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고고학과 구약성서(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고고학과 구약성서(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I. 서 론
A. 고고학(Archaeology)이란?
희랍어 αρχαιος ‘원래의, 본래의, 고대의, 옛날의, 낡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시작, 기원, 처음, 태초, 원천’
등의 뜻을 가진 헬라어 명사 αρχη에서 파생된 단어임.
와 λογος ‘(사상의 구체화로서) 말씀, 진술, 연고’를
뜻하며, ‘말하다, 주장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λεγω 에서 파생됨.
로부터 나왔으며, 옛 것이나 옛 사람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B. 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의 출현
1.
르네상스 이전의 상태
르네상스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성서상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성서의 권위에 의문을 품지 않았으며, 성서 내의 기록과 이야기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2. 르네상스 이후의 변화
수많은 발명과 발견은 과학을 비롯한 기타 다른 학문들의 발전을 가지고 왔다. 따라서 기존에 표준시
되어왔던 것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고대 역사와 종교를 취급하는 기록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성서 역시 다른 고대
문헌과 같이 비평의 대상으로 놓여지게 되었고 결국 하나의 신빙성없는 고대 문서로 격하될 위기에 이르렀다.
예) 발달설(The Development Hypothesis: Graf-Wellhousen Theory)
: 헤겔의
변증법적 이론과 다윈의 진화론적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이스라엘 종교도 다른 일반 종교의
발전과정(저급종교에서 고급종교)을 거친 것으로 주장한다. 모세오경도 모세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닌 연대가 다른 4가지 자료를 편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4가지 자료를 사상 발달 순서에 따라 진화론적으로 연대를 정한
학설이다.
① 야웨문서(Jahwistic document: J 문서 - 주전 850년경)
: 야웨의 신명칭(Jahweh)을 사용하며
기록된 장소가 유다라고 추정한다. 여기에는 창조 와 타락,
죄와 하나님의 심판,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으며 출애굽 사건과 시내 광야 행진, 계명과 약속, 가나안
진입 역사가 포함되었다.
② 엘로힘 문서(Elohistic Document: E 문서 - 주전 750년경)
:
엘로힘(Elohim)이라는 신명칭이 사용되며, 기록 장소는 북왕국 에브라임으로 추정한다. 여기에는
남쪽 유다보다 북이스라엘의 전통을 더 강조하는 이스라엘 약사를 기록했다 고
본다.
③ 신명기 법전(Deuteronomy: D 문서 - 주전 621년에서 주전 400년경)
: 요시야왕 18년(주전 621년)에 성전 헌금궤에서 발견된 율법서가 신명기
12:-26:까지의 중심부와 같다는 주장(De Wette)을 기초로하여 문서 자료 연대로 정하고 이를 신명기 법전이라고 불렀다. 물론
성전에서 발견된 원 신명기 법전은 주전 621년보다 이전에 작성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 법전이 주전 621년에 발견된 이후 주전
400년경까지 몇 차례에 걸쳐 편집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④ 제사 법전(Priesterkodex or Priestly
Code: P 문서 - 주전 470-400년경/포로기 이후)
: 미완성 오경(J.E.D)에 대한 역사적 주석이나 주전 6세기의
미드라쉬(Midrash)라고 할 수 있으며, 율법과 역사 그리고 제사 의식법을
종합한 것이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정보와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 도서를 참고하시오.
최종진, 「구약성서개론」 (서울: 소망사,
1990), pp. 80-105.
U. Cassuto, 「반문서설」 배제민 역편 (서울: 기독교문사, 1994)
3. 성서고고학의 출현과 그 유익
19세기에 이르러 성지(The Holy Land)인 팔레스틴은 물론 이웃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성서와 관련된 많은 수의 위대한 발굴들이 이루어져 고등비평의 주장들은 근거없는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듯 성서고고학은 크게
두 가지로 성서 특히 구약성서에 도움을 주었다.
첫째로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 지방의 사람들에 의해 고대 언어로 기록되었고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지식은 구약성서를 좀더 완전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로 성서고고학을 통하여 구약성서는 그 고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가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 역사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II. 본 론
A. 성서고고학 방법론 개요
1. 발굴지 : 텔(Tell)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도시의 용지이다. 이 말은 “폐허의 무더기”라는 뜻을 가진 바벨론어와 같은 뜻이다. 텔(Tell)이라는 말은 아라비아어이다.
이 지역은
오래전에 멸망한 성읍들의 유적을 간직 하고있는 인공 언덕을 가리킨다.
2. 발굴지 혹은 발굴품의 연대 측정
: 오지 그릇의 연대
기록에 의한 측정(Flinders Petrie)과 방사선 연대(Willard F. Libby)가 대표적인 방법.
3. 발굴된 고대
토판(Tablets)에 대한 해독(解讀)
: 롤린슨(H.C.Rowlinson)은 고대 페르시아어와 아카디아어 그리고 수메르어를 해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프랑스의 샹풀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
B. 고고학 연구로 밝혀진 족장시대
1. 아브라함의 생활무대였던 우르(Ur) - 이미 주전 약
2.700년전에 제1대 왕조가 창설되었으며, 그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 신전들과 기타 다른 건물들 - 장식된
기둥. 전원 풍경을 묘사한 정교한 모자이크.
2) 정교하게 제작된 구리 숫소 유물 발견.
3) 우르의 왕실 무덤 - 이 지역에는
없는 석회석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특히 숩아드(Shub-ad) 라고 확인된 여자의 무덤에서는 금으로 만든 잔이 출토되었다. 사체의 머리는 금과
은으로 장식되었으며, 준보석급 돌들로 꾸며져 있었다.
4)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읽기, 쓰기, 산수, 지리 등을 학습하였으며, 아브라함 당시 일반 시민 들의 주택은 현재 바그다드의 하류층 사람들의 집보다 더 좋게 지어졌다. 우르를
발굴했던 울리(Sir. Leonard Woolley) 경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는 한
위대한 도시의 시민이었으며 고대의 고도로 조직된 문명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5) 우르의 종말 - 주전
1.950년경 한창 번영 중이던 우르 제3대 왕조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아모리 족의 침략과 엘람족의 약탈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아브라함 일가의 하란
이주는 이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고 추측된다.
2. 마리 문서(Mari Texts) - 우르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남쪽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아모리 족은 마리(Mari: 現 Tell Hariri)에 수도를 정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지배하였다. 마리
문서들은 이 시기의 왕궁 문서 보관소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주전 18세기경).
1) 이 문서가 구약성서를 위해 중요한 것은 족장들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라반
그리고 요셉과 같은 이름들이 주전 2.000년경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 다는 것이다.
예) 아브라함 : A-ba-ra-ma, A-ba-am-ra-ma, A-ba-am-ra-am.
3. 누지 문서(Nuzi Texts) - 호리족(Horites)의 성읍인
누지에서 발굴된 문서로서 족장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주전 15세기경).
1) 남자는 자기 부인이 아기를 낳지
못할 때에 그 여종과 결혼할 수 있으며, 그 여종이 자기가 받은 영광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건방진 행동을 할 때에는 그 여주인으로 하여금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cf. 창세기 16:1-6).
2) 어느 부부에게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였으나 훗날 그 부부에게 친자식이 생겼을
경우 재산 상속권은 친자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가정 수호신(드라빔)의 소유는 순수한 종교적 이유의 차원을 넘어 장자의 상속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cf. 창세기 31:19, 30-35).
3) 누지 문서에서 나타나는 결혼의 목적은 주로 출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남자 상속인이 없는 사람은 사위(데릴사위)를 양자로 택하여 자신의 상속자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위가 낳은 자식들은
외조부 생존시에는 그의 자식으로 지내야 했다(cf. 창세기 31:28,43). 심지어 노예를 양자로 들여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도 있었다(cf. 창세기 15:2-4).
4)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혼수의 하나로서 여종을 한 명씩 딸려보내야 했다(cf.
