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자의 고희에 부쳐
1973 년 어느 봄 날, 그대의 졸업파티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어 모두 낯선 얼굴들이고 후배들도 보여 불편한 자리라서 그 곳을 나와 수성 못 호반 레스토랑으로 옮긴 것이 첫 만남이라.
전화도 없었고 나는 외과 레지던트 1년 차라 무척 바빴고, 365일 병원 내에 대기해야 되는 몸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서로 그리워한 것 같소.
이듬 해 나는 무의촌 근무로 봉화군 명호. 재산 보건진료소장으로, 그대는 졸업하고 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월성군 서면 아화 중학교로 발령을 받아 주고 받은 편지 글이 수월찮을 것이오.
만남이 거듭할수록 청혼이란 개념도 없이 그저 그렇게 당연히 결혼하는가 싶었고, 1975년 1월 7일 대구 동원예식장에서 은사이신 홍선희 선생님 주례 하에 식을 올렸다.
신접살림은 동인동 단칸방에서 전세 30만 원으로 시작하였고, 몇 번 이사를 다니는 중 큰 딸 지민이가 경대병원에서 1976년에 출생하였고, 전문의 마치고
군에 입대 양구 21사단에서 근무하였는데, 이듬해(1978) 장남 종민 이를 서울 경희대 병원에서 얻었지요.
양구에서 일 년 간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대구 통합병원으로 전출 와서 근무중 1979년 전주 지방병무청에서 수석 군의관으로 5만 명의 장병신체검사를 하고, 그 해 말 원대 복귀하였다.
1980년 둘째 딸 진희가 개인병원에서 출생하였는데, 난산이라 매우 힘들었고,
그 해 제대를 하고 예정대로 곽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대명동 개나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곽 병원 외과 과장으로 2년 3개월 동안 많은 수술을 하였고, 1982년 4월 12일(?)내당동에서 이승기 외과의원을 개원하였다.
첫 일 년은 하루도 쉬지 않고 수술하고 외래 환자 진료하고, 분만도 받아 새벽 2-3시에 미역국 끓이느라 당신도 잠을 설쳤다.
아이들은 학교에 잘 다니고, 다행히 환자가 많이 찾아와 개원 시 빌린 부채를 곧 갚을 수 있었고, 2년 만에 대지를, 4년 만에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마련 할 수 있었다(비록 부채는 좀 있었지만).
1986년 새 건물로 이사 오는데, 결혼 한지 11년, 11번 째 이사를 하였다.
아이들은 다행스럽게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하였고, 결혼도 각기 피앙새를 데려와서 걱정을 안했지요.
바쁜 와중에도 술을 너무 좋아하여 당신을 힘들게 한 것이 가장 미안하고, 아울러 나에게도 스스로 후회막급입니다.
술 마시고 기억을 못하는 블랙아웃(blackout)을 헤아려 보니 거의 100회에 가까운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소.
자기도 두 번 큰 수술을 하여 힘들었고, 2011년 경 슬그머니 찾아온 우울증에 나도 괴로웠지만, 당신은 수발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그러나 지금은 잔병치레야 있지만, 비교적 건강 하니까 어찌 다행이 아니겠소.
요즈음 친구들 끼리 주말에 파크골프를 즐기고, 훌라와 더불어 하는 “도파클럽”이 아주 매력적 이예요.
어느 책에선가 65-79세가 인생의 황금기라 했고, 우리가 바로 그 바운더리에
있으니 옛말인 'Carpe Diem(enjoy today)을 모토로 열심히 삽시다.
항상 고맙고, 미안하고, 감사 합니다....
첫댓글 금슬 자랑도 이런 방법이 있구나.
코로나 땜시 이걸로 고희연을 때울 모양이지.
수필가라면 열편쯤 우려먹을 내용인데...
인생 잘 살아 왔네그려.
젊은이들은 내일을 얘기하고 늙은이들은 지난 날을 얘기한다.
여일은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나 지난 날들이 참 뿌듯하겠다.
밤에 부부가 다정하게 한 잔 하게나.
수필가니 그런 거창한 언어는 당치 않은 것이고, 마침 내자의 생일이라 한 두자 꺼적거려 본 것이고,
다행히 칠순 기념 여행을 지난해 다녀왔고,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사모님 칠순 축하!
자네 수호여신 집사람 고희 축하하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글
부라보!
** 근자에 시인 친구(시집 5권을 냄)가 시 한 수 보내왔다네.
자네 삶의 글을 보니, 그 시가 생각나서 올리네.
처음에는 좀 밋밋한 느낌이었는데 읽을수록 소박한 은은한 감동이...
영도 청학동의 추억
다섯 누님 아래 외아들로
대구의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니
이웃의 숙부님이 더 좋아하셨는데
이듬해 홀로, 전공을 좇아
부산에 간다니 다들 실망하는데도
아무런 내색을 않으시던 두 분
가족 이산의 한 해가 지나고
봉래동에 이어 청학동의 셋집에서
3대 여섯 식구가 비좁게 사는데
혹한이 없고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친지 없는 객지에서의 쓸쓸한 심사를
가끔 해풍에 날려버리시던 두 분
어린 손녀와 손자를 돌보시며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니
멀리서 오시는 손님이 끊이지 않던
청학동 비탈의 그 작은 집
아아, 어느새
오십 년이 흘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