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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8일
황해도 송죽리 고분서 새 벽화 발굴
북한 황해북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벽화 고분
(서기 4~5세기)에서 16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인의 모습. 초생달 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다
무덤을 지키는 흰둥이와 누렁개, 말 탄 자세에서 상체를
돌려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파르티안 슛·partian shoot) 호랑이를 쫓는 호방한 무사들….
한민족의 가장 찬란한 문화유산 중 하나인 고구려 고분 벽화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목록을 새로
추가했다. 1600여년 만에 제 모습을 드러낸 황해북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고분 벽화는 일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 방과 현실(玄室·시신을 안치한 방) 두 방 구조로
이뤄진 이 무덤은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의
길이가 8m에 이르고 있어, 전체 봉분의 직경은 30m에 이르는 왕릉급으로 추정된다.
도굴 당한 채 옥수수밭에 방치된 상태였으며, 머리 뒤에
꽂는 은제 뒤꽂이 3점, 은으로 장식한 관 못 등이
발굴됐다. 발굴단은 4~5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는 석회를 바른 뒤 돌 등을 빻아 만든 자연
안료로 그렸다.
이같은 사실은 발굴에 참여한 일본 고구려회 나가시마 기미치카 회장이 8일 부산대에서 열린 ‘북한 고고학의
최신 성과’ 세미나에서 처음 국내에 공개했다.
나가시마 회장은 “섬세한 선과 아름다운 색채로 그린 고구려인의 얼굴이나 비늘갑옷(찰갑·찰갑)을 입은
무사상의 세부 묘사 등에서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며 “공동 조사한 북한
연구자들조차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벽화’라고 평했다”고 전했다.
▶2011년美 '대통령의 피아니스트' 로저 윌리엄스 별세
▶2010년중국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2005년인도·파키스탄 대지진 발생
▶2004년아프라카 케냐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 여성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
▶2002년단말기 보조금 3년간 금지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국무회의서 의결
▶2001년배리 본즈, 박찬호로부터 미 프로야구 사상 최다 홈런 수립
▶2001년밀입국하려던 중국 동포 등 25명 시신 수장(水葬)
중국동포 11명과 중국인 등 60명이 한국 어선에 숨어 국내로 밀입국하려다 선상에서 25명이 집단 질식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의 시체는 모두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확인됐고, 나머지 35명은 여수 부근 대경도와 돌산도 등에 상륙했다가 2001년 10월 8일 전원 검거되어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로 신병이 인도됐다.
이들 밀입국자들은 지난 1일 오후 8시쯤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100t급 중국 어선을 타고 출항, 6일 오전 1시쯤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 공해상에서 태창호로 옮겨 탔다. 처음 갑판에서 머물던 이들은 해안이 가까워지자 7일 오전10시쯤 배 뒤편 물탱크와 그물(어구) 창고에 35명, 25명씩 나눠 숨었다. 그러나 고기 창고로도 사용되는 그물 창고는 높이 3m, 넓이 3평 남짓한 크기인데다 어구 등으로 입구를 완전히 덮는 바람에 이곳에 숨었던 25명은 불과 3시간 뒤인 7일 오후 1시쯤 선원들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선장 이씨 등은 8일 오전 3시30분쯤 가막만 등대 부근에서 생존자 35명을 한국 어선에 인계했고, 운반책 여모(52)씨에게서 핸드폰으로 수장 지시를 받고 소리도 앞 해상으로 나가 오전 6시쯤 숨진 밀입국자들을 바다에 던졌다.
중국인 밀입국자 25명의 수장사건을 수사중인 전남 여수해양경찰서는 9일 밀입국자 사체를 바다에 버린 제7태창호 선장 이모씨 등 선원 8명을 중과실 치사와 사체유기 등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1998년프로야구선수 타이론 우즈, 첫 외국인선수 MVP에 선정
▶1998년원로 삽화가 김영주씨 별세
▶1998년조세 사라마구 노벨문학상 수상
▶1997년김정일 당총비서직 공식승계 발표
▶1994년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1992년현승종 제24대 국무총리 취임
▶1992년세인트루시아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 노벨문학상 수상
▶1992년빌리 브란트 전(前) 독일 총리 사망
▶1990년무용가 한영숙 사망
▶1988년탈옥수 지강헌 사건 발생
https://youtu.be/JOZjZ-RkkXk
탈옥수 지강헌 사건! 유전 무죄, 무전 유죄!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 서울 한복판에서는 난데없는 탈주범사건이 터져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지강헌을 위시한 탈주범들은 인질극 소동을 벌였다.