창세기 29:24, 29).
5) 아내의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었으며, 첩은 집안에서 조금 열등한 신분에
속하였다. 그렇 지만 누지의 법률은 첩의 자식이 가족 안에 남도록 명령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를 추방한 다는 것은 엄중하게 규제되었다(cf.
창세기 21:10-11).
6) 누지 사회에서는 족장의 임종이 임박하였을 때에 축복을 해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축복 선언은 죽어가는 사람의 최후의 뜻과 유언을 나타내는데 이는 돌이킬 수도 없으며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cf. 창세기 48:8-49).
4. 족장 시대와 모세 시대의 철기사용(창세기 4:22; 신명기 3:11
등)
이러한 사실은 비평적 학자들 사이에서 모세오경의 후기 발생설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인용 되었는데, 이들은 철기의 광범위한 사용이 주전 12세기 이전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은 이러한 주장을 뒤집는 자료를 제시해 주었다.
1) 이집트 제4왕조(주전 26-25세기경), 제6왕조(주전 23세기경),
제11왕조(주전 21-18세기경), 제18왕조(주전 1552-1306년경) 등의 무덤에서 철기류 발견.
2) 메소포타미아의 Tell
Chagar Bazar, Tell Asmar, Mari 등지에서 주전 2.000년대에 제작된 철기류 발견.
3) 시리아의 라스 샴라(Ras
Shamrah)에서 주전 1.500년경에 제작된 강철 도끼 발견.
출애굽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고고학적 증거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자존심이 강한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10가지 재앙이나 홍해에서의 패배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와
요르단 동편(Trans Jordan)을 방랑하면서 거의 유목민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때문에 아무런 행적을 남길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간접적인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적 실제성은 물론 그 시기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1. 출애굽 사건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
출애굽 사건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은 이 사건의 역사적 실제성을
증명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엇갈린 편이다. 이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객관적으로 살피고 지나가고자 한다.
1) 출애굽 전기설(주전 15세기설:
대개 주전 1.446년에서 주전 1.441년경으로 추측)
① 열왕기상
6:1 -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지 480년”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주전
966 년경) 즉, 966+480=1.446년(?)
② 사사기
11:26 - “이스라엘이 암몬에 거한지 300년이
되었다.” 입다가 암몬왕에게 한 말.
입다는
주전 1.100년경 사람으로 추정됨.
③ 꿈비석(Dream Stele) -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라고 추측되는 아멘호텝 2세의 후계자였던
투트모세 4세는 장자가 아니었다(10번째 재앙과 연관).
2) 출애굽 후기설(주전 13세기설:
주전 1.300년에서 주전 1.220년경으로 추측)
① 출애굽기
1:11 -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이 지역은 힉소스족이
이집트 북부를 통치하던 시대의 수도로서 제19왕조가 들어서서 이 지역을 재건하기 이전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② 민수기 20:-21: - “이스라엘인들이 에돔과
모압을 피해 그들의 땅을 돌아서 갔다.” 에돔과 모압
이 두 나라는 주전 13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았다(N. Glueck).
③ 메르넵타 석비(주전 1.220년경) - “이스라엘이 황무지가 되었고, 그의 씨가 없어졌으며...”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발견된
이집트의 유일한 비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 간음 - 함무라비 법전 129항 & 레위기
20:10; 신명기 22:22 / 사형
2) 유괴와 인신매매 - 함무라비 법전 14항 & 출애굽기 21:16 / 가장 무거운 범죄로 간주.
3) 보복의 원리 - 함무라비 법전 196, 197,
199, 200, 206, 210, 230항 & 출애굽기
21:18.19,23; 레위기
24:19-20; 신명기 19:21).
4) 차이점 : 함무라비 법전은 모세 율법과는 달리 윤리적이며 영적인 원리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도 높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
1) 파라오 하렘합(주전 1.353-1.319경 통치, 이집트 제18왕조 마지막 파라오)
: 그의 무덤 부조에는 이집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애걸하는 가나안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저들의 땅으로
쳐들어가 저들을 멸망시키고 저들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하렘합이 왕위에 등극 하기 이전 장군시절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2) 라기스, 벧엘, 벳세메스, 실로 등의
멸망이 주전 13세기에 일어났다는 고고학적 증거
: 출애굽 전기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들 도시의 멸망이 가나안 족속 혹은 블레셋과의 계속된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으나 후기설 지지학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다.
4.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하신
원인은?
: 성서상에는 그 원인으로서 가나안 족속의 종교, 우상숭배,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가나안 족속의 신(神)들과 종교 의식은 우가리트 문서(Ugarit Texts : 現 라스 샴라 (Ras
Shamra)의 발굴과 해독으로 잘 알 수 있다.
1) 가나안 족속의 예배 형태 : 본질적으로 다신(多神) 숭배 예식의 저급한 형태였으며, 예식의 진행에 있어서 매우
음탕하고 타락된 유흥적인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보수적인 성격의 이집트와 바벨론까지 유입되었다.
2)
타락된 형태의 사례 : 종교적 열정을 예식적인 매음 행위로 표현하는 것 가나안 신전의 여사제들은 단적으로
종교적 창녀들이었다. 이들이 신전을 참배하는 사람들과의 성적 관계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신전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 뱀 숭배, 어린
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행위(미가
6:7), 방종적인 행동 등.
cf. 출애굽기
23:9 -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는 행위.
D. 왕국시대 - 사울시대에서 남유다의
멸망까지.
1. 블레셋 족속과 철기 문화 - 이들은 소아시아 및 기타 지방과의 동맹을 통해 철기 문화와 접촉하게 되어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우수한 무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cf. 사무엘상
13:22). 나아가 이스라엘의 철기 문화 는 전적으로 블레셋에게 종속되어 있었다(사무엘상 13:19-21).
1) 사무엘상
13:20의 RSV(Revised Standard Version)역
: “the charge was a pim for the
plowshares and for the mattocks, and a third of a she-
kel for sharpening the
axes and for setting the goads.”
위에서 ‘a pim’이라는 단어는 주전 3.4세기경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던 번역자들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으며, 흠정역(KJV)에서도 단지 ‘with mouth’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번역을 난외주로 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의 팔레스틴을 발굴 하던 중 ‘pim’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많은 수의 석제(石製) 문진(文鎭) 책장 혹은 종이 쪽이
바람에 날라가지 않게 사용하는 물건
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무게는 각각 2/3 세겔이었다. 따라서 ‘a pim = 2/3 세겔’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2) 한 핌(a pim)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 - 보리 대두 한 말 가량, 밀 소두 한 말 가량, 양털 4 파운드 가량,
70장의 구운 벽돌 등을 구입 가능.
2. 난공불락의 요새 예루살렘(사무엘하
5:6)
1) 지리적 여건 - 원래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의 도성으로서 현재까지도 결코 말라본 적이 없는 두 개의 우물이 근처에 있었으며,
깊은 계곡에 둘러쌓여 있다.
2) 예루살렘의 지하 수로 - 이 수로를 통하여 다윗의 휘하 장수 요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사무엘하 5:8; 역대상
11:6).
3. 솔로몬의 성전(The First Temple)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대해서는 성서의 기록 외에는 그 동안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팔레스틴 주변의 페니키아와 시리아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전의 윤곽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 시리아 북부의 텔 타이나트(Tell Tainat)에서 발굴된 한 성전의 기초안과 솔로몬의 성전 기초안의
유사성
① 자립한 두 개의 기둥을 문의 양 측면에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입구를 시작으로 성소, 제물이 놓여있는 곳으로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위치하였다(역대하
3:17). 이 외에도 기둥 들이 있는 현관 모양과 삼목으로 주름잡힌 내부 조각 그리고 상감으로 꾸며놓은 장식, 천장 바로 밑에 들창들을
끼워놓은 것 등이 페니키아의 그것과 유사하다.
