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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묵상글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 믿음의 완성이요 모범이요 증거인 순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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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의 완성이요 모범이요 증거인 순교
순교자들의 축일을 지낼 때마다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육신은 편한데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죽었는데 저는 죽지 않으니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으니 자기(Ego)를 죽이지 않으며,
자기를 죽이지 않으니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지금이
옛날 우리 선조들의 신앙생활보다 더 복되다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실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이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리고 신앙인이란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성인들 특히 순교 성인들은 그것을 완성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순교 성인들은 그것을 완성한 분들일 뿐 아니라 모범입니다.
오늘 독서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는 이런 순교의 모범입니다.
율법이 금한 돼지고기 대신 먹어도 되는 다른 고기를 먹으면
살려주겠다고 책임자들이 제의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하지요.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눈을 한 번 질끈 감아도 될 것입니다.
나는 순교할 마음이 있고 또 순교의 용기를 이미 보였다고 합리화해도 됩니다.
사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보면 그래도 됩니다.
나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다 아실 터이니 말입니다.
입으론 배교 해도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말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 합동평의회 때문에 갔을 때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일본 순교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영화로도 만들어진
엔도 슈사꾸의 그 유명한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방문했지요.
이 책을 저는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후미에 밟기입니다.
후미에 밟기란 배교의 표시로 성상이나 십자가 등을 밟게 한 것인데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죽임으로써 이웃 사랑의 배교와 순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고문 방식이었지요.
이때 주인공인 신부는 이웃 사랑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면
이웃 사랑을 위해 당신 얼굴을 밟으라고 하실 것이라고 믿고 후미에를 밟지요.
이때 주인공인 신부는 주님의 이런 말씀을 마음속으로 듣는 듯하였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도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아무튼 겉으론 후미에를 밟아도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으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래서 배교 해도 되지만 순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순교의 세 번째 이유는 증거입니다.
순교가 다른 믿는 이들에게는 모범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증거 하는 것이 순교라는 말입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대하게 죽을 수 있는 저 죽음은 무엇이고,
죽어가면서도 행복해하는 저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믿음이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이 사는 것이 행복임을 믿는 것인데
순교란 자신에게는 이 믿음의 완성이요,
다른 믿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모범이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증거임을 순교자들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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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아침이면 집안이 시끌벅적했습니다. 6남매이다 보니, 회사 출근과 등교 준비로 늘 바쁜 아침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쁜 아침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바로 화장실 문제입니다. 가족 모두 이용해야 하는데, 화장실 숫자는 마당 구석에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장실 앞에 줄이 서 있을 때, 저는 곧바로 앞 건물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이 앞 건물이 바로 성당이었습니다.
1분만 뛰어가면 바로 성당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당 화장실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집처럼 편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집 화장실보다 더 많이 이용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 집에 들어가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정 급하면 사정을 이야기하고서 화장실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웬만해서는 이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당은 제게 너무나 편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편한 곳이 된 것은 그만큼 성당에 자주 갔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를 했고, 또 복사를 서면서 성당은 집처럼 편해졌습니다.
