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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역사유적 탐방
일시:2017년 11월 23일 목요일~28일 화요일
탐방지:미얀마 양곤, 바간, 만달레이. 헤호
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한국 인천 공항 출발, 미얀마 양곤 공항 도착
* 한국 인천공항 출발
이번 미얀마 여행은 양곤, 바간, 만달레이, 헤호 지역의 역사유적 탐방이다. 오후 2시에 집을 출발하였다. 한국은 겨울이고, 미얀마는 여름이어서 겨울옷보다 여름옷을 많이 끼어 입고 간다. 공항 미팅이 오후 3시 30분이다. 우리 부부의 비행기 표를 받았다. 좌석이 36G, 36H다. 대항항공 18:45분 KE471 항공이다. 보딩타임은 18:30분, 게이트는 22다. 공항이 더워서 여름옷을 한꺼풀씩 벗었다. 미얀마는 지금 30도가 넘는 더운 여름 날씨로 여름옷만 준비해 간다. 총 39명인데 현지 미얀마 가이드가 많은 인원으로 인솔하기 어려워서 1호차 20명, 2호차 19명으로 나누어서 여행한다. 우리 부부는 2호차 버스에 탑승하기로 배정되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조금있으니 어두워진다. 오늘 밤 22:35분에 미얀마 양곤 공항에 도착 예정이다. 6시간 30분 소요 예정이다. 미얀마와의 시차는 -2시간 30분이다. 한국보다 미얀마가 2시간 30분 늦다. 밤을 날아서 가는 여정이다. 그래도 세계여행은 언제나 설렘을 주고 행복하다. 미얀마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담아 올 것이다.
* 한국 인천공항에서 미얀마 양곤까지 기내모니터 항로
기내 석식으로 쇠고기와 비빔국수, 빵, 햄, 레드와인, 파인애플 쥬스 등이 나와 맛있게 잘 먹었다. 햇포도로 담근 프랑스산 레드와인을 특별히 드린다는 안내방송이 나와서 우리 부부도 받아서 잘 마셨다. 한국 인천 공항에서 미얀마 양곤까지의 항로가 기내 모니터에 뜬다. 지도에서 우리 부부가 다녀온 세계국가의 지역을 보며 그 위치를 다시 확인해보는 것도 참 유익하다.
* 대한 항공 기내영화 <하트비트>
세계여행 중에 기내영화를 보는 것도 참으로 좋다. 오늘은 <하트비트> 영화를 먼저 보았다. 6시간 30분의 긴 비행시간으로 이 영화가 끝나면 또 한 편을 볼 예정이다. 미국영화로 한국어와 한국어 자막을 선택했다. 대화도 한국어, 자막도 한글로 나와 참 좋다. 108분 짜리다. 천부적인 힙합댄서 켈리는 부모의 반대에도 춤추기를 좋아한다. 오빠는 법학도였는데 대학시절 교통사고로 죽었다. 켈리가 5살 때다. 부모는 딸도 오빠처럼, 변호사인 그의 엄마 뒤를 따라 법학공부를 원하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다. 결혼식 참석을 위해 부모와 함께 인도에 간다. 인도 결혼식은 1주일 동안 춤과 노래로 파티를 연다. 그때 켈리는 춤추는 남자를 만나게 되어 사랑하기까지 이른다. 부모는 아들을 잃은 후유증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갈등을 겪다가 이혼한다. 아버지는 홀로 딸을 키우기로 했고, 결국 딸의 소망대로 법학을 포기하고 댄서로 커 달라고 말한다. 그 길이 행복하다면 아빠도 딸이 선택한 진로를 존중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는데 남자친구와 헤어짐이 아쉬울 때, 남자친구도 함께 미국으로 가도록 남자의 춤 친구들이 도와준다. 아버지도 돕고, 그래서 금전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어 함께 미국 LA에 도착했다. 어느 방송국에서 댄스 오디션을 보는데 켈리의 여동생 도움으로 근사한 음악을 주문하여 남자친구와 켈리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는다. 방송국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고 전문적인 댄서가 된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이 영화에서 부모가 자녀의 특기를 잘 살려서 진로를 결정해 주어야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꺠달았다. 나 역시 그런 부모관으로 내 두 아들의 진로를 선택해주고 밀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문학과 시다. 그래서 시인으로 사는 지금의 생활이 참으로 행복하다. 큰 축복이다. 그리고 켈리가 성공하도록 도와준 남자친구도 멋진 청년이다. 나는 인도를 좋아한다. 인도여행에서 만난 라카가 아주 친절하여서 인도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라카를 생각하며 영화를 끝까지 큰 감동으로 잘 보았다.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영화다.
* 대한항공 기내영화 <인터루드 인 프라하>
두 번째로 본 영화는 <인터루드 인 프라하>다. 체코 프라하가 배경이라는 것과 모짜르트가 주인공이라는 데서 나는 바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 프라하를 여행하며 받은 고전적인 낭만이 벌써 눈앞에 일렁이고 그에 더하여 음악이 만났으니 내가 사랑하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만족이다. 모짜르트가 프라하에 와서 하느여인과 사랑한다. 그 여인은 바람둥이인 나쁜 백작 남자로부터 살해 당한다. 슬픔 일이다. 그로 인하여 모짜르트는 그 유명한 <돈 조반니>를 작곡한다. 그 여인에 대한 애달픈 사랑의 곡이다. 이 영화는 졸음이 쏟아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귀국하던 날 다시 보았다. 천재적인 음악가 모짜르트를 둘러싸고 음악가들의 보이지 않는 암투가 실인을 저지르고, 비극을 부르는 영화다. 하지만 모짜르트는 사랑한 여인의 죽음으로 인해 명곡을 탄생시킨다. 그의 아내와 자녀도 와서 함께 축하해주며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났다. 최신 헐리우드 영화로 금년 2017년 상반기에 나온 영화다. 영화지만 모짜르트에 대하여 그의 인생 한 도막을 배운 소중한 영화다.
* 미얀마 양곤 공항 도착
미얀마 현지 시간으로 밤 10시 30분에 양곤 공항데 도착했다. 공항은 27도라고 기장이 안내방송을 했다. 기내에서 옷을 한 꺼풀 벗었다. 아주 사뿐히 착륙한다.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1시다. 캄캄한 밤을 날아서 왔다.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어두운 도시 양곤이다. 입국 수속이 늦다. 약간 공항이 덥다. 가이드를 미팅했다. 2조라서 가이드가 2명 나왔다. 우리 부부는 2조다. 가방이 파손된 일행이 있어서 조금 늦게 호텔로 이동했다. 아담한 공항이다. 버마로 알려진 미얀마는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색적인 문화체험 여행의 보고이다. 약 2500년 불교역사를 간직한 세계최대의 불교 국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황금빛 파고다의 모습 때문에 황금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미얀마의 고대 유적지는 독창적인 문화다. 아시아 서남부에 있는 연방국. 국민의 9/10가 불교도이다. 공용어는 미얀마어다. 1885년부터 1948년초까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사회주의 중앙 계획 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산업은 대부분 국영화되어 있으며 경제는 주로 농업과 무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레이 반도를 따라 내려간 길이 640km의 지협까지 포함해서 남북길이는 약 2,050km이고, 폭이 가장 넓은 곳의 동서길이는 935km 정도이다. 남동쪽으로 타이·라오스, 북동쪽으로 중국,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 및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나갈란드·마니푸르·미조람 등의 여러 주들과 경계를 이룬다. 남부와 남서부의 해안선은 벵골 만, 마르타반 만, 안다만 해와 접해 있다. 미얀마는 지형상 북부 산악지방, 서부 산악지방, 중부 저지대, 동부의 샨 고원 등 4개 주요지역으로 나뉜다. 사회주의 중앙 계획 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는 개발도상국가다. 산업은 대부분 국영화되어 있으며 경제는 주로 농업과 무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계에서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매우 낮은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국내총생산(GDP)의 3/5 정도는 농업·수렵·임업·어업 등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서비스업과 제조업이다. 쌀은 가장 중요한 농작물로 재배에 많은 노동력을 고용함으로써 경제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쌀은 이 나라 제1의 수출품이기도 하다. 그밖에 중요한 농작물로는 옥수수·땅콩·콩류·목화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채소·과일 등도 재배한다. 1974년 제정된 헌법은 미얀마를 미얀마사회주의계획당이 지배하는 1당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명시했다. 미얀마 국민의 3/4이 이라와디 강 유역의 전 지역과 좁다랗고 길게 뻗은 해안지대에 살고 있다. 친드윈 강의 서쪽 구릉지대에는 여러 친(Chin) 부족들이 살며 이라와디 강 상류지역과 북부 구릉지대에는 카친 부족들이 살고 있다. 미얀마에는 단순한 방언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100개가 넘는 토착어가 있으나 공용어는 미얀마어로서 평야와 산악지방의 주민 모두가 사용한다. 버마라는 공식 이름으로 불렸던 영국 식민지시대(1885∼1948)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나 독립한 후로 영어는 공용어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그러나 영어의 기초 지식은 각급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으며 1981년에는 영어를 교과 과정에 다시 복귀시켰다. 아시아에서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기복이 심하고 삼림이 우거진 지방에는 아직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촌락은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국민의 1/4 미만의 사람들만이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연간 인구증가율은 세계적인 수준에 비하면 다소 높은 편이지만 동남아시아의 수준으로 보면 대략 평균치에 이른다. 비교적 높은 유아 사망률은 1950년대 이후로 상당히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대도시로는 이라와디 강 삼각주에 위치한 양곤과 내륙의 만달레이를 꼽을 수 있다. 한국과의 관계는 상사 및 기업 주재원 등 다수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미얀마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2017년 11월 24일 수요일 양곤에서 바간으로 자국기 탑승 이동, 바간 파고다 유적 탐방
* 양곤 호텔 출발
어제 밤 1시 30분에 취침에 들었다. 새벽 4시 30분 모닝콜이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시차는 2시간 30분 늦은 나라로 그리 영향을 주지 않았는데, 늦은 비행기로 와서 늦게 호텔에 들어와서 그렇다. 눈을 조금 붙이려니 모닝콜이 깨운다. 캄캅한 밤중이다. 커튼을 열고 보니 캄캅한 밤중이다. 양곤 시가지가 어둠에 잠겨있다. 가로등도 없고, 거리와 집들의 조명이 어둡다. 호텔도 한국의 모텔 수준이다. 화장실에 작은 도룡뇽이 있다고 남편이 말한다. 한 박자 떨어져서 사는 우리 부부에게는 딱 좋은 분위기라며 웃었다. 로비에 세계국가의 시계가 걸렸는데 한국 SEOUL 시계가 걸려있어 정겹다. 호텔 로비에 사탕이 있다. 친절한 분위기다. 오늘은 자국기로 양곤에서 바간으로 간다. 밖으로 나오니 벌써 버스가 기다린다. 호텔에서 5시 30분 출발이다. 어둠 가득한 호텔의 꼭대기에 PLATIUM이라는 마크가 있다.약간 더운 기온이다. 여기서 공항까지는 15분 소요예상이다. 버스에서 아침 대용으로 도시락을 나누어 준다. 비행기에서 조식을 준다고 샌드위치와 삶은 계란 정도의 아주 간단한 메뉴다. 서둘러서 먹으며 양곤 공항으로 간다. 오늘은 만달레이를 탐방한다. 어제의 늦은 취침으로 피곤하다. 세계여행은 이런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서야 새로운 미지의 땅에 대한 정보와 지식, 자연, 역사 등을 얻는다는 사실은 그 동안 90여개국을 탐방하며 이미 습득한 체험이다. 상쾌한 새벽, 행복한 여정의 힘찬 첫 출발이다.
