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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
□ 본문 : 요한복음 8장 3-11절
※ 한국의 ○○교회에 다니는 정집사라는 여자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 남편이 시어머니나 시누이에 관한 말을 조금이라도 꺼내면 호통을 치고 난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 아픔이 싸이고 싸여서 병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마침 남편이 현대그룹의 부장이어서 현대에서 세운 아산병원에 아내를 입원시키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백혈구 치수가 너무 낮은 것입니다. 백혈구 치수가 적어도 1000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정집사의 백혈구 치수는 하루마다 바뀌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백혈구 치수가 3000이 넘었다가 그 다음 날에는 800으로 떨어지고, 또 그 다음날에는 다시 3000이 넘어서 이제는 항암치료를 할 수 있겠구나 하면 그 다음날 다시 800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담당 의사가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서 정집사에게 차트를 보여주면서 도대체 당신의 백혈구 치수가 이틀이 멀다하고 3000에서 800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정집사가 ○○교회 집사인데 3000으로 올라간 날을 보니까 속회 가족들이 찾아와서 예배하고 기도해주고 함께 웃고 울면서 힘을 주고 위로해 주었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3000에서 800으로 떨어진 날을 보니까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찾아와서, 시어머니는 정집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이년, 빨리 죽어라, 네 년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되는 일이 없다’ 하면서 악담을 퍼붓고, 시누이는 손톱으로 정집사 발바닥을 사정없이 쥐어뜯으면서 빨리 죽으라고 악담을 퍼부었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한바탕 하고 돌아가면 정집사의 백혈구 치수가 800으로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정집사의 속회 가족들이 찾아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사랑을 나누면 백혈구 치수가 다시 3000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정집사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담당의사가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도 ○○교회 집사였습니다. “나는 교회에도 다니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 사람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당신 교회 사람들이 찾아온 날에는 백혈구 치수가 올라가고 당신 어머니와 동생이 다녀간 날에는 백혈구 치수가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으니, 아내를 살리고 싶거든 당신 어머니와 동생을 절대 병원에 못 오게 하고, 당신 교회 사람들에게 매일 병문안 오라고 부탁하시오.” 그래서 남편이 정집사의 속회원들에게 매일 정집사 병문안을 부탁했습니다. 결국 정집사는 암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움의 힘입니다. 이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고 미움은 사람을 죽이는 힘입니다. 만약 정집사가 매일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온갖 악담을 듣고 폭행을 당했다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미움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정집사에게는 함께 사랑을 나누는 속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도와 사랑의 위로 속에서 정집사는 살아났습니다.
정집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게 속회구나, 아, 이게 교회구나, 아,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의 교제가 왜 아름답고 능력이 있습니까? 그 교제 안에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왜 세상의 소망입니까? 교회에 나오면 어느 누구나, 그 사람이 아무리 죄 많고 허물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실패하고 낙심한 영혼들이 새 힘과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정죄해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매일 시어머니와 시누이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매일 함께 기도하며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교제하는 믿음의 가족이 있으면 삽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힘이 미움의 힘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사랑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랑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려면 먼저
1. 사랑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자는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사랑할 구석은 조금도 없고 미운 구석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구석도 있고 미워할 구석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타락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사랑할 가치가 있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스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사람 속에도 미운 구석이 있고,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 속에도 예쁜 구석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낳은 아기를 내다 버리고, 몇 달 되지 않은 아기를 베란다에서 집어 던지고, 자신의 신세를 망쳤다고 하면서 어린아이를 굶기고 때려죽이는 부모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악해졌습니다. 멀쩡한 아이인데도 그 눈이 미움으로 뒤덮이면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 오체불만족을 쓴 오토다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지가 정상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심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태어났을 때, 병원 측에서 산모에게 아기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팔 다리가 거의 없는, 머리와 몸통만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보고 산모가 쇼크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드디어 어머니와 아기가 첫 대면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남편이, 아기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다른 아기하고는 많이 다르니 절대로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아내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드디어 산모의 방으로 아기가 들어옵니다. 엄마가 아기를 보고 기절하면 어떻게 하나 남편도 의사도 긴장하며 조용히 산모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침묵을 깨고 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かわいい’
왜 어떤 엄마는 팔 다리가 없는 아기를 보면서도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왜 어떤 엄마는 사지가 멀쩡한 아기에게 너 때문에 신세를 망친다고 하면서 굶기고 때려죽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습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허물과 실수, 사랑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의 눈, 분노의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미워할 수밖에 없고, 오직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들만 보입니다. 감사와 불평도 똑같지 않습니까? 똑같은 상황, 똑같은 문제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불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제목이 보이고, 불평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평거리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사랑이 얼마나 깊은 가는 얼마만큼 용서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가 얼마나 제한적입니까? ‘목사님,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계속해서 잘못하는 상대편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이 없는 우리 마음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실수하며 잘못하며 살기 마련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용서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없으면 작은 일도 용서할 수 없지만, 사랑하면 그 어떤 큰 죄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상대편이 변화될 때까지 사랑할 수 없고, 상대편이 사과할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사랑의 눈으로 보려고 해도 그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미움이 상대방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까지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미운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눈에 씌워진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본 후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 그 순간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됩니다.(18)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의 눈에 비늘이 씌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거짓으로 보고, 거짓을 진리로 보면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울처럼 비늘을 눈에 끼고 살아갑니다. 그 비늘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존귀한 생명을 사랑으로 볼 수 없습니다. 나쁜 것만 보이고 허물과 실수만 보이고 부족한 것만 보이니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울의 눈에 낀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우리 눈에 낀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고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믿음으로 보지 못하고 감사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이 멀어야 합니다. 사울이 보았던 빛은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9절은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거짓과 미움과 불신과 불평의 눈으로 살았던 우리의 눈이 멉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는 비늘이 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때때로 거짓과 미움과 의심과 불평의 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눈의 비늘이 벗겨지려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진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참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첫 번째 열매가 사랑입니다.
