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걸어온 길(1)-내란사건에서 민주화사건으로 등극
내란사건에서 민주화사건으로 등극(1980-1997)
1980-87년, “5.18은 무장폭동에 의한 내란사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에까지 진행됐던 5.18소요는 소요를 일으킨 폭도들이 국가의 무기고를 털어 계엄군을 상대로 일으킨 무장폭동이었다. 광주교도소를 6회씩이나 공격한 엄연한 사실을 더 보태면 보편타당한 시각을 가진 상식인이라면 누구나 이를 무장폭동이요 내란이라 규정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식에 따라 1980-91년 4월 1일까지 진행된 당시의 재판에서 5.18은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좌익정권을 세우기 위해 몇 몇 주동자들이 김대중의 사주와 자금을 받아 일으킨 내란 폭동이었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판결내용은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리 사회에 수용되었고, 전두환 시대가 끝나는 1987년 말까지 대한민국의 정사가 돼 있었다.
1988-95년, “5.18은 민주화운동”
1988년 2월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4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여소야대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쳤다. 1988년 6월 27일, 국회는 ‘5공비리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두환 일가 및 측근들에 관련된 30건을 조사대상으로 확정했다. 이렇게 시작한 5공특위는 ‘5공청문회’라는 이름으로 헌정사상 처음으로 청문회를 열었다. 이어서 전두환의 측근들과 일가들이 줄줄이 감옥에 갔다. 같은 날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였다. 5.18특위 위원장은 문동환이 맡았고, 28명의 위원들이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상식에 벗어난 의혹들만 나열했을 뿐, 별 내용 없이 조사를 마감했다.
전두환을 향해 빗발치는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노태우는 전두환을 압박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정치자금 139억을 내놓고 사유재산까지 사회에 헌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백담사로 향했다. 이어서 11월 27일, 노태우는 성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담화문을 발표했고, 그 중에는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약속한 구절이 있었다.
노태우의 약속 그대로 1990년 8월 6일,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당시 2,218명에 총 1,428억원을 지급하였다. 1인당 평균 6,440만원,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3억 1,700만원이었다. 1991년에 간첩이 북한으로 데려간 윤기권은 2억원을 수령했다. 1990년이면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당시의 2억이고, 6,400만원이라면 지금의 가치로는 얼마나 될까?
결국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둔갑하여 보상을 받고 그 위에 추가하여 지금까지도 매월 독립유공자에 맞먹는 월 연금을 수백만원씩 받고 있는 이 기막힌 현상은 당시 거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전두환과 유약-무능한 노태우가 유발시킨 것이라 해도 지나친 해석이 아닐 것이다.
1995년의 박계동과 김영삼의 희화적 코미디에 편승한 5.18
1993년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하나회 해체, 부정축재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우쭐해지면서부터 좌익들의 숙주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가 민주화의 화신으로 역사에 남으려 했던지 1993년 5월 13일, 느닷없이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는 매우 자극적인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12.12에 관련된 정승화 일파와 5.18에 관련된 광주사람들이 동시에 일어섰다.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장태완 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장을 냈고, 정동년 등 구속자-부상자-사망자가족 등 322명이 주동이 되어 1994.5.13일 전두환-노태우 등 5.18 당시 대대장급 이상 신군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검찰은 1년 이상에 걸쳐 수사를 했고, 1995년 7월 18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고, 5공에는 상당한 역사적 공이 있었다고 결론 냈다. 당시 여론은 이런 결론들을 별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세력에 의한 역사뒤집기 노력은 일단 서리를 맞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2,300억 원 대에 이르는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한 것이다. 국민은 충격과 배신감에 노태우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전체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역사를 뒤집기하려는 소위 민주화세력에게 절호의 찬스가 되었다. 국민적 분노가 열화와 같이 일자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는 조기진화를 위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역시 또 다른 뜻밖의 변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1995년 10월 25일부터 중국 ‘조어대’(영빈관)에 1주일간 가있던 김대중이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10월 28일, 그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가 그런 폭로를 한 것은 광장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될 경우, 그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양심선언을 해두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영삼을 코너로 몰아넣어 자기의 안전을 꾀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이 정도를 받았다면 당시 민정당에 들어가 노태우 밑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더 큰 규모의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사하면 김대중 혼자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김영삼이 더 많이 다칠 것이니 알아서 막으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김대중의 이 의도는 적중했다. 김대중의 폭로로 당황한 쪽은 김영삼 정부와 여당이었다. 여당은 김대중의 정치자금 수수를 비난하며 ‘20억+a’ 설까지 제기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노태우로부터 검은 돈을 받았다면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이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니 고백하라 다그쳤다.