* 양곤 공항 출발
바간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온 양곤 공항이다. 어제와 동일한 공항인데 어제는 국제선 터미널이고, 오늘은 국내선 터미널이다. 공항 건물이 두 개 있다. 공항이 넓고 좋다. 미얀마는 국토가 한반도의 3배에 이를 정도로 광활한 나라다. 그런데 사회 간접자본 부족으로 도로 상태는 매우 열악하다. 그런 연유로 여행객들은 주로 항공편을 이용한다. 탑승대기장 바닥이 융단으로 특이하다. 우리 부부는 11D, 12B로 좌석이 떨어져 있었는데 가이드가 12A, 12B로 다시 바꾸어 주었다. 매일 비행기, 버스, 현지 미얀마가이드가 바뀐다. 어젯밤 옵션투어비를 1인당 130불, 가이드 경비 60불 총 190불을 지불했다. 공항 오면서 호텔에서 제공한 간단한 도시락으로 삶은 계란과 샌드위치을 먹었다. 비행기를 타면 기내조식을 준단다. 오전 7시 바간행 자국기다. 양곤에서 바간까지는 1시간 20분 걸린다. 바간에서 만달레이는 30분, 만달레이에서 헤호는 30분, 헤호에서 양곤은 1시간 이렇게 매일 지국기로 이동할 것이다. 6시 40분에 보딩이다. 2층의 30번 게이트다. 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로 2층으로 갔다. 국내선은 복도길이 없다. 버스로 이동하여 공항마당에서 비행기에 탑승한다. 모든 자국기가 그렇게 탑승한다. 공항마당에 비행기가 많다. 기내 좌석이 2, 2제다. 비행기 실내가 큰 편이다. 70~80석 정도인 것 같다. 항공직원들이 친절하다. 아침이 열린다. 운무와 햇살이 곱게 드리운 공항을 출발한다.
* 양곤 공항 상공
비행기가 이륙한다. 상공에서 바라본 양곤은 나무가 아주 많은 시가지다. 숲 사이로 파고다가 보인다. 호수, 물길도 있다. 건물보다 숲이 더 울창한 도시다. 비행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기내 조식으로 빵, 샌드위치, 차, 물 등 간단하게 나온다. 하얀 구름과 지상의 나무 숲이 비경을 이룬다.
* 바간 공항 상공
지상의 숲 사이로 물길이 있는데 말라 있다. 건기의 겨울로 접어들어서 그런가보다. 농사를 짓는 경작기가 잘 다듬어져 있다. 민가도 군데군데 보인다. 더 지상 가까이 내려가자 바간 시가지가 드러나고, 곳곳에 파고다 건물도 보인다.
* 바간 공항 도착
공항의 시스템이 한국의 1960년대 수준이다. 모든 문화 등이 다 그렇다. 집에 냉장고도 없이 사는 사회다. 환율은 한국과 1;1이다. 미얀마의 1짜시가 한국의 1원과 같다. 짐이 늦게 나온다. 바간의 오전 9시 현재 기온은 26도이다.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모두 여름옷 차림이다. 바간Bagan은 현지 발음으로 버강이라고도 한다. 세계 3대 불교도시이며 천년고도이기도 하다. 바간은 만달레이 남서쪽, 약 145km 지점, 현 수도인 양곤에서 북쪽으로 500km 떨어진 에야워디 강(Ayeyarwady River)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바간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와 더불어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의 하나다. 동남아시아에 대규모의 또다른 불교국가를 이룩하고자 했던 미얀마 고대 왕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11세기에 들어선 미얀마족이 권세를 떨쳤던 초대왕국인 바간 왕조의 1057년 아나와라하따 왕(King Anawrahta)이 따톤(Thaton)을 정복한 후, 예술가, 미술가, 수도사, 30마리의 코끼리떼와 더불어 불경을 들여 왔다. 2세기가 넘도록 40평방 킬로미터지역내에 웅장한 규모의 수많은 파고다와 사원등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그러나, 바간왕조가 몰락되었던, 1287년 몽고의 쿠브라이 칸(Kublai Khan)의 침입은 수도인 바간의 대부분의 건축물도 많은 소실을 입게 되었다. 그후, 1975년 대지진으로 도시전체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세계적인 역사유적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자취는 오늘날까지 남겨진 5천여개의 불탑과 사원이 대변하고 있다. 몇차례의 서양인의 예술품약탈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며,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지역으로 미얀마인 가슴에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바간에 남아 있는 사원과 파고다 중 20여개는 사원의 건축과 장식 디자인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 최대의 불교 문화유적군으로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바간 도시 전체가 세계 3대 불교성지이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 지역과 인도네시아의 보르부드르와 함께 세계3대 불교 유적지군으로 불리는 천년의 고도 이며, 2천5백여 개의 탑으로 조성된 세계 최대의 탑 유적지다. 세계 3대 불교 유적지중 하나다. 항공입국 이외에는 미얀마를 갈 수 있는 길이 없어 아직은 다른 두 유적지보다 더욱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바간은 도시 자체가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어, 별도의 도시 입장료를 내야만 도시 진입이 가능하다. 유적들은 도시 전체에 넓게 퍼져 있어서 자전거나 마차를 빌려 관람하면 좋다. 우리들도 마차 투어가 에정되어 있다. 우리는 오늘 쉐지곤 파고다, 아난다 사원, 틸로민로 사원 등을 탐방할 것이다. 현지인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냥우 재래시장도 간다. 신비 가득한 미얀마의 첫 여정, 여기는 바간이다.
* 바간 냥우 재래시장
냥우 시장은 바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시장이다. 생각보다 훨씬 크고, 물품도 다양하고 사람들도 많다. 야채, 과일, 생선, 닭고기, 목각, 신발, 조각품, 이불 등 온갖 생활용품이 다 모여 있는 미얀마 전통시장이다. 상가 골목도 많다. 좁은 길목에는온갖 물건과 비릿한 냄새와 사람들로 훈훈하다. 미얀마 바간의 과일, 채소, 곡물은 물론 골동품, 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을 판매한다. 냉장고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미얀마 사람들은 매일 시장에 나와서 장을 본다. 야채, 과일, 꽃 그리고 미얀마의 천연 썬크림인 다나까의 재료까지 이곳에서 판매한다. 냥우시장에서는 물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곳 미얀마 사람들의 삶의 생생한 모습을 본다. 미얀마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굴에 하얀 가루를 바른다. 이것은 타나카라고 하는데, 타나카나무를 돌에 갈아 가루로 만든 다음 물에 개어 바르는 것이다. 자외선 차단 효과가 있다고 하니, 햇빛이 강하고 더운 미얀마에서는 필수품이다. 자외선 차단 이외에도 화장을 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젊은 여성일수록 아주 강하게 바른다. 냥우시장에서는 곡물, 채소를 비롯하여 가방, 신발, 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한다. 바닥이 진흘과 물리 섞여 있어서 흙탕물이 옷으로 튀어 오른다. 한국의 1960년대 시장을 연상케 한다. 내 유년의 엄마 뒤를 따라 다니던 그 시장이 보인다. 골목 상가를 탐방하고 나와서 도로변의 상가도 보고 자유롭게 곳곳을 둘러보았다. 큰 도로변에는 마차가 손님을 기다리는 풍경도 있다. 오토바이가 많이 왕래한다. 한국에서는 사라진 진풍경들로 눈과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 바간 쉐지곤 파고다 입구 풍경
바간은 도시 전체가 사원들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엄청난 불교의 역사적 가치를 품은 도시다. 바간에는 5천 개의 사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2천 5백 개 정도만 남았다. 바간은 파고다 유적을 보기 위해 오는 곳이다. 미얀마 사찰은 기도하는 곳으로 거주는 안 한다. 한국의 사찰과는다르다. 파고다는 탑이 있는 큰 사원을 말한다. 오전에 쉐지곤 파고다와 틸로민로 파고다를 보고 중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호텔에 들러서 짐을 놓고 나온단다. 오후에는 부파야 파고다, 아난다 파고다, 마누하 파고다를 간단다. 지금 우리는 승리의 땅, 쉐지곤 파고에 첫번째로 왔다. 냥우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파고다. 미얀마 파고다에서는 맨발로만 입장할 수 있다. 상하의가 모두 긴 옷 차람이어야 한다. 미얀마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정장을 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미얀마의 전통의상 정장은 론지라는 치마 같은 바지 하의와 티셔츠나 남방 같은 상의, 그리고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끈을 끼워 신는 슬리퍼 차림이다. 호텔에서도 룸과 화장실에 그런 슬리퍼가 제공되었다. 한국의 1960년~70년대 '게다'라고 부르며 신던 슬리퍼와 유사하다. 나무가 아니고 고무라는 점이 다르지만, 한국도 나무 게다 다음으로 이런 고무 슬리퍼가 나왔고 많이 사용되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모두 이런 동일한 슬리퍼 착용을 도시를 걷는다. 우리도 정장차림을 하기 위해 버스에 신발을 벗어 놓고 아예 맨발로 나왔다. 길도 맨발로 걸어서 간다. 좀 어색한 일이지만 이것도 건강에 좋다는 긍적인 생각으로 걷는다. 옛날로 돌아간 듯한 아련한 추억 속에 흐뭇한 미얀마 여정의 시작이다. 쉐지곤 파고다 앞은 사람가 차량들로 매우 복잡하다. 입장하여 실내로 가니 긴 회랑이 있다. 미얀마 사라도 많고, 세계인도 많은 길을 함께 걸어서 들어간다.
