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22일부터 26일까지 한국 방송대학교 성남시 학습관 소속 늘푸른 역사여행 동아리와 누리빛 사진동아리 회원들이
베트남의 하노이와 기타 주변도시를 다녀왔다.
월남파병과 베트공, 국군파병과 청룡부대,맹호부대, 사이공,호이안, 탄손누트공항, 월맹에 의한 공산화, 호치민주석,
월남파견 근무자들과 파월장병, 라이따이한등, 무수히 뇌리에 기억되어진 지난 시절의 베트남에 대한 단순한 단어들의 복합을
염두에 두고 첫 발을 내 디딘 오늘의 베트남은 생각과는 달리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1993년 우리나라와의 국교수립과 함께 한류로 대변 되는 우리의 문화는 전쟁과 이념의 사슬을 녹여 버린 듯 했으며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역동적인 열망이 또 다른 제 2의 한국을 건국 할 듯한 한국사랑을 엿 볼 수 있었다.
전쟁의 적대적 관계를 융화 시켜버린 베트남 사람들의 실리적인 면과 초거대 강대국의 영주인 미국을 물리치고
스스로 자주적인 독립을 이룩한 베트남은 후진국이라는 표면적 환경을 뛰어 넘어 아시아의 차세대 미래라는 생각을
떨처 버릴 수가 없었다.
1975년 월남을 침공한 월맹의 호치민군은 이미 월남에 조직화되어 비정규전을 치르던 월남 내부의 게릴라 조직인
베트공들이 미군철수 후 혼란 상태에 빠진 월남 정부를 무력화 시키고 사이공시를 접수한 상태라 월맹군은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월남의 공산화 된 통일은 1985년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경직성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소비에트 연방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페레스트로이카/ 글라디노스트)의 영향을 받아 1986년 베트남의 개혁 개방으로 상징되는
도이모이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1966년 베트남에서 작전중인 미군
경제 문호를 개방한 베트남에 정치 체제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투자회수가
관건인 서방세계의 자본들이 불안한
투자를 할리가 없어 개방은 했지만
투자는 없는 상태로 1993년 우리나라와
국교 수립을 하게 됐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선봉이 된 기업이
김우중의 대우건설이다.
서방세계의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월남에
진출한 대우는 하노이 중심부에 하노이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하노이 대우호텔을
짓게 된다.
우리나라에 있는 호텔중에 조선호텔이나 신라 호텔에서 하룻밤 잠자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하노이 대우호텔이 그들의 꿈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상징성이 대단했다.
대우가 도산하면서 한때 이 호텔이 싱가폴의 자본가에게 넘어간 적이 있었는데 당연히 싱가폴의 상징적 이름으로
개명하려 했으나 월남 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하노이 대우호텔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 후 우리나라 롯데 건설이 싱가폴에 팔렸던 가격의 한배 반을 더 주고 다시 인수하여 지금은 우리나라
기업이 운영 중이라 한다.
하노이 대우 호텔
베트남의 한류. 1993년 대우건설을 필두로 우리나라의 수십 수백의
중소기업이 중국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자구책으로 월남의 저임금을
찾아 이동하는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장사하기가 쉽지 않아 한국이라는
이미지 재고를 위해 궁리해 낸 방법이 우리나라의 드라마를 수입하여 틀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베트남의 국영방송이 타국의 드라마를 틀어 줄리
만무하여 아침 시간대에 광고 형식을 빌어 방송국에 광고비를 주고 방영을
시작했는데 이 드라마가 센세이션을 이르켰다고한다.
베트남의 국영 방송은 사회주의 전형적 특성인 선전 선동의 형식인
계몽 방송과 선전 선동 방송이 전부였는데 아침에 눈뜨고 일하러 나가던
아낙네들의 시선을 잡아버린 드라마가 김남주가 주연으로 나왔던
모델이란 제목의 드라마였다.
생소한 문화며 이질적이 여야 할 외국의 드라마를 처음 접한 베트남 아줌마들은 집회와 결사가 엄하게 금지 되있는
사회주의 국가의 국영 방송사 앞으로 몰려가 데모와 항의를 했는데 이유는 아침 출근 시간대에 방송하는
우리나라 드라마를 저녁시간대로 옮겨 달라는 것이 였다, 베트남 정부는 아줌마 부대의 집단화가 두려웠는지
저녁 황금 시간대로 옮겨 주었고 지금은 베트남 방송사에 한국드라마가 빠지는 날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별로 많이 팔리지 않는 화장품이 있는데 바로 드봉 화장품이 베트남에선
최고의 브랜드다.
