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사라지지 않는 풍경들
삶을 응시하는 에세이 55편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절이 있다. 작가에게도 그렇다. 작가의 ‘폼이 미쳤다’ 싶은 시기가 있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는 어떨까? 아마도 그의 초기 시절이 아닐까. 다른 무엇보다 《환상의 빛》, 《금수》 등의 걸작이 모두 초기 작품이다. 그 시절 그의 필력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삶을 깊이 파고들었다. 에세이집 《그냥 믿어주는 일》은 바로 그 시점에 발표되었다.
이 책에는 모두 55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에세이는 주로 그가 살아오면서 실제 겪었던 일들을 내용으로 한다. 더러 자신이 발표한 소설 작품을 소재로 삼지만, 그조차도 삶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요컨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응시하고 싶은 독자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이다. 믿음과 신뢰의 신비로운 힘, 평온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 흐릿함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미진한 이별의 아쉬움 등의 테마가 작가의 삶의 맥락 속에서 담담하게 서술된다.
현재 일본에서 테루의 에세이집 가운데 가장 많은 리뷰와 호평을 받고 있는 책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한 울림을 준다. 30대를 통과하고 있는 미야모토 테루의 생각을 진솔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일본 서점 스테디셀러
책의 구성에 대하여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는 14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으며, 주로 작가 데뷔 이전의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어린 시절 혹은 학생 시절에 겪었던 인상 깊은 일들이 흥미롭게 서술된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전에 광고회사에서 일했는데, 그때의 인연과 사건들을 회상하기도 한다.
2부는 28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주로 한 펼침면 안에 끝나는 짤막한 분량의 칼럼들로, 시사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추상적인 사색을 풀어놓기도 한다.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최근 있었던 일을 소재로 삼기도 한다. 대개 《금수》를 발표한 이듬해에 쓰인 글들이다.
3부는 작가 데뷔 이후의 일들을 위주로 13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미야모토 테루는 1977년 다자이 오사무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1978년에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3부에서는 이 시절 작품을 집필할 때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영화화 하던 때의 인연들에 대해 다룬다. 작품의 후일담으로 읽을 수도 있고, 삶의 보편적인 풍경을 길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편집자 노트
언뜻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왜 미야모토 테루의 글들은 지금도 울림이 있을까? 글이 쓰인 시점과 현재는 적어도 40년의 격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쓰인 그의 소설은 물론, 에세이 역시 흥미롭게 읽힙니다. 어쩌면 그때 도쿄에 흐르던 공기가 지금 서울의 공기와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그 시절 일본을 떠올려봅니다.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를 목전에 두고 호황을 만끽하고 있었죠. 거리에 넘실거리는 미래적인 패션, 그리고 시티팝 사운드. 모든 것이 밝고 분명해 보이는 사회에서, 미야모토 테루는 오히려 미지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라진 사람과 돌아오지 않는 말, 침묵, 막연한 불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치 그런 비합리가 삶의 본연이라는 듯. 저는 그중에서도 일말의 다정함을 부여잡고 싶어, ‘그냥 믿어주는 일’을 한국어판의 제목으로 잡아봤습니다. 점점 드물어지고 있는, 그러나 간직하고 싶은 비합리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여러 글들에서 작가는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례를 들려줍니다. 오늘날 그런 건 위험할까요? 덮어놓고 믿다가 잔뜩 이용만 당하게 될까요? 저는 두 갈래의 마음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한 권의 책의 형태로나마 선의를 봉인하는 마음으로 편집 마감을 했습니다.
17쪽
하지만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특별한 감상을 품게 된 것은 내가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나는 최근 들어 깨달았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다양한 것이 복잡하게 뒤엉켜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지만, 나는 나를 흠뻑 사랑해주고 어떤 인간이라도 좋다, 무사히 자라기만 해다오, 하고 계속 빌어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필설로는 다하기 힘든 감사의 마음으로 떠올린다.
19쪽
내 안에 줄기차게 내려서 쌓이는 눈은 도야마의 그 납빛 눈이며, 다른 어떤 눈의 고장에도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거리는 점점 납빛으로 변한다. 몸을 구부리고 걷는 사람도, 집들의 지붕도, 하늘도 학교 건물도 낡은 빌딩도, 시영 전철도, 시영 전철의 철길도,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조차 납빛으로 변한다. 그런 기억이 내 마음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도야마라는 곳이 싫었다. 거의 증오했다 말해도 좋을 정도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47쪽
회사에서 돌아와 열한 시쯤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새벽 서너 시까지 작업을 계속하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는 나날이었는데, 몸이 약한 나에게 그런 턱없는 생활이 가능할 리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똑바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계단 대여섯 개만 올라가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지쳐버렸다. 이대로 그런 생활을 계속한다면 나는 분명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었지만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53쪽
나는 아무 장점도 없는 인간이고, 머리도 나쁘고 완력도 없으며, 제멋대로에 겁쟁이에 질투가 심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내가 조금은 타인의 고통과 함께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살짝 낮춰 대답할 것이다.
59쪽
신기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작정해서 그리 되는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저항하고 또 저항해도, 자신이라는 인간의 핵을 이루는 부분을 공유하는 사람과만 이어진다. 그 무서움, 그 불가사의함.
93쪽
나는 어린 시절 공부를 싫어했고 운동도 잘 못했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서투른 데다 제멋대로에 울보에 병약하기까지 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담임선생님이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배신하지 마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이렇게만 교육하고 있습니다. 매화나무에서는 장미꽃이 피지 않습니다.”
102쪽
“어떻게 하면 점점 늘어나는 마음의 병을 없앨 수 있을까요?”
다카야마 씨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다정해지면 돼요.”
141쪽
“바로 지금 임종!”
이 냉엄한 각오를 견디지 않고서야
어디에 인간의 승부가 있겠는가
나는 이 시를 읊조릴 때마다 언제라도 죽어주겠다는 각오를 품고서 아주 오래 살아야지, 하고 뜨겁게 결의한다.
158쪽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매혹시키는 것이야말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언제나 ‘새롭다’.
163쪽
한여름의 번화가는 사람도 차도 아지랑이로 흔들렸고, 분명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의 소란으로 가득했을 텐데도 내 마음에 새겨진 풍경은 어둡고 황량하며 쥐죽은 듯 고요하다. ‘세상이 알아주는 작가’를 향한 출발점은 한없이 멀리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먼 길인지, 회사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은 순간 나는 소스라치듯 깨달았다.
173쪽
나는 어째서 소설가가 될 수 있었나. 그런 질문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내가 짊어진 신경증이라는 병을 나의 내적 필연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결심이 섰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내 안에 있는 생명命이 샘솟았다. 이케가미 기이치라는 사람과의 만남도 외적 우연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내적 필연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 역시 생명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