② 페니키아의 성전 모형 및 그림들 역시 두 개의 자립기둥을 보여준다.
2) 이스라엘 성전과 페니키아 성전의 유사성을 갖는 이유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해 두로
(Tyre)왕에 의해 이스라엘에 파견된 공장(工匠)에서 발견된다(역대하
2:13-14). 때문에 솔로몬의 성전은 그 당시에 성행하던 종교적 혼합주의를 나타내기도 한다.
4. 오므리 가(家)의 상아 보물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가문의 부귀와 영화를 말해주는 상아(象牙) 유물들은 미국 고고 학자들의 사마리아 발굴
작업에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화판 양각의 형태로 야자나무, 백함, 사자, 사슴, 스핑크스 그리고 날개달린 사람 모습들을 그리고 있으며,
상아 상감으로 장식된 한 침대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이들 상아 유물들의 세공 솜씨는 특히 페니키아의 특색으로 되어 있었으나, 성격상으로는
이집트적인 것이었다. 아뭏든 이러한 발굴의 결과로 열왕기상
22장 39절에서 언급한 아합의 상아궁 건축에 대한 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
5. 성서에서 언급한 사건과 주변 국가 역사적 기록의 중복
1) 앗시리아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경)의 콜사밧(Khorsabad) 연대기 中
: “나는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27,290명이나 잡아 갔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전차들을 50대나 거두어들였다...”(열왕기하 18:9-11).
2) 앗시리아 산헤립 연대기 中
: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던 유다인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그의 강력했던 성읍들 중 46개
와 그 이웃에 있던 좀더 작은 성읍들을 내가 포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나는 그를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그의 왕도인 예루살렘 성에 가두어
두었다....”(열왕기하
18:14)
cf. 히스기야의 도수관(열왕기하
20:20; 역대하
32:30). 이 도수관에 대한 Dan Gill의 새로운 학설.
3) 유다 왕국의 최후 - 라기스(Tell
ed-Duweir)에서 발굴된 18개의 도기 조각들(주전 589년).
문서들 중 대부분은 라기스의 북쪽에 있는 한
군사기지로부터 ‘호사이 아’라는 사람이 라기스의 요아스에게 보낸 지급
공문서들이다.
: 그 내용은 아즈카(Azekah)가 이미 바벨론 사람들에게 함락되었음을
암시하면서 자신들은 비록 아즈카의 신호는 다시금 볼 수 없지만 아직도 라기스의 신호만은 주목하고 있다는
기별이다(cf. 예레미야
34:7).
4) 바벨론에 위치한 느부갓네살의 왕궁 폐허에서 발견된 서판들의 내용 中
: 이방 고용인들과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로 데리고 온 왕족들에게 황실 창고에서 분배하여 준 양식에 대한 기록인데, 그 중에는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그들의 한
유대인 개인교사가 기름과 술의 수령인(受領人)들로 나타나 있는 문서가 있었다.
5) 유다 왕국이 멸망하던 시기의 아람어 편지 한 장 - 이집트에서 발견.
: 블레셋 족속의 한 도성
아스글론(Ashkelon)으로 추측된다.
의 왕 아돈(Adon)이 기록하여 파라오 호프라(Hophra) 파라오 호프라는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돕기 위하여 왔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예레미야
37:5).
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여 내려 오고 있다는 것과 그 군대가 아스글론 동북방 35마일 지점에 위치한
아벡까지 진격하여 왔음을 알리고 이집트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되어있다(예레미야
27:2-11).
이 문서의 중요성은 아람어로 기록된 초기 외교 서신이라는 점에 있다. 이로 인하여 다니엘 서의 아람어 부분(단 2:4-7:28)과 에스라서의 아람어 부분(스
4:8-6:18; 7:12-26)이 후기의 환상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던 비평가들의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E. 포로기 시대(The Exile Period)와 포로기 이후 시대(The Post Exile Period)
1. 바벨론 제국의 종말 - 벨사살의 실제성 문제
: 벨사살이라는 이름은 정경 다니엘서 5장과 외경 바룩서를
제외하면 어느 고대 문서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벨론 제국 말년의 바벨론
설형문자 문서들이 해독되자 벨사살이 바벨론 마지막 황제의 황태자임이
밝혀졌다. 벨사살의 아버지는 나보니두스(주전 556-539 년경)로서 자신이 즉위한 지 3년만에 아들 벨사살을 섭정으로 세우고 자신은 아라비아에서의 전투를 위해 떠났으며 타이마(Teima)에 처소를 정하였다. 따라서 벨사살은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제국 전체에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다니엘
5:30). 한편 느부갓네살이 벨사살의 아버지라고 언급한 다니엘서 5장 18절의 내용은 아들과 손자를 가족관계 속에서 상호 교환적 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당시 근동의 상황을 반영한다. 사실 벨사살의 어머니 니토크리스는 느부갓네살의 딸이었다.
2.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 - 고레스왕의 조서(역대하
36:23; 에스라
1:2-4; 6:3-5).
: “...에서 앗술(Ashur)과 수사(Susa), 아가드(Agade), 아스눈낙(Ashnunnak),
잠반(Zamban), 메투르누(Meturnu), 데리(Deri) 그리고 구스 땅 영역과 티그리스 반대편에 있는 성읍들... 그 성읍들 안에
거하고있는 산들까지 내가 그들의 지방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그 곳의 모든 주민들을 모아서 그들을 그들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3. 엘레판틴 파피리(Elephantin Papyri) - 주전 500-400년경.
1) 에스라서를 위한 중요한 단서 제공:
엘레판틴 문서들은 주전 5세기의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성서에 인용된 페르시아 공문서 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줌으로 에스라서의 인용 문서가
진정한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에스라
6:6-12; 7:11-26).
2) 유월절에 관한 다리우스 2세의 칙령에는 엘레판틴(이집트 상부)에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과
관련되는 자신들의 규칙 모두를 세심하게 주의하여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절기가 이르면 깨끗이 하여야 하고, 니산월 15일과 그 달 21일은
무교절 첫날과 마지막 날 에는 일하지 말아야 하며, 그 절기 7일 동안은 음주는 물론 누룩이 든 것이면 집에 있는 무엇이든 먹어서는
안된다.”
4. 에스더서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명들
: 사실 에스더서의 역사적 진실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하다. 다만 에스더서에 반영된 상황들이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에스 더서의 저자가 페르시아 궁중의 습관과
규례는 물론 궁전의 구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1) 니푸르(Nippur)의 상업문서
보관소(Business Archieve)
: 이 곳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닥사스다 1세 당시 유대인들이 매우 부유한
생활을 하였으며 페르시아 사람들의 호의를 얻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로의 신분 이었던 유대인들의 이러한 생활은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 한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그 이전 상황에 잘 부합된다.
2) 에스더서의 상황 당시의 설형문자 서판 - 베를린 박물관
소장
: 운그나트(A. Ungnad)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 박물관의 미간행 서판들을 연구 하던 중
‘마르두카(Marduka)’- 모르드개(Mordecai)를 바벨론 문자로 옮긴 것-라는
남자에 대한 문서를 발견했다. 이 사람은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통치 기간 중 수사(Susa)의 고위 관리임이 밝혀졌는데, 그의 작위
시피르(Sipir)는 그가 유력한 고문관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에스더
10:2-3).
5. 느헤미야의 원수 세 사람 - 사마리아의 산발랏, 암몬의 도비야, 아라비아인 게셈(느
2:19)
1) 산발랏 - 엘레판틴 파피리 중 한 서판에서 언급되며, 다리우스 2세 당시 페르시아 속령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다.