주님과 편한 관계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많이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가깝고 편한 관계가 되는 길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대화하고,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들 때, 주님께 얼른 달려가서 그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 안에서가 아닌 세상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들은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셨으며 이로써 지금의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신 우리의 선조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실제로 우리 순교 선조들은 자기 죽음을 통해 이 땅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 분이셨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크기에 배신할 수 없었고, 그 사랑이 너무 편안해서 주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주셨던 주님께 대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가득 담을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편한 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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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과유불급)(논어 선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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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오늘은 그들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그들 중 124위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입니다.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입니다. 전라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입니다. 구베아 주교의 파견으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입국했습니다. 강완숙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성사를 집전해 6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를 1만 명으로 늘리는 데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신유박해 때 귀국을 결심했다가 순교하기로 마음먹고 자수했고,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아버지인데, 형 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해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고, 평신도단체 '명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다 1801년 순교했습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첫 기념일을 앞두고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님은 <특별담화문에서, 그들은 “신분 차별과 불평등, 가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보여주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도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곧 목숨을 바쳐 섬기는 순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섬김”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존중하고,
함께 계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섬김으로 당신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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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광
오늘은 잊었던 감격을 일깨우는 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프란치스코 교황 124위 시복식 미사 강론을 요약해 봅니다 (2014,8,16).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각자의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신앙 선조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해야 합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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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5일에 ‘첫 영성체’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처음으로 모시는 아이들의 모습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새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아이들의 모습은 천사 같았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이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아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강조이(아녜스), 강소희(스텔라), 김민준(다니엘), 김예성(미카엘라), 김재호(토마스 아퀴나스), 박서인 (헤론), 박수현(스텔라), 박세온(프렌시스), 엄율하(노엘라), 이영후(사비나), 임유빈(브루노), 장유주(로사), 전라희(벨라뎃다), 정서현(줄리아), 진도미닉(프란치스코), 릴리 지윤 페냐스(릴리아나), 아리얼 은윤 페냐스(아리얼), 홍재원(루크)” 미사 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파티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는 파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선물과 첫 영성체 증서를 주면서 파티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 늦은 나이인 1974년에 동생과 함께 첫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기억에 남은 것은 당시 찍었던 ‘첫 영성체’ 사진입니다. 기도문을 외우던 것도 기억납니다. 12개 기도문을 외워야 했습니다.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첫 영성체를 하였던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1984년에 저는 신학생이었습니다. 1984년 5월에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여의도 광장에는 대형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시성식에 함께 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교우들이 여의도로 왔습니다. 당시 저는 질서유지를 위한 안내를 맡았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휴지 한 장 없이 행사가 잘 마무리 되었다고 보도 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1994년에 저는 보좌 신부로 용산 성당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2년 동안 본당 신부님을 3분이나 모시는 색다른 체험을 했습니다. 용산 성당은 ‘성직자 묘지’가 있는 성당입니다. 해마다 위령의 날이 되면 교구장님과 사제들이 ‘위령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04년에 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명동의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게 된 것은 작은 사연이 있습니다. 2001년 저는 ‘사제 성화의 날’에 사목체험을 발표하였습니다. 저의 체험담이 바람을 타고 교구청이 있는 명동까지 전해졌고, 사목국장 신부님이 제가 있던 성당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저는 3년 동안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14년 저는 또 다시 교구청이 있는 명동에서 지냈습니다. 이번에는 성소국장의 소임을 맡았습니다. 2014년에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시복식을 위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였습니다. 시복식은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습니다. 30년 전에 질서 유지를 위해서 안내하던 저는 ‘영성신심분과’를 맡아서 시복식 준비에 함께 하였습니다. 겸손하시고, 따뜻하신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에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첫 영성체’를 함께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첫 영성체를 보면서 저의 지난 50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 영성이란 말은 흔히 순교 정신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곧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모든 신앙과 신념과 모범적 삶 모두를 총칭하는 것이다. 즉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생명까지도 포기하며 사는 삶,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순교 영성, 순교 정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그분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깨닫고 그 길을 따랐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 길을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 빠진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그마한 일상에서 순교하는 삶,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 바로 오늘날의 순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옛날 우리의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 지킨 신앙을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퇴색됨 없이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시련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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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얼마간 화제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신들린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요. 물론 그들의 직업이어서 잘하겠거니 하겠지만 그래도 이번 영화는 그 몰입감이 너무 좋았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더 몰입됐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습니다.
야! 이거 실화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래.
영화 대사 중 이런 대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간은 강력한 누군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라지.
사람들은 강력한 누군가를 원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주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도 우리 주님을 강력한 지도자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왕이 아니십니다. 강력하기보단 오히려 약하고 순종적인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에 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을 세상의 왕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니 미리 주님께 청탁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들은 호기롭게 말합니다. 마실 수 있다고요.
그 잔은, 주님께서 마신 잔은 순명의 잔이었고, 용서의 잔이었고, 겸손의 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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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완두콩을 심을 때
흙을 파고 완두콩을 넣습니다.
과연 몇 알을 넣어야 적당할까요?
저는 한 알 혹은 두세 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완두콩에 관해 이야기해 주신 분의 말씀으로는 여섯, 일곱 개의 완두 콩알을 넣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넣냐는 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완두콩을 그 정도 심어야 서로 얽히고설켜서 위로 올라갈 수 있어요. 너무 적게 심으면 힘이 없어서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다시 말해, 서로 얽히고설켜서 돕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다른 말로 ‘상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얽히고설키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 부대낌이 우리를 넘어지지 않고 성장시킨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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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교영성과 순교적 삶
-섬김과 따름-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모두 124위 순교자들은 10년전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 미사를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분들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에 이어 1866년 병인박해까지 사이에 순교한 분들입니다.