막다른 코너에 몰리자 김영삼은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전두환 등 군부세력에 대한 ‘공소권 없음’ 결정을 존중한다던 종전의 입장을 갑자기 바꿔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를 2,358억 9,6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구속하고, 11월 24일. 김영삼이 5.18특별법을 제정하라 지시함으로써 11월 30일에 특별수사본부가 발족되었고, 정당과 국회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12월 13일, 검찰은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서 그를 검거하여 안양교도소에 수감시켰다. 김영삼은 결국 그를 향해 집중돼 있는 검은돈의 의혹을 피해가기 위해 노태우와 전두환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에게 집중됐던 국민적 관심을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이런 약사가 말해주듯이 5.18에 대한 재판은 순전히 김영삼의 상황 돌파 필요성에 의해 시동되었고, 좌익 검사들과 좌익 법관들이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영합하여 판결문을 쓴 정치재판이요, 역사를 뒤집는 역사쿠데타였다. 역사는 학문이다. 분석에 훈련된 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써야 하는 대상의 것이지, 법을 다루는 법관들이 단기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1996-97년의 법관들은 12.12 및 5.18에 대한 역사를 권력에 아부하면서 이념적 잣대를 가지고 판결문을 썼다. 이로써 이들은 이미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정치권력과 사회를 장악한 386세력의 야합으로 5.18신화 조작해
전두환과 노태우가 거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돌팔매를 당하자, 군부독재라 몰아치며 1980년대의 거리들을 폭력으로 도배했던 386주사파 세력이 민주화의 영웅들로 각광받게 되었고, 이 나라 역사왜곡을 물밑에서 지휘해오던 검은 사령부는 이 엄청난 조건들을 역사뒤집기를 위한 절호의 찬스로 이용했다.
1995년 12월 21일, 김영삼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유린하고 초헌법적인 ‘5.18특별법’(5.18민주화운동등에 대한 특별법)을 발효시켰다. 김영삼 자신이 명명한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1981년 4월 1일의 대법원 기판력을 뒤집고 재심 사유 없이 사실상의 재심을 강행했다. 1996년 3월 11일 제1심 1회 공판을 시작으로 재판은 거의 1주일 간격으로 강행되었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선고로 막을 내렸다.
1980년-81년에 진행된 5.18재판은 비밀스럽게 진행되어 5.18의 죄상들이 낱낱이 공개도지 않았지만, 1996-97년에 진행된 두 번째 재판은 매우 요란스럽게 진행이 되었고, 전국의 모든 보도매체들이 잔치판을 벌였다. 언론들은 전두환 세력과 공수부대의 잔인성을 최고조로 이끌어 내기 위해 무협지보다 더 황당한 소설들을 써댔고, 황당하면 할수록 국민들은 더욱 환호하면서 스스로 많은 신문들의 독자가 되었다.