2) 도비야 - 요르단 동편에 위치한 암몬 종족의 궁전 폐허 부근의
바위 절벽에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이 두번 새겨져 있다. 이집트에서 발견되었으며 프톨레미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제논 파피리(Zenon
Papyri)에는 도비야 종족 하나가 언급되어 있으며 이들이 이집트와 광범위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3) 게셈 -
아라비아 서북쪽에서 발견된 리히아족의 비문과 나일강 동부 델타에서 발견된 같은 시대의 은그릇에 새겨진 아람
비문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이 자료들에서 알 수있는 것은 그가 하나의 유력한 추장이었다는 것이다.
III. 결 론 - 고고학을 통한 구약성서 연구시에 주의할 점.
고고학이 성서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고고학의 증언이 성서를 성서되게 하는 척도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서의 기사는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학문적 결론을 초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들의 연구 결과라도 성서의 권위를 넘지는 못한다. 고고학은 단지 성서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보조학문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
들어가는 말
본고는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 또는 시로-팔레스틴 고고학의 연구에 대한 개요가 목적이다. 따라서 1장에서는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에 대한 개론적인 정리를
하고 2장에서는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권 pp354-367에 실린 William G. Dever의
“Archaeology, Syro-Palestinian and Biblical”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요약하여 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과 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Ⅰ. 고고학, 성서 고고학
1. 고고학의 역사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3.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ㆍ문화ㆍ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ㆍ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학이다. 따라서
고고학을 단순히 사료 수집을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고고학자는 동시에 역사가이어야 한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2권,
p.462.
고고학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양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주변에는 관련 과학이 매우 많다. 자연과학 계통으로는
자연인류학, 자연지리학, 암석학, 광물학, 야금학, 古생물학, 동물학, 식물학, 생태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기상학 등이 있으며, 인문과학
계통으로는 문화인류학, 민족학, 종교학, 예술학, 사회학, 경제학 등이 있다. 또 자연ㆍ인문 양 과학에 걸친 것으로는 선사학, 선사지리학,
농학, 환경학, 통계학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진 촬영ㆍ실층, 도법(圖法)ㆍ복원(復元)ㆍ복제(複製)ㆍ탁본(拓本)ㆍ보존과학(保存科學) 등의
기술이나 석기제작법ㆍ토기제작법ㆍ금공(金工)ㆍ칠공(漆工)ㆍ방적(紡績)ㆍ도량형(度量衡), 나아가 박물관이나 문화재 보호법 등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다. 즉 고고학은 이러한 학문을 산하에 거느린 하나의 거대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2권, pp.462-463.
고고학과 성서고고학 개요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고대를 탐구하려고 한 시도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 나이드 왕(556-538B.C.)이 바빌로니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샤마슈 신전(神殿)을
발굴하여 아카드 시대의 신전 자리를 발견한 것이 고고학 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간간이 고고학적인 발굴은 있었으나 근대적인 학술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고물(古物)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후반부터 고조되기는 했으나 고고학이라고 할 만한 연구는 독일의 J. J. 빙켈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진행된 것은 그리스ㆍ로마의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이며, 이런 종류의 연구에 대해 독일의 C. G. 하이네는 고고학(arkhaiologia)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고고학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의 시기였고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고학의 연구 조사는 일대 약진을 이룩하였다.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대규모 발굴이 있었고,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조사법과 보존법도 눈부신 진전을 이룩했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2권, p.463.
고고학의 연구는 연대 결정부터 시작되는 데
상대연대(相對年代)의 판정법에는 형식학적 방법(Pottery Typology). 자동차나 카메라의 형식의 변천을 통해서 연대를 알 수 있듯이,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지만 새로운 형식은 오래된 형식을 기초로 하여 태어난 것이므로 원형으로부터 변형, 파생된 형태를 파악하여 연대를
구분하는 방법.
과 층위학적 방법(stratigraphy). 지층이 교란되어 있지 않은 한, 같은 지점에서는 하층이 오래되었다는 전제에
근거하여 유물이나 유적의 신구를 판정하는 방법.
이 있고, 절대연대의 판정의 방법에는 문헌을 연구하는 것과 탄소14법. 생물의 체내에
일정량 함유되어 있는 방사성 탄소가 세월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감소되었는가를 측정하는 방법.
(카본 데이팅), 피션트랙법. 글라스질(質)의
유물 속에 자연의 핵분열로 생긴 상처가 세월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증가되었는가를 산출하는 방법.
, 연륜연대법. 수목의 연륜 폭이 해마다
변하는 현상을 응용한 방법.
발열분석법(Thermoluminescence). 그릇들을 분석하여 언제 구워 냈는지 계산해 내는
방법.
, 분광분석법(Spectographicanalysis). 전자파를 그릇에 발사하여 그 그릇에 있는 광물질에 화학 반응이 어떻게
반사되어 나오는가를 재어 보는 방법.
, 중성자 활동계산법(neutron activation). 핵 반응기에 사기그릇을 갖다 대서 사기
그릇의 내용물인 진흙의 화학적 구성물에서 발산되는 전자파의 반응을 분석해서 그 그릇의 내용물을 분석하는 방법.
등이
있다.
2.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聖書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서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2000년기부터 신약성서가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16권,
p.579.
성서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G. E. Wright)는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서를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고,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성서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과
소련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서와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p.258-259.
즉 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다.
성서 고고학은 아마도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애굽을 침략했을 때 발견된 로제타 바위(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세 줄로(헬라어, 애굽의 상형문자, 후기 애굽의 필기문자의 세 줄)쓰여졌는데 진 프랑소와
샴폴리온에 의해 해독되었다. 나폴레옹이 애굽에서 고대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8.
과학적
고고학이 팔레스틴에 이르게 된 것은 1890년에 W. M. 플린더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그의 연구 방법인 “연속적 연대의 연구”를 위한 성층연구법. 산에 있는 여러층의 지층 연구와 각 층에 속하여 있는 그릇들에 대한 연구
방법.
에 따라 수행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9.
와 19세기 미국의 E. 로빈슨이 성서 속의 지명을 실지 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
「원색세계대백과사전」(서울:한국교육문화사,1994) 16권, p.579.
에드워드 로빈슨은 탐사보다는 지리학이나 지면 탐사에 더 비중을
두었는데, 1838년과 1852년에 성서에 기록된 지명과 현대의 지명이 비슷한 각 지역을 수십 군데 추적해 본 결과 성서 시대의 지명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성공하였다(예: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과 현대의 아나다). 거의 1세기쯤 지난 이후에 넬슨 글루엑이 요단강 건너 황폐한 땅과
네게브(브엘세바 주변의 상당히 건조한 지역)를 탐사하여 비슷한 결과를 거두기도 했다.
가 있다.
페트리를 이어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헤브론 서쪽인 텔 베이트 밀심(Mirsim). 올브라이트는 이곳을 성서에 나오는 데빌 혹은
기럇-세퍼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에는 반대가 많다고 한다.
을 발굴하였는데(1926-1932), 세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그릇들의 발전 과정을 완벽하게 확립했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20.
(도표1.노광우121쪽)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가 1930년대부터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기의 형식에 의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영국의 페트리가 텔 엘
헤시 발굴 때 도입하고 올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267.
그 외에도 라이스너와 피셔(C. S. Fisher)가 사마리아에서 새로운 발굴 기술로 발굴 작업(1931-1935)을
벌였으며, 1952년에는 케더린 케년(Kenyon)이 여리고와 그외의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20.
성서 고고학(또는 팔레스틴 고고학)의 성립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전한 과학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동양학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교수였던 피셔와 올브라이트의 공헌이 컸다. 올브라이트의 텔
베이트 미르심 보고서는 과거의 연구 방법에 나타나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도 이를 연구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p.150-151.