당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124명 순교복자들은 지역별로는 한양 37명, 경기 13명, 강원 3명, 충청 18명, 전라 24명, 경상 29명등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대부분 용감하게 믿음을 고백하며 순교했던 분들입니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당신 상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윤바오로와 권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8일 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바오로가 32세였고, 권야고보는 40세였다.’
이런 순교자들의 순교행적을 보면 그 신앙에 깊은 충격과 감동과 더불어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신앙을 뒤돌아 보게 됩니다. 말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그대로 따랐던 분들입니다. 당신의 순교를 예감하신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예수님과 그 뒤를 이은 무수한 순교자들이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들이 되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실상 이들 순교자들은 영원한 삶을 누리는 분들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절대적 가치인 진리의 주님 앞에 상대적 가치를 지닌 목숨이자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진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자기 목숨에 대한 초연한 자유가, 자발적 순교가 가능했으니 바로 이것이 순교영성의 진수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순교의 모범을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에서 뛰어난 율법학자인 엘아자르의 순교에서 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으로 전달되는 그의 당당하고 의연한 고백입니다. 엘아자르는 아끼는 마음에 지인들은 살길을 제시하지만 그는 일체의 호의를 겸손히 거부하며 말합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고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갑니다.”
이런 언행일치의 삶과 죽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런 고결한 삶, 거룩한 죽음보다 젊은이들에게 좋은 가르침의 선물은 없습니다. 참으로 보고 배울 어른들이 없어 희망을, 길을, 빛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널린 세상입니다.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으니 영원히 살게 된 엘아자르는 말그대로 순교자의 모범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순교영성을, 순교적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십자가의 길로 입증되고 검증되는 우리의 신앙이요 순교영성입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자발적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순교영성입니다. 현재의 시련이나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살아내는 자들이 거룩한 살아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참으로 순교영성이, 파스카 영성이 절박한 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 역시 빛나는 순교영성, 파스카의 영성입니다. 어제 딸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초라하고 서글프다고 고백하는 분에게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신에 좌절하지 말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밝고 기쁘게 사십시오. 이것이 순교영성입니다. 어머니인 자매님이 이렇게 살아야 따님도 힘을 얻을 것입니다. 힘든 중에도 이렇게 인간다운 품위를 견지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이 힘든 중에도 성실히 살아가는 따님에게도 참 좋은 ‘희망의 표징’이자 선물이 될 것입니다.”
비상한 순교영성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순교영성의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신망애(信望愛)의 순교영성을 살도록 도와 줍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기도를 나눕니다. 늘 나눠도 늘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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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복된 순교자들을 기리며>
세상에 제 낳으신 고운님 모셨기에
함께함이 삶이요 떨어짐이 죽음이라
제 목숨 빼앗길수록 영원생명 빛나네
너와 나 갈림 없이 님 안에서 하나로다
님 닮은 사람이라 모두 다 귀하기에
사람의 높낮이 매긴 냉혹 세상 부수네
님 품은 순간부터 평화의 사도이니
찢기고 억눌려도 온유함 가득하고
시퍼런 칼날아래서 찬미노래 부르네
님 따라 나선 길을 선혈로 물들이고
피 삼킨 어머니 땅에 하늘빛 드리우며
기나긴 어두움 뚫고 새하얀 새벽여네
앞서간 고운 넋들 간절히 손짓하니
두려움 떨쳐내고 한걸음에 따라가서
찬란한 새 하늘 새 땅 아낌없이 맛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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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7)
높은 곳을 향한 길
얼마나 심오합니까? 그들은 그분께서 영광을 추구하시도록 부추겼지만, 그분께서는 겸손으로써 높은 곳에 오르시고, 겸손의 길을 통히여 그 높은 곳에 이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분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기를 바랐던 그 제자들은 영광을 청하였습니디(참조 마태 20,20-23; 마르 10,35-40). 그들은 목표는 보면서도 길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본향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들을 길로 다시 부르셨습니다. 교회가 본향이며 겸손한 길입니다. 본향은 그리스도의 길이고,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참조 마태 16,25; 마르 8,35; 루카 9,24, 17,33). 본향은 그리스도의 집이고, 길은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길을 거부하는 자가 어찌 본향을 찾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우리의 복은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피조물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고귀한 일은 존재입니다. 나의 육친이 자신의 본성을 물려주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존재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만 존재를 받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른 자리에서 말씀드렸고, 그런 와중에 자주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하여튼 유다는 하늘에서도 지옥에서도 다른 아무개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그랬습니까?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버렸을 것이고, 그러면 아무 것도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존재는 하느님이 비추시는 빛의 영향을 쉽게 받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순수한 것도,맑고 투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영혼은 하느님의 빛을 충만히 받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빛은 베일에 가려진 채로만 영혼 안으로 들어갑니다. 햇빛이 나무와 기타 다른 대상들 위에 내리비치지만, 우리가 태양 자체를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선물들도 이와 같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선물을 평가할 수 있을 뿐이지, 선물을 주신 분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17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5절: 십자군 운동