* 바간 쉐지곤 파고다
쉐지곤 파고다는 황금 모래 언덕 위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황금 대형 사원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다. 석문에 '자야부미(승리의 땅)' 라고 기록돼 있다. 전해지는 애기에 따르면 아노라타 왕이 부처님의 모조 치사리를 네마리의 코끼리가 등에 얹고 각각 네방향으로 보내 코끼리가 멈춰 쉬는 곳에 성물을 안치하라고 했다. 쉐지곤 파고다는 북쪽으로 향했던 코끼리가 멈춰 쉰 곳에 세운 파고다다. 쉐지곤 파고다는 미얀마 파고다들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 탑으로 상륜의 티 장식에는 998개의 보석으로 장식되어있다. 바간왕조의 아나우라타 왕이 짓기 시작하였으며 부처의 앞머리뼈와 치아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쉐지곤 파고다는 3층의 계단 위에 종 모양이 있는 모습으로 금 도금을 하였다. 여자 같은 11~12세기 불상이 2개 있다. 황금색의 웅장한 모습의 파고다로 바간의 많은 유적들 중 초기의 파고다로 제1호로 지정되었다. 쉐지곤 파고다는 미얀마 파고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바간 왕조의 설립자인 아나우라타(Anawrahta) 왕이 타톤을 정복하고 세운 기념물로 미얀마 파고다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톤은 미얀마 남동부에 있었던 국가이다. 아나우라타왕이 타톤의 마누하 왕에게 불교 경전을 요청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아나우라타 왕이 침략하여 타톤을 멸망시켰다. 쉐지곤 파고다는 아나우라타 왕이 짓기 시작해 짠지타(Kyanzitta)왕이 완성하였다. 부처님의 머리뼈와 앞니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성지로 미얀마의 축제기간인 나다우(Nadaw)기간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이 곳으로 모여든다. 지진과 다른 자연 재해에 의해 파손된 것을 16세기 후반에 보수했지만 1975년의 대지진때 돔의 윗부분이 크게 손상을 입어 대대적인 수리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사원의 밑부분과 테라스는 비교적 손상이 적어 11세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손상이 심했던 돔 윗부분은 잘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인들도 볼 수 있다. 미얀마 파고다에 있는 종은 누구나 울릴 수 있다. 우리 부부도 종을 쳐 보았다. 흰색의 코끼리는 미얀마에서 신성한 의미를 가진 동물이다. 쉐지곤 파고다 옆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탑들. 쉐지곤 파고다 경내에는 여러 건축물들이 있다. 시주로 갖다 놓은 음식도 있고 물을 담아 놓은 작은 사각통 등 불교의 향기가 가득 배여 있다. 기온은 벌써 더워져서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는 땀이 흐른다. 웅장한 황금 사원과 크고 작은 많은 부속 건물들이 눈부신 풍경이다.
* 바간 쉐지곤 파고다 물에 비친 지붕
쉐지곤 파고다 큰 건물 앞에는 물 웅덩이가 있다. 땅 바닥의 작은 물 웅덩이에 비친 파고다의 정상 부분 지붕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1975년의 대지진 때 손상을 입은 돔의 윗부분이 지금은 보수 되어 물에 비친 그 모습이 비경이다. 미얀마 소녀가 사람들의 폰을 달라하여 잘 찍어 준다. 지붕이 무척 높아서 육안으로는 확인이 잘 안 되는데 물 속에 비친 사진으로 잘 보이도록 하는 배려가 돋보인다.
* 바간 쉐지곤 파고다 정령을 모신 낫사원
미얀마의 토속신을 정령이라 한다. 이것을 미얀마에서는 정령을 낫NAT이라고 한다. 미얀마의 토착 정령신앙의 전통신 정령들이다. 영어로는 Nat이라고 쓴다. 낫을 섬기는 미얀마의 무당들은 낫억, 낫카도라 부른다. 미얀마 낫 신앙의 성지는 뽀빠Poppa 산으로, 5~6월에 낫을 기리는 축제를 연다. 상좌부 불교가 도입되면서 처음에는 아나우라타 왕이 낫 신앙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신 37위의 낫만을 인정하고 뽀빠 산에 모시게 되었다. 37위가 넘어가면 기존의 낫 중 하나를 뺀다고 한다. 쉐지곤 파가다 뒤편에 작은 낫사원이 있다. '37 NATS'이란 글자가 새겨진 허술한 건물이다. 미얀마 불교에서 자꾸 번지는 낫신앙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허락하게 되었다. 결국 아노라타 왕이 37개의 낫 정령들을 인정하여 이곳에 모아놓았다. 이것만으로도 미얀마에서는 유명하여 많은 자국 사람들이 찾는 쉐지곤 파고다다. 그곳에 들어가니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낫이 있다. 허름한 부처상도 있다. 낫사원에서도 가장 우선은 부처상이다. 두떠비, 코끼리 등 여러 형상이 보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원한상이다. 원한상을 만지면 원한이 치유된단다. 옛날에 한국에서 굿을 할 때 보던 무당을 연상케 한다. 낯선 장면은 아니지만 미얀마 이면의 토속종교를 보는 소중한 곳이다. 쉐구지 파고다의 한 영역을 자리내어 낫사원을 허락한 것은 대단한 아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쉐지곤 파고다를 떠나왔다.
* 바간 틸로민로 사원
틸로민로 사원은 난타웅마(Nantaungmya)왕의 통치 초기인 1218년에 지어졌다. 미얀마의 바간 5대 왕조 난타웅마(Nantaungmya)왕이 이곳에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사원이다. 파고다와 사원은 거의 같은 개념이지만 엄격히 구분하면 파고다가 더 큰 규모로 불탑이 있는 곳을 지칭하고, 사원은 그보다는 작은 불탑이 없는 곳을 지칭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틸로민로는 사원으로 불러야 될 듯하다. 바간 왕조는 최초로 미얀마(버마)를 통일한 왕조(1044∼1287)다. 중국에서는 포감또는 면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자 아나우라타(Anawrahta)는 앙코르왕조의 타이·로프부리 정복으로 미얀마로 밀려난 몬족을 원조해서 캄보디아군을 퇴치한 후, 1044년 이와라디강 유역에 있는 바간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아나우라타는 끝내 상·하 미얀마를 정복하기에 이르렀는데, 버마인들은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몬족으로부터 문학 및 불교·미술 등의 인도문화를 수용해서 새로운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바간왕조는 독자적인 역사적 기록을 비문의 형태로 남기게 되어 미얀마 사상 최초로 그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왕조가 되었다. 또한 그들이 영유한 해항을 통해서 인도문화와도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이 상 미얀마 차우세의 관개설비를 정비해서 이 지방을 곡창지대로 만든 것은 유명한 일이다. 불탑(파고다)왕조라고도 일컫는 바와 같이 바간왕조는 파고다·사원을 많이 건립하여 왕조 말기에는 국력을 소모하기도 하였다. 1287년 원나라의 침공을 받아 수도 바간을 점령당하였으나 원나라 입조를 약속하고 일시 위기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 바간왕조에 입사하고 있던 샨족의 고위관리 3명이 왕위를 찬탈, 왕조를 멸망시켰다. 틸로민로란 말은 ‘우산의 뜻대로’란 뜻이다. 이곳 틸로민로 사원은 바간 왕조의 난타웅마 왕의 선왕인 나라빠디시투 왕에게 5형제가 있었는데 막내 아들인 난타웅마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싶은데 형들이 있어서 꾀를 내었다. 우산을 던져서 떨어지는 아들에게 왕위를 주기로 한 것이다. 왕위 계승자를 지목하는 방법에 우산을 사용했는데, 다섯 형제 중 우산을 던져 그 끝이 향하는 사람이 선정되었다. 마침 막내 아들 난타웅마에게 떨어져서 원하던대로 막내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난타웅마 왕은 그 장소에서 다섯 형제 가운데 왕위를 계승할 왕자로 지목되었다. 난타웅마 왕은 이를 기념하고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형들을 위로해 주려고 틸로민로 파고다를 지었다. 그 옛날 장남에게 상속계승되던 시대상황을 뛰어넘은 훈훈한 전설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은 모두 똑같고, 그 중에서도 장남은 대를 잇는 큰 존재라는 통념적인 사회구조에서 그벽을 허물었을 때, 선왕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상상이 된다. 난타웅마 왕은 형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사원으로 지었다지만, 실은 아버지 선왕의 가슴저리는 아픔을 달래고자 지었으리라. 파고다는 총 높이가 46m인 3층 건물이며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왕이 지은 파고다이기 때문에 바간의 많은 파고다들 중에서도 아름답고 규모 또한 웅장하다. 곳곳에 검게 변한 모습이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고다 외부 벽은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다. 파고다 입구를 지키는 신. 파고다 외부 벽에는 귀신을 잡아먹는다는 동물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내부의 네 방향에는 각각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벽에는 많이 훼손된 벽화가 남아 있다. 이 파고다는 난타웅마 왕의 아버지가 지은 술라마니 파고다와 디자인이나 세밀한 여러 부분이 많이 닮아 있다. 원래 각 테라스에는 테라코타화가 많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훼손되어 거의 볼 수 없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폐쇄되어서 일반인에게 공개 되지 않고 있다. 바간 파야 양식으로 지었다. 파야는 미얀마에서 부르는 파고다를 말한다. 그런 연유로 탄생한 사원이서일까, 이곳은 다른 파고다와는 조금 다른 개념의 사원이다. 일상생활에서 힘들거나, 지치거나, 학업 실패, 사랑 실연 등으로 상심하여 괴로울 때 위안을 받기 위해 찾는 사원이다. 사원 바닥 사각코너마다 불상이 있다. 사원마다 불상이 조금씩 다르다. 석가 이전 불상이다. 실제로 사원 안에 금빛 좌불상이 있는데 부처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우리 일행은 모두 만져보았다. 쉐지곤보다 뒤에 건설된 곳이다. 쉐지곤 파고다는 여성스럽고 틸로민로 사원은 남성스럽다. 위치도 도시 가운데 있지 않고 초원 가운데 앉아있다. 외형도 서민적인 향수가 배인 정감어린 건물이다. 그리 화려하지 않고 치장을 잘 한 것도 아니고 붉은 벽돌의 그저 고풍스럽고 아담한 사원이다. 지붕 부분은 보수 중인지 그물망을 씌워 놓았다. 1287년 몽고군 침략시 외부는 보존 되었으나 내부에 있던 많은 불상들이 훼손되었다. 그리고 1975년 대지진으로 인하여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1976년에서 1979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현재는 파고다 대부분의 문이 폐쇄되었다. 작은 문들은 햇빛을 들게 하여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과 울창한 나무들이 외객을 다정하게 반겨주고, 그리고 형제관계의 우애가 서린 독특한 의미로 건립된 소박한 사원이어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 바간 틸로민로 사원 전망대에서 본 사원 풍경
틸로민로 사원을 나와서 뒤편에 있는 뭉뚝한 건물의 전망대에 올라갔다. 2층 정도의 허름한 건물의 낮은 전망대인데 사방을 다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바간은 이런 곳이라고 외치듯 온통 사원이 들녘을 차지한다. 일반 민간이 주택은 보이지 않고 오직 숲과 사원만이 전부인 영토다. 그래서 바간은 이런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 사원들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이런 풍경을 보고자 우리도, 세계인도 찾는 곳이다. 조금 전 다녀온 틸로민로 사원이 가까이에서 잘 조망된다. 숲 사이로 붉게 솟이 오른 크고 작은 사원들이 비경이다.