올브라이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팔레스틴의 고고학적 편년을 세운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미르심에서 발굴된 토기를 형식적이고 층위적인 발전 단계로
구분하면서 편년을 세웠다. 편년의 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데 유적의 발굴 숫자가 증가되는 것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 등으로 좀 더
정확한 편년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한상인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에 정리된 3인의 편년을 표로 정리하여
보았다.(도표2.한상인2,252쪽)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라이트는 스승의 고고학적 입장을 견지함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신학에
접못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독일계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성서의 기록만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역사에서의 계시”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 고고학은 미국의 성서신학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그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 주장되었던 성서 고고학이라는 용어 대신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성격도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입장에서 고대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 연구라는
일반 고고학적 입장으로 변모하였다.. 한상인,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서울:예인,1996), pp.267-268.
그러나
학자들은 “성서 고고학”이란 용어의 사용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고고학의 방법이나 목적은 그것이 성서와 관련이
있건 없건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고고학과
성서” 등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점에 대해서 James I. Packer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성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이라는 말이 별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James I. Packer편저(노광우
역), 「구약성서 시대의 세계」 (서울:성광문화사,1993), p.114.
팔레스틴 고고학은 성서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시대와 성서의 주제를 벗어난 다양한 내용을 다룬다. 또한 팔레스틴 고고학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동쪽 부분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서쪽 너머에 있는 이집트 문명을 연결해 주는 교량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화적 변천을 연구한다. 팔레스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적어도 6,000개 이상의 유적이 확인 및
조사되었으나, 그 가운데 중요한 유적은 28곳에 지나지 않고 발굴된 곳은 20곳이 못되며 발굴 결과가 발표된 곳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에. D.
J. Wisemen, “고고학과 구약” 「엑스포지터스 성경연구주석(총론)」 (서울:기독지혜사,1983), p.372.
앞으로 팔레스틴 고고학이 계속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Ⅱ.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성서 고고학
성서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도 W.F.
Albright, G. Glock, Toombs, Moory 같은 상당수 전문가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⑴학문(discipline)으로써 고고학 분과의 발전 ⑵1970년대 이후 고고학(its)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고심(elaboration)
⑶미국 학파의 특색 있는 접근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 통용되는 인문과학의 범위(state of art)를 설명함으로써 토론을 새롭게 하려
한다.
field고고학을 구성하는 데에 공감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고학은 단순히 골동품을 추적하고 환상적인 유물을 발견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인간 경험을 꿰뚫고 조명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추상적 이론(speculation)이 아니라 고고학을 고고학 그 자체로 보는 기본적
방법으로써의 이론(theory)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 미국인의 지적 지평을 강조하는 변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시리아-팔레스틴, 성서 고고학 자체라는 것은 없다.
1. 신 고고학의 성숙기
1960년대 후반
미국인들의 연구가 시작되면서 미국의 신세계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의 개척된 다양한 이론적 방법론적 교리들은 연구 계획(resaerch
design), 현장 답사(field work)와 분석 그리고 중요한 출판에 영향을 주었다.
1-1.복합
학문적(Multidisciplinary) 접근은 우리가 전통적 관점이라고 여겼던 건축학적, 요업(ceramic)적 국면보다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는데 식물과 동물의 유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과거 생활양식의 흔적, 환경학적 변화의 증거, 고고학적 기록에
우연히 주어진 모든 물질문명의 자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 층위학자와 도자기 전문가(물론 성서역사 학자도) 원정발굴대가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많은 분야들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용적 차원에서 시작된 Gezer에서의 첫 복합전공적 접근 방법의 충격은
신고고학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15년 전 만해도 고고학 분과는 종종 편협하고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다른 고고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었기 때문이다. 복합전공적 접근이 유발한 새로운 현장 방법들(firld methods)은 종종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그것들의 결과는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거품을 일으키는 체(sieve)와 식물과 동물의 흔적을 구별해 내는 (꽃가루 분석 방법인)palynology와 고대
기후와 생활 수단과 음식물과 같은 것을 구별해 내는 것을 기본적으로 포함한다.
1-2.생태학적 지향(An Ecological
Orientation) 복합전공적인 교수진(Staffs)을 고용한 것은 필연적으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 과거 개인적인 고고학적 현장은 그들의 환경이나 다른 현장과의 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왔다(몇몇 블레셋 발굴
현장(유적)은 네브라스카처럼 그들이 파고 발표하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자들은 현장 사이(intersite)와 환경적 관계는 관심을 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당연히 가정하는데, 아마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전통적,
역사적(즉 성서적) 지향에서 기인했다. 그래서 문화적 변화를 위한 설명을 물질적 요인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러나 곧 고고학이
주로 인류학적, 생태학적 지향을 차용하면서 어떠한 문화의 독특한 양식도 대체로 경제적인 요인들에 기인하고 이런 문화들의 양식(these)은
자연적 환경에 의해 빡빡하게 조건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란 지리학적 상황, 기후, 자연 자원에 대한 접근성,
무역 통로, 재료(raw, material) 경제적 결정론을 대하는 동시에 1970년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은 유적을,
문화/역사적, 자연적 상황이라고 하는 더 큰 틀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조사와 반론을 진화시키고 필요로 하는 주된 연구 전략은
지역적 스케일에서 수행되어졌다. 경제학적 지리학자에 의해 개발된 유용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정착지 유형 변화와 분배 형태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는 고대 기후와 기술적 적응을 포함하는 생활 양식과 아직까지 우리 분야에서 수행되는 가장 진지한 인구 통계학 계획들을 재구성하려
한다.
진행되고 발표되어 이제 축적되어 있는 환경적 자료(data)는 한 세대 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전망을 열어 주고 여러 기간과 문제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을 줄 것이다. 다양하게 언급된 지표 조사(surface surveys)처럼 위에서 언급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의
모든 발굴 계획은 현장 작업에서 더욱 새로운 생태학적 지향의 예가 될 것이다.
1-3.체계 이론(System Theory) 최근의
사례 분석은 체계 이론이 미국 고고학에서 이제 주도적인 이론적 접근 방법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체계적 모형(paradigm)이 고고학에
응용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들에 대해 작용해야 할 것이다.
⑴문화란 자연 환경에 대한 인간의 놀랄 만한 적응
반응이다.
⑵문화란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정한 조건으로 특징지어지고, 집단적인 것이며, 유형화되고, 축적되고, 전이되는
것이다.
⑶그래서 문화는 “체계적(systemic)”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문화의 진화(문화-과정 설명이 아니라)가 고고학의 주된
목표이고 ‘정치적 역사’같은 편협한 종류의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면,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접근 방법이 체계적이어야만 한다.
현재의 연구
단계에서 우리는 인구 통계학의 역량 성장과 함께 고대 팔레스틴의 정착 유형과 생활 양식
체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복구해 왔다. 몇가지 유용한 증거가 이제 얻어졌지만 아직 사회 조직의 재구성은 시작 단계이다.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소홀히
취급되어 왔고, 명백히 그것들은 특히 선사 시대의 추측에 대한 가장 만만치 않은 하위 체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발전은 있었고 특히 대중적
제의(cult)를 조명하는데 진전이 있었다.
1960,70년대 미국 신고고학을 특성 짓는 나머지 경향은
⑷민족
고고학(ethnoarchaeology)의 사용 혹은 먼 과거의 고고학적 흔적을 설명하기 위해 아직도 잔존해 있는 원시 문화를 묘사해서 유추하는
것
⑸진화되는 모델에 의존해서 문화적 변화를 설명하려고 다선 궤도, 인간 행위의 독특한 성질, 인간 진화에 대한 강조와 함께 생물학적
진화를 묘사하는 것.
⑹비교 문화 분석과 교차 문화 분석을 통해 식별된 문화적 과정의 보편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과 함께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고학의 모든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
⑺문화적 과정에서의 보편적 법칙을 테스트하고 정식화하려고 가정된 주된
목표와 함께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아주 과학적이거나 독단적인(nomothetic?) 접근 방법의 선호 등이다.
