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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제 1장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본장 1:1-2:52절까지는 누가복음 전체의 서론 격으로서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본장은 예수의 탄생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비교적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특히 본장은 누가복음의 특징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데 그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누가의 치밀함을 보여 준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찬양이 돋보인다.
누가복음은 찬양복음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위대한 찬양을 보여 준다 46-55절의 마리아 찬양, 68-79절의 사가랴 축가가 서로 짝을 이루어 예수 탄생 직전의 즐겁고도 복스러운 분위기를 더해 주며 문학적 흥취를 풍기고 있다. 이 외에도 천사들의 영광송, 시므온의 고별송,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또 누가복음에는 기쁨과 웃음이 있고 즐거운 잔치가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기쁨과 찬양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둘째,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이 본서의 속편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누가는 예수의 활동에 있어서나 사도들의 활동에 있어 성령의 역사하심을 매우 강조한다. 성령에 대하여 마태복음에 12번, 마가복음에 6번 나오는데 비해 본서는 17번 나오며 사도행전에는 57번 나온다. 본장에서는 천사가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탄생을 예고할 때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할 때 언급되었다. 이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들의 위대한 활동의 원동력이 바로 성령의 권능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은혜’라는 말 ‘카리스’가 본서에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는 구속사의 정점에서 활동하신 예수의 생애를 이방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오직 은혜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위대한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누가의 의도를 엿보게 하며, 이 용어는 사도행전에도 17회나 사용되었다.
본장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가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누가는 요한과 예수께서 구속사에 각각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으며 양자의 탄생이 나란히 소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의 우월성과 독특성을 더욱 강조한다.
1. 머리말 (1;1-4절)
마태복음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의 왕통 족보로 시작되고 마가복음은 섬기러 오신 예수의 복음으로 시작되며 요한복음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시작되는 반면에 본서는 상대적으로 길며 짜임새 있는 머리말로 시작되고 있다. 즉 이 서문에는 본서의 집필 동기와 목적, 그리고 집필 방법이 밝혀져 있다.
첫째, 집필동기이다.
로마의 관리 데오빌로에게 인자 곧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증거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함이다. 누가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께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며 예수가 어떻게 인류 구원의 터전을 마련하셨는가 하는 과정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집필 방법이다.
누가는 구두나 문서를 막론하고 예수에 관한 전승이나 자료를 주의 깊게 살피고 조사하였으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예수의 행적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사복음서 중에서 예수의 행적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연대기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가장 뚜렷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에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관한 체험과 증거를 전파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지나친 논리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하고 확대하여 특정 종파의 교리에 이용함으로써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이들의 기록은 객관성과 정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외경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에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개연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1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했는데 이 말을 직역하면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이라는 말이다. 누가는 본서를 통하여 사료들의 정확한 날짜를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성을 입증했으며, 예수의 공생애 처음부터 사건의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사실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였다.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동안 곁에서 목격자 되고 일꾼 되었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사도적 증거와 제자들의 증거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은 열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 대원, 그리고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수종들던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로서 그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기록했는데 하나도 더 하거나 뺀 것이 없었다. 누가는 마가를 바울의 첫 투옥 시에 첫 만남을 가졌고 2차 투옥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마가가 먼저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며, 누가는 마가가 전하는 내용을 많이 참고했을 것이다.