* 바간 난다식당 전통민속 인형극 공연 중식
난다식당에서 전통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관람하며 중식을 했다. 마리오네트marionette는 실로 조작하는 인형극이다. 식당의 무대에서도 상단에서 줄을 조종하는 사람이 보인다. 하단 무대에는 인형이 실에 매달려 민첨하게 움직인다. 마리오네트는 르네상스 때부터 19세기에 걸쳐 성행하며 인기를 끌었다. 소형무대를 설치하고 조작하는 사람이 무대 상부에서 인형을 움직인다. 옛날에는 인형 머리에 붙인 나뭇개비나 철사로 조작하였으나 18∼19세기에 몇 가닥 실로 조종하는 법을 연구해 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 이야기나 롤랑 전설, 영국에서는 이탈리아 희극의 흐름을 이은 펀치와 주디의 쇼 같은 것이 인기를 끌었으며, 19세기에는 풍자나 희화화의 수단으로 인형극이 예술가 사이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관람하는 미얀마의 마리오네트 역시 왕실의 전통의상과 귀족들의 일상의 한 단면을 해학적으로 우스꽝스럽게 연출한다. 음식은 나물, 밥, 생선튀김, 닭강정, 오이무침, 무국, 수박 등으로 아주 풍성한 식단이다. 식당 직원들은 한국말을 잘 한다. 미얀나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많다. 어떤 반찬을 더 달라고 요청하면 바로 알아듣고 대꾸하며 갖다준다. 칼칼한 오이무침은 인기여서 여러번 갖다주다가 한번 더 달라고 하니 '오이무침 없어'라고 대꾸한다. 음식도 좋고, 직원도 좋고, 공연도 좋은 훌륭한 식당이다. 마지막에는 인형들이 총 출동하여 무대를 가득 메운 후 막이 내린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가 지나다닌다. 자동차와 오토바이도 빠르게 질주한다. 전동자동차가 많다. 마차도 많다. 바간은 올드 바간과 뉴 바간이 있다. 공항 주변은 올드 바간이고 지금 가려고 하는 바간 전망대가 있는 곳은 뉴 바간이다. 관광용으로 이용하는 전망대에 올라 신전 등을 조망할 것이다. 신비 가득한 나라 미얀마에 온 것이 매우 보람되고 흐뭇하다.
* 바간 타워 전망대
이곳은 선택관광으로 온 곳이다. 마차투어와 전망대 투어를 합하여 40불을 지불했다. 황토색 높은 건물이 오롯하다. 정원은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한국의 전망대와는 전혀 다른 외형으로 눈길을 끈다. 색상과 구조상으로도 여기는 미얀마라고 외치는 형상이다.
* 바간 타워 전망대에서 본 바간 비경
전망대 높다란 건물에 입장하여 먼저 엘리베이터로 9층 카페에 먼저 올라갔다.음료 한잔씩 마시며 유리창 너머로 전개되는 푸른 숲 물결과 시원 풍경이 비경이다. 가이드는 놀라는 우리들을 데리고 다시 11층으로 올라간다. 11층 원형의 야외 전망대에서는 바간 시가지가 모두 조망된다. 한 바퀴 크게 돌려 바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간은 온통 숲과 사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곳곳에서 조망되는 사원이나, 산, 바간 공항 등을 큰 사진으로 액자에 전시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바간 공항 사진 앞에서 찾아보니 바간 공항이 멀리 보인다. 바간 공항이 숲 가운데 붉은 건물로 선 것이 신기하다. 바간 공항 주변이 올드 바간이다. 사원과 탑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냥우 지역과는 3~4k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에 바간에서 유명한 사원과 탑의 80% 이상이 몰려 있는 바간의 명소로 바간 여행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다. 올드 바간 지역은 도보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자전거나 마차(Horse Cart)를 이용해서 사원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1990년 이전에는 현지 주민들이 파고다 옆에 집을 짓고 파고다와 같이 있었으나 정부의 문화재 보호 정책으로 주민들이 모두 뉴 바간 및 냥우 인근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일반적으로 타라바 게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을 올드 바간이라 말한다. 뉴 바간은 올드 바간 유적지 주변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서 만든 마을로 냥우 지역에서 약 10km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강제 이주는 1990년에 완료되었으며 현재 올드 바간 지역에는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들만 남아 있다. 뉴 바간 지역에는 게스트 하우스, 저가 호텔 및 레스토랑과 칠기 공장, 우체국 등 편의 시설이 있지만 주변에 유명한 사원 유적지가 많지 않아서 관광객의 발길은 뜸한 편이다. 뉴 바간 지역에서 볼 만한 유적지로는 에야워디 강변에 자리한 로카난다 파고다(Lawkananda Pagoda)가 있다. 산의 사진 앞에서 바라보면 멀리 푸파산이 오롯하게 보인다. 그외 여러 사원들 사진도 있다. 사원의 전경을 비롯한 여러 풍경을 내 디카에 사진으로 담기도 했다. 저 바간 사원들은 옛날에는 개인, 부자들, 종교단체 등에서 건립하여 소유했지만 지금은 모두 국가소유다. 개인이 돈독한 불심으로 지은 사원이 많다. 미얀마 사람들의 불교신앙은 사원을 많이 짓고, 사원에 금을 많이 붙이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도 사원은 자꾸 지어지고, 사람들은 금박이를 사서 사원에, 불상에 붙이는 것이다. 사원 안에서 소녀들이 금박이를 들고 다니며 1달러씩 팔기도 한다. 쉐지곤 파고다에서 보았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원칙으로는 남자만이 금박이를 붙일 수 있다. 그런데 여행객들 중에는 여자도 금박이를 사서 붙이곤 한다. 우리 가이드도 관광객 중 여자 불자에게 묵시적으로 허락하여 한적한 곳에서 붙이도록 허락하곤 했다. 전망대는 쉼터로 목조마루와 의지도 조성해 놓아 아늑하다. 이곳 바간 전망대에 올라 미얀마의 전신을 바라본 진풍경은 매우 보람되고 뜻깊은 여정이다.
* 바간 타워 전망대에서 본 직조틀
전망대 건물 1층에 내려오니 옛날 한국에서 어머니들이 직조로 사용했던 베틀이 있다. 여인들이 베틀에 앉아서 직조를 한다. 물론 전시용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옛 직조기구를 본다는 것이 흐뭇했다.
* 바간 호텔 휴식
바간 전망대 근처에 우리가 유숙할 호텔이 있어서 잠시 들러 짐을 풀었다. 호텔이 아늑하고 참 좋다. 양곤 호텔처럼 여기도 빗, 칫솔, 치약까지 서비스가 좋다. 때묻지 않은 나라다. 호텔 로비에 준비해준 사탕도 고운 정감을 준다. 이곳 사탕은 특이하다. 껍질을 벗기니 낱낱이 낱장으로 덮혀진 사탕이다. 천연향이 매우 상큼하다. 아담한 정원에는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다. 오후에는 3개의 사원을 볼 예정이다. 모두 호텔 가까이에 있단다. 오후 4시 30분에는 마차투어도 예약되어 있단다. 30분 정도 소요되며 해지기 전에 마차투어를 해야 되어서 1시간 정도의 휴식 후 오후 2시 50분까지 로비에 다시 모였다. 우리 부부도 더위로 지친 몸만 살짝 샤워하고 나왔다. 저녁에는 선셋 가든식당에서 일몰을 조망하며 석식을 한단다. 호텔 주변에는 숲 들녘과 숲 사이에 솟아오른 붉은 크고 작은 사원들이 매우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이 바간의 실체라는 듯 지워지지 않은 미얀마의 불교역사 유적들이 눈잎에서 전시되고 있다. 참으로 신비로운 풍경을 보는 호텔이다.
* 바간 거리 축제
오후 일정으로 미누하 사원으로 가는 길에 거리 축제를 보았다. 덤으로 얻은 미얀마의 축제 풍경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고운 복장을 한 소녀들이 모여 노래 부르기도 하고, 탈을 쓰고 독특한 의상을 한 남자들이 거리를 누비기도 하고, 사자 등 동물 탈을 여러 사람들이 쓰고 활보하기고 한다. 아마도 오늘 밤 늦게까지 거리 축제가 열릴 것이라고 미얀마인 현지 가이드가 말해준다. 길가에는 나무잎 줄리로 지은 건물도 있다. 미얀마인들의 속살을 보는 참으로 소박하고 정겨운 정취다.
