서 나온 미국인을 상대로 일해야 했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임 초기에 운전면허 취득, 아파트 계약, 사회보장국 신고 등 미국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절차는 영어 잘하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그럭저럭 해결했지만, 직장생활은 참 힘들었다.
처음에는 같은 부서의 미국인 직원과의 대화도 어려워서 필담도 섞어가며 일을 하려니 피차 못 할 짓이었다. 성미가 급한 여직원은 제깐엔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말을 시작한다고 처음 한두 문장은 아주 천천히 말하다가 조금 있으면 인내심이 바닥나는지 갑자기 성난 말투로 속사포를 쏘아대곤 했다. “따다다다다… 좔좔좔좔좔….”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그녀의 말은 내 머릿속을 빙 돌아서 바로 빠져나가니 알아들을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늘 보는 직원이고 늘 듣는 일상적인 업무 대화니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할 수 있었지만 전화받기는 정말 어려웠다.
내가 일하던 고객상담부서에서는 하루 종일 화가 난 고객을 상대해야 했다. 흥분한 고객이 하는 말은 대개 빠르고 장황해서 수화기를 들고 있으면 알아듣지 못 해서 답답하기는 했지만 몹시 화가 나서 마구 욕을 퍼붓는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전화받기도 시간이 흐르니 그런대로 적응 되었다.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한국에서 회화는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지만 ‘문법, 해석, 작문’을 위주로 소위 삼위일체식 영어를 빡세게 공부했던 기본 실력이 있으니 시간이라는 약이 효력을 나타낸 것이다.
미국에 온 지 한 달 만에 출장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침 일찍 뉴저지를 떠나 미시간 주에 있는 트로이에서 볼일을 보고 당일로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오클라호마 시티로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택시 회사로 전화해서 집으로 데리러 와 달라고 했는데 가격 흥정까지 마치고는 모든 게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택시 회사에서 우리 아파트 주소를 재확인하려고 했다. 동네 이름이 Belleville인데 이게 은근히 발음이 까다롭다. B와 V에 신경을 써서 조심스럽게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 했다. 벨빌을 끝에 있는 L자 두 개 때문에 ‘비얼’ 비슷하게 발음해야 하는데 아무리 얘기해도 Bellevue? Fairview? 라고 계속 헛짚는데 시간은 자꾸 흐르고 속이 탔다. B-e-l-l-e-v-i-l-l-e라고 철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일러 주었더니 겨우 알아들었다. “오우, 벨빌!”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에이, 녀석도 자기 나라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구먼.” 하고 속으로 짜증을 냈지만 참 진땀 나는 경험이었다.
미국 생활 30년이 넘으니 눈치가 늘어서 미국인과의 의사소통에 큰 불편은 없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어를 더듬거릴 때가 있으니 그것도 문제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전화하다가 적절한 한국어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 버벅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어 회화 실력은 조금만 늘고, 한국어 구사 능력은 조금씩 떨어지고, 이제는 나이 어린 외손녀 눈치도 봐야 하니 이래저래 타국살이는 서럽다.
(2013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