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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일곱 가지 요소 (살전5:16-24절)
주님의 재림의 때가 임박하다고 선포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 날은 정말 역사의 종말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기상의 이상 현상이나 핵전쟁의 위험, 도처에 발생하는 기아와 자연 재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코로나 19의 발생은 인류의 최대의 재앙이자 환난입니다. 이 재앙은 사람들을 비대면의 시대로 만들었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여 지킬 것은 지키고 금할 것은 금하면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은 신앙의 높은 미덕의 삼 요소입니다. 신앙의 미덕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존재합니다. 나아가 반드시 금해야 할 것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지혜를 온전히 응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를 당하여 이 일곱 가지 신앙의 요소를 생각하고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에 당시 교회는 핍박과 시련이 극에 달했었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은 인간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나 환경에서 비롯된 기쁨이 아니라 주 안에서 가지는 성령의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는 그 말씀대로 오히려 고난이 닥쳐오고 환난이 가중될수록 더 희열을 맛보는 그런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우리의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 때문에 얻는 기쁨입니다.
*고후7: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버렸습니다. 혈혈단신으로 평생을 외롭게 살면서 오로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춥고 배고프고 환난이라는 환난을 다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진 기쁨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가질 수 있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생활은 항상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전 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자신의 신앙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생활은 성령의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신 절대 주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성령 하나님은 환경의 일희일비에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나 못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기뻐하시고 언제나 즐거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생활은 기쁨의 생활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중에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기쁨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옥중 생활을 하면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 역시 로마의 압제 하에서 자유가 없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자유가 없고 인권을 빼앗기고 경제를 빼앗긴 상황은 감옥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같은 처지인 것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의 그 기쁨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가족입니까. 권세입니까.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이 중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그가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는 만족했습니다. 그에게는 죽고 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차디찬 이국 만리타향의 감옥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기쁨, 복음을 위해 사는 기쁨에 만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자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희가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물으신 후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중의 하나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형편이나 처지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고민과 갈등은 깊어지고 나중에는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염려나 걱정을 주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기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매일 밤낮없이 24시간 교회에 찾아와서 형식을 갖추어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제쳐 두고 기도원에서 일생을 지내는 사람처럼 산에 올라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직장 일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식사도 하고 잠도 자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합니다. 일상의 모든 삶이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제나 기도하는 정신으로 깨어 있으며 규칙적인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어떤 일을 할 때에 항상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시작할 것이며 일을 마친 후에도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식사할 때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정신과 각오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두산 여행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백두산은 일기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그 정상과 천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다 보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며칠씩 기다리면서 몇 번이나 천지에 올라갔으나 끝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설령 일부를 본다고 해도 잠시 후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길어야 삼십 분 정도 보였다가 갑자기 운무에 가려 사라지는 신비한 산입니다. 천지에 오르려면 연길에서 자동차로 5시간 이상 달려서 입구에 도착하고 거기서 준비된 산악 자동차를 갈아타고 산에 오릅니다. 한국에서 간 교인들이 천지를 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부디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해주시고 백두산의 웅장한 모습과 천지를 잘 보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와 백두산이 한 점 가림도 없이 다 보였습니다. 천지의 물이 얼마나 맑든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하면서 몇 시간을 지루한 줄도 모르고 즐겁게 지냈습니다. 저녁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장로님이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편안한 가운데 좋은 구경을 하도록 허락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행의 안내를 맡은 인도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분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는데 하는 말이 ‘오늘 날씨가 좋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재수가 좋았던 겁니다.’ 일순간 분위기는 어색해졌습니다. 여러분! 재수가 좋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나 감사가 없습니다. ‘운이 좋았다.’ 일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즉 자연주의자나 무신론자에게는 기도가 있을 수 없고 그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기도의 가치와 응답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경우에 임하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모든 상황에 다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조건은 하나도 찾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순경도 있고 역경도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 밤과 낮이 있듯이, 맑은 날씨가 있고 흐린 날이 있듯이, 우리의 삶 역시 안정되고 발전하고 번성하는 때가 있고 반대로 실패와 시련을 겪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웃을 날이 있는가 하면 슬프고 괴로운 날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 자연현상이요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온 우주와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있고 취하여 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처분이나 결정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 욥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재앙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 재앙은 하루 동안에 일어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스바 사람들이 와서 욥의 재산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있는 중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버렸습니다. 아직 보고를 받고 있는 중에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재물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보고를 받고 있는 중에 거친 들에서 광풍이 자녀들의 집에 불어 열 명의 자식들이 다 죽었습니다.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고 열 명의 자식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 비참한 소식을 들은 욥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욥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혁명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그 말의 개념을 살펴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다. 사회가 이렇게 혼란한 것은 정치인들 때문이다. 혁명하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혁명을 하지 않습니다.