재판부는 사실과 법률에 의거하여 재판을 한 것이 아니라 2심 판결문에 명시돼 있는 구절처럼 여론재판(자연법 재판)을 했고, 증거를 내라는 변호인들의 주장에 대해 채동욱, 김진태 등의 검찰은 “이 사건은 접근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소통불가의 말만 반복했다. 변호인들이 그 접근방법이라는 게 무어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검찰의 수사기록은 1980년에 작성된 것이나 1995년 7월 18일 최종보고서로 작성된 것이나 똑 같았다. 오직 다른 것은, 같은 검찰기록을 놓고 1980-81년의 판사와 1996-97년 판사들의 해석들이다. 1980-81의 판사들은 대한미국 사상을 가진 판사들이었고, 1996-97년의 판사들은 인민공화국 사상을 가진 판사들이었다. 1981년의 대법원은 김대중을 역적으로, 광주시위대를 무장폭도였다고 판결한 반면, 1997년의 대법원은 전두환을 역적으로, 무장폭도들을 전두환 일당으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라고 성역화 했다.
이에 날개를 단 광주 5.18세력과 빨치산 세력이 사회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이후의 언론, 정치인, 학계, 지식인 사회 전체가 5.18에 굴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마다 5월이 되면 정치인들은 광주에 얼굴을 내미는 것을 정치역량을 키우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해 왔다. 이에 따라 민주화의 성지가 된 5.18의 위상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상승했고, 5.18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막강한 점령군 세력으로 성장해온 것이다.
검찰수사 최종보고서에 북한특수군 600명 기록돼 있었다
1995년 검찰이 작성한 수사결과보고서에도 북한특수군 600명이라는 표시와 이들이 수행한 기막힌 작전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김영삼 주도의 정치재판부는 이런 중요한 자료들을 간과하고 오직 전두환에 죄를 씌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1996-97년의 재판의 초점은 전두환이었지, 북한특수군이 아니었다.
따라서 1997년의 대법원 판결문을 앞세우며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오지 않았다고 한 정홍원 총리와 당시 국방장관인 김관진의 2013년의 발언은 무식하고 무책임하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할 몹쓸 발언이다.
필자는 북한의 목표와 생리를 1980년 1년 동안 중앙정보부에 있으면서 매일 많은 북한관련 정보문서들을 읽으면서 배웠다. 그리고 미해군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통해 학문적 분석력을 길렀다. 베트남에서 소위-대위 시절의 44개월 동안 공산 게릴라들과 뒤엉켜 싸우면서 게릴라전 지식도 길렀고, 12년의 장구한(?) 연구시간도 가졌다. 이런 것들이 1980년 당시의 정보분석관들, 그 위의 정보판단자들 그리고 1995-97년의 판사 및 검사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북한특수군 600명의 광주참전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특이한 자산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움직이는 사람들, 대부분 5.18에 굴종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치열한 검증을 통해 정의된다. 일단 정의됐던 역사라 해도 새로운 증거와 새로운 해석이 나오면 공론시장에서의 토론을 통해 더 가까운 진실로 접근한다, 이를 부정할 인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5.18역사에 대해서만은 치열한 검증도 불허되고, 새로운 증거의 제시도 불허되고, 공론의 시장에서 토론되는 것도 불허된다. 권력의 최정상에 있는 대통령도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5.18에 대한 검증과 비판은 절대 금지돼 왔다.
역사학에 적을 둔 사람의 수가 얼마이던가? 이들은 5.18역사에 손도 대지 않는다. 오직 5.18의 ‘민주화역사’를 더욱 성역화하고 더욱 미화하는 간행물들만 쏟아져 나올 뿐이다. 참으로 불건전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모든 학문은 진실탐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 진실 탐구라는 명분을 내걸고 좌경학자들은 이승만 역사, 박정희 역사에 대해 치열한 검증을 해야 한다며 연구의 범위를 넘어 마녀사냥까지 해왔다. 제주 4.3사건이 표를 먹고 사는 일부 불량 정치꾼들에 의해 장마당에서 거래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무고한 주민을 살해하면서 이 땅에 공산국가를 세우려 했던 공산폭도들이 민주화의 화신으로 둔갑해 있다.
