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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예봉산으로
갑작스러운 회장님의 분부 받들어 시산제 산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펜을 들어-아니 자판을 토닥거려 봅니다. 알자지라 대장은 올해 시산제를 눈 덮인 하얀 봉우리에서 지내고 싶었나 봅니다. 올 1월 지리산 천왕봉(사실은 바로 턱밑의 장터목)을 다녀온 후 회장님과 알 대장과 함께 만난 적이 세 차례나 있었는데(만두전골집, 플라자호텔 뷔페, 민어찜집) 그때마다 알대장이 그런 희망을 강력히 피력하더군요. 회장님이 축령산을 거론하자 알 대장은 "거긴 눈이 별로 없을 것 같다"며 "태백산이나 함백산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죠.
그런데 정작 공지가 난 곳은 그보다 훨씬 낮아 눈도 그다지 없을 것 같은 예봉산이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할 마음이었고 또 많은 사람에게 한턱 내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도 그 전주에 가리왕산을 다녀온 터여서 가까운 근교가 반갑기는 했지요.
집에서 나와 8시 33분 공덕역에서 용문행 경의중앙선 열차 맨 앞 칸에 올랐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신문을 읽으며 가다보니 8시 55분 왕십리역에서 우리 일행이 우르르 탑니다. 피플러버 회장, 알 대장, 멍게 총무, 꿈푸리, 꼬맹이, 오솔길, 지리산은 며칠 전 한두 차례 본 얼굴이지만 그린란드 형님, 아톰, 뜬구름은 해 바뀌고 처음입니다. 각자 빈자리를 찾아 앉느라 눈인사만 나누기도 하고 일부와는 손을 맞잡기도 했습니다. 춥다는 예보 때문인지 생각보다 객차 안이 한산합니다.
쉼터에서 벌어진 장어집 맛 논쟁
팔당역에서 내린 뒤 알 대장이 대형 안내판 지도 앞에서 오늘 코스를 설명합니다. 예봉산 정상으로 올라 시산제를 지낸 뒤 적갑산~운길산~수종사 길은 너무 길어 포기하고 견우봉 쪽으로 하산해 한강변 길을 걸어 팔당역으로 되돌아 오겠다는 겁니다. 등산로 입구로 향해 가는데 장어집에서 삐끼 아저씨가 나와 내려올 때 들르라고 권합니다. 장어로 몸보신도 하고 통기타 라이브 음악도 즐기라고요. 멍 총무는 잡화점을 지나치자 술집에 들러 막걸리를 몇 병 더 삽니다.
본격적인 등산로 입구에 섰습니다. 이정표에 적힌 거리는 2.3Km. 지금이 오전 10시니 늦어도 12시에는 도착할 듯합니다. 제가 대원들의 면면을 돌아보며 "오늘은 빡세게 걷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도 되겠다"고 농을 건넵니다. 꼬맹이가 "나를 두고 하는 얘기냐"며 뾰로통해하고 꿈푸리가 "왜 제 발이 저리냐"고 거듭니다. 오솔길은 중견 산악인답게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앞서 갑니다.
첫 능선길 벤치에 이르러 두꺼운 외투를 배낭에 달고 물을 한 모금씩 마십니다. 아톰은 사과를 한 쪽씩 돌립니다. 누가 말을 먼저 꺼냈는지는 몰라도 들머리에서 만난 장어집 삐끼 아저씨를 두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아침부터 나와 호객 행위를 할 정성이면 당연히 음식에도 정성을 쏟지 않겠느냐"는 긍정론과 "음식 맛에 자신이 없으니 호객 행위로 메우려는 거 아니겠느냐"는 회의론이 맞서는 가운데 알 대장이 "삐끼와 주방은 보직이 다르고 삐끼 아저씨는 아마 알바인 듯하니 음식 맛과는 상관없을 것"이라며 둘 다 일축합니다.
