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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인가‐ 바바리안(켈트, 게르만)의 맥락에서
* 이 글의 일부는 한국선교연구원(KRIM)에서 발행하는 「현대선교」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예수는 누구인가(Who is Jesus)?: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역사의 시각에서,” 「현대선교」 14 (2012): 67-90.
이번 호에서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계속 다루어 나가겠다.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중세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독교가 소위 ‘바바리안’(Barbarians, 우리말로는 야만족으로도 번역된다.)에게 전파되고 수용되는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 시기의 바바리안을 크게 켈트족(Celts)과 게르만족(Germans)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변방 혹은 그 지경 밖에 있던 민족들로서 헬레니즘 문화 바깥에 있던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넓게는 유럽 북부의 바이킹이라 불리던 노르만족(Normans)과 유럽 동부의 슬라브계(Slavs) 민족까지 포함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 유럽을 이루는 민족들이기에 이 시기의 역사는 곧 유럽 초기의 기독교 역사요, 그 뿌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켈트족과 게르만족
켈트족은 중앙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헬라군을 패배시킨 후 이들이 소아시아 지역에 자리잡은 곳은 이들의 이름을 따서 갈라디아(Galatia)라 불렸다. 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옛 이름인 고올(Gaul) 역시 이곳으로 대거 확장된 켈트족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갈리아전쟁(Gallic Wars)을 통해 점령한 대부분의 고올 지역 그리고 영국제도의 일부를 점령하여 이룬 로마령 브리튼 지역은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로마군과의 싸움에서 밀린 켈트족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의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로마제국에 속해 있지 않았다. 켈트족은 인신제물을 드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사람의 영혼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패배한 적의 머리를 잘라 와서 여러 방식으로 장식하던 머리사냥꾼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자연숭배, 정령숭배를 하던 자들이었으며 이들 제사장을 드루이드(druid)라 불렀다.
게르만족 혹은 튜턴족(Teutons)이라 불리던 자들은 로마제국과 자연 경계를 이룬 라인강과 다뉴브강 너머에 살았다. 문명인으로 자처하던 헬라인이나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말은 있지만 글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던 헬라인들은 이들이 말할 때 쓰는 바~바~(bar~bar~)라는 의성어를 차용하여 이들을 바바로이(barbaroi, 야만)라 불렀는데, 여기서 바바리안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성서에서는 이들을 ‘야만인’(롬 1:14, 골 3:11)이라고 일컬었으며, 사도 바울도 방언에 관한 그의 입장을 논할 때 뜻도 모르고 소리를 내는 ‘외국인’(고전 14:11), 헬라인과 대비해서는 ‘어리석은 자’(롬 1:14)라고도 표현했다.
이들은 유목민, 부족공동체, 군장문화적 삶을 영위했으며, 지중해 지역을 감싸는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땅이 있던 로마제국을 항상 넘보았다. 몰락한 제국의 지경으로 물밀듯 들어와 자리를 잡음으로써 유럽의 새로운 판도를 형성한 5세기 바바리안들의 대이동은 제국권 밖에서 떠돌던 민족들의 꿈이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간 열망해오던 부와 문명과 고상한 종교가 있는 땅의 새 주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선교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로마의 몰락은 복음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사건(AD 70)이, 기독교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의 경계를 넘어 이방 세계인 로마제국으로 확장된 전기가 된 것처럼, 천년 가까운 제국의 도성인 로마시가 서고트족의 알라릭(Alaric I)에 의해 약탈된 사건(AD 410)은 기독교 복음이 제국의 경계를 넘어 바바리안에게로 확장되는 전기가 되었다.