이유는 그들의 우상인 탤런트 김남주가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달려와 이 화장품을
바르면 얼굴이 나처럼 하얀 피부로 바뀐다는 단 한마디의 멘트 때문인데 키 작고 몸매
호리호리한 월남 여인들의 미에 기준이 몸매 보단 하얀 피부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다녀가는 여행자들에게 주문하는 필수품이 이 드봉 화장품이란다.
라이따이한: 일반인들이 대부분 잘못 알고 있는 사실 중에 라이따이한의 탄생에
대한 오해이다.
한국인들의 인식 속에 숨겨저 있는 잘못된 생각 중 라이따이한은 한국군에 의한
월남 여인들의 수난 속에 필연적 탄생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인식이 였는데
현지인 월남에 직접 찾아가 들은 얘기는 전혀 다른 사연을 담고 있다.
1964년 미국의 참전 요구로 인해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여명의 국군을 파견하는데 미국과 월맹간의 전쟁이 아니라
월남 내부에서 월맹의 지원을 받고 있는 베트콩들과 내전 양상을 보이는 전쟁에 미군이 참여하게 되고 미군의 참여가
자유 수호를 위한 명분으로 연합군을 구성할 필요가 있어 태국군과 한국군등 참전을 요구하게 되는데 수차에 걸 처
한국군을 파견한다.
첫번째는 파병을 하기전에 먼저들어간 우리나라 근로자들이고 두번째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의 파병이나 세번째 백마부대파병으로 이루워지는 단계에서
군속이나 장교등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한 사람들이 현지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탄생한 아이들이 라이따이한이다.
전쟁터에서 일반 사병들은 1년 파병기간에 이틀씩 주는 몇번의 휴가도 마음대로
위험한 시내를 돌아다닐 엄두가 나질 않아 병영내 휴게소에서 휴가를 보내기 일쑤였다.
현지에서 결혼 생활을 하던 우리나라 근로자들과 하사관급 이상의 병사들과 사이에서
난 아이들에 운명은 이렇다.
1973년 한국군의 철수로 인해 월남에서 결혼한 우리 나라 근로자들과 현지에 가족을 두고
철수 할 수 없었던 군속들이 잔류를 하게 되는데, 이들 역시 1975년 월남이 완전 패망하고
월맹으로부터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을 두고 철수하게 된다.
서너살 어린 아이와 현지처인 월남 부인을 두고 생이별하는데 한 가족이 사진 한장 찍어
사진뒤에 서울의 주소등을 적어 주고 사회가 안정이 되면 돌아온다는 기약과 함께 가족들을
놔두고 모두 귀국하고 공산화된 땅에 남은 식구들은 적국의 아이들과 엄마로 멸시 받는
신분으로 추락한다.
한국 사람과 살았던 부인들은 그 사회의 냉대로 직업을 구할 수 도 없었고 아이들은 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 들의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찾아오길 바랄 뿐이다.( 미국은 월남이 공산화 되자 월맹에 돈을 주고 미군의 현지 가족들을
모두 미국으로 데려 가고, 하다못해 미군 유해까지 발굴해 갔다)
라이(혼혈/잡종)따이한(한국의 월남어)이란 불결하고 더럽다는 의미가 내포된 월남 사람들이 한국인 혼혈아를
부르는 명칭이다.
어린 아이에게 유일한 희망인 아버지를 찾게 하기 위해 라이따이한의 엄마들은 나중에 커서 아버지를 찾아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걱정으로 아이들에게 한국말과 한국어를 가르친다.
그런 암울한 현실 속에 작은 희망이 커다란 빛으로 찾아오는 일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것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이다.
1993년 국교 정상화가 되고 시간이 흐르며 한국의 기업들이 속속 월남에 안착을 하는데 현지에서 고생하며 살아가는
우리나라 자손들의 열악한 환경을 전해들은 한국의 기업들은 대우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 사내 내규에
라이따이한은 무조건 우선 채용하라는 규정을 두게 된다. 한국어와 한국말을 하는 라이따이한...
이렇게해서 라이따이한은 월남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되고 신분도 수직 상승하게 되는데
요 근래에는 직원을 2500여명을 둔 라이따이한 오너도 생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으로 시집오는 여인들:
남녀의 성비가 남자의 다수로 기울어 저 있는 한국과 잦은 전쟁으로 여자의 다수로 기울어저 있는 월남의
현실은 공급과 소비라는 측면에서 경제적이던 경영학적이던 균형화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경영과 경제에 집중해 있는
몇몇 한국인들이 인신매매에 가까운 결혼상담소를 개설해 국제결혼을 시킨 부부가 수십만에 이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월남 여인들의 한국행은 월남의 특수성과 맞물려있다.