누가는 의사였는데 그렇다면 그는 세상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는 3절에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하는데 먼저 ‘그 모든 일’이라는 말 ‘파신’은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던 모든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누가는 이 사건들을 그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는 것이다. 여기 ‘근원’이라는 말은 예수의 탄생 기사를 언급하는 말이다. ‘자세히’라는 말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매우 정확하고 엄밀하게 살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차례대로’ 써 보낸다고 한 것은 순서에 맞추어 서술하는 역사적 시간 순서를 존중하는 연대기적 방법을 택하면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체계화하고 조직화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수신자 데오빌로 각하는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람들은 데오빌로가 로마의 고위 관리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는 신자였다고 한다. 이 이름의 뜻은 ‘데오스’ 즉 하나님이라는 말과 ‘필레오’ 즉 사랑하다는 말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의 친구’라는 의미이다. 이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었는데 그 신앙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전했던 것이다. 당시 귀한 책을 권위가 있고 명성이 높은 분에게 헌사할 때 그 책이 더욱 권위와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서는 탈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인 서신이며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2.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예언 (1:5-38절)
인자이신 예수의 행적과 사역을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으로, 또한 가급적이면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 누가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예수의 공생애를 소개하면서 마가는 예수의 세례 받으신 때부터 시작하며, 마태는 예수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 누가는 예수의 탄생 예언은 물론이고 세례 요한의 출생 예언까지 수록하고 있으며 예수의 유년 시대, 예루살렘 방문, 나사렛 생활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누가의 기록은 구속사의 흐름을 통해 나타난 ‘예언과 성취’라는 큰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약 말라기서에 예언되어 있으며 본문은 그들의 탄생 직전에 다시 한 번 천사들이 예언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언은 1:57-66절과 2:1-20절에 그대로 성취된다. 누가는 신구약의 연속성을 부각시키려 했는데 세례 요한을 구약 선지자들의 계승자로 여겼다. 누가복음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종교적이며 역사적인 관계를 연결시켜 보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그 중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들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 최대 이적 중의 하나이자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학의 정수인 동정녀 탄생 사건에 관해서는 마태와 누가만이 증거한다. 예수께서 잉태된 때는 요셉과 마리아가 동거하기 전이었으며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당황하는 마리아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잉태 사실이 통보되었다. 세상은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권능을 믿는 자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으셨고 아담을 잠재운 후에 그의 갈비뼈 하나로 하와를 만드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처녀의 몸을 빌려 성육신의 신비를 이루신 것이다. 동정녀 탄생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사건은 구약 이사야 7:14절의 예언의 성취이다. 동시에 창세기 3;15절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둘째,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아담 이후로 전가되어 온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 즉 아담의 씨로 태어나면 안 되고, 동시에 완전한 인성을 지닌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인의 몸을 통하여 태어나는 육신을 가진 자라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 방법이 동정녀 탄생인 것이다.
‘유대 왕 헤롯’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고 유대를 통치하는 분봉왕 헤롯을 말하는데 그는 주전 4년에 죽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를 했으며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건물을 건립하여 유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정적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식과 아내 장모 처남 삼촌을 다 죽일 정도로 잔인했으며,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 임명과 폐위까지 간여하여 종교적 타락이 극에 달하도록 했다. 누가는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배경으로 한 헤롯 시대에 다른 새로운 희망을 비추게 하는데 말리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가 중단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아비야 반열’은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로 아론 자손의 제사장을 기초로 하여 24반열이 있고 각 반열은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아비야 반열은 제 8반열이었다.
*대상24:10 일곱째는 학고스요 여덟째는 아비야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아론의 후손 엘리사벳이 소개된다. 사가랴는 히브리어로 ‘스가랴’이며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이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한 이름이고, 대제사장 아론의 부인 이름과 동일하다. 이들은 모두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은 이중적인 명예로 여겼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의인이라고 했는데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라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함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의인’이라는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간주되었는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한 인물에게 붙여진 말이다. 신약에 와서는 바울이 자신에게 이 말을 사용했는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바울의 이 말은 구약 율법의 의인관에 따른 것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복음관을 부인한 것은 아닌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 시므온 장로와 안나 등이 하나님 앞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특별한 계시를 받았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자들이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두 사람의 종교적, 도덕적 삶을 비난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았다.