그 많은 지식인들, 면책특권을 보장받은 국회의원들, 언론인들, 기자들, 방송인들, 평론가들, 군간부들, 공무원들 모두가 5.18의 노예들이다. 5.18의 ‘5’자만 나와도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친다. 심지어 방송통신심의위처럼 5.18세력에 아부하고 부역하는 공직자들도 있다. 사회가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병들 수가 있다는 말인가. 1807년 피히테가 묘사한 썩고 썩은 독일국민과 조금도 다름없고, 패망직전의 월남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서슬 퍼런 5.18단체들, 지만원 한 놈만 짓밟아 버리면 아무도 5.18에 대해 떠드는 놈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12년 동안 필자를 괴롭혔다. 개 끌고 가듯 필자를 광주로 끌고 가 감옥에도 넣고, 매도 때리고, 차와 집도 부수고, 8시간 이상 수갑을 뒤로 채운 후 인간 이하의 린치와 언어푹력을 가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그들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더욱 강해졌다. 끝까지 5.18의 진실을 추구한 결과 5.18의 사기극을 폭로할 수 있었다. 2014년 10월, 필자는 “5.18분석 최종보고서”를 냈다. 이 한권의 책이 5.18의 성역을 산상 조각냈고, 5.18세력의 그 누구도 이 필자의 책을 허물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5.18단체들을 대국민사기기집단이라 정의했다. 5.18의 주연은 북한특수군 600명이고, 조연은 부나비처럼 날아든 넝마주이 등 천대받던 20대의 천덕꾼들이었다고 명확하게 정의했다. 이는 핵폭탄이다.
이 폭탄을 맞은 5.18단체들, 몽둥이 가지고 서울에 오지도 않는다. 버스를 빌려 술을 마신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올라오지도 않는다. 도끼 들고 올라온다는 협박도 없고, 고소도 없다. 5.18전선에 5.18단체가 모두 꼬리를 내린 것이다. 방송국을 지정해 토론을 벌이자 여러 차례 제안했지만 묵묵부답이다. 그 지역 언론들도 “억울하다” “참을 수 없다. 법적 조치하겠다” 이런 유의 흔했던 볼멘소리마저 전달하지 않는다.
광주가 갑자기 무풍지대, 무성의 지대가 됐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일단 노예 병이 걸린 사람들은 지금도 5.18이 무섭고 광주가 무섭다며 곁눈질을 한다. 아무리 그들이 옳은 소리를 내도 영혼이 병든 이러한 자세로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2014.12.18.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작성일 : 14-12-22 14:41
5.18이 걸어온 길(2) -5.18의 폭력-군림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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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지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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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걸어온 길(2)
5,18의 폭력-군림 시대(2002-2013)
5.18 단체들과 세력들은 그 동안 5.18의 진실과 5.18이 북한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고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5.18기념재단과 5.18연구소를 운영하는 전남대가 발간한 ‘5.18유공자들의 증언록’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1980년 5월 21일, 총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고만 표현한다. 그 많은 총기의 탈취를 그들의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그들 중에는 5.18을 계획한 사람이 없었다. 광주 지역 최고의 운동권 대부로 알려진 윤한봉과 정동년도 5.18을 기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중 아무도 어떻게 해서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특전게릴라작전이 실행된 것인지, 누가 그 주도 세력인지에 대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의 모두는 단 두 가지, 고문을 당했다는 것과 거리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상징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조사천-조천호 부자의 영정사진과 장갑차 옆에서 젊은이를 향해 곤봉을 내려치는 공수대원의 사진 그리고 집합돼 있는 관들이다.
민주주의가 전혀 없는 민주화의 성역 5.18, 그 내부에 거짓과 사기와 음모가 가득했기에 ‘5.18단체’들과 그 옹호세력은 남들이 성역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접근 자체를 차단했다. 누구든 비-우호적으로 접근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폭력과 협박으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랜 동안 당했던 사람은 물론 필자였다. 아래에 요약해 놓은 폭력사건들도 분명한 5.18의 역사다.