바바리안 대이동의 결과 오늘날 프랑스에 해당하는 고올 지역엔 프랑크족(Franks)이, 이탈리아반도엔 동고트족(Ostrogoths)이, 이베리아반도엔 서고트족(Visigoths)이, 북아프리카 지역엔 반달족(Vandals)이, 북부 독일의 앵글족(Angles)과 색슨족(Saxons)은 로마령 브리튼 지역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앵글로색슨족 영토로 각각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들 민족은 모두 게르만족의 일파로, 로마제국의 서쪽 영토에 자리잡아 오늘날 서유럽 국가의 모체를 이루었다. 이와 유사한 민족 이동으로 슬라브족의 이동을 들 수 있다. 슬라브족은 6세기에서 8세기 걸쳐 유럽의 중앙과 동쪽 영토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오늘날 동유럽 국가의 근간을 이루었다. 또한 9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오늘날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족 혹은 노르만족이라 불리는 자들의 민족 이동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유럽은 여러 민족의 이주와 정착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바바리안의 중심 질문: 안녕과 복지
그렇다면 바바리안들이 찾던 핵심 가치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에 대한 선교역사 기록이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준다. 선교역사가 월스(Andrew Walls)는 중세시대의 역사 기록을 남긴 투르의 감독 그레고리(Gregory of Tours, c.539-594)와 수도사 베데(The Venerable Bede, c.673-735)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The History of the Franks)와 『영국민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를 각각 그 출처로 소개한다. 그레고리는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ClovisⅠ)의 회심에 관한 기록을, 베데는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왕국의 왕 에드윈(Edwin)의 회심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1
이 기록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한 개인의 신앙(private religion)이었다기보다는, 공동체의 신앙(public religion)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내세적 가치보다 현실에서 공동체에 가치와 질서와 평안과 복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실존적 필요(existential needs)에 대한 실효성이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 작용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왕들이 회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쟁에서의 승리, 기적의 체험, 기도의 극적인 응답과 같은 것들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는 과정만 보아도 중세 기록에서는 헬라의 초대교부들이나 변증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진리 체험’(truth encounter)보다는 ‘능력 체험’(power encounter)의 유형이 압도적으로 많이 기술되었다.
또한 기독교를 수용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은 개인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공동의 의사결정이었다. 예를 들어, 7세기경 노섬브리아왕국에 기독교 신앙이 소개되었을 때 원로들이 모여 이 새로운 신앙에 대한 견해와 이전에 섬기던 신앙에 대한 경험을 나눈 기록이 있다.2 여기서 한 이교 제사장은 이전에 섬기던 종교가 개인적으로 보상해준 것도 없고 공익을 위해서도 무용함을 주장하며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왕은 제사장과 원로들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모든 신하와 함께 세례를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기 기독교 신앙은 공공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한 공동체의 신앙은 지도자의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왕의 회심이나 결정은 공공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예로, 10세기경 러시아가 정교회를 수용하는 과정을 들 수 있다. 키예프의 치리자 블라디미르(Vladimir I)는 여러 조언과 문의와 시찰을 거쳐 러시아인들의 정서와 필요에 부합하는 신앙으로 동방정교회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블라디미르는 장엄하고 화려하며 신비스럽기까지 한 콘스탄티노플교회(하기아 소피아)의 예배를 체험하고 돌아온 시찰단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이 무엇을 추구했으며 나중에 발전할 러시아정교회의 모습이 무엇을 반영해주는지를 말해주는 좋은 일례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인들은 상당히 심미적이고 화려한 것을 선호했으며, 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발전된 러시아정교회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고 본다.
예수는 누구인가: 보호자, 군장, 왕
켈트 지역인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패트릭의 기도문으로 알려진 〈패트릭의 흉배〉(St. Patrick’s Breastplate)는 켈트적 맥락에서 이해한 예수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나는 삼위일체의 강력한 이름에 나를 붙잡아맨다….
그리스도여 나를 보호하소서!
당신이 오시기까지 그리하소서.
그리스도여 나와 함께하소서.
내 안에 있으소서.
내 뒤에 있으소서.
내 옆에 있으소서.
나에게 승리를 주시고, 나를 위로하시고 회복하소서.