비늘이 벗겨지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항상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충만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늘이 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거짓에 속고,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고, 자꾸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미워집니다. 가족이 미워 보이고, 교인들이 미워 보이고, 모두가 미워 보이는 것은 성령충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사람이 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 그래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인데, 아닌 건 아닌 데, 어떻게 사랑할 수만 있습니까? 그렇게 계속 사랑만 하는 것은 상대편에게도 나쁘지 않습니까?’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결국은 사랑이 승리한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사랑 안에는 권면도 필요하고 징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정 아끼는 마음으로 말했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우자에게 말하고 자녀를 징계했습니까? 사랑이 넘치는 상태에서 형제자매를 권면했습니까?
사람은 사랑하고 죄는 미워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미우니까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밉습니다. 좋은 일도 잘한 일도 가식으로 위선으로 보입니다.
우리들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했던 말과 권면과 징계는 종종 참다못해 분노 속에, 배신감과 실망 속에, 기도 없이 행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미움과 분노로 끝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긴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악을 이기는 것이 선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악이 아무리 강해도 선이 승리합니다. 미움이 아무리 커도 사랑은 모든 미움의 불을 끕니다.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가 아무리 커도, 그 죄가 수 없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끝없는 용서는 반드시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 증인이 바로 우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습니까?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무서워서 행동을 조심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잘못된 습관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 무서움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길로 빠질 자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 만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어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새로운 만화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살만한 용돈을 준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어보았고 결국 아들이 서점에서 훔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서점에 가서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만화책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고학년이 되었는데도 만화책을 훔치는 아들의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타일러도 보고 엄하게 경고를 하는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의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아들이 만화책을 훔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아버지의 회초리가 무척이나 아팠던 모양이구나. 그날 이후로는 절대로 만화책을 훔치지 않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말에 아들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아버지가 때린 회초리 때문이 아니에요. 저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시는 것을 보았어요. 저 때문에 아버지가 우시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알았어요. 더 이상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어떤 죄도, 어떤 잘못된 인생도 사랑 앞에서 회개하고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귀는 죄로 우리를 폐인으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사랑을, 십자가의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가서 8장 6절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모든 미움과 조롱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켰던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죄에 붙잡힌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악은 악을 낳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악과 복수의 사슬을 끊고 축복의 문을 엽니다. 결국은 사랑이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
사람들은 정죄의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돌이 있습니다. ‘저런 악한 여자가 있나, 당장 돌로 쳐서 죽여야 해.’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죄의 수치심과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만약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저 죄인을 죽여라!’ 하면서 돌을 던진다면, 그것을 신호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오늘 성경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십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분입니다. 세 번째는 이 둘 사이에 서 있는 군중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군중들은 미움과 정죄의 사람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편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미움과 정죄가 주인노릇 하던 죽음의 분위기가, 용서와 사랑이 다스리는 은혜로운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미움과 정죄의 자리에서 용서와 사랑의 자리로 돌아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군중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을 벗기신 것입니다. 이 여인만 죄인이 아니라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만 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자신이 이렇게 돌에 맞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바로 이 여인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들의 눈에 끼여 있던 미움과 정죄의 비늘을 벗겨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사람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빛이 들어가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미움이 역사하는 곳에 사랑이 들어가면 미움은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미움과 사랑, 정죄와 용서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만약 미움과 정죄를 말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미움과 정죄를 따라갈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사람이 등장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우리 중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을 정죄할 만큼 우리는 선한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비판과 정죄의 분위기에서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당신 말이 옳다고, 우리가 잘 못했다고, 우리 이제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말자고, 그것을 깨닫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할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경우는 사랑과 용서를 말한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이 맞아야 할을 대신 맞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과 용서를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의 돌을 맞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랑과 용서를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사람들은 돌을 들어 여인을 정죄하며 죽이려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정당한 행위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인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 날 일을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분명 이들에게도 남이 모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간음했으나 발각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낮에는 그것이 바른 일이라고 흥분해서 돌을 던졌지만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은 그 여인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도 돌에 맞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돌에 맞는 그 여자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면서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만약 그 여자처럼 죄가 드러나지 않고 일평생 숨기고 산다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돌에 맞을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돌에 맞는다면 이 세상에 돌에 맞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러나 돌을 내려놓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해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 여인에게 긍휼을 베풀었듯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그 여인이 살아났듯이, 크고 작은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에게도 그런 은혜가 임할 것이라는 생각에 평안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움과 정죄의 돌을 던진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미움과 정죄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더 행복한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더 불행한 것입니다. 용서를 받는 사람도 큰 은혜를 받은 것이지만 용서하는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정죄를 받는 사람은 괴롭지만 정죄하는 사람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진리, 사랑만이 죄를 이긴다는 진리의 증인이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용서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어떤 사람도 안아주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죄를 이기고, 사랑이 사람을 바꾸고, 결국은 사랑이 승리합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돌을 든 사람들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주신 것처럼, 우리 눈에 있는 비늘을 벗겨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십자가,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먹고 마십니다. 오늘 성찬을 통해 우리 눈의 미움과 정죄의 비늘이 벗겨져서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