* 바간 허름한 마누하 사원
오늘 오후 일정은 마누하 사원, 부파야 파고다, 아난다 파고다, 쉐구지 파고다 전망대, 마차투어, 선셋석식이다. 먼저 마누하 사원에 왔다. 버스에서 파고다 입장의 정장차림으로 내린다. 즉 신발 벗고 맨발이란 뜻이다. 마누하 파고다 앞은 넓은 흙마당 주차장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여러 상인들이 물건을 판다. 그래서 차와 오토바이, 사람들로 혼잡하다. 마누하 파고다는 석가모니 와불이 있는곳이다. 허름한 외벽 건물이다. 외부가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작은 직사각형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누하 같은 초라한 느낌을 연상시킨다. 입구에 큰 시주함이 있다. 시주함에 시주하기 위한 사다리가 놓여 있다. 불쌍했던 마누하에게 늦게나마 베푸는 따뜻한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쌀 등 많은 시주 물품이 쌓여있다. 마누하 사원은 지어진 것에는 아린 사연이 있다. 마누하는 몬족의 왕국이었던 타톤의 왕이다. 마누하 왕의 백성은 몬족이다. 그 당시는 춘추전국시대였다. 짠시타는 미얀마의 통일 왕조다. 부모형제를 죽여도 불경만 읽으면 된다는 모순된 종교시대였다. 그래서 다시 바간에 좋은 종교를 보급한 것이 소승불교다. 마누하 왕이 경전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나우라타 왕이 타톤의 마누하 왕에게 불교 경전을 요청였다. 그때는 바나나 잎에 글을 적었다. 마누하 왕에게 필사를 요구했는데 그만 거절했다. 이를 거절하자 아나우라타 왕이 침략하여 타톤을 멸망시켰다. 마누하 왕은 아나우라타 왕에게 잡혀 지내다 1059년에 풀려 났다. 결국 마누하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다시 왕이 되어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누하 마누하 사원을 지었다. 마누하 사원은 그의 감옥 생활을 묘사해 놓은 가슴 저린 곳이다. 내부에는 앞쪽에 3개의 좌불이 있고 뒤쪽에는 커다란 1개의 와불이 있다. 거대한 16미터의 석가좌상이 좁은 공간에 앉아있다. 하나는 캄캄하여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형상은 마누하의 옥살이에서 답답했던 심정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외부에는 종이 두 군데 있다. 사원 정원 작은 건물에 마누하와 왕비 동상도 있다. 왕비가 토라져 있다. 남편인 마누하가 경전복사를 거절하고 포로로 붙잡혀 가서 노역을 하며 고통스럽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토라져 외면하는 형상이다. 뒤편으로 가니 28미터의 길게 누운 엄청나게 큰 규모의 석가상이 누워있다. 몸통이 금빛이고 얼굴은 붉은 입술 등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협소한 공간으로 와불 앞은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다. 석가와불은 답답한 마누하의 심정을 묘사한 것이다. 와불상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는데 이것은 죽음만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임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파고다 내부에 불상을 크게 만들어 내부 공간이 협소하다. 왕이 바간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감옥에서 지냈던 답답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파고다 내부는 공간은 만나는 곳마다 무척 협소하여 몹시 답답하다. 이것은 마누하 왕이 포로로 잡혀서 감옥 생활을 하였을 때, 비좁은 감옥에서 느꼈던 기분과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한 국가의 왕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국가가 망하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와서 감옥 생활을 한다는 것이 큰 괴로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마누하 왕이 포로 생활의 고됨을 파고다를 지음으로써 표현하였듯이 미얀마 국민들은 정부에 불만이 있을 때마다 이 사원에 시주함으로써 자기들이 포로와 같이 고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표현한다고 한다. 돌아서 나와서 버스 안에 앉아 있는데 좀처럼 눈길이 마누하 사원에서 떼어지지 않는다. 왜 이곳 사원 앞은 이토록 서민적인지, 상인과 사람들과 오토바이와 차량으로 엉켜 혼잡해도 왜 아름다운 풍경인지 알게 되었다. 타국이지만 모두 가슴 훈훈한 정경이다. 허름한 마누하 사원 떠나가는 외객을 정겨운 모습으로 오랜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포근하게 배웅하였다.
* 바간 이다와리 강변 부파야 파고다
바간의 파고다는 모두 맨발로 입장해야 한다. 나는 예전에 북한산을 맨발로 올라 등정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아파트 서초산의 야트막한 선정을 매일 맨발로 오르던 기억도 떠올랐다. 40대 젊은 날의 고운 회억이다. 그런데 지금 타국에서 흙길, 아스팔트길 구분없이 맨발로 걷는다. 파고다 내부도 걷고, 버스까지 왕복으로 걸어서 돌아온다. 이것도 미얀마에서 겪는 행복한 추억이다. 부파야 파고다는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간다. 이다와리강 또는 에야와디강 강변에 금빛 높이 솟구쳐 오른 호리병 모양의 종탑이 부파야 파고다다. 부(Bu) 파고다의 이름은 미얀마 어로 '박'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부bu는 호리병박을 의미한다. 둥근 지붕의 모양이 호리병박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겹의 연꽃잎 받침대 위로 첨탑이 치솟아 있고, 꼭대기에는 티가 있다. 실제는 부 파고다리고 불러야 한다.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파고다로 북쪽의 성벽이 세워진 850년 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쀼(Pyu)족 양식의 원통형이다. 종탑 앞에는 작은 사원 건물이 있는데, 그 안의 석가상이 화려하다. 영국 식민지 때 우울한 마음을 극복하려고 화려하게 만들었단다. 이다와리강 강변의 아름다운 경치 속에 솟구쳐 오른 금빛 호리병 모양의 종탑이 아름답다. 종탑의 전설은 미얀마에 5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동자승이 모두 해결하여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기념으로 지은 파고다란다. 강변 종탑이 원래는 청색종이었은데 금을 붙여서 금종탑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라와디 강가에 집단으로 서식하는 호리병박을 다 없애 버리고 파고다를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벽돌로 지어졌으나 복원할 때는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은 후에 겉에 금도금을 했다. 지금의 건물은 1975년 지진 때 강에 떨어져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6년에서 1978년 사이에 복원한 것이다. 재건축 당시 석판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3세기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다와리 강과 함께 찬란한 금빛 부파야 파고다는 비경을 선사한다.
* 바간 부파야 파고다에서 본 이다와리강 풍경
미얀마는 13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7개의 대표족이 있다. 그 중 버마족이 70%다. 히말라라야에서부터 흐르는 이다와리강 주변에 모여산다. 이라와디강과 강변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라와디강은 미얀마에서 가장 중요한 강이며 많은 하항을 가진 수운의 요지이다. 강의 전체 길이는 2,170km다. 최대의 지류는 이라와디 삼각주 중앙부에서 합류하는 친드윈 강으로, 미얀마 북동부의 나가 구릉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이라와디 강은 히말라야 산맥의 남단에서 발원한 느마이 강과 말리 강이 카친 주에서 합류해 형성된다. 이후 미얀마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종단하고, 9개로 나뉘어 광대한 삼각주 지대를 형성하며 안다만 해로 흘러든다. 철도나 도로가 정비되기 전의 식민지 시대에는 '만달레이로의 길'로 불리고 있었다.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의 강'을 의미하는 airavati로부터 왔다고 추정되고 있다. 1989년에 연방 정부는 이 하천의 영어 표기를 옛 버마어의 발음에 유래하는 Irrawaddy로부터, 현대 버마어의 발음에 가까운 Ayeyarwady로 개칭했다. 강으로부터 이름을 붙인 이라와디돌고래라는 종도 있다. 이라와디 강은 부파야 파고다 곁에서 절창으로 흐른다. 이곳은 넓은 폭으로 많은 배들까지 품고 있다. 멀리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풍경은 더욱 아름답다. 하루 종일 여기서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과 파고다의 금빛 첨답을 눈과 가슴에 가득 담고 떠나왔다.