제 1차 십자군(1096∼1099):
본연의 십자군에 앞서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일군의 농민들의 돌연한 출발이 있었다. 그들은 라인 지방을 통과하는 동안 흥분하여 유대인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일으켰다. 발칸 지방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지휘자가 없는 이 무리는 현지 주민들에게 많은 폭행을 저질렀고, 그래서 비잔틴 황제는 그들이 도시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도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십자군을 설교하였던 아미앵의 은수사인 베드로의 지휘 아래 소아시아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셀주크족의 첫 습격에 전멸되고 말았다.
거의 로만계 국가들에서 온 기사들로 구성된 본대는 여러 길을 거쳐 콘스탄티노폴에 도달하였다. 툴루즈의 라이문도, 부이용의 고드프뢰와 그의 형제인 보두앵과 에우스타키오, 노르만인 타렌트의 보헤문드 등의 제후들이 그물의 지휘자였다. 심한 과로와 많은 격렬하고 피투성이의 전투 끝에, 그들은 1099년 7월에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무서운 대량 학살은, 그들의 영웅적인 고생에 더없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 동시대의 자료들은 부녀자와 어린이들,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행한 이같은 불법행위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즉. 햇볕에 그올린 돌의 사막을 거쳐 행군할 때의 과도한 고생과 매복병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습격은 기사들에게 엄청난 큰 손실과 지독한 혈세를 요구하였고, 궁지에 몰려 있던 울분과 지나친 자극은 성도(聖都)짧로 돌진할 때 “무신앙자’들에 대한 완전히 비그리스도교적인 살기에서 울분을 토하게 하였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행위들은 확실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인간적인 부족함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지나친 행동은, 그후에도 십자군의 사건들을 여러 번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열정이 생사를 건 써움의 쓰라렴과 혼합되었을 때, 거칠고 동시에 정신적으로 거의 교양이 없는 이 전사들에게 어떠한 일이 얼어날 수 있었는가를 누가 미리 판단할 수 있었겠는가?(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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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죽음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고, 스스로도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밀알’은 사실 그저 곡식 낱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씨앗일 뿐입니다.
그러나 땅속 깊은 어두움, 그 숨 막히는 공간에 자신을 맡기고 부서짐을 받아들이면 땅속의 양분들과 융합하여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게 됩니다.
씨앗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자신의 본모습을 꽃으로, 향기로, 열매로 온전히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두렵고 불안하며 불편한 시간을 받아들임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때로 놀라운 생명력을 낳는 은총의 여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하며 이를 집요하게 움켜쥐고 유지한다면, 자기 보호와 방어는 이루어지겠지만 그 어떤 창조의 힘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밴드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라는 노래에 “빛나는 열매를 보여 준다 했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을 막고 폐쇄적으로 남아 있다면 그 어떤 빛나는 열매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도전이 다가오면, 자신을 보호하려고 맹렬히 저항하기보다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진정한 생존의 지혜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하는 자료 보관 차원에서 추가합니다 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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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김명겸 요한 신부님.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목숨을 함부로 대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 안에는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있는 것을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욱이 요즘 세상은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며
그래서 먹는 것이나 운동 등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의술로 생명 연장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오늘의 말씀은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이
언뜻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 속에는
한편으로는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한 노력들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그 불안감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안감이 클수록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안타까운 것은
그 불안감은
노력으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불안감은 점점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내 힘으로 불안감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포기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단 1분도 죽음을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노력해서 되지 않는다면
그 노력을 멈추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것입니다.
