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만 싣고 빈 배로 돌아오다
천 자나 되는 낚싯줄을 바로 아래에 드리우니 한 물결 겨우 일었는데 만 물결 따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 물지 않으니 달빛만 가득 싣고 빈 배로 돌아오도다.
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야부도천, 금강경오가해 지금 이 순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창밖으로 희부윰한 안개가 깔려 시야가 맑지 않다. 지나가는 차들의 덜컹거리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낮은 탁상시계 소리가 일어난다. 눈앞 모니터에 글자들이 찍히고 그 옆으로 컵과 책과 휴대폰과 벽걸이 에어컨이 보인다.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사물들, 문밖으로 보이는 사물들, 건넌방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에서 경험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 일어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글자를 따라 생각이 실타래 풀리듯 일어난다. 미묘한 느낌이 일어나고 무덤덤한 마음 상태가 알아진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바깥의 것들과 내면의 것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형태와 소리와 느낌과 생각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것들이 출현해서 시끄러울 법도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매 순간 활발발하지만 고요하다. 그러나 일어나는 생각에 끌려다니면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정신을 못 차린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삶이 초라하다, 무료하다, 의미 있다 의미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근심 걱정 등등에 사로잡히면 삶이 괴롭다. 그러나 그것들은 새소리와 다름없다. 지금 이렇게 여기에서 일어나는 무상한 것들이다. 그것에 사로잡히면 스스로 어두워지고 피곤해진다. 그림자와 같은 망상에 휘둘려 마음이 피폐해진다. 그러나 그런 저런 판단이나 생각이 일어나더다로 그런 것이 바로 이 마음이기 때문에 실체가없다. 온 세상이 그 모습, 그 움직임, 그 생각 그대로 고요하다. 지금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깥이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을 기준으로 성립된 바깥과 안이라는 분별을 놓아버리고 어떤 판단이나 해석 없이 경험하면 모든 것이 즉한 바로 여기에서 출몰하고 있다. 모든 것의 원천은 바로 여기 모든 것의 직하(直下)이다. 모든 경험과 하나인 바로 이곳이다. 새소리 이것이고, 시계 소리 이것이고, 사물사물 이것이고, 생각생각 느낌느낌 이것이다. 이 경험 자체 바로 이것이다. 만약 이런 직하의 경험을 놔두고 따로 생각을 따라 이 경험이 일어나는 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이 당처를 자각하지 못한다. 물론 이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자체는 다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자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는 생각으로 헤아리면 바로 어긋난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그것이 일어나는 바로 여기이다. 어떠한 경험과 틈 없이 딱 들어맞은 바로 여기이다. 이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이 하나인 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모든 것이 이것일 때 세상은 있는 그대로 고요해진다. 본래 아무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동안 마음에서 일어난 분별 의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시끄럽다고 여겼다. 그런데 세상이 시끄러운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의 소음에 휘둘려 세상이 시끄럽다고 여겼다. 이 적멸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이 마음 하나임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깨달음이라는 미끼를 끼운 낚싯줄을 드리운다. 모두가 완전히 갖추고 있는 이 마음 하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말들의 미끼를 제시한다. 이 마음은 분별망상심 속에 있기 때문에 분별망상 속으로 들어가 끌어올려야 한다. 처음에는 다소 요란하고 시끄러운 파동이 일어날 수 있다. 기존의 상식과 어긋나는 말을 듣고 놀라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망상을 깨부수는 말을 꺼리기도 한다. 그러나 듣다 보면 틀리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갖고 듣게 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말을 따라 시끄럽게 헤아리고 따지고 정리하지만 결국 그 말은 모든 사람의 분별심을 녹이기 위한 말이다. 생각에서 깨어나게 하는 말이며 본래 완전하여 구할 것이 없다는 말이며 본래 마음뿐임을 밝게 보게 하려는 말이며 이런 말도 마음에 남기지 말라는 말이다. 가르침의 말을 진심으로 듣다 보면 스스로 고요해지고 세상도 고요해짐을 알게 된다. 진심으로 듣게 될수록 삶이 가벼워지고 생각과 감정에 시달리지 않는 삶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본래 부족함이 없고 구할 것이 없으며 알 것도 없고 받아들이거나 지킬 것이 없는 현실이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텅 비워진 삶을 회복한다. 고요하고 일이 없지만 온갖 일이 저절로 피어나는 이 세계 전체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리되고 보니 전부가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따로 있지 않는 세계, 지금 이 순간 마주한 현실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살아있는 적멸도량이다.
- 릴라님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