나의 아래에도 나의 위에도 계신 그리스도시여…
—〈패트릭의 흉배〉 중에서
삼위일체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우리는 싸움터로 나가는 자가 마치 그리스도로 갑옷을 입는 것과 같은 기도를 볼 수 있다. 또한 9세기의 색슨족 복음서라고 불리는 『헬리언드』(The Heliand The Saxon Gospel, 헬리언드는 구세주라는 의미이다.)를 통해 당시의 유럽인들이 군장문화 공동체였음을 엿볼 수 있다.3 여기서 예수는 ‘군장’(warrior chief)으로, 그의 제자들은 그 휘하의 ‘장군’(general)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서에 나온 지명은 이들에게 친숙한 식으로(예. Romaburg, Nazarethburg)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군장문화는 전쟁을 중요한 생존 수단과 심지어는 덕목으로까지 여기던 당시 게르만족의 문화를 반영한다. 이러한 전투적 용어와 문화는 고트족의 선교사로서 성서를 번역한 울필라스(Ulfilas)가 전쟁 기록이 많은 구약의 열왕기서를 의도적으로 뺀 이유를 반영하기도 한다.
바바리안들이 추구하던 가치와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찾은 배경과는 사뭇 다르다. 결국 공동체적 연대(solidarity)와 안보(security), 안녕과 복지(well-being)를 중요하게 여기던 상황에서 자연 예수는 보호자(Protector)요, 군장(Warrior Chief)이요, 궁극적으로는 왕(King)으로서 더욱 부각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환상을 보고 전쟁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은 훗날 중세적 기독교의 전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 고올 지역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나, 브리튼 지역 노섬브리아왕국의 오스왈드(Oswald) 등 왕들의 회심에는 이러한 체험이 뒷받침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 군주들은 중세 기독교가 확장되는 데 주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바바리안 기독교의 공헌과 유산
먼저 켈트기독교의 공헌을 생각해보겠다. 켈트기독교는 무엇보다 수도원운동을 통한 기독교의 확장에 기여했다. 로마제국 밖에 있던 아일랜드에서 형성된 수도원운동은 로마기독교와 대조적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인 로마가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수직적이고 통제적인 교회 중심 구조라면, 지방분권적인 아일랜드의 기독교는 각 지방의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적인 공동체였다. 또한 로마교회가 파송과 강요(특히 라틴어)를 통한 선교 확장의 모드를 가졌다면, 켈트교회는 이주와 정착을 통해 기독교가 확장되었다. 6-8세기 동안 켈트기독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유럽 복음화의 3대 전초기지 중 하나로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의 사도라 불리는 콜롬바(Colomba)를 위시하여 콜룸바누스(Columbanus), 아이단(Aidan), 윌리브로드(Willibrord), 보니페이스(Boniface) 등은 이러한 켈트적 선교 유산의 주역이다.
또한 켈트기독교는 영성과 신학적 방법론에서도 헬레니즘적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헬라와 로마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했다면, 자연친화적인 켈트는 임재성을 강조했다. 이는 삼위일체에 대한 샴록(Shamrock, 세 잎 클로버)의 비유 등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켈트기독교는 인위적·제도적·법률적인 헬레니즘의 특징과 대조를 이룬다. 헬레니즘이 좌뇌 중심적(논리, 이성, 추상, 개념화 등)이라면, 켈트는 우뇌 중심적(직관, 감성, 상상력, 경험 등)이라 할 수 있다.
훗날 색슨족을 정복하여 무력으로 그들의 개종을 강요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 옛 로마의 판도 내에 신성로마제국의 기초를 닦은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나, 역시 무력과 강압으로 스칸디나비아에 기독교를 확장시킨 노르웨이의 왕 올라프(Olaf Tryggvason) 등을 통해 우리는 중세적 특징을 보게 된다. 결국 이러한 바바리안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중세 유럽의 특별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토적 개념의 기독교 왕국, 즉 ‘크리스텐덤’(Christendom)을 낳게 했다. 왕과 왕비 같은 통치자가 그리스도인이며 그 영토가 기독교령인 크리스텐덤은 전형적인 중세 기독교의 특징이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야말로 여러 왕위의 왕인 ‘왕 중 왕’(The King of kings)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도 중세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월스는 이를 유럽인들의 관습법(customary law)적인 이해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동체의 질서와 삶의 방식으로 작용한 관습법에 따르면 남에게 절도나 상해를 입히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상과 속량을 해야 하는 원칙이 있었다. 11세기에 부상한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의 속죄이론(atonement theory)은 이러한 유럽인들의 관습법적인 이해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속죄이론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법을 손상시킨 인간의 범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이 만족할 만한 보상을 줄 수 있다는 논리로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의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로마의 법률적 특징을 계승, 강화, 발전시켜 예수를 이해한 것이다.