이들 중 후자의 네
경향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얼마간 영향을 끼쳤지만 처음 세 경향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각각의
‘신세계 고고학’의 신조(원칙)들은 우리 분야에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그들의 오랜 역사와 대단히 복잡한 사회계층론과 함께
ANE(Ancient Near East)의 고분에 그들을 적용시키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우직스럽게 차용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970년대와 80년대에 발전해 온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같은 경우에다
이론적 틀을 제공해 온 1960년대 미국 신고고학의 주된 경향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독립된 전공을
향하여?
우리가 1970년대 초 미국,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 의해 무언가
논의하고 제안했던 상당수 경향들은 독립된 학문으로의 위상을 향하던 Albright-Wright시기를 특징 짓는 성서 연구의 지배 아래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성서 고고학 운동의 지배는 신고고학의 도전이라는 형태의 외적 발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신학적 형태 모두의 내적 약화에
의해서도 위협받았다. 특히 족장 시대, 정복 시대 같은 성서적 전승의 에피소드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이용되는 고고학의 목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Albright의 가장 저명한 제자 중 하나이며 성서 고고학의 훌륭한 변호사인 D. N. Freedman은 최근 존경받을
만한 공평성으로 인정받았다:
성서를 고고학의 토대에 확고히 정초시키려는 Albright의 원대한 계획과 기대는 실패한 듯이 보이고, 적어도
허덕이는 듯이 보였던 실증할 수 있는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결국 모든 발굴은 행해졌었고, 행해진 것 그리고 아직 행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얼마나 많이 수행되어져 왔나? 성서에 대한 고고학의 관련성에 관한 격심한 토론과 논쟁 그리고 그 역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많은
이슈들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이 족장과 족장 시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회의적인 목소리가 이제 그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올부라이트주의자의 종합(synthesis)이 벗겨졌고 지금까지보다 해결로 좀 더 우리가 나아가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고고학은 가장 자주
질문되어 왔던 물음을 대답하는 데 아주 유용하거나 결정적인 증명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특별히 초기 시대의 성서적 인물과 성서적 사건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
2-1.성서 고고학 운동의 붕괴 회상해보면, 고고학적 ‘혁명’이 Albright와 그의 추종자들이 단지
구체화하지 못함으로써 이리저리 상상되어졌다는 것은 명백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성서 고고학’의 사망(demise)은 성서 신학의 죽음에
대한 많은 토론과 일치한다는 것은 논의해 볼 만하다. 어떤 경우에는 성서 고고학이 좀 더 특징적이고 전문적인 세속 학문 용어인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으로 대치되어 불려져 왔다. 의미론적 혼돈의 결과 혹은 위협적인 아마추어와 성서학자의 감정적인
과민 반응의 많은 부분에 대해 처음으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 ‘두 고고학의 투쟁’(Glock의 용어)에서
시리아-팔레스틴이 승리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양상은 어느 곳에서나 명백하다. 성서 고고학의 오래된 옛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꽤 남아 있지만 사실상 미국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그러한 고고학을 할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조차도 말이다. 그 분야를
지배하기 위해 출현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특징 지워진다. ⑴특수화(specialized) ⑵전문화(professional)
⑶세속화(secular)
2-2.추정되고 있는 전공(과목)으로서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
연구 분야는
이것을 포함할 때 전공과목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⑴연구되어진 독특한 현상의 분류와 과업에 적절한 자료. ⑵특정 방법과 표준이
파생되어진 타당한 이론에 부합하는 체계(body). ⑶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가적 학문적 자세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 그룹. ⑷직원을
교체할 만큼 충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 ⑸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인수해야 할 필수적인 재정 지원. ⑹단결된 정체성의 장려, 합작
계획의 촉진, 표준의 보증, 전공의 관심을 촉진시키는 전문적인 기구. ⑺결과의 유포와 발표를 위한 적절한 기구. ⑻자의식적으로 연결된 다른
전공들에 잘 훈련되어진 관계, 그리고 ⑼사상의 시장과 연구 기관에 겨룰 수 있는 전공이 되도록 해주는 적절한 대중 지원.
자세한 기록
없이도 현재 발전 단계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겸손함으로 이들 모든 표준을 만날 것이라고 강조된다. 사실상 이들 테스트 중 몇몇은
오래 전 ‘성서 고고학’때부터 있었고 나머지는 전공을 창조하려는 현재 세대의 성실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제 만나 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적어도 신출내기이지만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전공 분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측은하게도 조그맣게 남게 되고, 미래는 결코 세속적이지 않다고 하는 반면에 성서 고고학은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성서학 분과 혹은 특별히 성서 고고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크로스,1973). 다른
학자들은 두 유형의 고고학이 전적으로 전공 학과의 지위를 획득해 왔거나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3.전공 학문 사이의 대화
가능성
최근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근본적인 물음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분리된
전공과목이 되거나 되어야 하는지 혹은 아직도 그것의 부모 전공인 ANE와 성서학에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그러한 질문은 오늘날
고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드러내고 빈곤한 논쟁을 영속화시킬 뿐이다. 잘못된 개념들이 몇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첫째, 가장 단순한 것으로
성서 고고학의 이론과 목적이 성서나 성서의 땅을 단순히 설명하려는 것이다(고고학은 단순히 역사의 보완이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에 필요한
도구에 숙달됨으로써 인문과학과는 떨어져 있는 단순한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혹은 전문가주의는 전공 학과에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등).
다른
학문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자율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ANE나 성서학에 대한 배타적 의존에서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것의 내적 역동성에 따라 일반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오늘날 모든 고고학의 학문 상호간의 관련이라는 특성을
강조해 왔다. 물론 이 대화의 파트너로 아직 ANE와 성서학이라는 부모 학문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과학의 많은 분야도 역시
포함한다(특히 인류학과 점증적으로 자연과학 분야도).
그 의도는 학문을 편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넓히려는 것이다; 성서학과의
대화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려하려는 것이다. 새롭고 건실한 기초에서 고고학과 함께 이것은 이제 동등한 파트너가 되었다. 불행히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격차가 허용되는 특수화의 정도와 신선한 관점과 함께 독립선언이 과거 10여년간 고고학에서 일어난 반면 새로운 대화는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다른 학문이 발전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은 적절하다. 즉 어떻게 그들이 그들 자신을 스스로 재형성하고 연결된
다른 학문과 새로운 제휴 형태를 재형성했는지 관찰하는 것. 여기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고전적 작품은 가장 교훈적이다. 쿤은
시대별로 혁명이 내적, 외적 변화에 기인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지향이 뒤집어진 결과로서 전공 학문에서 유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실용적인 관심의 결과로서 발생한다는 것을 밝혔다. 규범 과학의 시기 이후 소장 전문가들의 주류가 과학을 수행하는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는 동안
성립되어 있는 관점이 도전 받는 과정으로 경쟁하는 범주, 패러다임 사이에서 투쟁이 연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코 전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주류의 공감대가 추구될 때 규범 과학의 새로운 단계는 머지않아 성취되어져 왔다고 이야기되어지고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반복되어질 것이다.
쿤의 유추(analogy)에 대하여 우리는 1970-1985년 시기에 증언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에서의 참된 혁명을 논할 수 있다. 더군다나 포괄적인 지적 기반 작업(즉 이론)의 정초는 아니다.