서서히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오고 조망이 시원해집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남쪽 사면이어서 그런지 눈이 하나도 없습니다. 강 너머 검단산에는 잔설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춥다고 잔뜩 긴장했는데 막상 와보니 바람에 봄기운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바닥도 눈이 녹아 촉촉합니다.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젠 누가 뭐래도 봄은 봄인가 봅니다.
모처럼 산 정상에서 함께한 마포나루
요즘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는 피 회장께서 동기인 그린 형님과 함께 나란히 앞서 갑니다.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마지막 벤치에서 퉁퉁한 중년 사내가 "오랜만입니다" 하고 말을 건넵니다. 바로 마포나루입니다. 여러 차례 산행에 동행했지만 산 정상 부근에서 함께한 것은 정말 한참 만인 듯합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반가움을 표시합니다. 우리보다 앞선 열차를 타고 와서 먼저 올라온 모양입니다. 마포나루 본인도 "해발 300m 이상의 정상은 몇 년 만에 처음인지 모른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쳐져 서쪽으로 흐르는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뒤쪽으로는 적갑산과 운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굽이쳐 이어집니다. 주위를 조망한 뒤 바로 밑 평평한 자리에 돗자리와 신문을 깔고 제상을 마련합니다. 오솔길이 부쳤다는 전과 멍 총무가 준비해온 시루떡과 사과, 각자 챙겨온 찹쌀떡, 육포, 과자 따위가 가지런히 놓입니다.
천지신명께 올 한 해도 무사고 산행을 빌며
멍 총무가 강신 분향은 생략하고 제주가 헌작부터 하겠다며 시산제의 시작을 알립니다. 제가 즉석 제문을 읊습니다. "예봉산 산신과 북한강 남한강 수신을 비롯한 천지신명께서 성대 신방과 산악회를 어여쁘게 봐주셔서 지난해 산행을 아무 사고 없이 마치고 회장님의 회갑 기념 세계일주도 무사히 끝낸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올해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회장님에 이어 알 대장, 멍 총무, 그린란드 고문이 차례로 술을 따르고 절한 뒤 저와 다른 후배들도 뒤따라 절을 올렸습니다. 회장님은 절을 한 뒤 금일봉을 쾌척하셨는데 나중에 봉투 안을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100만 원이나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퇴주 그릇을 따로 준비해오지 않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퇴주 원샷 논란'이 재연됐습니다. 술을 주변에 뿌리면 환경 보호에도 위배되고 아깝기도 하니 곧바로 입에 퇴주를 비운 것이지요. 대선에 출마할 이도 없고 동영상으로 찍는 이도 없으니 신경 쓸 일은 없었지요.
비닐 셸터 뒤집어쓰고 오붓한 음복례
이제 즐거운 음복 시간입니다. 제가 준비해온 비닐 셸터를 꺼냅니다. 예전에 알 대장이 갖고 온 김장용 비닐보다는 훨씬 가볍고 맨 밑에 고무줄이 달려 있어 아래쪽 바닥의 바람을 잘 막아줍니다. 저는 지난해 겨울부터 2년째 쓰는 것인데 쓸 때는 좋아도 접어서 들고 오기도 힘들고 나중에 집에서 씻었다가 말리고 말아서 넣는 것도 번거롭긴 합니다. 제 아내는 최근 몇 주째 씻어서 말렸다가 접는 일을 도와주며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이 고생 하는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알 턱이 있겠습니까? 멤버가 주마다 각기 다른데요.
비닐 안에 모여 앉으니 마음까지 포근해지고 음식도 여느 때보다 성찬이어서 모두 즐거워합니다. 특히 오솔길이 손수 부쳤다는 전에 칭찬이 쏟아집니다. 원래 계획은 팔당 가게에서 뒤풀이를 하는 것이었으나 알 대장이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자기가 지난 월요일 민어찜 집에서 딸 기자 시험 합격 턱을 내려고 했는데 컴불 형님이 대신 돈을 냈으니 오늘 자기가 한턱을 쏘겠다고요. 대신 지금 배가 부르도록 먹었으니 아예 서울로 가서 뒤풀이를 하자고 합니다. 뚝섬역 근처라는 말에 누가 "자기 집 근처로 가자는 말이구만"하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가 메뉴가 한우 고기라는 말에 다들 환호작약합니다.