한 가지 문제가 된 것은 엘리사벳이 무자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아내가 있으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은 파문을 당한다는 것이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에 무자한 것은 이혼의 정당한 사유가 되었다. 더구나 이들 부부는 나이가 많아 수태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으며 마침내 사라나 한나와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다. 특별히 그 아들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을 얻음으로써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하는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마침 사가랴가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 직무를 행할 때가 되어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게 되었다.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 명 이상이 되고 이 사람들을 24반열로 나누면 각 반열에 약 천 명 정도가 된다. 이 제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 다윗이 정비한 것으로 다윗은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반열로 나누고 그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일씩 성전 봉사를 하게 했던 것이다. 바벨론 포로 시기에는 이 제도가 시행되지 못하고 포로 귀환 때에는 4반열만 귀국하였다. 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홀 이 4반열은 에스라 주도하에 반열을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시켰다. 사가랴는 그 중에 8번째 반열이지만 다윗 당시의 반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 제사장 가족들은 1년에 두 번씩 섬겼고 그 기간은 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주일이었다. 물론 절기 때에는 제사장 모두가 참여하였으며, 한 사람의 제사장이 상번제를 위해 혼자서 분향하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이런 경우는 일생에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조차 큰 행운으로 여겼다. 사가랴 당시에는 제사장이 너무 많았으므로 한 제사장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비를 뽑아 당첨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인 것이다.
사가랴 제사장은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준비된 기구들을 분향하고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성소에 들어갔는데 ‘성소’라는 말 ‘나오스’는 성전의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지칭하는 ‘히에론’과 구별된다. 사가랴는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들어간 것이다. 이 일을 맡게 된 제사장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홀로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분향은 제사장 고유의 임무로서 향을 사르는 것은 모든 백성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분향하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께 흠향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하여 하루에 세 번씩 성전 뜰이나 바깥뜰에 모였다. 이 중에 첫째와 셋째 시간은 상번제를 드리는 시간과 일치하였다. 바로 이 시간, 주의 사자가 성전에 나타나서 사가랴의 우편에 서 계셨다. ‘앙겔로스’라는 이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자의 현현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매일의 분향은 성막 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 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번제단에서 불을 가져다가 향단에서 향을 사른다. 주의 사자는 이 시간에 향단과 떡상 사이에 나타나신 것이다.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놀라며 무서워했는데 ‘놀라다’라는 말은 ‘내적 동요를 일으키고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며, 무서워했다는 것은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가랴는 주의 사자를 보고 마음의 평정을 잃고 정신이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사람의 공통된 현상이다.
천사는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자신이 현현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사가랴의 간구함이 하나님께 들렸다는 것이다. ‘간구’라는 말 ‘데에시스’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프로슈케’와 비교되는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들린지라’라는 말은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인 기도였다는 것이다. 사가랴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천사의 응답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즉 자식이 없는 그를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기도 이상으로 응답하셨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시야도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인의 간구하는 힘이 크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천사는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었는데 이는 그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요한’은 히브리어로 ‘예호하난’이며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의미이다. 세례 요한의 탄생은 그의 부모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의 기쁨이 될 것이라고 천사는 일러 주었다.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와 ‘즐거워하다’라는 말 ‘아갈리아시스’가 연이어 나오는 문장인데 ‘아갈리아시스’는 ‘환희’라는 의미로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말하는데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요한의 탄생은 일개 가정의 기쁨을 넘어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이다.
천사는 요한의 직분과 사명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일러 주었다.
첫째,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큰’이라는 말 ‘메가스’는 ‘위대한’ ‘덕스러운’ ‘권위 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 말은 예수의 수태고지 때에도 사용되었으나 32절에 예수는 그 자신이 큰 자가 되었지만 요한은 ‘주 앞에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은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아갈 것이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할 것이다. 즉 술 취하는 대신에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는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이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둘째,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시키는 마지막 선지자로서 그의 사역은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다는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예레미야처럼 선지자의 직무를 감당하였다.