아직 뛰어난 결과를 가져 올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들이 아직 많이 발표되지 않았다. 세대의 투쟁에 의해서 뒤따르는 쿤의 ‘패러다임의 이동’이란
것이 일어났다. 이 발전은 1950년대-1960년대의 층위학(stratigraphic)의 혁명에 뒤이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4번째
혁명’을 구성한다고 다른 곳에서 논쟁되었다(데버 1988).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연구 과정으로 산출된 새로운 자료로 논쟁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길 원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규범 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혁명 이후’고고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위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이슈들은 종종 이런 양식으로 제기되어졌다. 아직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ANE, 성서 역사나 인류학의 한 분과로 남아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오늘날 고고학의 어떠한 학문의 분과도 아니다. 고고학은 어떤 학문의 보조 과목이 아니라 전공 학문 그 자체이다. 제시된 2개의 학문 중
선택하라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최근, 인류학 쪽에 좀 더 밀접해져 왔다. 이것은 많은 이로움 때문에 관련되어진
것이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성취한 가장 인상적이고 유익한 것은 오늘날의 그 학문이 근동 혹은 중동에서 종교학,
역사, 고전, 인류학 분야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북미 고고학의 몇몇 학과에서도 후자의 발전(nonareal(비지역)의
확립 모두를 포함하는 고고학, 독립적인 인류학, 근동학 혹은 고전적인 학과)은 고고학이 오늘날 생존에 적합한 학문적인 전공 과목이 되었음을
명백히 가르친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아직도 많은 지엽적 문제(context) 때문에 즉 부차적 문제 때문에 ANE와 성서학을
끌어들이지만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점점 더 분석 과정을 위해 자연과학을 추구하고 그것의 이론적 지향을 위해 인류학과 다른
사회과학을 추구한다. 역사, 인류학 혹은 과학이라는 꼬리표로 고고학을 한정시키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고고학의 여러 국면의 다양성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은(인류학처럼) 많은 다른 학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또 공헌도 한다.
3. 미래의
모습(shape)
우리는 이미 비유를 사용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최근에 그의
시대가 도래한 위엄 있는 부모의 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젊은 성인의(adult) 미래는 어떨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전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먼저 외적 환경, 즉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자.
3-1.외국 현장 작업
미국의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진지한 학문적
작업으로서, 원래 연구와 혁신된 가르침에 공헌하는)중동에서 가능한 틀(framework)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미국 고고학자들이 과거
중동의 모든 고고학 발전을 선도해 왔다면 오늘날 그들은 경직되어 있고 많은 나라로부터 배척까지 받고 있다. 단지 이스라엘, 요르단,
시프러스에서만 미국인의 발굴과 연구가 활발할 뿐이다. 그러나 세 국가들에서조차 미국의 역할은 그 분야를 주도하려는 그 국가들의 학자들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학자들은 강력한 우선권(발굴현장의 지속적인 접근과 선택, 국가적 규모의 작업에 대해 우선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자유, 정부 부처, 대학 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의 장기적인 지원, 다양한 연구 장려책, 거의 발표되지 않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종교
고고학을 통해 국가 의식과 정체성을 초래하는 점점 계몽되는 대중들, 수백의 안전하고 전문적인 지위 등)을 누리고 있다. 그 국가들의 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가장 훌륭한 외국의 방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것을 더함으로써 급격히 성장하며 부족한 기금과 인력은 외국(특히 미국)과의 합작
사업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이 발전 지역이라는 사실에 의해 주어진 몇 가지 조건(급격한 현대화와 지역 전체의 경제 성장, 폭력적인
반미 감정과 함께 종교적 열광주의와 함께 결합된 이 지역의 국가주의와 극단주의의 태동)이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더욱 더 불길한
것은 고고학의 몇 가지 극단적인 요소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이다. 일부 아랍에서의 이슬람 형제애와 이스라엘의 초정통주의는 현장에서 고고학자를
애먹이고 기념물을 파괴하고 발굴을 금지하도록 공작한다.
미래에 미국의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권이 우리로부터 토착의 국가주의
학자들에게로 넘어가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 몇 가지가 남아 있다. 첫째, 미국 고고학자들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는
‘비이익적 학자’로 남아 있는 것이 최선이다. 둘째,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우리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그 국가의 학자들의 노력을
되풀이하기보다는 보완적인 연구를 발전시켜야 한다(특별히 그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소홀히 대하는 유적, 시기, 문제에). 셋째, 비문자적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보여지는 협력과 연합 계획에 좀 더 참여하는 것이다.
3-2.고국에서의
학문(The Discipline at Home)
a.몇 가지 실제적인 고려들
우리가 과거 20년 혹은 풋내기 학문으로서 그것을
확립시키기 위해 애를 썼던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성서적 고고학이 미국에서 누려 왔던 상당한 대중적 지원을
유지하고 획득하려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위상으로 마지막 변형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첫째, 현장 작업의 전업(full-time)전문가들의 연구와 가르침을 위한 직업을 제공하기 위해 파트타임 직업을 고용(유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둘째, 우리 연구의 기본 형태인 현장 작업과 출판을 위한 기금을 필요로 한다. 셋째, 더 긴급한 것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 참된 학문적인 과목이 되기를 열망하느냐의 여부이다. 넷째,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필요,
학습된 단체들의 강화와 전문적인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다. 우선, 1900년 이래로 성서학의 많은 측면과 함께 고대 근동 언어학, 역사, 고고학
분야에서 봉사해 온 동양연구미국연구소(ASOR)가 이제 아주 중대한 다른 영역에서, 즉 더 넓은 차원에서 고고학의 장려와 미국 대중교육에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미국만이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과 지원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새롭고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견해를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연구 기관으로 사상의 혼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주류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모토는 ‘수도원 밖으로, 학문 속으로, 그리고 심지어 시장에서조차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b.이론적
고려들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항상 이론과 방법의 중요성을 각성하는데 불충분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전엔 미국
고고학자들의 풍부하고 생생한 문헌과 비교되어, 놀랍게도 우리 분야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도서 목록이 실제로 없으며 지금도 비평적 토론도 거의
없다.
연구를 위해 선택되어진 질문들이 필연적으로 조사 양식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방법이 이론이다’라는 사실이 분명히 간과되어졌다.
그래서 우리의 고발은 이론적 틀이 부족한 성서 고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정들(⑴고고학이 아니라 성서 역사와 신학에서 이슈를 끌어낸다.
⑵거의 명확하지 않으며 더구나 비평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닌 가정)이다.
우리는 해석적인 이슈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서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거의 모든 발견에 대한 해석이 많은 지성들 사이에서 이들 과목을 특징지어 온 생생하고 격렬한
논쟁으로 끝없이 논의되어져 왔다. 그러나 가장 해결되지 않는 논쟁은 대체로 학문이 참된 고고학적 인식론을 개발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 즉
기본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공감대가 없었다. ‘역사적 고고학’조차도 이 접근 방법엔 불충분했다. 증거는 선택적으로 수집되어졌고 결론은
끄집어내어지고 논쟁되었다. 또 해석은 발전했다(역사를 언급하는 모든 기초에 대해). 그러나 역사라는 것과 현대 사료 편찬 방법은 거의 질문되지
않는 물음인 고고학적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가 의미하는 것을 거의 명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고학은 최소한의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적절한 고고학적 인식론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것들 같이 명백한 질문들에 직면할 것이다(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유적 형성 과정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상황은 고고학적 발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가? 고고학적 자료들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고고학적 사유에 있어서
유비(analogy)의 역할은 무엇인가? 독특한 고고학적 논리는 있는가? 우리는 문화 유물로부터의 반응(behavior)을 어떻게 추정할 수
있나? 무엇이 문화와 문화 변화를 결정하는가? 등). 인식론은 효과적으로 우리가 얻은 자료의 질을 결정한다. 유물들은, 그것들이
상황(context)속에서 적절히 발굴되어지고 적절한 질문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질 때, 그리고 출판되어질 때에야 자료(data)가 될 수 있다.
고고학은 엄격하게 조직적이고 축적된 이론을 세우고, 이론을 시험함으로써만 인간적이거나 과학적인 학습의 분과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론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우수한 이스라엘 역사가와 고고학자 베냐민 마자르에 의해 쓰려진 팔레스틴의 중기 청동기 시대에
대한 초기 논문은 이제 아주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우리가 정치적 역사로 구분되었던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자들의 지향점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본질적인 것으로 연구하는 것, 즉
정주 형태, 기술, 사회, 경제적 역사와 인구 통계학에 관련된 언급은 없다. 미학적이고 종교적인 것도 소홀히 다루어졌다. 문화라는 용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Kenyon에 의해 쓰여진 유명한 CAH에서도 중기 청동기 시대 연구는 강조점이 별로 다르지 않다.