* 바간 아난다 파고다 외경
아난다 사파고다 파고다 앞의 주차장은 흙마당이다. 가까운 곳에서 내려 맨발로 걸어간다. 입구가 참 아름다운 조경이다. 숲과 오롯한 파고다의 탑이 참으로 영롱한 비경을 선사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회랑의 길목에는 책과 옷 등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바간의 파고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입구에서 기념품을 팔고, 외부인이 입장할 때의 길목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 들러가도록 되어 있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미얀마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유익한 회랑 길목이다. 아난다 파고다는1091년, 아나와타(1044~1077)왕대 건립을 시작하여, 크얀지따하(1084~1113)왕때 완성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사원이다. 총 면적은 555 평방 미터로, 도시 동쪽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바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아난다 파고다 역시 매우 아름답다. 바간에서 가장 균형미가 뛰어난 파고다이다. 파고다 지붕에는 작은 불탑들과 동물상들이 있다. 부처의 끝없는 지혜를 대표하는 파고다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여성미를 자랑하는 아난다 사원Ananda Pagoda는 히말라야 산에 있는 전설의 난달뮤라 동굴를 본따 건축되었고, 부처님의 시자인 아난존자의 존함을 따서 명명하였다. 한쪽면의 길이가 53m 사각형의 기초단 위에 6개의 단을 만들어 둥근 지붕을 얹고, 그 위에 51m높이 탑을 세웠다. 위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건립 900주기를 맞은 1990년에 금박으로 입혔다. 사원내에는 9.5미터 높이의 부처상이 있다. 카쿠산다는 북쪽, 코나가마나는 동쪽, 카싸파는 남쪽, 최근의 부처 구아타마는 서쪽을 바로 보고 있다. 1975년 지진으로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바간왕조 초기에서 중기로 들어섬을 알리는 중요한 유적이다. 각각의 단 벽면에는 액자 형태의 여러가지 부조물을 새겨 놓았다. 맨아래 단에는 부처의 교화장면이 새겨져 있다. 단의 동쪽면은 3명의 신들, 마라(Mara)라는 악을 물리친 부처의 환희에 찬 모습을 그려 놓았다. 단의 서쪽면에는 마라의 무리, 동물, 악마등을 새겨 놓았다. 그위의 단 벽면에는 자타카(Jataka) 업적을 새겨 놓았다. 현관입구를 지키는 수호동물상 도 있다. 지붕 위의 사장상은 파고다를 지킨다고 한다. 외부 벽에 있는 부조 장식으로 파고다 곳곳에는 파고다를 지켜준다는 신들의 모습들로 장식되어 있다. 파고다 벽의 아래쪽에는 부처의 생애를 부조로 새겨 놓았다. 외벽의 프레스코화도 아름답다. 바간의 파고다들은 동서남북 빙 둘러 길이 나 있다. 1975년의 지진으로 한 번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나, 다시 복원된 후에는 잘 유지되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높고 아득한 파고다 외경이 바간 왕조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 바간 아난다 파고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불상
아난다 파고다에서 가장 큰 특징은 큰 불상이다. 그런데 단순한 불상이 아니고, 그 옛날 왕족과 귀족, 서민의 신분에 차원을 두고 다르게 매겨서 불공을 드리는 위치마저도 지정해둔 것이다. 아난다 파고다를 동서남북으로 도는 길도 3개가 있다. 가장 안쪽은 왕이 다녔던 곳이고, 중간의 길은 귀족들이, 가장 바깥쪽의 길은 일반 서민들이 다녔다. 파고다 내부 중앙에는 약 9.5 m에 달하는 커다란 목조도금의 불상이 서 있는데, 이것은 해탈의 경지에 오른 부처를 형상화 한 것이다. 북쪽과 남쪽의 작품은 원작이지만, 동쪽과 서쪽의 작품은 화재로 손상되었던 것을 복원시킨 것이다. 사면으로 되어 있는 내부에는 입불상이 모셔져 있다. 신기한 것은 가장 바깥쪽에서 불상을 보면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이나, 왕이 다녔던 곳에서 보면 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힌두교처럼 신분 차이를 둔 사원이다. 불공 드리는 위치를 왕족, 귀족, 서민으로 나누어 지정해 놓았다. 왕족은 상단에, 귀족은 중앙에, 서민은 맨 하단에 자리하여 불공을 드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처상 바로 아래의 가까운 곳의 왕족석에서는 부처상이 근엄하게 보인다. 서민의 좌석에서는 부처사이 웃는 인자한 모습으로 보인다. 멀수록 부처상은 인자한 모습이다. 실제로 내가 세 군데 서서 바라보니 그랬다. 아난다 파고다에는 이런 부처상이 몇 개 더 있다. 파고다 내부 벽에는 작게 창문같은 것을 만들어 안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이 1,000개가 있다고 한다. 파고다 내부에 작게 창문같은 것을 내어 안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것을 모웅이라고 한다. 아난다 파고다에는 모웅이 매우 많다. 이 곳에는 또 석조의 불전도, 도판의 본생도, 테라코타판의 본생도가 있다. 서쪽의 밀실에는 이 신전의 주조자의 동상이 있고, 서쪽 문 입구에는 부처의 발자국 있다. 이 외에도 아난다 파고다에는 부처의 생애를 묘사한 다양한 석조물과 불상들이 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도록 세워놓은 큰 금빛 불상이 아주 신비로운 정경이었다. 석가모니 불상은 귀족은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귀족은 평범한 인상으로 바라보고, 서민은 맨 하단에 있지만 아주 포근한 웃음으로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민의 아픔을 포근하게 다독이는 자세가, 그렇게라도 해서 서민에게 위안을 주는 부처상이 돋보이는 아난다 파고다가 대단한 발상의 건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바간 아난다 파고다 연못에 비친 비경
아난다 파고다는 아름답고 화려해서 사랑받는 곳이다. 파고다를 모두 관람하고 나가려는데 현지 미얀마 남자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이끌고 연못 쪽으로 간다. 왜 오라는 걸까, 의아하며 따라 갔다. 연못 앞에는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발을 씻으라는 걸까, 잠시 생가도 했다. 그런데 연못의 끝으로 데리고 가더니 연못 둑에 서 보란다. 일일이 일행을 세워 놓고 아난다 파고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자세히 보니 연못 속에 아난다 파고다가 전신을 비추며 잠겨 있고,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 속에 인물을 담아준다. 파고다 건물만도 아름다운 비경인데 양쪽으로 푸른 나무 숲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경관이다. 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우리는 감탄했다. 친절한 미얀마 현지 가이드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아난다 파고다 비경과 물 속에 비친 비경을 담아 잘 찍어 주었다. 이곳을 우리는 몰랐으니 그 남자가 아니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알고보니 그 남자는 미얀마의 베테랑 20년 가이드 경력을 소유한 소중한 사람이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일이며, 좋은 추억으로 잘 간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보며 행복할 것이다.
* 바간 쉐구지 파고다 전망대에서 본 숲속 사원들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본 파고다다. 마지막 정장차림으로 맨발로 걸어갔다. 입구에 열대과일을 파는 아낙이 있다. 이곳은 전망대를 보는 곳이다. 사원으로 입장하여 전망대로 올라가니 숲과 사원, 그리고 일몰이 비경이다. 쉐구지 파고다Shwegugyi Paya는 버섯 모양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1131년 알라웅시뚜(Alaungsithu) 왕이 건립한 사원으로 패륜의 역사가 남겨진 사원이다. 탓빈뉴 파야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다. 사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실내 계단을 통해 상부로 올라가면 바간의 사원들이 한눈에 조망이 된다.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사원이다. 이곳에서 보는 탓빈뉴 파야의 풍경이 멋지다. 쉐구지 파야는 상부가 버섯 모양으로 건축이 되었으며 큰 문과 개방형 창문이 특징이다. 창문에는 낫의 형상을 표현했으며, 커다란 나무 대문에는 다양한 조각을 해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알라웅시뚜 왕은 만신소와 나라뚜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나라뚜는 아버지가 병들자 왕권이 탐이 나서 아버지인 알라웅시뚜 왕을 이곳에서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서 세운 사원이 바로 유명한 담마양지 파고다이다. 바간 사원 중에서 이 두 사원이 바로 패륜과 관련된 사원이다. 입구의 문이 거무스름하고 다른 사원과는 다르게 칙칙한 분위기다. 여기서는 전망대로 올라가 주변을 조망했다. 푸른 바간의 들녘 곳곳에 솟아오르는 사원들이 비경을 선사한다. 가이드는 장간기가 발동했는지 우리 부부에게 뽀뽀를 하는 장면을 연출해야 찍어준다고 으름장이다. 웃으며 응했다. 많이 다른 풍경에 미얀마 여행의 깊은 의미를 담아간다.
* 바간 마차 투어
쉐구지 사원에서 조금 이동하여 마차투어를 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우리 부부를 태우고 가는 마부는 젊은 남자다. 큰 도로를 달리다가, 좁은 길로 가다가, 산길로, 들길로 지나가며 바간을 보여준다. 덜컹거리며 웅덩이을 지나갈 때는 기우뚱거려 약간 무섭기도 하지만 싱그러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마주치는 바간의 자동차와 사람들 거리 풍경이 신비롭고 행복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어느 길을 가도 주변에 사원이 보인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사원들이 바간의 들녘에서, 숲속에서, 대로변에서 꽃불로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바간이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지 증명해주고 있다. 인도와 캄보디아와 함께 세계 3대 도시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옛날 미얀마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불교유적이 오늘날 후세의 자손들에게 큰 관광수입원을 제공하고 잇다. 마부는 결혼했고, 아이가 아들, 딸 둘이란다. 이작 어리단다. 말은 5년생 암컷이란다. 일을 잘 한단다. 영어를 잘하여서 우리 부부와 얘기를 주고 받았다. 우리를 보며 영어를 잘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 남자가 영어를 정말 잘 한다. 미얀마는 영어를 배우다가 영국이 떠나면서 한동안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1990년에 들어와서야 다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외국인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져서 그런가보다. 바간의 마차체험을 약 30분 정도 마치고 석식식당 앞에서 하차하였다. 어둠이 내리는 밤이다.
* 바간 이다와리강 강변 현지석식
마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간 곳에서 식당을 만났다. 이 식당은 라와디강 강변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강이 보인다. 어둠이 내려 일몰이 사그라들고 있지만 아직 그 비경은 살아잇다. 석식은 선셋을 보며 강변에서 먹는다. 오후 5시 30분에 일몰이다. 강변은 어둠과 노을이 드리워 아름답다. 노을과 강물과 하늘과 바간의 순수한 자연의 낭만을 섞어 풍성하게 베풀어주는 식단으로 배부르고 평화로운 식사를 했다. 미얀마의 음식은 모두 한국의 음식맛과 거의 동일해서 거부스러움이 없이 구수하고 참 맛있다. 얼마던지 여유있게 음식을 갖다주는 미얀마의 고운 손길도 참 고맙다. 내일은 만달레이로 간다. 마하간다용 수도원은 스님이 되려는 자들이 다니는 학교다. 오전 10시 30분에 탁발의식이 있다. 그것을 참관할 것이다. 오늘은 저녁 7시경 호텔에 갈 것이다. 어제 밤 늦게 돠착하여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오늘은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2017년 11월 25일 토요일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이동, 우뻬인다리, 마하간다용수도원,쿠도도파고다, 민군 등
* 바간 호텔 출발
바간 호텔을 떠난다. 오전 5시 모닝콜, 6시 조식, 7시 출발이다. 호텔 내부도 넓고 넉넉하여 아름답고, 외부의 정원도 꽃과 나무로 참 아름답다. 호텔 앞에는 푸른 들녘인데 크고 작은 붉은 사원들이 우뚝우뚝 솟아 비경을 선사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원을 조망하며 바간을 두 눈에 가슴에 담아간다. 호텔 직원들이 우리들의 큰 가방을 버스에 날라다가 실어 준다. 각자 끌고 간다해도 직원들은 그것은 자기들의 소임이라고 생각하여서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네 호텔에 온 손닌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다. 도착했을 때도 친히 버스에서 가방을 내려주고 룸에 갖다준다. 그런데 좀 느긋한 자세가 문제다. 우리 가이드는 빨리 공항에 가야 되는데 천천히 나르는 직원들이 안타까운 것이다. 현지 마얀마 가이드 남자에게 서두르라고 말하니, 잘 하고 있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하니 참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아무튼 잘 마무리 되어 우리는 줄을 지어 서서 배웅하는 직원들에게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며 뜨거운 이별을 고했다.
* 바간 공항 출발
바간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15분 정도 소요된다.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가는 오전 8시 10분 자국기를 타기 위해 왔다. 좋은 날씨다. 기온도 알맞다. 공항에서 가방에 AIR KBZ 마크룰 붙여준다. 우리 나라의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 같은 마크인데 공항을 통과할 때 신속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다. KBZ는 미얀마의 카보자 항공 마크다. 바간 공항 건물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사원을 닮은 형상이다. 비행기는 역시 공항 마당에서 탑승한다. 아담한 공항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금새 흰구름 속으로 진입한다.