즉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불안감을 없애려는 노력을 멈추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것을 통해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섬김으로
하느님께서 존중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 불안은
하느님과 함께할 때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하느님께서 나를 존중해 주시고
나의 목숨을 소중하게 대해 주십니다.
내 안에 있는 불안함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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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워하란 말은 흘려보내란 뜻이다
2014년 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주님의 종들을 복자품으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많은 성인이나 복자들의 삶은 우리가 세세히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윤지충 바오로가 어떠한 분이신지, 왜 124위 한국 복자들의 대표가 되었는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는 누구일까요? 이승훈 베드로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사제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윤지충 바오로인 것입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함께 순교하였지만 아무래도 윤지충 바오로가 더욱 용맹하였고 먼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기에
복자들 중 첫째로 놓은 것 같습니다.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제사 문제가 불거지고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제사를 금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양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위폐를 불살라버리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전라 감사가 그를 문초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불사를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그것을 땅에 묻든 불사르든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매를 맞아 죽어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전라 감사는 윤지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로 군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33세였고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태연하게 칼을 받았고, 9일 만에 친척들이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몸이 전혀 상하지 않았고 방금 피를 흘린 것처럼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했다고 전합니다.
그 피를 닦은 손수건을 만진 이들의 병이 나은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저렇게 버리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 것일까요, 미워한 것일까요?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기에 이웃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목숨과 자기 자신이 같은 것이라 혼동합니다.
목숨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소유한 것입니다.
목숨을 잃어도 자신은 남습니다. 목숨은 피입니다.
피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는 생성되었다가 죽는 것을 반복합니다.
만약 피를 좋아해서 자신 안에 모아두려고 하면 썩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따라서 피를 몸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생명도 흘려보내야 자신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은 붙들고 있지 말고 흘려보내란 뜻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맏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며느리에게 흘려보내지 않아서 며느리도 죽고 자신도 아들의 사랑을 잃게 된 예화를 제가 자주 씁니다.
이것이 생명과 같은 자녀를 붙들어놓으려고 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라는 말은 세속적인 미움이 아니라 ‘흘려보내라’라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에서 선물 받았던 난을 흘려보내니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는 것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생명일지라도 그것을 흘려보내야 많은 열매를 맺고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계속 공급받게 됩니다.
피가 흐르지 않고 죽지 않으면 새로운 피가 생성되지 못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지금의 생명이 썩지 않게 이웃에게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내가 흘려보낸 목숨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얻는 방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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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의 순교 복자들 124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호교론 50,13) 했듯이 이분들은 참으로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씨앗이 된 분들이다.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시복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우리 순교자들은 모두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 밀알이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살아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신 길과 같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는 하느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십자가와 부활의 열매로 모든 이가 그분을 알게 되었듯이 순교자들의 피는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삶에 대해 과도한 욕망에 빠짐으로써 자기를 파괴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자신이 파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을 이겨 나가야 한다. 순교자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그분을 올바로 섬기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사랑을 실천할 때,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태 6,3 참조).
오늘의 순교 복자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닮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장 큰 사랑을 드리셨다. 우리가 지금 순교 정신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같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끊고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현하며 그분을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 그분을 따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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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을 섬기는 것을 어찌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124위 순교 복자 시복식이 거행된지 벌써 1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참 세월이 빠릅니다.
통상 바티칸 외에서 거행되는 시복식은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집전하는 것이 보통인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방한하셔서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거행하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성지(대전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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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기쁨』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오셨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ㄴ).”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그 기쁨에 대한 희망 속에서 ‘지금’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 문제에 관한 율법 규정들을 가리키는데, 넓은 뜻으로는
‘율법 준수만 강조하는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신경 쓰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사랑도 평화도 기쁨도 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입니다.
“찡그린 성인은 없다.” 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성인 성녀들의 공통점은
바로 ‘기쁨’입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이
성덕을 쌓는 일의 출발점입니다.
2) ‘밀알’이라는 말에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여기서 ‘환호’는 ‘큰 기쁨’을 뜻합니다.>
이 시편은 씨를 뿌릴 때 누구나 울게 된다는 뜻은 아니고,
또 울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씨를 뿌릴 때 울었더라도
추수 때에는 크게 기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기쁨을 알고 있는 농부는
씨를 뿌릴 때부터 기쁨으로 뿌립니다.