이제 Kenyon과
Mazar는, 이들 이슈가 1960년대에는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잘못된 질문을 물어 왔기 때문에
혹은 아주 유용한 자료의 전체 범위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명확한 연구 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부적절한 질문들을 누적시켜 왔기 때문에 그 자료는
쓸모가 없다.
wheeler-kenyon의 층위학 방법은 정확한 위치를 분리할 만큼 경험적으로 지표층(soil layers)의 관찰,
기록에 기계적으로 집중했다. 팔레스틴의 평범한 도자기는 도자기 연대를 꽤 정확하게 집어내도록 하는 도자기의 유형화 된 발전 단계를 챠트화
할만큼 거의 분석되고(장식과 모양이) 분류되어졌다. 그러나 극히 작은 예를 제외하고서는 도자기는 우리의 역사, 기술, 미학, 국제 관계, 무역,
즉 문화와 문화 변화에 대한 지식에 공헌한다는 관점으로 연구되진 않았다. 결국 그것은 불충분한 문화 변화 자체의 모델들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도자기 집합’이란 말과 항상 마찬가지 의미이다. 주요 민족운동과 외국 침입은(즉 역사적 사건) 고대 팔레스틴의 거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데 이용되어졌다. 토착적인 사회 경제적 요인들, 기술적 혁신, 혹은 다른 의미로 일반적인 지역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은 층위학과 도자기 연대측정학의 숙달에 의해서 혹은 완벽한 현장 기술에 의해서는 그리 많이
발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인식론이 좀 더 정교해짐으로써 발전할 것이다.
미래에 ‘정치적 역사’의 대체 모델은 거대한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이데올로기 밑으로 거대한 우연적인 대중적 사건을 넘어 거대한 시간의 휘두름을 넘어, 셀 수 없는 개인들의 일상 생활과 환경을
추구하는 사회, 경제적 역사를 쓰는 아날(annales)학파로부터 유래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고고학은 아날학파의 역사가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광범위 한 문헌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잘 가공된 개인적인 역사로 써서도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학은 생태학적이고
환경(setting)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적 변화에 대한 민감함 때문에 모든 학문 사이에서
독특하다.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초점의 범위를 우리가 넓히는데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고고학 일반 분야와 인류학을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통합시키는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중추적인 지정학적 상황,
위대한 문명 발상지, 급격히 성장하는 데이터 베이스와 함께 중동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그 지역에 훨씬 강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연구의 오랜
역사, 성서의 땅으로서 엄청난 대중적 호소력(appeal) 등의 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류학자와 사회역사학자들은 사례 연구로서,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잘 알려지지 않은 시리아와 비교하는 사례 연구로서만 전형적으로 팔레스틴을 무시하는 교차-문화적
비교를 추구하고 있다. 왜 그럴까? 소홀한 부분은 단순히 많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반성서적 경향을 지닌 세속주의자가 원인이다. 그 부분의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 자료의 질에 대한 의심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최근의 더 나은 작업을 소홀히 한 것처럼 과거의 불충분한 발굴에 기인한다.
그들은 주요 잡지를 읽거나 출판하지 않았고 전문가 모임이나, 다른 고고학적 인류학적 조직의 연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근동 선사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신세계와 유럽 고고학이 수행해 왔던 대학 인류학과의 프로그램을 가르치거나 나누지도 않았다.
세계 고고학의 최근-현재의 이슈는
다음과 같다. ⑴복합적인 사회의 흥망성쇠 ⑵문화적 변화의 재구성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와 물질주의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의 균형 ⑶고고학/인류학의
사회학적 역사 ⑷공간-시간 체계론, 인공물의 다양성, 문화적 유형, 행위의 구체적인 상호 관련 ⑸유적 형성 과정과 고고학적 기록의 성질
⑹민족성에 있어서 고고학적 정체성. 덧붙이자면 신고고학의 몇 가지 이론적 공격은, 정착 유형, 생활 양식, 사회 구조, 인구 성장 같은 특정
질문들을 반성하게 한다. 시리아-팔레스틴의 냉정한(공평한) 조사 방법이나 일반적 고고학과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문학에서의 비교
인용 분석은 우리가 이를 핵심 이슈의 토론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소장 고고학자들은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을 주류로 만드는 과업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새로운
지향점을 발생시킬 것이다.
3-3.대화로서의 새로운 성서 고고학을 향하여
새로운 성서 고고학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학문 사이의 새롭고 실속 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해야 한다. 신고고학과 현대 성서학 사이의 새로워진 대화가 이루어질 만한 성숙한 때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세속적 고고학은 옛 고고학보다 ‘대화’에 공헌하는데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가정에 있어서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유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고학 연구에서 적절하게 한 것이 거의 없는 특정 경향의 신학적 관점에 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a.텍스트의 유적(remains)들과 그것들의 공헌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정복 시대를
회복시키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예수를 재발견하려는 과업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다. 역사가로서 우리는 성서가 ‘무엇이 발생했나’를 묻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묻는다는 사실에 의해 궁극적으로 한정되어져야 한다. 다른 형태로 지적하자면, 고고학은 작지만 의미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 한다. 더욱이 해석의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 텍스트는 많은 말을 하지만 유적은 침묵한다는 평범한 언급을 남겨 놓아야
한다.
b.인공적 유적들과 그것들의 공헌
보호되어지고 있는 고대 팔레스틴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인공적인 가공물들이다. 그러한 자료들은 종종 불성실하게 보호되고 어떤 경우에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이 불규칙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미를 제공하는데 필수적인 맥락은 사라져 버리고 잘못된 발굴로 인해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이들 물질적
유적(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텍스트 연구를 보완, 보충하는 역사와 문화는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고고학은
성서가 출현하는 맥락, 없으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물질적, 문화적 맥락의 지식에 공헌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역사적, 신학적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고고학은 적어도 우리가 ‘변화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공해 준다.
여호수아서와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을 여호수아의 기적적인 선물로,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12부족의 급작스럽고 통일된 군사 정복의 결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들은 B.C.1200년전 후기 청동기 시대 팔레스틴의 가나안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로 밝혀진 거의 모든 곳이 평화롭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땅에서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역사가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복은 부분적으로 점진적이었으며, 후기 청동기 제1철기 시대의 지평에서 사회경제적 변화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 기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은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히브리 성서에 반영되어진 표준적인
이스라엘 종교는 아마도 야웨주의적이지만 고고학은 민족 종교가 아주 혼합 종교였으며 가나안 풍요 다산 종교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제의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4. 2장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과 성서 고고학의
역사, 그들의 변화하는 관계, 특히 그들의 미래 전망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고학은 이론적 재형성과 기발한 유형, 새로운 자료의 정렬에 있어서
모든 사회과학 학문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학문이 되었다. Albright가 예언한 ‘고고학적 혁명’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구약 시대의 고대 팔레스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충족시키는 저작이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의 많은 미래의 성취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성서를 증명하는 것이다(실제로 일어났던 ‘구속사’를 중심에 놓는 성서 기자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을 논증하는 것으로도). 더군다나 현대 혹은
고대이든 이들 사건들로부터 유래된 신학적 추론을 확인함으로써도 역사적 증거가 확인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은 여기서는
모순이다.
나오는 말
1장에서는 일반 고고학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성서 고고학의 태동 과정을, 2장에서는
Dever의 논문 요약을 통해 고고학에 대한 개략적인 정리를 하였다.
고고학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현장의 바른
보전과 각종 기술이 발달해야 하고, 또한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성서 고고학에 대한 일반학자들의
오해와 편견에 따라 기독교의 지원이나 참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고고학의 가치와
제한성이다.
고고학이 우리에게 과거 성서 시대의 사안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성서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