셋째,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구약 시대 선지자인 엘리야의 기질이나 영향력,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가지고 사역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이사야,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했는데 유대인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
*사40:3-4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될 것이요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아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사실 요한은 전 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나 비슷했다. 광야에서의 청빈한 삶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 박해를 받는 것도 역시 동일하다. 구약 말라기 4:6절에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했다. 이 예언의 성취로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선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위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다. 요한은 또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 된 이방인까지도 포함하는 영적 이스라엘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천사의 대답을 분석해 보면 사가랴는 겸손했던 것이 아니라 불신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과 아내가 이미 늙었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수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동정녀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했는데 이는 불신앙의 말이 아니라 천사의 메시지를 믿지만 그 내용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었다. ‘늙고’에 해당하는 말 ‘프레스뷔테스’는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율법에는 나이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하는데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50세 이전이라는 것과 현직에서 거의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그의 초조함과 불신이 겹친 것이다. 천사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고 하였다. ‘가브리엘’이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두 명의 천사의 이름만 나오는데 가브리엘과 미가엘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사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이라는 말은 천사의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는 말이지만 동시에 천사의 조심스럽고 겸손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일꾼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을 과시하거나 높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는데 ‘좋은 소식’은 ‘복음의 선포’를 말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의 탄생과 관련하여 사가랴 개인과 온 민족을 받을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가랴의 불신앙으로 인해 ‘좋은 소식’은 이미지가 퇴색되었고 그 대가로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 때까지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벌이라기보다는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가 된 것이다. 만약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지 않고 말을 했더라면 그의 부인 엘리사벳이 수태했을 때에 천사의 말을 사람들에게 두루 전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은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하는 제사장을 기다리던 백성들은 그의 지체함을 보고 이상히 여겼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은 제사장의 지체함을 두고 그가 어떤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 오래 머물지 않고 속히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지체함은 백성들의 궁금증이 되었을 것이고 혹시 죽지 않았나 하는 걱정했던 것이다. 제사장은 성소에서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사가랴가 말을 못하므로 축복하지 못하자 백성들은 그가 환상을 본 줄 알았다고 했다. 헬라어는 ‘이상’이라는 말이 세 개가 있다. ‘옾타시아’라는 말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이며, ‘호라마’는 ‘보여지는 것’ 을 나타내는 말이고, ‘호라시스’라는 말은 ‘외관’ ‘자태’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옾타시스’가 사용되었는데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무엇을 본 것, 황홀경 중에 본 것,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말하는 것이다. 사가랴는 백성들 앞에서 말을 못하고 손짓과 몸짓으로 그의 뜻을 전달했으며 이런 행동은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사가랴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지만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내는 천사의 고지대로 잉태하였고 그녀는 사람들에게 잉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그 이유는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엘리사벳은 남편으로부터 태어날 아이에 대해 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잉태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큰 부끄러움이다.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살다가 마침내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셨다.’고 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라는 말 ‘오네이도스’는 단순한 수치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에 빠지는 치욕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이런 기막힌 치욕을 치워버리고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 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함을 보여 준다. 이는 누가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잉태된 지 여섯 달이 지난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지방에 있는 나사렛 동네에 나타난다. 누가는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소개할 때에 갈릴리 지방을 먼저 이야기한다. 이는 이 책의 수신자 데오빌로가 유대의 작은 지방 나사렛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가랴 제사장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분향할 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는데 지금은 호화롭고 화려한 예루살렘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시골의 외진 마을에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사렛 지방을 아주 천시하고 멸시했다. 요1:46절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고 하는 나다나엘의 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에게 극단적으로 천시 받던 동네가 나사렛인데 예수께서는 공생애 이전의 삶을 거의 대부분 이 지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 약 100km 지점에 있는 이스르엘 평원 북쪽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으며 뒤편에는 레바논 산맥과 언제나 눈이 덮여 있는 헬몬 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 산이 있다.
나사렛에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는 마리아라는 처녀와 정혼한 사이였다. 유대 관습에 의하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을 하며 샴마이 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한 행위는 사형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정혼한 사람끼리 혼전의 성관계도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한 기간 중에 신랑이 사망한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었다. 누가는 마리아에 대해 ‘처녀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마리아가 약혼한 이후에 더욱 조신하고 경건한 생활을 했음을 부각시키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것이다. ‘처녀’라는 말 ‘파르데논’은 ‘미혼녀’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동정녀’를 의미한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인사를 했다. 사가랴 제사장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마리아에게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사가랴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우편에 서 있었지만 마리아에게는 평안의 인사를 한 것이다.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은 은혜를 받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천사와 마리아와의 대회는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 28-29절에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난다.
