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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 도종환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밖으로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 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 시집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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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더디게 오지 않는 봄이 오히려 미덥지 않다. 줄곧 들어온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 탓일 게다. 지난주 비 내린 후 꽃샘추위 어쩌고 하더니 요 며칠 낮의 온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집에서 내려다 뵈는 강둑에 개나리가 와락 피었다. 그 옆으로 목련도 화사하게 벌어졌다. 등고선이 그려지는 곳에선 촘촘히 혹은 스멀스멀 산수유와 진달래도 볼 수 있겠다.
황지우 시인의 ‘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이란 시에 보면 온갖 꽃들이 온갖 곳에서 다 피고 있다. 진달래는 ‘파주 연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고, 백목련은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고, 철쭉은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고, 라일락은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고, 안개풀꽃은 ‘망월동 무덤 무덤에’ 피고, 수국은 ‘순천 송광사 명부전 그늘에’ 피고, 그 뭣이냐 칸나는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고, 아무튼 그 밖의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핀 무궁화까지 총망라하여 숨 가쁘게 다 핀다.
그 가운데 ‘미아리 점집 고갯길에’ 헤프게 핀 개나리꽃은 내가 본 것과 영락없이 같은 꽃이다. 사람 떠나고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성주군 선남면 초가 곁에 엉망진창으로 피어있던 꽃도 개나리였고, 내 나이 열일곱 대구 방천 뚝방길에 도회로 가출한 소녀처럼 눈부시게 피었던 꽃도 노란 개나리였다.
해직교사 신분인 시인의 ‘나이 사십의 그해 봄’은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는 게 당연히 불만이었겠다. 쉬 오지 않는 봄이 시인을 더욱 지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서둘지 않아도 봄은 충분히 짧다. 개나리꽃 필 때를 맞추어 도시로 줄행랑친 뒤 오지 않는 우리들의 누이를 생각한다면, 흐르는 세월에 개나리꽃 피는 걸 무심히 보고 있는 것은 쓴 약 같은 아픔이다. 그럼에도 머지않은 4월의 봄은 조금 기대를 걸어볼 참이다. 새롭게 피어날 3백 송이의 무궁화에게 조심스럽게 새 희망이란 이름표를 붙이고서.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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