이 사건은 당일 자기들끼리 의견다툼을 벌이다 서로 총을 쏴 자살하거나 끝내는 경찰로부터 사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 가운데 "이 시대 마지막 시인"으로 자처한 주범 지강헌등은 인질극을 벌이는 와중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당시 세태를 예리하게 헤집는 말을 남겨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자살과 유혈로 막을 내린 이 인질극은 서울올림픽과 함께 88년 한국사회를 수놓은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들이 죽고 난 뒤 유행했던 "유전 무죄, 무전 유죄"는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시대의 암울한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
▶1985년남북체육회담, IOC주재로 로잔에서 열림
▶1984년삼성반도체 256KD램 개발
▶1983년창경원 동물가족,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 시작
▶1983년전두환 대통령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 등정
▶1983년중공, 신학대 개설
▶1982년폴란드 자유노조 해체
▶1980년서울지검, 처음으로 순회법률상담제 실시
▶1978년미국, 크루즈미사일 실험성공 발표
▶1977년예비군, `쌍용 작전` 개시
▶1975년살인마 김대두 검거
▶1975년김옥선 의원 파동
▶1973년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사망
▶1970년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 사망
▶1968년법관추천회의, 새 대법원장에 민복기 선출
(21일 정식임명)
▶1967년체 게바라 볼리비아 정부군과
전투중 총상 입고 체포
▶1967년영국 정치가 애틀리 사망
▶1963년유엔총회, 월남의 불교도박해 조사단파견 결의
▶1962년이승만대통령, 미군의 철수연기를 요구
▶1959년정부, 대일통상해제 원칙을 결정
▶1955년국회, 한국통일방안 결의
▶1952년한국휴전회담서 유엔측 무기한 휴전통고
▶1951년휴전회담장소 판문점으로 결정
▶1951년역사학자 김성칠 작고
▶1951년한국-미국 재정협정 조인
▶1943년총독부, 생산증강 노무강화요강 발표
▶1942년인도서 반영국소요. 3천명 사상
▶1929년제1회 경ㆍ평축구전
30여명의 선수가 가지런히 늘어선 이곳은 배재고보운동장. 1934년 4월 제3회 경-평축구대항전 입장식 모습이다. 1차전은 평양이 2대1로 승리했고, 2차전은 2대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서울과 평양의 도시대항전은 조선일보사 주최로 1929년 10월 처음 열렸다. 당시 서울 휘문고보구장에서 3전 2선승제로 치러진 대항전에서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평양이 2승1무로 서울을 압도했고, 이듬해 제2회 대회에서는 경성이 3전 전승으로 빚을 갚으며 본격적인 '경-평 라이벌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두 도시의 경쟁 의식은 한국축구 발전에 촉매제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대회마다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1928년장개석,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
▶ 1919년 오늘,
미국의회가 술을 제조하거나 판매 금지하는 '금주법'을 가결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기만적인 법도
이보다 더 위선적인 법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술을 마셨다. -필 브라이슨-
▶1910년중추원 부의장에 김윤식,
고문에 이완용 등 14명 임명
▶1908년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1895년명성황후, 일본에 의해 시해(을미사변)
암호 '여우사냥'!
을미사변 발생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일본 낭인들에게 한 나라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피살을 당한 사건으로 살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들 중에는 미우라 고로 와 미야모토 다케타로 등에 지휘아래 자행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근처의 녹원 숲속으로 옮겨가 석유를 붓고
그 위에 장작더미를 올려 쌓은 다음
불살라 버렸다.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타고 남은 시신을 우물에 버리고 일부는 묻어버렸다.
폭도들의 이러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 수비대병력은 궁궐의 각문을 파수하며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물 샐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궁궐은 일본군 수비대와 이 사건에 이용된 훈련대에 의하여 장악 되었고 목적을 달성한 폭도들은 궁궐을 빠져나갔다.
얼마 전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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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필설로 옮길수 없슴을 양해바랍니다)
일제는 아예 명성황후 시해 장소였던
건청궁을 없애고 화단을 꾸미려하였다가 삼일운동으로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만행의 배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기획하고 사주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명성황후'를 지칭할 때 '민비'로 호칭하였는데 이는 일제 36년 동안 식민사관교육의 결과이고 친일파 교육자들은 이를 그대로 답습해서 해방 이후에도 사용 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은 일본인들과 훈련대 군인들의 복장을 한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고종과 태자를 위협한 후에 옥호루에 들어가 왕비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증거말살을 위해 옥호루 옆의 숲 속으로 시체를 옮긴 후에 태워버렸다. 이들이 범행을 자행하는 동안 궁궐은 완전히 통제되었고, 범행이 끝난 후 범인들은 궁궐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일본은 자국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발표하였다. 일본은 언론을 통해 민비시해사건이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권력다툼의 일환이라고 선전하였다. 한편 미우라는 훈련대 군인들이 궁궐에 침입한 죄로 이들을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이 돌연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에 이용되어 경복궁으로 들어와 행동을 규제받았으며, 훈련대 군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인이 민비를 시해하는 동안 경복궁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국제 여론은 일본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았다. 속속들이 증거가 포착되자 여론은 더욱 들끓기 시작하였다. 베베르는 “살인자와 살인 교사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열강은 일본을 “야만의 나라”로 규탄했다. 악화되는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은 시해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시인하면서 미우라와 관련 인물 40여 명을 소환하였다. 이는 공사의 개입만으로 사태를 무마하려는 일본정부의 계획이었다. 결국 8월 29일, 미우라는 본국에 소환되었고, 관련자들이 수감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여론이 수그러들자 이듬해 1월, ‘증거불충분’이라는 판결을 받고 무죄로 풀려났다.
▶1895년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출생
▶1879년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71년시카고 대화재
시카고가 정식 '시' 로 탄생된 해는 1837년으로 당시의 인구는 4천 2백만 정도였다. 1871년 10월 8일 시카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은 10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상업지구를 포함해 10㎢의 시가지를 삼켰다. 불은 남서쪽에서 발생해 목조건물과 도로를 타고 옮겨갔는데 오랫동안 건조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쉽게 번져나갔다.이 화재의 불길은 극도로 건조한 날씨와 거센 바람 탓으로 무려 27시간 동안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바람에 다운타운과 북쪽의 전지역이 전소되다 시피하였다. 이 하루동안의 화재로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던 빌딩 중 1만 8천호가 소실되어 당시 시카고 인구의 3분의 1인 10만명이 집을 잃었고 약 250명이 죽었다. 불길은 북동쪽으로 번져 시카고 강을 지나 미시간 호에 이르러서야 꺼졌다.
▶1735년중국 청조 13대 황제 옹정제 사망
https://youtu.be/COI-hFeX9Sc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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