둘째, 30-34절에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셋째, 35-38절에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천사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인사에 대해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놀라며 이런 인사가 어찌된 일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생각하매’라는 말 ‘디엘로기제토’는 반대할 뜻이 없으며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추론하는 것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냉정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마리아가 조용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 천사는 그의 방문의 목적과 되어 질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사가랴는 천사의 나타남 그 자체를 보고 무서워했지만 마리아는 나타난 천사의 인사를 듣고 나서 무서워했는데 주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듣고 무서워했던 것이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 후에 또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다. ‘입었다.’는 이 말은 특별한 은혜가 갑자기 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마리아가 발견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 대가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은 채 언제나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엡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제 천사가 방문한 목적의 내용이 소상히 공개된다. 그 내용은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헬라 음역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이에 대해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한다.
첫째, 그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말할 때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된다.’고 했다. 이는 다분히 제한적인 어투였으며 주 때문에, 주를 힘입어 큰 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단순히 ‘크신 분’이라고 하여 매우 경외하는 표현을 한 것이다.
둘째,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의 신적 기원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 하는 말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말은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인데 신약성경에서 아홉 번 사용했는데 이 중 누가가 일곱 번 사용하였다.
셋째,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그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의 호적상 부친인 요셉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의 혈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위’는 왕 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예수는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실 분이다.
넷째,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고 했다.
예수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인데 야곱의 집이란 소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다.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것이다. ‘나라’라는 말 ‘바실레이아스’는 ‘왕국’ ‘왕권’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로서 끝이 없는 영원성과 무한성을 가지고 있다.
천사의 설명을 듣고 난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알다’라는 말 ‘기노코스’는 히브리어 ‘야다’로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마리아는 과거나 현재에도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은 처녀라는 주장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듣고 표적을 구했지만 마리아는 성취 방법을 물었는데, 수태고지에 대한 천사의 전언을 듣고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 방법을 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천사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면서 기적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 분의 동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삼신할머니를 등장시켰듯이 유대인들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대답은 아버지를 제외시키고 성령이 그녀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시면 잉태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시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 칭함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 칭호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 산에서 변화되실 때,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백부장에 의해, 여러 번 불려졌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시다.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 행위와 영생 수여의 면에서 하나이다. 이 칭호는 메시야적 칭호임과 동시에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서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한다.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의 증거로 그녀의 친족 엘리사벳의 임신을 내세웠는데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어떤 친척의 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엘리사벳은 레위인 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었고, 마리아는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는 자신의 말의 확실한 증거로 말하기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라고 했다.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는 ‘생생한 목소리로 말한 것’이다. ‘말씀’에 해당하는 또 다른 말 ‘로고스’와는 달리 ‘레마’는 그저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생동감이 있고, 영적인 운동력이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을 표시하면서 ‘주의 여종’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노예’라는 말의 여성형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과 수치와 곤욕을 감수하더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려는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이기도 하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처녀 수태로 인한 파급 문제는 엄청난 것으로 세인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하고 심지어 재판을 받아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의 말이 마리아의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만사의 시작이시며 끝이시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를 계속해서 감동시켰던 것이다.
3.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1“39-56절)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 서로 화답하는 이 장면은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주어진 가브리엘 천사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역시 교차적 방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와 마리아에게 주의를 집중시켜 예수께서 요한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조한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요한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의가 집중된다. 북쪽 갈릴리 나사렛 지방에 사는 마리아가 어떻게 엘리사벳이 있는 남쪽의 유대 산골의 한 동네에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먼 길을 ‘빨리 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이적적 은혜에 의하여 수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고자 한 것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문안했는데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렬한 것이었다. 임신 6개월이 되면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 현상을 특수한 것처럼 기록한 것은 이 순간의 태동이 특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 놀라운 태동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았고 이를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요한이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하며 뛰놀며 맞이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태중의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께서 그의 모친 엘리사벳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여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와 사랑을 가득하게 채워주셨다. 엘리사벳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엘리사벳과 그녀를 방문한 마리아와 복중의 태아가 모두 성령 안에 있었던 것이다.