한우 고깃집 뒤풀이 제안에 마음 급해진 하산길
견우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 내려가다가 맨 처음 갈림길이 나오자 걸음이 늦은 마포나루는 먼저 내려가기로 합니다. 길이 제법 가파르고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한발한발 걸음을 뗍니다. 율리봉으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 들어서니 비탈길이 얼어 있습니다. 짧은 구간이어서 아이젠을 꺼내 차기도 번거로운데 심히 위태로워 보입니다. 꼬맹이는 얼음 구간을 피해 낙엽이 쌓인 비탈로 가려다가 미끄러집니다.
겨우 위험 구간을 통과한 뒤 한참을 가는데 알 대장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합니다. 율리봉 넘어 남동쪽 예빈산, 견우봉 쪽으로 가야 하는데 율리봉을 옆으로 돌아 북동쪽 길로 접어들었다는 거지요.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하니 그대로 내려가 운길산역으로 가자고 하네요. 멍 총무는 그리로 가면 너무 멀다고 다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잘못된 길로 먼저 앞장서 온 것은 회장 아니냐고 인책론도 등장합니다. 총명한 회장님도 한우 생각에 잠시 혜안이 흐려진 모양입니다. 지도부 간에도 균열이 일어나자 대원들이 모두 불안해합니다.
멍 총무의 주장대로 온 길을 되돌아갑니다. 여기저기서 푸념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제가 "자고로 나라나 산악회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고생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입바른 소리를 합니다. 회장님의 눈 흘기는 표정과 알 대장의 튀어나온 입이 눈에 선합니다. 율리봉 넘어 예빈산 쪽으로 향하다가 직녀봉 못 미쳐 안부에서 팔당역 쪽으로 내려갑니다. 모두 한우 생각에 더 걷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한참을 내려가니 앞서 다른 길로 내려온 마포나루가 보입니다. 팔당역에서 오후 3시 8분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옵니다.
왕십리에서 환승해 뚝섬역 근처의 한우집에 12명이 둘러앉았습니다. 며칠 전 한턱을 대신 쏜 컴 형님도 뒤풀이에 합류합니다. 한우집 뒤풀이 얘기는 동참하지 못한 회원들을 약올리는 것 같아 여기서 생략하기로 합니다. 식대는 알 대장이 반을 내고 나머지는 오늘 산신제에서 걷힌 기금의 일부로 충당했습니다.
부록
동행하지 못한 회원들을 위해 그날 제가 꺼낸 아재 개그 2제를 소개합니다.
제 딸내미가 남친과 헤어졌다며 울먹거리며 밤늦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제 엄마에게 한참을 하소연하다가 엄마가 "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니 그만 울고 빨리 자라"고 핀잔을 주니 제 방에 들어와서 "엄마가 위로 안해줘" 하며 훌쩍거립니다. 제가 "위로 안해주면 내가 아래로 해주랴" 하고 말하자 "으앙"하며 저를 노려보고 대성통곡을 하더군요.