<그 기쁨을 모르거나 안 믿으면, 씨를 안 뿌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하고 참된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에, ‘지금’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도 있고,
슬픔과 아픔을 겪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힘든 일들이 신앙인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는 못합니다.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은 많은 열매를 맺을 때의 기쁨을
희망하고 믿기 때문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것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 ‘기쁨’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해야 합니다.>
3) 요한복음에 ‘수확의 기쁨’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요한 4,35ㄴ-36).”
여기서, ‘씨 뿌리는 이’는 아버지 하느님이고,
‘수확하는 이’는 예수님인데,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에, 이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함께 씨를 뿌리시고,
함께 수확하시고, 함께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에 신앙인 전체가 참여해서 함께 기뻐합니다.
사실 인류 구원 사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기쁨이고,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시작해서 기쁨으로 완성되는 것이 구원 사업입니다.
십자고상에 있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날마다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기쁨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념일이라고 해서
꼭 박해, 고난, 고통만 묵상해야 하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의 생활’이 되고,
그리스도교가 ‘기쁨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기쁨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슬픔과 고통은 정신을 차리는 데 효과가 있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기쁨’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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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2,24)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 미사에서 시복을 선언했습니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를 위한 기념일입니다.
잠시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의 순교에 관한 증언을 읽어보렵니다. 『1791년 신해박해의 원인인 진산사건은 그해 5월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바오로)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외종 사촌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유교식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당대 사회에 폐륜으로 받아들여졌고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관아에 나아가 자수함으로써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당한 사건이다. 참수 당하기 전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없습니다.” 특히 윤지충은 “만약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진산성지홈페이지 자료)
오랫동안 다른 순교자들처럼 이분들도 유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는 유항검이 수습해서 바우배기에 묻었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유항검이 치명한 후 신자들 사이에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무덤의 위치를 잊게 되었는데, 전주교구는 2021년 3월 이곳을 정비하다가 유해를 발견했고 같은 해 9월 1일, 발견된 유해가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3명의 유해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유해 발견이 한국 교회사, 더 나아가 세계 가톨릭 교회사에 기록될 큰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9,23) 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제자의 요건 중에서 자신을 버려야 하는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어떤 협상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위해 자기 생각이나 계획이나 욕심 등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지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의 길이고 자기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삶의 방식, 예수님의 여정인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 또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무릇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 제자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12, 24.2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순교자들은 예수님처럼, 또 다른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려 했으며, 밀알과 같은 삶을 살려는 모든 이에게 위로와 함께 희망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의 표지였으며,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윤지충(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죽기까지,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증언하고 증거한 그 동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사랑이며, 그 사랑의 표현이 순교였던 것입니다. 또한 순교로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섬겼으며, 그 섬김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임을 믿고 희망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순교자들은 그래서 ”영원한 생명“(12, 25)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하듯,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오늘날 한국천주교회가 열매 풍성한 교회로 성장, 성숙했음을 믿습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의 인물은 바로 90세의 순교자 엘아자르입니다. 그는 평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거짓되고 가식적인 삶을 살기보다 자신의 나이에 맞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왔었기에 ‘법에 어긋난 이교 제사’를 거부함은 물론 자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젊은이가 더 살아보려 늙은 나의 가장된 행동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진다면,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6,25)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늙어가는 저에게 큰 감동을 주고 도전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다음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증언입니다.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나 자신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6,27) 엘아자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자들 역시 동일한 생각과 마음으로 신앙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의 순교로써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실행한 사랑의 순교보다 더 큰 은혜와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 또한 자랑스런 순교자의 후손들로 순교의 얼과 정신으로 우리네 삶에 적합한 순교 영성를 실천하도록 합시다.
순교자란 의미는 근본적으로 <증거자> 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바로 순교자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증거자입니다. 다만 순교 선열들과 우리와의 근본적인 차이, 곧 우리의 증거는 피 흘림이 없는 백색 순교라는 점입니다. 아직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한순간 생명을 바친 순교의 영광을 받을 수 없겠지만, 일상을 살면서 삶을 통해서 믿음을 증거 하는 삶 또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자고요. 우리의 믿음 약함을 인정하면서 오늘에 맞는, 지금 주어진 각자의 삶의 자리에 맞는 순교를 해 나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시험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으리라. 알렐루야” (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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