오랜 산중 생활에서 외부인과 접촉을 끊고 있던 엘리사벳은 자기를 문안하러 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노는 사실에 대해 감동을 받고 성령의 계시를 받아 탄성을 발하며 예언을 했다. 물론 마리아가 오기 전까지는 엘리사벳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나 마리아를 본 순간 계시에 의하여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마치 선지자가 된 것처럼 큰 소리로 예언을 했는데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리도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아람어적 표현으로써 마리아가 세상의 여인 중에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리아의 축복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복중에 든 아기 곧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 때문이다. 엘리사벳은 이어서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하고 탄성을 질렀는데 주의할 점은 신약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한 곳이 없다. 즉 마리아는 메시야요 주이신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임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닌 것이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는 우상 숭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주’라는 말 ‘Lord'는 공관복음서에 166번 나오는데 그 중에 누가복음에 95회가 나오며 그 뜻은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겸손함을 보이고 있는데 이 겸손은 후일에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던 세례 요한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고백하기를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고 했다. 이 말은 메시야에 대한 계시가 엘리사벳에게 임했다는 것으로 그 계시를 통해 마리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복중의 태아까지 기쁨으로 뛰놀았다는 것이다. 엘리사벳의 고백을 들은 마리아는 자신에게만 임했던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벳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태어날 아이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엘리사벳은 다시 한 번 마리아를 축복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마리아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다. ‘믿은’이라는 말 ‘피스튜사사’는 한 순간만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믿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변함없이 믿고 있는 여자에게 복이 있다고 축복한 것이다.
46-55절까지는 마리아 찬가라고 부른다. 이 노래는 내용상 4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46-48절은 마리아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며, 49-50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성품을 찬양한다. 51-53절은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공의로운 보상을 찬양하며, 54-55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 노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양과 비교되는데 그 내용에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며 찬양한다.
둘째,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높이고 찬양한다.
셋째, 여호와는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고 했다.
넷째, 여호와는 미천한 자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다섯째, 여호와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처지를 뒤바뀌게 한다.
반면에 두 노래의 차이점도 있는데 마리아 찬가에는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된 마리아 자신의 영광스러운 인식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리아 찬가에는 구약의 시편이나 역사서, 선지서 등의 내용이 인용되는데 이는 마리아가 구약 성경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억눌린 자를 옹호하는 내용이 두드러지는데 주께서는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 가히 혁명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마리아 찬가는 처음에 마리아 자신의 개인적 감사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관한 소망으로 끝나며 이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마리아는 과거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약속들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백성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당신의 언약 백성을 영원히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마리아 찬가의 첫 번째 단락으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는 노래로 시작하는 마리아 찬가는 원문에서는 ‘찬양하다’라는 말이 서두에 나온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내 마음아 하나님 내 구주를’ 이렇게 되어 있다. ‘영혼과 마음’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으나 굳이 이를 구분하자면 ‘마음’에 해당하는 말은 ‘프뉴마’인데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생의 중심부를 말하며 ‘영혼’이라는 말 ‘프쉬케’가 영적인 면을 강조한다면 ‘마음’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 의지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내 구주’ 즉 구원의 하나님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와 동등하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잉태하는 순간 모든 원죄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리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 한 후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선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나타낸다.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다.’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에 대한 인식과 겸손에서 나온 말이다. 마리아가 목수 일을 하는 요셉의 정혼자라는 것만 보아도 그녀의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을 만한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사실에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말을 이미 들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복 있는 여인으로 칭송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 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마리아가 받는 복은 그녀를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리아 찬가의 두 번째 단락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권능과 성품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을 ‘능하신 이’라고 부른다. ‘호 뒤나토스’라는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호칭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일관되시는데 이는 당신의 공의로운 뜻과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룩’을 노래하는데 거룩의 구약적 개념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초월성을 뜻하며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말한다. 신약에서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가 성도들에게 전가되거나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윤리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노래한다. ‘엘레오스’라는 이 말은 ‘자비’ ‘은혜’ ‘친절’의 뜻이며 ‘사랑’으로도 번역된다. ‘헤세드’라는 말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로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성실’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헤세드’는 당신이 직접 약속하신 신실하고 자비로운 사랑으로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헤세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두고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고 노래하였다.