*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가는 비행기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가는 비행기는 자국기로 2, 2제 좌석이다. 좌석이 지정석이 없이 탑승하여 아무데나 마음대로 앉으란다. 버스표처럼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은 표를 나누어주었다. 비행기는 뒤쪽의 문으로 올라간다. 앞쪽으로는 짐을 싣는다. 이 자국기는 작아서 가방을 모두 붙여야 한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 가서 왼쪽 네 번째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스님이 앉았다. 비행기 탑승할 때 직원이 우선하여 스님을 불러 앞에 줄을 서도록 한다. 미얀마의 깊은 불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의 노약자나 임산부, 장애자들을 우선 하듯이 미얀마에서는 그에 더하여 스님을 성으러운 대상으로 존경하는 차원에서 우선하여 대해준다. 바간 지상은 푸른 숲 물결이다. 숲 사이로 사원이 보이기도 한다. 바간에서 만달레이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된다. 승무원이 사탕을 바구니에 들고와 집으라고 한다. 미얀마 사탕은 순순한 맛이 나는 독특한 향으로 참 좋다. 비행기는 작아도 흔들림 없이 매우 안정적으로 비행한다.
* 상공에서 본 만달레이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오는 비행기에서 지상으로 보니 농토가 반듯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경작지 주변은 나무로 경계선을 이룬다. 만달레이 상공도 마찬가지다. 울창한 숲이 대부분이고, 더러는 숲 사이로 호수도 보이고, 강물의 구불구불한 물길도 보인다. 비행기 프러펠러가 힘차게 돌아가며 하늘을 달린다. 만달레이 상공에서는 구릉진 산도 보인다. 정겨운 풍경들이다.
* 만달레이 공항 도착
비행기가 만달레이 공항 마당에 도착했다. 만달레이 공항 건물은 하얀 색상으로 세련된 구조다. 공항 버스로 이동한다. 짐벨트에서 짐이 늦게 나온다. 한참을 기다려서 짐을 찾았다. 만달레이 가이드를 다시 미팅했다. 그가 데리고 간 버스가 참으로 크고 시원하여 좋다. 공항에서 만달레이 시내로 이동한다.
* 만달레이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고속도로
만달레이 공항에서 만달레이 시내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먼 거리다. 수도 양곤에서 북쪽으로 622㎞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만달레이는 약 70만명의 인구가 있는 미얀마 제2의 도시이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버마(미얀마의 옛 국명)의 마지막 왕조였던 콘바웅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라 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있다. 만달레이는 도시라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하나의 역사 공원으로 보일 만큼, 개발이 되지 않은 문화유적지와 더불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도시이다. 어떤 이에는 영국 작가로 정글북을 지은 작가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의 "the road to Mandalay"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다는 것을 먼저 떠 올린다. 훼손되지 않는 자연과 최근까지 군사독재 정부가 방문객들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점도 새롭다. 만달레이는 미얀마 제 2의 도시로, 마지막 왕조가 있었던 곳. 도시 중앙에 정사각형의 해자로 둘러싸인 붉은 고성이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수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있어 문화예술의 중심지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이라와디강 연안에 있다. 미얀마족이 세운 콘바운 왕조의 민돈왕(재위 1853∼78)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영국에 점령되면서 중심은 양곤으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의해 시내는 크게 파괴되었으나, 사원과 명소가 많다. 만달레이 언덕 아래에 730개의 탑이 있는데, 이들 탑에는 불교경전들이 729개의 석판경으로 소장되어 있다. 견직물, 차, 양조, 금은보석 세공, 목조각 등이 성하다. 고속도로를 달라며 간다. 도로 주변은 푸른 나무와 숲, 노란 꽃, 하얀 새 등 비경을 선사한다. 날씨가 매우 청명하다. 이곳 만달레이는 미얀마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미얀마 중부 만달레이주의 주도이며 천년 왕조의 역사도시다. 불교문화중심도시 미얀마 제2의 수도로 문화와 예술과 무역의 도시다. 미얀마 최대의 수도원, 마하간다용 수도원과 우뻬인 다리, 마하무니 파고다, 민군의 민군 대탑, 민군 종, 신쀼미 파고다 등을 볼 것이다. 미얀마의 역사를 잘 배우고 갈 것이다.
* 만달레이 시가지 진입
만달레이 공항에서 긴 고속도로를 달려온 끝에서 사거리 로터리를 만난다. 그곳 로터리 중앙에는 아담한 사원 모양의 건축물이 있다. 여기가 미얀마 만달레이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버스는 서서히 만달레이 시가지로 진입하고 있다. 이 도시는 한국의 경주와 유사한 천년고도의 영토다. 미얀마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 왕조 또는 꽁바웅 왕조또는 얼라웅퍼야 왕조의 수도였다. 얼라웅퍼야 왕조는 18세기 중엽 버마족의 얼라웅퍼야가 개창한 후 19세기 후반까지 계승된 미얀마 최후의 왕조이다. 그 수도는 이라와디 강 중류에 있는 슈웨보, 아바, 아마라푸라, 만달레이 등으로 전전하였다. 얼라웅퍼야는 팽창정책을 펼쳐 아유타야까지 원정했고, 제5대 보도퍼야 왕 때에는 동쪽의 테나세림에서 서쪽의 아라칸까지 영유하여 미얀마 최대의 판도를 누렸다. 그러나 영국 세력과 충돌하여 3차에 걸친 영국과 미얀마의 전쟁이 있었고, 결국 1885년 제10대 왕인 시보가 영국군에 포로가 되자 이 왕조는 133년 만에 멸망하였다. 어느 나라든 세계는 지배당하고, 지배하고 그런 고리를 물고 윤회한다. 예외 없이 미얀마에서도 왕조의 번영과 멸망을 듣는다. 많이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 만달레이 우뻬인 다리가 놓인 따웅타만 호수 풍경
만달레이의 아침이 밝아오고 처음으로 가는 여정은 우뻬인 다리다. 미얀마는 모계사회다. 여성주도 사회다. 남편은 잡혀 산다. 여성 목소리가 크다. 그 이유는 여성부가 경찰보다 위에 있어서란다. 외도시 남편은 바람을 피우면 바로 쫒겨나는데 여성은 바람을 피워도 훈도만 한단다. 그러나 여성은 스님이 될 수 없어서 아들을 선호한다. 미얀마에서는 여성 관광객이 스님과 접촉하면 안 된다. 스님의 공덕이 증발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큰 스님의 덕은 어머니에게 간다. 예를 들면 삼장법사의 그 영광은 그의 어머니에게도 동일하게 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머니는 스님이 될 수 없어서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가는데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들어온다. 마침 내가 앉은 창가 쪽으로 호수가 있어서 잘 볼 수 있었다. 호수의 수변도로를 달린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생활하기도 한다. 나무 밑에서 쉬거나 자는 사람, 민가의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있기도 하고, 호수에서는 낚시를 하는 풍경도 보인다. 모두 호수를 둘러싼 진풍경이다. 호수는 끝없이 이어지다가 드디어 우뻬인 다리를 보여준다. 우뻬인 다리 가까이에 다다르자 호변에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우리가 가는 곳은 바로 저 우뻬인 다리다. 우뻬인 다리는 벌써 긴 몸을 호수 위에 늘이고 비경을 선사한다.
