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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인가-동방(시리아, 페르시아)의 맥락에서
* 이 글의 일부는 한국선교연구원(KRIM)에서 발행하는 저널 「현대선교」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에서 일부 발췌되었음을 밝힌다. “예수는 누구인가(Who is Jesus)?: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역사의 시각에서,” 「현대선교」 14 (2012): 67-90.
지난 호까지 유대적 맥락 그리고 헬레니즘의 맥락에서 본 “예수는 누구인가?”를 각각 다루었다. 이번에는 그 시대의 또 다른 중요 문화권인 시리아와 페르시아 문화권, 즉 동방 지역의 맥락에서 탐색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동방 지역은 지리적 요소는 물론 언어와 인종적으로도 지중해 문화권과는 달랐던 곳이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하여 예수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신학적 성향도 서로 차이가 난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동방 지역은 시리아와 페르시아는 물론 아랍, 인도, 몽골, 중국까지 확장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시리아와 페르시아
예수의 공생애 행적은 팔레스타인 지경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의 사역의 초점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 15:24)에 국한되긴 했지만, 예수가 유대인들만을 선호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러한 예수의 제한된 행적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온 수리아에 퍼져 있는 상태였다.(마 4:24) 여기서 언급된 수리아는 시리아어(혹은 아람어)를 공용어로 쓰는 지역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영향력은 이미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섰다. 또한 수리아는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나타난 대로 성령께서 사도바울 일행의 여정을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돌린 사건이다.(“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왜 성령은 이들이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을까? 추측건대 이는 마게도냐의 유럽인들을 선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동방인 아시아 지역에는 예수의 다른 사도들과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순절 날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행 2:5), 특히 아시아권에서 온 이들의 이후 행적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서방은 복음의 개척지라 할 수 있기에, 헬라어를 잘 알고 헬라 문화권에서 자란 바울과 디모데를 그리로 인도하신 것이라 사료된다. 따라서 복음의 여정을 논할 때 처음에는 복음이 서진하여 서방으로 가고 훗날 서방을 거쳐 아시아인 동방으로 왔다고 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시각이다. 복음은 서진만 한 것이 아니라 동진도 하였다. 복음의 전파가 처음부터 전(全)방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초대 기독교 전승에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도마가 인도로 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 예수 당대에 시리아 지역의 소왕국인 오스로에네(Osrhoene)의 왕 아브갈이 예수를 초청하는 서신을 전달했다는 전승과 이후 그곳이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622년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동방 지역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시리아인(Assyrian)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로마(Greco-Roman) 지역의 그리스도인들과 차별화하여 지리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교회의 전통으로 보아도 로마 세계의 동방정교회나 서방 가톨릭 전통과는 다른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 전통이 일찍부터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635년에는 비단길을 따라 몽골 지역과 중국의 심장부인 장안(당시 당나라의 수도, 오늘의 시안)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시리아-페르시아(Syro-Persian) 권역은 그리스-로마(Greco-Roman) 권역과 문화적·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만큼 로마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이 지역에 편만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잘 보여준다.
동방에서의 중심 질문: 윤리적 행실, 금욕적 영성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 지역에는 유목 문화와 더불어 점성술이라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특히 세계 종교의 창시자들이 활동했던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자라투스트라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 사산왕조(224-651)의 국교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이 대결하는 이원론적인 틀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특별히 선한 생각과 언행을 강조하였다. 이후 이 지역에서 탄생한 이슬람교 또한 윤리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동방 지역에서 발현된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도 이러한 행위적이고 윤리적인 특색은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형이상학적 이해와 정교한 교리적 체계로 나타나는 헬레니즘적 기독교의 신조들과는 달리 윤리적 측면이 매우 강조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교부였던 아프라핫(Aphrahat, c.280-345)의 저술 『예증』(Demonstrations)의 “아프라핫의 신앙고백”에서 이러한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신앙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생명을 창조하신 주,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으며, 모세에게 법을, 선지자들에게 성령을,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셨음을 믿으며, 죽은 자의 부활과 세례와 하나님의 교회를 믿는 것이다.