마리아 찬가의 세 번째 단락으로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상을 노래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팔로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높은 곳에서 내리치셨다고 하였다. ‘힘’에 해당하는 말 ‘크라토스’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팔’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 과거에 애굽 왕 바로는 교만하게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다가 물리침을 당했으며, 아말렉 족속들이나 가나안 족속들이 멸망을 받았는데 마리아는 이를 두고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무관하게 천상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모든 불의와 왜곡된 상황을 바로 잡는 분이시다. 마리아는 악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철퇴를 ‘흩으셨다.’라는 말로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압제자들을 그의 보좌에서 쫓아내셨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권력이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약자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면서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고 하였다.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는데 당시 특권층과 기득권자들로 인하여 부는 집중되었고 빈민층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다수 백성들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배불리셨다.’라는 말 ‘에네플레센’은 ‘가득 채우다.’ ‘만족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리사욕에만 급급한 자들에게 결코 은혜를 내리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를 많이 가질수록 영혼은 빈핍하게 되며 그 부가 절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리 부를 축적해도 부유해질 수 없으며 결국 빈손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 찬가의 네 번째 단락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셔서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반드시 그 자손에게 이루게 하신다.’ 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택하심을 받은 언약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으며, 이방인들은 이러한 언약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언약의 대상은 이제 민족과 혈통의 구별을 초월한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되었다. ‘기억하셨다.’라는 말 ‘므네스데나이’는 ‘마음에 간직하다.’ 라는 의미로서 언약한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찬양은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조상들과 맺으신 약속대로 언약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긍휼과 은혜로 함께 하시리라는 강한 확신을 표명하는 것이다. 임신 6개월이 된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가 석 달을 함께 머물렀으니 엘리사벳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따라서 마리아는 그 해산을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3. 세례 요한의 출생 (1:57-66절)
누가는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의 탄생을 번갈아 가며 교차적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본 기사는 25절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사가랴의 축가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남아의 출생은 큰 기쁨이었으며 해산할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다가 남아가 태어나면 일제히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특히 사가랴의 경우 만년에 얻은 아들이라 기쁨은 더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의 탄생은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 즉 말라기 4:5-6절의 성취이며 나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의 성취였다. 세례 요한은 오랜 침묵을 깨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구속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으며 동시에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나 메시야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였다.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으며, 이웃과 친족들이 함께 즐거워했다. 이 기쁨은 엘리사벳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은 지 팔 일이 되면 할례를 행하는데 할례를 받는 의미는 4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식이다.
둘째,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식이다.
셋째,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는 표식이다.
넷째, 신약 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고 난 후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례였으며, 아버지의 이름이나 조상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일종의 관례였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역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라 하고자 했으나 엘리사벳에게 거절을 당했는데, ‘아니라’에 해당하는 말 ‘우키’는 ‘절대로 아니다.’라는 강한 의미가 있는 말이다. 엘리사벳은 서판을 통하여 남편이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이미 전달받았기 때문에 남편의 의사와 천사의 고지에 따라 반대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천사가 지어준 그대로 ‘요한’이라 부르려 했던 것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이름인 ‘요한’은 저들 부부에게 있어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둘째, 요한이 장차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선구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친척과 이웃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느 가문이든지 전승되는 이름이 있고 가문 중에 명망이 높았던 이름을 따서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가랴 제사장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짓겠냐고 물었으며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서판을 본 사람들은 이 사실을 놀랍게 여겼는데 이는 사가랴가 제사장의 가문의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름인 ‘요한’이라고 적었기 때문이었다.
사가랴의 믿음 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자신의 불신의 표적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의 말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사가랴는 그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자 즉시로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이 찬양은 지금까지 되어 진 모든 일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며 지난 10개월 동안 아들을 정상적으로 지켜 주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었다. 사가랴의 말과 행동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 두려워했는데 이는 공포심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을 접한 후에 갖게 되는 종교적 경외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가운데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경탄을 금하지 못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출생은 사람들의 화두가 되어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었다. 요한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장래의 일에 대하여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는데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돌보셨다는 것이다.
4. 사가랴의 축가 (1:67-80절)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이적적 체험을 한 사가랴 제사장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축가를 불렀다. 이 축가는 내용상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68-75절은 메시야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둘째, 76-79절은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세례 요한의 역할을 예언한 내용이다.