예봉산 정상에서 율리봉으로 향하는 길에서였습니다. 그린란드 형님이 "예봉산 운길산 능선이 말발굽처럼 생겼지. 예봉산에서 적갑산 쪽으로 가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도 나오고"라고 말합니다. 그 얘기가 나온김에 제가 겪은 실화를 들려줬습니다. 지난해 강릉 괘방산을 올랐을 때였습니다. 60대 어르신 서너 명이 저희 일행 뒤에 올라오다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표지판에 이르자 "아니 여기에 활 만드는 공장이 어디 있다는 거야"라며 두리번거리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저와 제 친구들은 크게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킥킥거리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첫댓글 항공 관련지 에디터로 10여 년째 복무해 오고 있는 1인으로서 '활 공장'에서 크게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ㅎㅎ 산악인 허영호 대장, 촐라체의 사나이 박정헌 대장도 항공인으로서 만난 적이 있고요. '파일럿' 허 대장님을 인터뷰할 때는 제가 산에 좀 다녔다고 구라 좀 쳤더니 아주 친근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셨었어요. ㅎ
율리봉을 지나친 그곳에서 바라본 한강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이른바 '알바'가 선물해 준 신의 한수라고 할 정도로요. ^^
역시나 형 산행기는 재밌습니다. 그런데 오자가 '딱' 한 자 있습니다. 찾아보셔용. ㅋ
안 찾을래. 귀찮아. 빨리 가르쳐줘.
산행보다 더 재미있는 산행기. 형님의 구라는 지면에서까지 세계 일등입니다. 즐겁고 행복하게 잘 읽었습니다.
오자 라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데 식자쟁이의 버릇을 참지 못하고.
어쟀든->어쨌든
자리를 빈 자리를-> 빈 자리를
씼었다가->씻었다가
시믄둥->시큰둥
잔쯕->잔뜩(이건 두 군데나)
부쳐쳤다는->부쳤다는
오자 몇 군데가 글의 재미와 묘미를 덜지는 못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딱' 일곱 군데네요. 후다닥 읽으면서 제가 본 건 '씻었다가' 였는데...ㅎ
이도 희망과용기 형이 전문가, 프로이시니 '혹 쌍시옷인가?' 했는데용....ㅎㅎ
오자가 몇 개씩은 나와야 교열자들도 할 일이 있잖아요. ㅎ
햐, 근데 알 형 존경스럽습니다요. ^^
그렇게나 오자가 많이? 맞춤법을 몰라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자판에 익숙지 않고, 다시 훑어봐도 눈이 침침해 오타를 못 잡아내는 탓이라고 보네. 고맙네. 수정해놓겠네.
@희망과용기 수정하시는 김에 뽀루퉁 -->뾰로통도요...^^
@오솔길 뾰루퉁을 쓰려다가 뽀루퉁으로 잘못 친 건데, 뾰로통이 바른 말인 줄은 이번이 처음 알았네. 고맙네.
구라빨은 여전하네. 산행기 쓰느라 수고했고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만에 빡센 산행이었습니다.
산에 올라 드넓은 세상을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민폐 안끼치려고 노력했는데...다행이네요.
모두들 홀해엔 지난해 못이룬 소원 중에서 제일 중요한 소원 한가지는 꼭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뭉쳤던 허벅지 근육도 이제 다 풀린것 같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산악회 선후배님들을 만납니다. 땡큐
그리고 산행기 정말 재밌습니다. 잘 읽었고요...
올해 앞으로 남은 10번의 산행중에서 한번은 꼭 산행기를 쓸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팩트의 나열로만 이뤄진, 간결하고도 건조한, 주관이나 감상을 배제한, 전형적인 저널리스틱한 내 글을 두고 왜 다들 '구라'라고 '구라'를 쳐대시는 건지. 쩝.
제가 했다는 구라는 형이 생각하시는 그 '구라'고요, 아래 두 분이 말씀하신 '구라'는 저는 '스토리텔링'으로 읽히는데요....ㅎ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런데.."꼬맹이가 "나를 두고 하는 얘기냐"며 뽀루퉁해하고 꿈푸리가 "왜 제발이 저리냐"고 거듭니다." 이런 일이 있었나요? 기억이 가물가물~~
눈은 없었지만, 푸근하고 오붓한 산행이었던 듯 합니다. 시산제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올해도 우리 회원 모두의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되기를 기원합니다.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안가도 간듯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직 구라에 대한 공부가 않되신듯 차후 함께 공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