안식일과 다른 월삭을 지키는 일을 하지 않으며, 점을 하거나 마술을 하지 않으며, 음행과 술수와 악하고 헛된 가르침을 좇지 않으며, 감언과 욕과 간음을 삼간다.
이것이 참된 반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니 그에게서 우리가 세움을 입는도다.2
위에서 묘사된 신앙고백의 전반부는 성서 내용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후반부에 있는 안식일, 월삭, 점, 마술, 음행 등을 금하는 행동강령은 올바른 행위와 윤리적 삶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이요,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시대에 헬레니즘의 맥락에서 나온 니케아 신조와는 대조적인 면모이다. 니케아 신조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정교하게 묘사하며 ‘바른 교리’(orthodox)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바른 행실’(orthopraxis)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히 시리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영성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예로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극단적’이라는 말은 심지어 결혼과 부부 간의 성생활마저도 금하는 풍조를 뜻한다. 이러한 태도는 시리아의 기독교 사상가요 성서학자라 할 수 있는 타티안(Tatian, 110-180)에게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위 ‘언약의 아들들’ 혹은 ‘언약의 딸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예수를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을 서약한 자들인데, 위에 언급된 아프라핫도 언약의 아들들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독신주의는 특별히 다산을 신의 축복이라고 여겼던 조로아스터교의 신앙관과 직접적으로 부딪혔다. 당시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정황에서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신랑으로 여기고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중대한 박해 사유였다. 사산왕조하의 박해시대에 포시의 딸이며 또한 언약의 딸들 가운에 하나였던 젊은 처녀 마르다에 관한 순교사화는 이러한 충돌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마르다는 그녀를 취조하면서 결혼을 강요하고 배교를 종용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에 맞서 그녀의 진정한 신랑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며 담대히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예수는 누구인가: 참된 반석
위에 언급된 아프라핫의 신앙고백에서는 그 말미에 그리스도를 “참된 반석”으로 묘사하며, 이러한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지는 삶을 참된 “믿음의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온전한 신앙을 ‘건축물’에 비유하고 ‘실천적 행위’로 강조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20)
흥미롭게도 위 발언의 화자인 예수, 야고보, 유다는 모두 한 형제로 유대인이었다. 이로써 시리아와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 지역의 정서와 유대인의 정서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신비적이거나 철학적 개념의 용어가 아니라 일상적 용어, 보통명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특히 예수는 선한 목자, 문, 길, 포도나무, 씨 뿌리는 자, 신랑, 진주, 등, 빛과 같은 성서의 이미지와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솔로몬의 송시 또한 지극히 일상적인 용어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묘사하고 있다.
한 잔의 젖이 나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주님의 인자의 달콤함으로 마셨다
독생자가 첫 잔이며
성부는 젖을 내는 그분이며
성령은 그분에게 젖을 먹이는 그녀이다
- 『솔로몬의 송시집』(The Odes of Solomon) 19편 중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묘사가 비유적이긴 하지만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여기서 사용된 ‘젖’(우유)이라는 단어는 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문화권에서 친숙하고도 중요한 용어이다. 젖은 물보다도 오히려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음료이고 또한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성부는 젖의 원천으로, 성자는 그 원천을 담는 용기(잔)로, 성령은 그 원천을 먹이는 분으로 소개된다. 심지어 성령에게는 돌봄의 이미지를 갖춘 여성성이 부여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동방에서의 공헌과 유산
동방 기독교가 지구촌기독교의 일원으로서 세계 기독교에 공헌한 부분은 무엇보다도 신학적인 이해와 방법론의 차이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시리아나 페르시아 기독교의 공헌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관해 우리의 삶 속에서 느껴지고 경험될 수 있는 그분의 ‘임재성’(immanence)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하나님 이해에 있어 ‘초월성’(transcendence)을 강조하는 헬레니즘의 맥락과 대조적이다.
