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龍洞) 큰우물
일본인 지역은 수돗물, 한국인 지역은 우물물
인천 개항과 함께 식수의 중심 용동(龍洞) 큰우물
용동 큰우물(龍洞 큰우물)은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있는 조선 고종 20년(1883) 인천항구의 개방과 함께 만들어 놓은 우물로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의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했다.
1967년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지붕을 올린 6각 정자를 세워 보존하고 있으며 유명 서예가인 동정 박세림 선생의 현판이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자연적인 연못이었으나 제물포 개항을 기점으로 현재와 같은 우물로 만들어졌다.
인천의 대표적 우물로 문학산 정상의 ‘비류정’(1778년 동사강목)은 물맛이 시원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쟁 후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훼손되었다.
화수 2동에는 6줄 깊이의 우물이 있는데 20미터 거리에 또 다른 우물이 있어 1920년대까지도 쌍우물지역으로 불렸다. 이 지역에는 구한말 이후 한국인 거주지역으로 많은 주민들이 이 우물을 사용했다.
화수동 쌍우물
일제 강점기(1883년)에는 배다리 입구에 큰우물과 목욕탕이 만들어져 주민들이 사용했다.
부평구 작전동의 ‘까치우물’(까치물,까치말,작정)은 우물물을 마시면 장사가 태어난다고 전해진다,
부평동의 옛 이름을 대정리(大井里)로 일신동을 구산리(九山里)라 불렸는데 이 두 마을 사이에 부개동에 항(航)굴이 있었다. 항굴이란 뜻은 동네 모양이 배와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이에 동네에 우물을 파는 것은 배 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 비운을 자초한다고 하여 동네 사람들은 이웃동네에서 물을 받아다 사용했다. 개화기에 들어와 전설을 믿지 않고 동네에 10여 개의 우물을 파 사용했다. 그 얼마 후 동네가 일본군의 군용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쫒겨나고 말았다.
문학초등학교 뒷산의 숫제골이라는 작은 골짝기에 우물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이 우물에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얻는다고 해서 산신 우물로 불렸다.
십정동은 우물이 많은 마을이란 뜻으로 ‘웃열우물,’아랫열우물‘같은 우물들이 있었다.(인천상수도 100년사)
관교동 우물 빨래터
제물포가 개항이 되었지만 해변가에는 식수가 없었고 저지대인 전동,용동,화수동,송림동에 큰 우물이 있었다. 그중 전동의 웃터골 우물이 제일 컸다. 일본지계(자유공원 남쪽 관동 1,2가 일대)와 청국지계(자유공원 서남 쪽)의 주민은 식수를 웃터골 우물에서 충당했다. 1884년부터 청나라 상인들이 우물물을 길어다 배에 팔았다. 1887년에는 일본인이 웃터골 우물물을 북성동 해변가로 송수하여 선박에 물을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895년 청일전쟁 후 일본인은 여러 곳에 우물을 파서 다량의 용수를 얻어 일본주 양조장,간장공장,대중목욕탕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인 거주(답동,선화동,인현동,내동,용동,율목동,화평동,화수동,만석동)에는 그저 과거의 우물로 식수와 생활용수를 충당해야 했다.(1890년대 인천 인구는 한국인 9천9백명,일본인 4천2백명,청인 2천3백명,양인(미,영,독) 63명이었다) 1900년 인천 인구수 1만6,445명, 1910년(한일합방) 한국인 1만4,820명,일본인 1만 3,315명)
배다리헌책방거리
1906년 한국 정부의 도지부수도국이 주관이 되어 일본의 차관과 기술로 공사를 시작 노량진에 취수장과 정수지를 구축하여 인천과 용산지역에 통수하기로 했는데 인천지역이 공사가 빨리 진척되어 서울보다 앞서 급수가 시작됐다.(1904년 대한매일신보에 ’궁내부 대신 이용태가 인천항 수도 부설권을 일본인에게 양도‘라고 기사화/1906년 탁지부에 수도국을 설치하고 일본인이 제안한 경인수도 부설 계획에 따라 일본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을 받아들여 관세 수입을 담보로 1천만원을 일본흥업은행에서 대출받아 1906년 11월, 4년간에 걸친 수도시설공사를 착수하고 1908년 10월 송현배수지가 준공되었다. 2010년 10월 30일 통수식을 가졌고 12월1일부터 인천시내 수돗물 급수가 시작되었다. (서울 뚝도정수장 준공 1908년)송현배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도국산이라 불려졌으며 정작 수도국산에 사는 달동네 주민들은 배수지와 인접해 있었어도 공동수도에서 수돗물을 물지게를 이용하여 물을 받아 사용해야 했다.)
1931년의 급수보급율은 일본인 지역은 2,655가구에 2,423전(급수율 90%),한국인 거주 12,026호에 3,111전(27%)으로 그 격차가 컸다. 인천시 전체 급수율을 보면 일본인 지역 급수율 90%는 1978년 이후에서야 달성하는 매우 높은 급수보급율이다.
( 신태범박사의 '인천 한세기'1912년생,경성제국대 의학부,인천의사회장,중앙교육위원, 수필집<반사경> )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