노예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뿌리’라는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상인들에게 잡혀 와서 쇠사슬에 묶인 채 평생을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것도 대대로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빵을 준들 무슨 감사가 있겠으며 따뜻한 옷을 한 벌 준들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로 살아가는 동안에 감사는 없습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형제와 가족을 빼앗기고 정배당한 사람에게 감사는 사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흑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육신은 비록 노예의 신분으로 변함이 없지만 영혼은 자유하며 기쁨이 충만하고 그 어떤 핍박이나 압제나 고통이 해칠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럴 때 남이 가지지 못한 그 하늘의 평강을 소유한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부부 싸움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돈을 빼앗기면서 하는 말이 ‘아침마다 강도 만난 기분이다. 평생을 식구 먹여 살리는 머슴이다.’ 아내가 대꾸합니다. ‘나는 이 집 식모다. 월급 한 푼 못 받고 공짜로 혹사당하는 식모다.’ 그래서 곁에 있던 분이 참견을 합니다. ‘이 집은 가족은 없고 머슴과 식모만 사는 집이군요.’ 그 집에는 남편이나 아내는 없습니다. 가족이 없는 삭막한 곳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으로 강에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저녁에 각자 일기장을 쓰는데 아버지는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질로 하루를 허비했다.’라고 썼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해서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었고 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십니까. 불평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불평하면 인생이 비참해집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사랑도, 은혜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어떤 결과가 나왔든지 무조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잃어버렸던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4.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가쁨 불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성령을 불로 묘사하여 그 불을 끄거나 약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활동을 배격하거나 제한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몇 가지 은사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은사에 대한 열성이나 교회의 성장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고 교회는 인간들의 집합체처럼 인본주의 성향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바울은 이런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성령의 불을 끄는 일을 중지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통제가 신앙의 열심을 식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광신적 태도가 만연했음에 비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히려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배격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감화시키고 감동시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지만 성령을 무시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이므로 성령의 깨우침을 날마다 받아야 하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기적을 창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성령의 불을 지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날마다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면 세속의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성령의 은사가 사라지면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귀한 은총을 사모하고 성령의 불길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가 되면 물질문화가 발전하여 매사에 부족함이 없고 특별히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무기력한 삶이 지속될 때에 교회는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고 세상과 타협하며 세속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시대일수록 성령의 은혜와 역사를 뜨겁게 체험하며 신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엡5:17-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데 첫째는 말 그대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예언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초대 교회 당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나 주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지칭했습니다. 전자는 곧 사라졌기 때문에 보통 예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본문에서 말하는 예언입니다. 결국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의 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고 말씀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시키고 그런 말씀만 좋아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진리의 중심에서 이탈하기 쉽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를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자의적인 신앙을 고집하는 것도 진리에서 이탈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두 가지를 명백히 경계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언이라고 한다면 직접 계시를 통해 받은 예언이 있습니다. 즉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이를 선포한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느냐, 아니면 거짓 영의 역사로 인함이냐 하는 분별을 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점을 두고 혼란을 일으키고 문제를 야기 시켰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언이란 구약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은사로서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 부분도 가르치는 교사마다 그 해석이 분분하여 교단이 나누어지고 교파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 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일어나는 하나의 분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거나 그 말씀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기가 심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언의 은사에 비해 방언의 은사가 훨씬 더 기적적이며 신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예언을 멸시하고 방언을 우대했던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 역시 이런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욱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고전14:4-6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언도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이며 예언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성령을 멸시하는 것이며 이는 성령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검증되지 못한 무분별한 예언은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6. 악은 어떤 모양이라고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모양’이라는 말은 ‘형식’이나 ‘종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악이라고 하는 그 어떤 것들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장한 이단이라든지, 사이비 종교에 빠진다든지, 현실 생활에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생각에서 불의와 타협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받고 교회 생활에 충실한다고 해도 때때로 악에 끌려가거나 악과 타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한다는 이유로 악한 영의 유혹에 끌려가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여 이단에 빠진다든가, 기도에 전념하다가 이상한 영에 미혹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사화가 다변화되고 인간의 심성들이 복잡해져서 악도 여러 가지 유형으로 위장하고 나타나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요즈음은 비대면 시대이기 때문에 가상 세계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화폐가 통용되고 투자를 하고 이익을 남기고 하는 사례가 세계 도처에서 불같이 일어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 가상 세계를 좋아하고 현실을 기피하면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특히 가상 화폐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돈이 존재하지 않지만 주식을 하는 것처럼 그곳에 투자를 매매를 합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큰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현상은 인류를 정신이상자로 만들고 결국은 멸망하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없이 엄마 혼자서 병원에 가서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를 자기 소유로 키웁니다. 이것이 법적으로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동성연애자,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이혼은 시대적 유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묻지 마 폭행이나 살인이 날마다 일어나지만 사회는 대책이 없습니다. 성도는 이런 악한 일에 과감히 대처해야 합니다. 순간적인 욕정에 의해 다윗과 같은 실수를 범해서도 안 되고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적당히’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양자택일이 있을 뿐입니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7.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은사에 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혜를 응용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 전반에 걸친 바울의 최종적 권면인 것입니다. ‘헤아려’라는 말은 원래 동전이나 금속의 순도나 함량을 점검하여 살펴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영적인 일과 악한 일을 구분하기 위하여 철저하고 세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또한 ‘취하고’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을 갖는다는 의미 그 이상을 가리킵니다. 곧 매력 있고 유익한 것을 집요하게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사실 영적인 지혜를 실제 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박사 학위를 몇 개나 받았어도 그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고 응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와도 자기의 지식이나 재능을 살리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그 배운 것이 헛것이 되고 삶에 장애물이 되어 팔불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영적 지혜를 현실에 적용하고 응용하여 그것이 내 삶에 큰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순간마다 변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선과 악을 가려서 바르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과감한 결단성이 없다면 그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 영적인 지혜가 되지 못합니다. 참된 지혜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그 지혜를 유익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 교회 시절에 성도들은 카타콤 지하 교회에서 생활했습니다. 이곳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 저들은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고 생활이 곤고해도 신앙적 낙천주의로 살았습니다. 저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아름다운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영적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무조건성, 기도의 절대 필요성, 감사의 무한성,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에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앞으로의 약속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알고 이 귀한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나간 모든 일이나 현재 당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기쁨이 있을 수 없으며, 감사가 없는 기도는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를 위하여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영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충만이 없으면 우리는 파도같이 밀려오는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도록 하나님은 강한 주권적 역사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살전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온전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화의 역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신 분인데 이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멈추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성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도 확신하고 우리도 확신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던 바울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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