한마디로 중세 유럽은 한 왕이요, 목자요, 보호자인 예수에게 속한 하나의 그리스도 왕국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면에서 중세 기독교의 핵심은 공동체적 기독교였으며, 이는 ‘where to belong’ 혹은 ‘whom to belong’이라는 ‘소속’(belonging)의 문제로 귀착된다. 헬라적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을 믿느냐’(what to believe)라는 것이었다면, 시리아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떻게 사느냐’(how to behave), 그리고 바바리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에게 속하느냐’(whom to belong)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세 기독교의 유산은 결국 ‘cuius regio, eius religio’(whose region, his religion), 즉 ‘그 지도자의 종교가 곧 그 속령의 종교’라는 원칙을 만들어냈다. 이후 종교개혁 시대까지 그 잔재는 청산되지 못했다.
중세 전반기(AD 500-1000) 바바리안 기독교의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 즉 ‘힘 있는 기독교’(Powerful Christianity), ‘공동체 기독교’(Communal Christianity), ‘영토적 기독교’(Territorial Christianity)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힘 있는 기독교’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전반기 바바리안들에게 복음이 소개되고 확산되는 과정에는 왕들의 회심이 주요 인자였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 군주들은 중세기 기독교 확장의 매개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들이 경험한 기독교는 ‘힘’과 ‘능력’이었다. 게르만족이나 바이킹족이 우상으로 섬기던 천둥신 토르(Thor)를 훼파한 것이나, 슬라브족이 섬기던 신 페룬(Perun)의 단을 허문 것 등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우상의 신보다 더 강하고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가시화한 것이었다.
둘째는 ‘공동체 기독교’이다. 이는 부족 중심적이고 봉건적인 중세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왕의 회심이 중요하긴 했지만 신앙은 개인의 것 이상이었다. 그래서 회심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는 과정엔 언제나 왕의 모사들(counselors)이 함께했으며 이들은 집단으로 개종했다. 기독교는 공동체에 안녕과 복지를 제공해주는 새로운 혜택이요, 질서이기도 했다.
셋째는, ‘영토적 기독교’이다. 영토 정복과 확장은 곧 기독교의 확장을 의미했다. 중세의 선교 이해는 바로 정복이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구현되어 나갔으며, 이러한 패턴은 이후 전개될 십자군전쟁(Crusade), 이베리아반도의 회복(Reconquista), 신대륙의 발견과 식민주의(Colonialism)로 이어졌다.
바바리안 기독교의 위협과 도전
바바리안 기독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크리스텐덤을 역사적으로 창출했고, 이는 힘과 능력, 공동체적, 영토적 기독교라는 특성을 유산으로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본질을 위협하고 도전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신앙의 강요와 명목화로 나타났다.