5.18단체의 폭력-협박 사건들
<5.18의 폭력 사건 #1>
2002년 8월 15일 필자가 동아일보에 낸 의견광고 4,500자 광고문에 “5.18은 소수의 불순분자와 북한특수군이 순수한 광주시민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는 45자의 문장이 있었다. 5.18부상지회 회장 김부식이 이끄는 5.18단체들은 이 문장을 트집잡아 2002년 8월 20일, 검은 유니폼을 입은 어깨 12명을 대동하고 상경하여 필자의 사무실, 아파트 현관문, 차량을 파괴하고 소란을 피워 이웃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지만원은 빨갱이니 동네에서 내 쫓으라 소리 소리 질렀다. 경찰 몇 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구경꾼들이었다. 광주는 대한민국 위에 군림했다.
<5.18의 폭력사건 #2>
2002년 10월 22일, 광주지검 최성필 검사가 3명의 광주서부경찰서 경찰관과 1명의 검찰 조사관(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을 보내 필자를 물리력으로 제압하고, 수갑을 뒤로 채워 6시간 동안 광주로 호송해 가면서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하고, 아비 뻘 되는 필자에게 온갖 상스럽고 저질적인 욕을 퍼부으면서 머리와 뺨을 마구 때렸다,
“니미씨팔 좇 같이,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씨발놈아, 니가 시방 5.18을 씨부렀당가, 네깟 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씨부러, 이 씨발 개새끼 가다가 목을 비틀어 파묻고 가야 한당께,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받아 챙겼냐, 부하 꽤나 잡아 처먹었을 거다. 이런 쥐새끼 같은 개새끼, 우익새끼들은 모조리 밟아 죽여 없애부러야 한당께. 너 이새끼 가다가 죽을 줄 알아, 너를 때려 죽여서 파묻어도 증거가 남냐? 증거가? . .
"
6시간 압송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다 했더니 “이 발 새끼야, 옷에 흥건히 싸부러”하며 거부했다. 광주검찰에 도착하니 최성필 검사가 필자를 곧 때릴 듯이 동물처럼 분노하면서 “저 새끼 수갑 풀지 말고 조사해”하면서 노려보고 소리쳤다. 조사관들은 수갑을 풀지 않고 2시간 넘게 협박을 하고 때릴 듯 모션을 쓰면서 조사를 했다.
그리고 필자는 101일 동안 일부 판사들로부터도 공포스런 언행을 감수하면서 감옥생활을 했다. 서울 근교에 사는 사람을 광주에까지 끌어다 감옥에 넣고 재판하는 데도 당시의 대법원은 토지관할권을 규정한 형사소송법 4조와 지역정서가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라는 형사소송법 제15조를 무시하면서 필자를 광주에서 재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5.18의 폭력사건 #3>
강남 서울교회에서의 음주 소란 및 소송사건이다. 2008년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님이 설교 중에 4.3사건과 5.18 사건에 대한 설교를 하는 도중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5.18단체들이 동년 10월과 11월 수십 명이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버스를 대절, 세 차례에 걸쳐 서울교회를 찾아와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공갈 협박을 가하며 예배를 방해했다. 결국은 장로들이 광주 5.18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행패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목사님은 5.18단체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시달리다 승소하셨다.