시리아의 교부 에프렘(Ephrem, 306-373)은 신학자, 찬송작가로 ‘성령의 수금’(Harp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별명과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라는 칭호로 불린다. 그가 예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찬송을 작시하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별칭들이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그의 신학적 서술은 운율적이다. 마치 시편과 같다고 할까?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시리아적인 방식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묘사하는 방법에서 헬레니즘의 방식과는 달랐다. 헬라적 방식이 산문적이라면, 시리아적 방식은 운문적이다. 헬라적 방식이 사변적이고 추상명사를 많이 썼다면, 시리아적 방식은 구체적이고 보통명사를 많이 썼다. 헬라적 방식이 우화적(allegorical)인 반면, 시리아적 방식은 상징적(typological)이다.
에프렘에 의하면, 자연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상징물로서 곧 성례(sacrament)와 같은 기능을 가진다. 마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에프렘의 이러한 신학적 방식은 결코 일상이 무의미하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우리 주변에는 신학적 소재가 풍성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표현은 시리아 지역에서 널리 불린 찬송가 『솔로몬의 송시집』(The Odes of Solomon)과 같이 운율을 갖춘 노래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목가적 전통의 친숙한 노래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학을 온전히 표현했다.
또한 에프렘의 찬송시에는 인류의 첫 어머니인 이브의 불순종과 구속사에서 중요한 순종의 본을 보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인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대조와 대구가 사용된 에프렘의 찬송시를 보면 마치 시편을 읽고 있는 듯하다.
마치 죽음의 독약이 이브의 작은 귓속으로 들어가 죄악을 잉태한 것이라면, 이제 구원의 말씀이 마리아의 새로운 귓속에 들리어 그녀의 순종으로 인해 생명을 잉태하였네.
- 에프렘의 찬송시 중 교회의 찬송(Hymns on the Church)에서
결국 신학의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리스-로마 전통에 영향을 받은 서방 기독교 방식과 시리아-페르시아 전통에 영향을 받은 동방 기독교 방식이다. 전자가 조직신학의 유산을 남겼다면, 후자는 찬송신학의 유산을 남겼다. 모두가 중요하고 각자가 기여하는 바가 있다. 정리하자면 동방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해 방식에서(임재적),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에서(보통명사), 그것을 기술하는 방식에서(운율적) 헬레니즘으로 대변되는 서방과 분명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였다.
이제 동방 기독교의 또 다른 공헌과 유산을 살펴보겠다. 먼저는 그들이 끼친 선교적 확장이다. 13세기 몽골 시대 혹은 16세기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로마가톨릭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광활한 아시아 지역에 도달하기까지 이 지역에서의 복음 전파는 소위 ‘네스토리안’이라 불리는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의 몫이었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광활한 몽골 세계에 기독교의 확장을 가져왔다. 무역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시아 지역은 그 누구보다 친근한 세계였다. 그 결과 7세기경에 이미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중국의 심장부까지 기독교가 확산될 수 있었다.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경교(景敎)로 받아들여졌고 향후 150년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융성하게 발전하였음을 경교 비문이 증거하고 있다. 경교 비문의 내용과 더불어 중국의 서역 관문 도시라 할 수 있는 둔황에서 발견된 경교 문서들을 통해서는 당시 동방교회가 불교, 도교, 유교와 같은 중국의 종교들과 조우하면서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하려고 하였는지 그 구체적인 시도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몽골 부족 중 기독교를 받아들인 케레이트족(Keraits)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케레이트족의 왕 왕칸(Wang Khan, 1131-1203)을 당시 유럽에서 회자되었던 동방의 기독교 군주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으로 소개하고 있다. 왕칸은 몽골제국의 창시자인 칭기즈칸의 후견인이나 다름없었는데 훗날 정적으로 몰려 패하게 되고 케레이트족의 기독교 공주들은 칭기즈칸의 부인과 자부가 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같은 서방 기독교의 전래 이전에 이미 광활한 아시아 지역에 동방 기독교를 통한 복음의 확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은 중동 및 서아시아 지역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기독교 역사에서 또 하나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회교권 중상류층에 속한 그들은 서방 문명과 기독교의 전통을 아랍 세계에 번역, 전달, 소개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이렇게 전수된 헬레니즘의 유산들을 중세 시기에 유럽에 역으로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누구보다 문명의 보전자, 전수자로서 공헌하였다.