기원후 800년 성탄절에 샤를마뉴는 로마교황(레오 3세)으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이로써 기독교 제국이던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또 하나의 기독교 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이 출현되었고, 이는 이후 1,000년간 지속된다. 샤를마뉴는 강력한 통치와 정벌로 프랑크왕국을 확대시켜 나갔으며 당시 위협적이던 색슨족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벌로 무력화했다. 그러나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영토적 정복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겠다는 이념을 가지고 색슨족을 기독교화했다. 이 과정에서 하루에 4,500명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색슨족이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는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살인, 보복 등이 이어졌고, 특히 수도사들은 보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색슨족은 강압적으로 기독교에 굴복하긴 했지만 내심으로는 외부 권위나 압제에 대한 반발과 저항정신이 더불어 자라났다. 이는 훗날 독일 민족이 가톨릭에 저항하여 종교개혁을 받아들일 때 게르만족의 거주지이던 중앙 유럽과 북부 유럽이 거의 개신교 쪽으로 전향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자신도 독일의 색소니(Saxony) 지방 출신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크리스텐덤이 형성되는 과정은 로마제국이 기독교화해가는 과정에서부터 그 특징이 발현되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진 이후 380년에는 이단을 공예배로부터 배제하기 시작했고,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1세(Flavius Theodosius I)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었으며, 416년에는 그리스도인만이 공직을 가질 수 있었고, 529년에는 회심과 유아세례가 강요되었다. 점차로 그리스도인은 초대교회 때 박해받던 입지에서 특권을 누리는 입지로 바뀌었고, 교회의 문턱도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세속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또한 신앙의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강조되었는데, 일례로 664년 개최된 휘트비종교회의(Synod of Whitby)를 들 수 있다. 이 회의를 통해 부활절 날짜를 둘러싼 켈트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의 논쟁은 로마교회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반목하며 정죄한 것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보다 앞서게 한 것으로, 교회사의 어두운 면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한편 바바리안 군주들이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을 때는 실존적 필요에 상응하는 사회 통합적 기능, 이웃 국가와의 관계에도 도움을 미치는 대내외적인 실리요 혜택이 작용했다. 이러한 예는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 과정에서도 보여진다. 기독교는 그들보다 문화적․경제적으로 뛰어난 비잔틴제국, 프랑크왕국, 영국 왕실 등의 신앙이기도 했고, 무역이나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럽이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많이 생겨났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겠지만 혹자는 유럽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이었던 적이 있었는가라고 반문한다.
나가면서
기원후 1000년에는 아이슬란드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럽 세계의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알팅그(Althing)라고 불리는 나름의 민주적 결정 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 덕에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기원후 1,000년간의 역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여정이 대부분의 유럽권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수용은 신앙의 공동체적 성격을 반영했다.
이후 전개될 복음의 여정에서 과연 예수는 어떠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자리매김하게 되었을까? 이제 기독교는 중세 후반기라고 할 수 있는 1000년부터 지구촌기독교의 시대라 할 수 있는 20세기에 이를 때까지 서구적 맥락, 즉 유럽과 북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다음 호에서는 이들이 이해한 예수와 함께 그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註)
1 Gregory of Tours, The History of the Franks, Penguin Classics (London: Penguin Books, 1974), 141-145; Bed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Penguin Classics (London: Penguin Books, 1990), 117-132.
2 이에 관해서는 Bed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129-131 참조.
3 G. Ronald Murphy, The Saxon Savior The Germanic Transformation of the Gospel in the Ninth-Century Heliand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박형진|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선교 역사 및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으며, 지금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저서로 『지구촌기독교 선교 역사 이해의 지평들: 아돌프 하르나크에서 앤드루 월스까지, 선교역사가 8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가 있다.
첫댓글 공동체의 질서와 삶의 방식으로 작용한 관습법에 따르면 남에게 절도나 상해를 입히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상과 속량을 해야 하는 원칙이 있었다. 11세기에 부상한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의 속죄이론(atonement theory)은 이러한 유럽인들의 관습법적인 이해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다. 속죄이론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법을 손상시킨 인간의 범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이 만족할 만한 보상을 줄 수 있다는 논리로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의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로마의 법률적 특징을 계승, 강화, 발전시켜 예수를 이해한 것이다.
훗날 색슨족을 정복하여 무력으로 그들의 개종을 강요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 옛 로마의 판도 내에 신성로마제국의 기초를 닦은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나, 역시 무력과 강압으로 스칸디나비아에 기독교를 확장시킨 노르웨이의 왕 올라프(Olaf Tryggvason) 등을 통해 우리는 중세적 특징을 보게 된다. 결국 이러한 바바리안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중세 유럽의 특별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토적 개념의 기독교 왕국, 즉 ‘크리스텐덤’(Christendom)을 낳게 했다. 왕과 왕비 같은 통치자가 그리스도인이며 그 영토가 기독교령인 크리스텐덤은 전형적인 중세 기독교의 특징이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야말로 여러 왕위의 왕인 ‘왕 중 왕’(The King of kings)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