<5.18의 폭력사건 #4>
2010년 10월 29일, 이날은 필자를 고소한 5.18부상자회 신경진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날이었다. 신경진은 재판부의 명령을 두 차례 무시하다가 강제구인에 나선다고 하자 이날 법정에 출두하였다. 그런데 광주사람들이 70여명 먼저 법원에 들어와 필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법정 앞의 넓은 로비를 선점한 광주사람들은 인간들이 아니라 맹수 그 자체였다. 젊은 회원들이 필자를 에워싸고 검색대를 통과할 때에도 “지만원 이 씨발새끼 어디 얼굴 좀 보자” 하는 소리와 아울러 온갖 쌍욕을 하면서 호위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달려들었다. “얼굴을 긁어 부러야 한당께” “지만원이 저 개새끼 나올 때 봐라, 뒈질 줄 알아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안탕께”
양쪽 모두 방청석은 24개씩만 허락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법정 밖에 있는 넓은 로비에서 대기했다. 방청석을 얻지 못한 어느 한 40대 주부는 대형 창문 앞에서 밖을 바라보다가 광주의 한 남자로부터 폭력을 당했다. 뒤로부터 접근하여 투박한 손으로 귀와 얼굴을 밀어 때렸기 때문에 여성의 귀가 찢어져 선혈이 낭자하고 귀고리가 달아났다. 재차 때리려는 것을 어느 남성이 가로 막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1층으로 호위한 후 112로 신고를 했다. 112가 출동하여 귀에 난 상처와 피를 사진 찍고 곧바로 조사를 받으면 범인을 검거해 주겠다고 하면서 다시 법원 3층으로 올라와 범인의 얼굴을 찾으니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인터넷에는 필명 정OO님의 소감이 게시돼 있다.
“저는 재판정에 입장하지는 못하여서 대기실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만 말씀드립니다. 호남인들의 피해의식에 가득한 그 당당함에 우리 쪽은 사분오열, 지리멸렬되어 저들의 온갖 욕설과 협박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례로 많이 쳐주어도 40대 초중반쯤 되었을까하는 자가 60대로 보이는 우리 쪽 회원에게 "아그야! 니가 뭘 알아서 떠드냐"는 선창과 함께 이어지는 저들의 욕설...,칠.팔십대 어르신들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시종일관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욕설을 뱉어내는 저들이 진정 "5.18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들인지요...? 5.18이라고 인쇄한 군대식 머플러를 단체로 맞춰 쓰고 남녀노소가 벌이는 집단적인 발작 증세는 연로한 어르신들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가끔 바른 소리하시는 어르신들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 집단의 광기에 희생양이 되었고 이 상황에 고무된 자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나서서 어느 어르신의 태극기 뱃지까지 뺏으려는 만행을 저지르자 우리 쪽 회원분이 겨우 저지시켰습니다. 어제의 일은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저의 시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이 더러운 일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글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고, 정말 간단히 쓰려고 했습니다. 쪼사버릴 새끼들" "갈아 마셔 버리겠다" "오늘 아무나 년이든 놈이든 한 놈 걸려라, 작살을 내 버리겠다" "광주에 대해 너거들이 머 안다고 개지랄이냐” “일당 얼마 받고 쓰잘 데 없는 짓을 하느냐” “광주를 비난하는 너거들이 빨갱이 새끼들이다”. 녹음기를 가져 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정신병동을 법원으로 옮겨 온 것 같았습니다. 뚱뚱한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더 패악질이더만. 전라도 광주의 말투가 그렇게 살벌하고 추악스러운지 새삼 느꼈습니다. 시비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상대 하지 말라는 글을 읽지 않았다면 진짜 욱 할뻔 했습니다. 장이라도 이 나라를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5.18폭력사건 #5>
2013년 6월 10일, 광주사람들이 서울로 대거 몰려와 전두환의 집과 종편 방송국들에 들이닥쳐 폭력을 행사했다. 방송사를 지키는 경찰들에 밀가루를 뿌리고, 건물 유리에 계란과 토마토를 뿌리고 철물과 발로 유리창을 타격했다. 5.18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송들을 즉시 처벌하고, 전두환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주장을 했다. 이에 국무총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검찰이 광주인들의 요구를 100% 만족시켜 주었다.
