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서예가 안진경 《원차산비》 명대 탁본 唐书法家颜真卿的《元次山碑》明代拓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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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차산비》는 당대 대서예가의 법 성숙기의 모이다.서예 작품, '원차산비' 비첩크기 29.2×34.0cm의 명대 탁본으로 당대력 7년(772년)이다.안진경이 책을 함께 쓰다. 후덕하고 힘차며, 기세가 드높고, 생기가 넘친다.
《원차산비(元次山碑)》의 "경략"이라는 두 글자는 가운데서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도(都)·정막의 세 글자손해가 없다.
《元次山碑》是唐代大书法家法成熟期的毛笔书法作品,《元次山碑》碑帖尺寸29.2×34.0厘米,是一本明代的拓本, 唐大历七年(772年)。颜真卿撰并书。浑厚苍劲,气势磅礴,富有朝气。
《元次山碑》“经略”二字中间未损甚,“都”、“鼎”、“莫”三字未损。
안진경
안진경(真眞卿, 709~785년), 자는 청신(淸臣),경조 만년(지금의 섬서 서안) 사람, 일설임기(属沂今) 사람.당대의 서예가로 평원(平原, 지금의 산동) 태수(太守)를 지냈고, 벼슬은 이부상서(书部尙書), 태자태사(太子太師), 봉로군공(封,郡公)에 이르렀다.서예를 처음 배운 저수량은 후에 장욱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필법을 깊이 깨달았다.전서 필의로 해서를 썼는데, 진서는 필력이 풍부하고, 단아하고 웅장하며, 기세가 삼엄하여, 행서가 강건하고 활달하며, 자유로워서, 서풍이 뚜렷이 구별된다.둘째 왕(희지)에게 이별을 고하고헌지)와 당나라 초의 여러 집,우리나라 서예 예술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어 세칭 '안체'라고 한다.당시 또 다른 서예가 유공권과 함께 '안류("。"。)'로 불렸다.당인 《서평》은 "형경이 검을 누르는 것과 같이 번쾌는 방패를 감싸고, 금강이 노여워하고, 역사가 주먹을 휘두른다"고 그 서적을 논했다.전세의 묵적은 정서(正書) 『자서고신(自書告身)』, 행서 『제질문고』와 『유중사첩』이 있고, 비각에는 『쟁좌위첩』·『다보탑비(多寶碑碑)』·『동방화찬』·『안가묘비(家家廟碑)』·『마고선단기』·『안근례비』·『중흥송후손집으로는 《안로공문집》이 있다.
颜真卿
颜真卿(709—785年),字清臣,京兆万年(今陕西西安)人,一说临沂(今属山东)人。唐代书法家。曾任平原(今属山东)太守,官至吏部尚书、太子太师,封鲁郡公,世称“颜平原”、“颜太师”、“颜鲁公”等。书法初学褚遂良,后请教张旭,深悟笔法。参用篆书笔意写楷书,真书笔力弥满,端庄雄伟,气势森严,行书遒劲郁勃,阔达自在,书风明显区别于二王(羲之,献之)和唐初诸家,对我国书法艺术的发展有重大影响,世称“颜体”。与当时另一位书法家柳公权并称“颜柳”。唐人《书评》论其书:“如荆卿按剑,樊哙拥盾,金刚嗔目,力士挥拳。”传世墨迹有正书《自书告身》、行书《祭侄文稿》和《刘中使帖》,碑刻有《争坐位帖》、《多宝塔碑》、《东方画赞》、《颜家庙碑》、《麻姑仙坛记》、《颜勤礼碑》、《中兴颂》等。后人辑有《颜鲁公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