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사람이 우선입니다!
농어촌 마을에서 살다 보니, 농촌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열악한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재배되고 있는 효자 농작물들이 있습니다. 쌀, 보리, 옥수수, 고추, 마늘, 양파, 고구마, 감자, 사과, 감, 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이 있었는데,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 23,26)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모든 가르침이 마음의 안식으로 수렴하면 부모가 맞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법’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안식일법은 비록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율법이었습니다. 안식일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쉬지 않는다고 사형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안식일인데도 일합니다. 배가 고파서 남의 밭의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밀이삭을 뜯는 행위는 추수 행위이기 때문에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도둑질보다는 안식일법의 위중함을 감안해 안식일법을 위반하는 제자들을 둔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모든 잘못을 하는 당신 제자들과 당신 자신을 두둔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안식은 아무래도 평화나 평안, 혹은 보호받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의 반대말은 불안입니다. 부모가 절대 자녀들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 불안입니다. 불안하면 자녀가 악해져서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이킹은 왜 생겼을까요? 불안 때문에 생겼습니다. 춥고 척박한 산악지방에 인구가 늘어나니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가 남의 나라를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사회생활에 부적격자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특정한 물건에 집착하거나, 폭력적으로 되고, 도둑질과 타인을 괴롭히는 일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한 가지 원인은 ‘불안’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은 율법을 줍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고 불안만 가중시킵니다. 사실 부모가 아이들을 평화롭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본인들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통해서 자기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기에서 모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교회에는 없을까요? 고해성사 보러 들어왔을 때 사제가 신자들을 야단치고 불안하게 하면 될까요? 주일미사에 일하느라고 바빠서 못 왔는데 야단치면 될까요? 주일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세상 걱정을 잠시 잊고 하느님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정해주신 날입니다. 그러니 일에서 쉬면서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때 어떤 복사들은 틀릴까 봐 두려움에 떱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 때 아이들이 더 평화를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른들도 성당에 오면 세상 어디에서 느낄 수 없는 안식을 느껴야 합니다. 걱정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착해집니다. 이것이 창조자가 있음을 믿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찾을 때 부모는 바로 이 평화를 주는 존재입니다. 안식을 주는 존재가 부모이기에 불안을 조장하는 부모는 아이들이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신자들에게 밀쳐져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만연해지면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냉담률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참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아기를 반을 잘라서 두 어머니에게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진짜 어머니는 차라리 아기를 다른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짜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죽었으니 그 아이도 반이 잘리는 것을 원합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안식을 걱정하지 않는 자는 어머니가 아님을 분별해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교회에 하느님을 아버지요, 창조자로 믿게 하려면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율법이 신자들에게 마치 레베카가 야곱에게 에사우의 옷을 입히고 걱정하지 말고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한 것과 같은 평화를 주는 가르침이어야 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답변이다.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이다.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강의를 나갔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람이 많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쉼의 시간에 스마트폰을 본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스마트폰 보는 것이 쉬는 것일까요?
하루 평균,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습득하는 정보의 양은 신문 175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보통 신문 한 부에 포함되는 글자 수가 13만 자이나 우리가 매일 뇌 속으로 넣는 글자의 양은 일 평균 2,300만 자입니다. 일주일이면 1억 6,000만 자, 한 달이면 7억 자, 1년이면 84억 자입니다. 어떻습니까? 쉬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터질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정보의 양을 접하고 있으니, 머리는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가락만 움직이기에 쉬는 줄 알았지만, 머리는 쉴 새 없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는 일 없이 피곤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많은 일을 해서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기억력이 전과 다르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으시는 분도 많습니다. 단순히 나이 먹이서가 아니라,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쉬기 위해 하는 스마트폰이 오히려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 우리 삶에서 이런 경우는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쓸데없는 소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고 싶다면서, 정작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행복했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미움, 질투 등의 부정적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말로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에 보면(23,26),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밀 이삭 뜯은 것을 추수 행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에 왜 생겼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사랑 때문에 생겼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사랑 자체는 전혀 보지 않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데, 법 준수만을 외치면서 사랑을 외면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하며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논어 학이 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엿새 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은
일곱째 날의 휴식으로
회복 된다네.
엿새 동안 지은
우리의 죄도
주님의 날에는
참회와 감사로
깨끗이 씻어지고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을
모시고 살아가는
천국의 시민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하느님께서는 겉보다는
속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은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내가 그릇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릇에 담길 그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비싼 그릇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담길 따뜻한 밥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포함한 모든 계명의 정신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