<5.18폭력사건 #6>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 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동영상들과 인터넷 게시물들에 대해 매우 공포스럽게도 박효종 전 서울대 교수가 이끄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무단 삭제를 감행하여 현재 민사소송과 행동소송을 병행하고 있다. 방통심의위의 답변을 보면 이 표현이 5.18정신을 훼손하고 대법원 판결 등에 역행하며 지역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정부가 5.18을 대신하여 폭력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2014.12.22.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작성일 : 14-12-22 18:40
5.18이 걸어온 길(3) -5.18의 패망-수난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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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지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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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걸어온 길(3) -5.18의 패망-수난시대-
5.18의 패망-수난 시대(2014년 9월부터 진행)
지만원이 5.18을 이기는 순간
5.18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이었다. 모든 역사가 다 검증의 대상이 되어 정과 반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지만 오직 5.18역사 하나만은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성역으로 군림해왔다. 모든 정부기관이 5.18 앞에서는 호랑이 앞에 정신 잃는 사냥개처럼 지레 뻗어 처분만 바랬다. 그들이 해달라면 달이라도 따오는 흉내를 냈다. 대법원 법관들도 알아서 기었다.
2014년 6월 6일, 동작동 제28-29묘역에 누워있는 23명의 공수부대 장병들을 애국자로 추모하기 위해 공수부대 지휘관 출신들을 초대했더니 “거기에 광주 사람들 오지 않겠느냐”며 겁부터 먹었다. 공수부대 지휘관들까지도 이렇게 무서워 하는 5.18 광주에 대해 필자는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해왔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2002년 필자를 광주에까지 데려다가 감옥에 넣었던 5.18단체들. 승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 그들에게 자존심 상하는 글을 게시하는 네티즌들을 향해 ‘지만원처럼 깜방가고 싶으냐’ 엄포를 놓았다, 이런 엄포에 저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8년 필자가 인터넷에 2,720쪽 분량의 다큐멘더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책을 내면서 그 책의 머리말 일부분을 게시했다. 그 글 중에는 아래의 표현이 있었다. 이 글을 상대로 5.18부상자회 신경민 등 5.18단체들이 또 고발을 했다.
“필자는 10.26, 12.12, 5.18, 김대중 내란음모, 1995~97년에 걸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이 모두에 대한 기록들을 열람하였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만 5년 동안 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제1심에서 2명의 단독재판장이 사건을 맡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없다며 합의부에 사건을 넘기고 떠났다. 합의부 재판장은 공판 첫날 필자를 향해 “피고인은 지금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지만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막힌 말을 했다.
필자는 법원의 명령권을 가지고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있는 비밀자료들을 복사해서 정리해 냈다. 특히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라는 대남공작 역사책은 북한에서도 50부만 비밀로 발행된 책이라 한다. 북한이 만든 영화, 아니 김일성이 직접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엄청난 선물을 주고 제작한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도 찾아냈다. 모두다 금광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이어서 “광주의 분노”라는 5.18광주 역사책을 찾아냈다. 이 두 개의 책은 황석영 이름으로 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약칭 넘어 넘어)와 거의 동일했다. 이 두 개의 책을 합쳐서 가필한 것이 황석영 이름으로 나온 이적문서 ‘넘어 넘어’다. 이 책이 지금까지도 5.18의 바이블 노릇을 하고 있다.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은 필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과 2심도 필자에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5.18단체의 과도한 ‘지만원 죽이기’가 필자에게 비밀로 분류된 북한측 자료들을 당당한 매너로 복사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것이 5.18의 진실을 파 혜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들의 지나친 잔혹행위가 불러온 부메랑인 것이다.
황석영은 북한의 대남작전 도구
황석영은 최근 “넘어 넘어”는 자기가 쓴 책이 아니라 '조직'에서 자기에게 내주면서 ‘당신 이름으로 써야 저자가 구속되지 않고 잘 팔린다’ 이렇게 말해서 약간의 가필을 가한 후 자기 이름으로 냈다고 한다. 황석영은 자기에게 원고를 넘겨준 ‘조직’이 무슨 조직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 황석영에 갔을까?