‘찬송하리로다.’라는 말 ‘율로게토스’는 ‘복되도다’라는 말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말이다. 사가랴의 첫 마디 찬송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의 백성에게 간섭하셨고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의 백성들을 방문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내용은 그의 백성들을 속량하신 것인데 ‘속량’에 해당하는 말 ‘뤼트로시드’는 ‘구속’ ‘해방’ ‘구원’ ‘자유’ 등을 말하며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속죄금을 치른다.’는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 사용되는데 어떤 사람이 죄인의 죄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가랴는 이스라엘을 속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고 찬양한다. 중동 지방에서 뿔을 가진 짐승은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에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뿔은 능력이나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구원의 뿔’은 구세주 곧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라는 말은 오실 메시야의 선재성을 암시하는 것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이는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듣고 요한의 사역이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의 출생으로 메시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시132;17-18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게 하고 그에게는 왕관을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사가랴는 메시야의 강림이 구약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힌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서 등에 걸쳐 전반적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는 이스라엘의 대적자인 원수와 그들을 미워하는 모든 자들에게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인데 이스라엘의 대적자로서 일차적인 뜻은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원수들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볼 때 원수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사가랴는 이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노래한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이 언약의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함으로 인하여 이미 파기되었을 것이다. 사가랴는 언약을 말할 때 특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강조했는데 하나님은 노아와 맺은 무지개 언약을 비롯하여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 등 구속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하셨으며, 백성들의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시고 구원 계획을 제시해 주셨다. 그 중에서 특히 하나님은 모리아 산정에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창22:16-18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게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종신토록’이라는 말은 지상에서의 평생을 의미하며 ‘주의 앞에서’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는 만인 제사장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말이다. 주의 구원을 받은 성도는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주를 섬기게 되는데 사가랴의 표현이 구원 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경건함과 의로움을 나타낸 표현이라면 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로는 ‘성결과 의’로 섬기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메시야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은 끝을 맺는다.
이제 사가랴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세례 요한의 역할에 대하여 축복한다.
첫째,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는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이다.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큰 자’라는 칭호를 얻을 것이다.
먼저, 시대적인 위치적 면에서 그는 구약과 신약의 가교적 역할을 담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사역의 내용 면에서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구약의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았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 뿐이었다.
둘째,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이다.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누가는 엘리야와 요한을 연결시켰는데 실상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지 자로서 회개를 선포하고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사역을 했던 것이다.
셋째,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죄사함’이라는 말 ‘아페세이 하마르티온’이라는 말 중에서 ‘아페세이’는 ‘용서’ 해방‘ ’탕감‘이라는 뜻으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서 사함‘이다.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는 죄 사함을 근거로 한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의 제사를 통해 영원하고 완전한 죄사함을 이루셨다. 이 ’죄사함‘은 구원을 알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즉 회개와 함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요한은 후에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
사가랴는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언을 마치면서 그의 출생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동안 캄캄했던 하나님의 구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이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고 고백하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캄캄한 어둠은 다 물러가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이 빛으로 나아오고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망하던 자들에게 평강이 임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 빛에 대하여 이미 예언했었다.
*사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인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시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또한 말라기 선지자도 이 빛에 대하여 예언했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하게 하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사가랴는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을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으며 예수께서도 내가 주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고 영속적이고 완전한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다. 사람이 길을 갈 때에 밝은 빛 가운데서 걸어가면서 잘못된 길로 가는 일은 결코 없다. 이와 같이 주께서 비추시는 구원의 빛이 밝게 빛나는 곳을 걸어가는 사람은 주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가랴 제사장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는 말로 찬가의 끝을 맺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으로 시작하여 평강으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자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교통을 하게 되고, 그의 구원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의 응답은 평강인 것이다.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 성장은 예수의 성장과 유사하다. 그는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는데 마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것처럼, 엘리야가 길르앗 땅 광야에서 생활했던 것처럼,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3년을 준비했던 것처럼, 세속을 멀리하고 홀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회개의 사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마침내 요한은 사역의 때가 이르면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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