동방의 위협과 도전
시리아와 페르시아 지역은 바빌로니아가 일어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함께 인류의 고(古)문명권에 해당한다. 그만큼 고대로부터 여러 사상들이 발흥한 곳이다. 예수 탄생 당시에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그를 찾았다는 성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세월 점성술이라는 독특한 전통이 자리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서도 영지주의는 그 영향력을 떨쳤는데, 한 예로 오피스파(Ophites)라는 이단은 하와를 유혹한 뱀에 대해 다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신이 선악을 알게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gnosis)을 인간에게 주기를 꺼린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신의 뜻을 거스른 뱀이 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뱀을 영웅적인 존재로 숭배했다.
헬라 세계에서 영지주의가 교회의 위협이 되었다면, 이 지역에는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가 있었다. 두 종교 모두 헬라 사상처럼 이원론적 특성을 공통분모로 지녔으며 그러한 면에서 영지주의와 사촌 관계라 할 수 있다. 영지주의가 형이상학적 이원론(완전한 것 vs. 불완전한 것)을 출현시켰다면, 조로아스터교는 도덕적 이원론(선한 것 vs. 악한 것)을 출현시켰다. 즉 우주와 역사의 이해를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결 양상으로 믿었는데 이는 훗날 마니교 사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쳐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 구도를 초래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조론은 이처럼 대결 구도를 가지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각각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창조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성서적 창조신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마니교도들은 기독교화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혼합종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 마니교는 기독교 초기 시대에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급진적이고 널리 퍼진 고대 종교 가운데 하나였다. 3세기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의 사상은 북아프리카의 젊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이러한 마니의 사상은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그의 신학 사상을 정련케 한 대표적 이단사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마니의 사상은 서로 다른 두 신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상대적으로 제한했기에 기독교 신앙을 크게 위협하였다. 신앙인이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악을 어떤 실체가 아닌 선의 부재로 보았으며,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1장 2절에 언급된 흑암은 존재로서의 어둠이 아니라 빛이 없는 부재로서의 어둠(빛이 없는 상태)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시리아의 교부 에프렘과 페르시아의 교부 아프라핫 또한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창조신앙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위협했던 조로아스터교 및 마니교를 통렬하게 비판했으며, 당시 만연했던 점성술과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경계하면서 성서적이고 균형 잡힌 신앙의 안내자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특히 시리아의 교부 바다이산(Bardaisan, 154-222)은 그의 저술3에서 인간을 움직이고 제한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천성(nature), 운명(fate), 자유의지(will) 중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점성술의 영향이 강한 이 지역에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신학적 의제였기 때문이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포함한 동방 지역의 기독교를 살펴보면서, 헬레니즘의 맥락에서 형성된 기독교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각 문화권의 생활방식 및 사고방식의 차이가 기독교의 복음과 조우했을 때 어떠한 신앙의 결정체로 빚어지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었다. 동방 기독교는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예수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였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이에 대해 올바른 행위의 삶이 곧 올바른 신앙이라는 답을 내렸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신앙 표현에는 교리적인 신조보다 윤리적인 행동강령이 더 많이 강조되었다.
동방에서 복음의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 역사는 서방에서 또한 강력히 확장되면서 특별히 야만족이라고 여겨졌던 켈트인들과 게르만족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다음 호에서는 이들의 예수 이해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註)
1 유세비우스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1:13 참조.
2 아프라핫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술 『예증』(Demonstrations) 1:19.
3 『국가의 법들』(The Book of the Laws of Countries) 혹은 『운명에 대한 대화』(The Dialogue on Fate).
박형진|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선교 역사 및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으며, 지금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저서로 『지구촌기독교 선교 역사 이해의 지평들: 아돌프 하르나크에서 앤드루 월스까지, 선교역사가 8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