녹두서점의 주인은 김상윤, 그 잡안은 모든 형제가 다 공산주의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두서접은 광주 운동권들의 아지트였다. 그 집의 막내 동생 김상집은 “5.18항쟁 증언자료집”에서 이 책의 원고를 가장 먼저 입수한 사람이 자기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22세였던 소준섭은 자기가 22세 되던 해인 1982년에 자기가 발로 뛰며 이 책의 원고를 썼다고 주장했다. 5.18 당시 전남대 3학년이었던 이재의는 자기가 그 원고를 발로 뛰어다니며 썼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99년 3월, 미국에서 번역된 ‘넘어 넘어’ 책은 이재의가 저자로 기록돼 있다.
한 개의 책을 놓고 황석영을 제외하고 3명이 자기의 저작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국판 30쪽 분량으로 정리된 “찢어진 깃폭”이다. 이 책은 1980년대의 10년 동안 대학가의 대자보 내용이 되어 대학생들의 역사인식을 반국가적 반군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책은 누가 저작했는가? 이 책은 5.18 작전 중에 북한집단과 ‘정의평화를 앞에 내건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책은 기획되어 진 글이요 잘 쓰인 선동소설이다. 이 책은 5.18 사건이 종결된 1980년 5월 27일보다 8일 뒤인 6월 5일, 일본에서 처음 공개-확산되었다. 저자도 없고 발행처도 없는 이 책의 편집자는 ‘일본 카톨릭정의평화협의회’로 되어 있다. 급조된 이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카톨릭 정의 평화 협의회 라는 단어들을 달고 있다. 그리고 이는 5.18 광주의 모습을 가짜로 가공해낸 최초의 모략물이고 황석영 이름의 ‘넘어 넘어’와 북한이 쓴 2개의 대남공작 역사책 내용의 핵심이 되었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선동전의 주인공
그런데 ‘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는 북한의 ‘한민전 평양대표부’와 나란히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으깨진 얼굴들을 컬러 사진첩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인쇄하여 지금까지도 대한민국과 한국군과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5.18분석 최종보고서의 147-150쪽).
5.18 당시 상식을 초월한 내용들로 엮어진 유언비어들을 제작한 존재, 사진자료를 확보하여 모략작전에 사용해온 존재가 바로 북한의 정치공작원과 광주의 정의평화위원회일 것이라는 매우 강력한 추측이 가능해 진다. 이는 아마도 곧 미국의 역사학도 김대령 박사가 또 다른 책을 통해 밝혀낼 매우 중요한 챕터가 될 모양이다.
그로기 상태로 패망한 5.18
2014년 9월 초, 필자는 5.18의 진실을 찾아냈다.
“5.18의 주연은 북한특수군이고 조연은 광주 천덕꾸리기들이었다. 광주에 5.18을 기획하거나 지휘한 광주인은 없다. 시위대도 조직되지 않았고, 민주화운동도 없었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대국민 사기다.“
이 표현은 필자의 책을 읽지 않는 상대에 있는 일반국민들에도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결론이다. 이런 국민들은 ‘지만원이 또 광주사람들로부터 된통 당하겠구나’ 이런 예상을 한다. 그런데 이는 5.18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예상이요 상식일 뿐이다.
5.18 단체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은 5.18의 진실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필자에게 덤벼들 수가 없다. 아마도 양심이 있는 일부 5.18 사람들은 필자의 분석력과 집념을 존중하고 있을지 모른다,
진실이 이 세상에 나온 이상 5.18은 더 이상 이 나라를 호령하지 못할 것이다. 5.18을 성지로 하는 ‘민주화’ 세력은 이제부터 뿌리 없는 나무 신세가 되어 점점 고사할 것이다. 어깨들을 수도 없이 많이 거느리고 있는 5.18세력, 5.18성지를 통해 공산주의 단체들을 수도 없이 거느리고 있는 5.18세력, 그 막강해 보이는 세력이 단 한 사람, 이 지만원에 재기 불능상태로 완전 패망한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매너로 5.18을 비호-변호한 위장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이 5.18 자신들의 역사인 것이다.
끝
2014.12.22.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