2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베트남은 자국의 문화에 대한 긍지도 대한 하긴
하지만 일찍이 중국 문화권에 소속 돼 있다 보니 유교적 관습은 몸에 베어있고,
불교적 생명관이 혼재 되있음을 볼 수있다.
세상을 떠나면 긍극적으로는 불교적인 화장을 하지만 화장하기 전까지는
매장이라는 유교적인 시간을 3년 정도 갖게되는데 삼오제나 사구제나 삼년상을
치루는 문화가 사회주의 가치관을 표면에 두면서도 문화적 습성으로 인정 되는
사회가 월남이다.
그런 월남의 여성관이 지극히 보수적인 유교관이라 일부종사를 미덕으로 보는
유교관에 부합되어 한 남편을 꾸준히 보필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하기에
한번의 결혼에 실패하면 평생 혼자 사는 것이 당연시 하고 있다.
여자들이 태어나면 그 태어난 지역에서 대부분의 평생을 살아야 하는
환경이다 보니 다른 곳에 대한 환상이나 미지에 대한 열망이 없는 듯 하다.
그러다보니 하노이 부근의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도 대도심의 모습을 단 한번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70% 그 이상이라 한다.
도심에서 생활하는 30%의 사람들은 세계화의 변화를 알더라도 문화적으로 동요 할 수 없는 70%의사람들은 거주하는 지역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혼재된 사회가 베트남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월남 여인들의 한국행은 정상적일까?
활력에 넘치는 월남이란 신흥 개발 도상국에서 자국에서도 살아갈 길이 얼마던지 있는데 부부간에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친인척 하나 없는 사회에 왜 오는 것일까?
베트남 사회에선 신분 상승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속 된 가난이란 지겨운 환경을
벗어나고자 주부취업 형태로 한국행을 택하고,또는 자신들의 환경에서 떳떳하게 살아가기 힘든 직업이나 이혼 등
으로 재혼하기 힘든 사람들이 국제 결혼을 한다는 시각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가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1986년 경제 개방을 시작한지 26년이 지난 지금의 월남은 하노이 구도심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대나무 자라듯
여기저기 고층건물이 올라가고 신도시를 중심으로 10차선 이상의 넒은 도로도 만들어지고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이
활력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있다.
8600만명의 인구와 70% 이상의 40대 이전의 젊은 사람들,, 아직은 빅뱅 이전의 소용돌이 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발전이지만 거대한 의지의 발산을 곧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과연 그럴까?
위 글은 2011년 1월22일부터 1월 26일까지 북부 베트남 하노이시와 닌빈과 하롱베이를
여행하며 롯데 관광 소속 가이드의 말을 재구성하여 쓴 글입니다. 글을 쓰면서 베트남에
대한 가이드의 말과 인터넷으로 검색한 베트남에 대한 여러가지 기록들과 비교를 했는데
맞는 부분도 있고 비숫한부분과 전혀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도왔던
남부 베트남적 시각에서 바라본 글과 통일시킨 북부 베트남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의
차이 쯤으로 생각하며 위의 글 내용의 진실성에 초점을 두지 말고, 일반적으로 여행을하면
이런 얘기들을 들을 수 있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길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잘 모르고 있던 사실에~!
조금은 접근을 한것 같습니다~!!
다음 여행기 또 기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해운 학우님의 기대에 부응 하기위해
여행을 통해 달리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공감을 떠나 부족하더라도 올리려는 노력을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베트남에도 우리나라 우수 기업이 진출 /// 한류가 빛을 발하고~~~~
여인들의 삶이 왠지 서글퍼====
사진과 글의 적절한 조화<*~^.^**>
이 글은 한번 올렸다 삭제 했었는데 이현숙 학우님의 질책과 격려에 부응 하기 위해 사진 추가해 새롭게 편집 해서 올렸습니다.
이현숙 학우님의 관심 고맙게 생각하며, 저 또 한 제 소질을을 위해 노력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격려는 사람과 세계를 바꿉니다. 고맙습니다..^^
베트남 관광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편견을 걷고 생각이 깊어지는것이 여행의 진정한 미덕이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관심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방에 사진만 올리기 밋밋해서 사진위에 한 두 글자 쓰기 시작한 것이 사진은 밀어내고
글로 바뀌는 묘한 변화가 생겼답니다. 그리고 국문과 회장을 하면서 국문과 학우님들 글자 댓글을 관심있게 달다 보니 글이 조금 늘은 것 같습니다.
글은 써야 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