* 만달레이 우뻬인 다리 건너기 체험
만달레이 우뻬인 다리는 아마라푸라 지역에 있는 타웅타만 호수를 가로질로 1.2Km길이의 나무로 만들어진 길고 긴 다리다. 미얀먀의 우뻬인 다리에 도착하자 버스가 호수변에 정차한다. 강변에는 배들이 무수히 많다. 그 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마하 간다용 수도원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우리는 버스에서 하차하여 상가들 앞을 지나 우뻬인 다리에 진입하였다. 커다란 따웅타만(Taungthaman) 호수 위에 놓인 티크 우드로 만들어진 긴 다리다. 이 호수 위로 높이 3m, 폭 2m, 총 길이 1,209m에 달하는 목조다리로는 세계 최장의 다리다. 다리다. 수많은 세계인들과 자국민들의 탐방으로 다리 주변과 다리 위는 매우 혼잡하다. 우뻬인 목조 다리는 150년이 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지탱하는 것은 티크나무로 지었기 때문이다. 티크목은 물속에서 썩지 않기 때문이다. 총을 쏘아도 뚫리지 않을만큼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의 참으로 지혜로운 발상으로 건설한 다리다. 오늘 우리는 1.2Km의 긴 나무 다리 길이 중에서 약간의 거리만 걸어볼 것이다. 끝까지 건너갔다 오면 좋을 텐데 오전에는 마하간다 수도원의 탁발의식을 참관하려면 정해진 시간 안에 미리 참석해야하고 또한 오후에는 일몰 비경을 봐야하기 때문에 그리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 뻬인 다리를 건너가는 스님도 있고,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다리 아래에 농토가 있다. 수변에는 상가들이 많다. 오리들이 강물 위에서 평화로이 노닌다. 우 뻬인 다리의 유래와 다리에 담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뻬인은 다리를 짓기위해, 쓰러져가는 궁전에서 티크나무를 가져온 이 지역 시장의 이름이다. 이 다리는 이곳 지역 아마라푸라의 시장이었던 우뻬인이라는 사람이 156년(1849~1851) 전 마하 간다용 수도원과 호수 건너편 지역으로 스님들이 탁발 공양을 갈 수 있도록 보시로 건설한 것이다. 총 1,086개의 티크 우드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다리는 우기철에는 다리 난간 가까이까지 물이 차지만 건기에는 물이 빠져서 가장자리의 다리는 다리목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여름 건기에는 바닥까지 말라 우뻬인다리 밑부분까지 드러낸 호수바닥에 우뚝선 티크 나무기둥이 보인다. 15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미얀마에 오기 전 한국에서 우뻬인 다리를 공부할 때는 조금 두렵기도 했다. 오래된 허술한 다리를 왜 건너는 걸까싶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뻬인 다리를 건너며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평화롭다. 전혀 두려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호수에 반하고, 호수변의 풍경에 반하고, 모고다리의 낭만에 반하여 긴 다리 위를 자꾸 걸어간다. 남편은 이제 오라는 그만 시간이 다 되었다고 돌아서서 가자 하는데 나는 그 소리가 전혀 안 들린다. 저 건너 다리 끝까지 가고 싶은 욕망아 솟구쳐 오른다. 세계인의 걸음을 부르는 이유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정말 마지막 시간의 정점에서 걸음의 방향을 돌렸다. 아침 햇살 조명이 역광이어서 다리 저 건너 쪽으로는 그늘진다. 사진 속에 우뻬인 다리를 많이 담아서 품어간다. 먼 후일 이 순간이 그리울 때 두고두고 볼 것이다. 나도 우뻬인 목조 다리처럼 그렇게 강인하게 세상을 살 것이다. 다리를 건너와서 호수변에서도 고운 낭만에 젖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만달레이 마하간다요 수도원 탁발의식
마하간다용 수도원은 만 20세까지 수용하는 불교대학교다. 만달레이 근교의 아마라푸라에 위치한 수도원이다. 1914년 설립되어 현재 1200여명의 스님이 수행을 하고 있는 미얀마 최대의 수도원이다. 1천 명에서 1천 5백 명까지, 많을 때는 약 3천명까지 수용한다. 위빠사나 수행과 팔리어 삼장 강학을 하는 불교대학이다. 스님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오는 곳으로 인기가 최고인 학교다. 경쟁이 치열하다. 만달레이의 대표적인 수도원으로 미얀마 최대 규모의 탁발의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탁발이란 스님들이 먹을 음식을 사람들로부터 공양받는 것이다.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백성들이 베풀어준 지비로 해결한다는 의미다. 매일 1천여 명의 스님들이 오전 10시 15분경이 되면 맨발로 아침 공양을 위해 나선다.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세계인들, 자국민들, 사진가들이 마하간다용 수도원을 찾아온다. 수도승들의 중식시간이 12시이므로 수도원의 탁발의식을 보기 위해 10시 30분까지는 수도원에 입장해야 되어서 우뻬인 다리에서 서둘러 왔다. 다행히 우뻬인 다리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이곳 입장 역시 정장차림이다. 맨발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수도원 안에 들어가지 수도승 학생들이 자주색 스님정복을 입고 오간다. 그리고 우리는 탁발의식이 있는 길목으로 갔다. 도로에는 벌써 두 줄로 장대한 행렬이 이어져 서 있다. 잠시 후 수백 명의 스님들이 긴 줄로 걸어서 다가온다. 한동안 두 줄의 수도승 청년들이 자나간 후에 뒤이어 한 줄은 조금 큰 청년 학생들, 한 줄은 유치원 수준의 어린 학생들 행렬이다. 나의 8살짜리 초등학교 1학 손자쯤 되는 남아들, 아니 유치원생쯤 되는 어린 남아들이 하얀 제목을 입고 지나간다. 개인 또는 단체에서 보시를 한다. 먹을 것과 학용품 등을 준다. 탁발의식 행렬은 오래도록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는 스도승들이 큰 식당 안에서 중식을 하고 있다. 열린 문으로 수도원 학생들이 실내에서 보시해온 음식을 먹는 모습이 보인다. 미얀마에서는 스님이 높이 존경받는 인물이다. 저들은 머잖아 스님으로 자리매김한다. 부모에게는 큰 효도를 하는 것이고, 개인에게도 큰 영광인 것이다. 모드 찬란한 인물들이다. 지금도 그들의 불심에 우러러 보인다.
* 만달레이 마하무니 파고다 거대 불상
마하무니 파고다는 2500년 전의 부처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는 거대한 황금불상이 있는 곳으로 아주 큰 뜻을 지닌 곳이다. 마하무니는 '크다, 성자, 큰 성자, 큰 부처님, 이세상에서 부처가 들어간 불상'이라는 뜻이다. 그레이트 파고다(Great Pagoda) 또는 파야지라고도 한다. 1784년 마하무니 부처상을 모시기 위해 보도우파야(Bodawpaya) 왕이 파고다를 세웠다. 금박의 무게만 12톤이 넘는 화려하고 값비싼 거대한 금불상이 있다. 이곳의 거대한 불상은 미얀마의 3대 보물 중 하나다. 미얀마의 3대 보물은 양곤에 있는 황금사원 쉐다곤 파고다, 짜익토 산정 절벽에 아슬하게 세워진 흔들바위 격의 황금바위 짜익티요 파고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2500년 전의 부처상을 꼭 닮았다는 마하무니 황금불상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황금바위 짜익티요만 못 가고 2군데는 본다. 쉐다곤 파고다는 여행 마자막 날 양곤에 가서 볼 것이다. 짜익티요 파고다는 이곳에는 먼 산의 산정에 세워진 파고다라서 갈 수 없다. 우리는 그 대신으로 헤호의 팡도우 파고다를 간다. 마하무니 금빛 좌불상은 엄청나게 커서 문에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 입구에 모니터를 설치해 놓고 현재의 모습을 티브이로 중계해준다. 모니터에는 남자들이 여러 명 불상 앞에서 금박이를 붙이고 있다. 저런 불교의식은 여자는 금지다. 오직 남자만이 허락된 의식이다. 미얀마에서 인 되는 것 3가지가 있다. 1.아이의 모리를 만지면 안 된다. 2.여성은 불상을 못 만진다. 3.여성은 불상에게 금박이를 못 붙인다. 여성은 스님에게 붙여 달라고 해야 된다. 그렇게 공덕을 쌓으면 된다. 미얀마의 사람들은 남의 물건에 손을 안 댄다. 특히 사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이 지갑을 사원 불상 앞에 두고 나왔는데 한참 후에 갓는데도 그대로 있더란다. 570년대에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대승불교로 되어 중국, 한국 등으로 포교되었다. 미얀마는 몬족 때 마누하 왕 때 전성기였다. 만달레이는 1440년 바간에서 불교가 들어왔다. 그래서 만달레이를 천년고도 천년된 불탑이라 칭한다. 조금 돌아서 가보니 시주함이 있고, 돈이 많이 들어있다. 꽃다발을 바친 것도 있다. 또한 불상이 있는 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불공을 드린다. 미얀마의 불심 가득한 풍경이다.
* 만달레이 마하무니 파고다 외경
거대 불상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파고다 건물 지붕은 보수 중으로 철근구조물들로 싸여 있다. 사원 정원은 그리 넓지는 않은데 꽃과 나무들로 아름답다. 그리고 종이 두 군데 있다. 미얀마의 파고다에서는 항상 보는 종들이다. 종은 하나 아니고 크고 작은 여러 개씩 놓여 있다. 누구나 치도록 허락된 종들이다. 미얀마는 10명 중 9명이 불교신자다. 미얀마 사람들의 사후 시신은 모두 화장한다. 미얀마에는 무덤이 거의 없다. 아웅산 공동묘지도 뼈가루를 뿌린 곳이다. 세계여행은 그 나라의 명소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문화, 풍습, 지식, 정보 등 많은 것을 배우는 소중한 여정이다.
* 만달레이 마하무니 파고다 불상 세안
마하무니 파고다 뒤편에는 불상을 세안히는 곳이 있다. 매일 새벽 4시에 얼굴을 씻기는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그 물이 약물이라고 많이들 퍼간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불상을 세안한다. 물을 그릇에 떠서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부어 씻긴다. 나도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세안에 참여했다. 그런데 미얀마 남자 아이가 내 곁에서 세안히기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이의 얼굴에 바른 것은 미얀마의 썬크림으로 사용하는 다나까라는 식물의 액이다. 다나까는 나무인데 그리 흔하지 않은 나무이고 서서히 자란다. 다나까 나무 껍질을 벗겨서 두드리고 치대어 즙을 내어서 사용한다. 단순히 썬크림 목적만은 아니고 미얀마의 사람들에게는 화장과 같은 것이다. 얼굴 주요 부위에 바른다. 미얀마 여행 중 곳곳에서 남자도, 여자도,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저렇게 노란 다나까 즙을 얼굴에 바른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전신에 바르기도 한다. 오늘날은 화장품 원료로도 사용한다. 불상 세안을 하며 다나까를 바른 선한 미소의 남자아이도 만나고, 흐뭇한 순간이다.
* 만달레이 마하무니 파고다 입출구 풍경
미얀마의 피고다 앞은 어느 곳에서다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이유로는 여행객이 많고, 불공드리는 용도의 꽃을 파는 상인도 많고, 기념품을 파는 가게 혹은 거리의 상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하무니 파고 역시 그렇다. 싱그러운 나무들이 울창하여 불심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다. 우리들의 버스가 주차한 곳은 아스팔트 길가다. 맨발로 파고다를 오가는 길은 흙길일 때도 있고, 이렇게 단단한 아스팔트 길도 있다. 지금은 거칠고 단단한 아스팔트 길 위를 맨발로 걸으며 불자의 체험을 진하게 하고 있다.
* 만달레이 시가지 풍경
미얀마의 제2 도시 만달레이는 문화, 예술이 발달된 도시다. 분지 도시로 미얀마의 중앙에 있다. 오토바이가 비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오래도록 헌 것을 탄다. 초봉이 20~30만원이다. 싱가포르는 40만이고 말레이시아는 60만원이다. 그런데 한국은 100만원이 넘는다. 그래서 미얀마 사람들은 한국에 가길 원한다. 한국에 가면 사장을 잘 만나야 된다고 말들을 한다. 한국 사장은 '빨리빨리'를 좋아한단다. 어떤 일을 잘 못해도 그냥 무조건 '해보겠다'고 해야 된단다. 이것이 미얀마에서 한국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란다. 과거 식민지시대의 렬국 유물이 많다. 양곤에 특히 많다. 만달레이 분지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아니고 구릉이 가라앉아 내려앉아 생긴 분지다. 분지 도시라서일까. 바간보다 위쪽에 있는 도시인데 바간 못지않게 덥다. 그런데 바간과는 많이 다르다. 바간은 다듬어지지 않은 고전적인 낭만이 흘렀는데, 만달레이는 잘 다듬어진 화사한 낭만이 흐른다. 시가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중식을 한 식당 근처의 도시는 현대적인세련된 풍경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정경이다.
* 만달레이 샤브샤브 현지 중식
마하무니 파고다에서 10분 정도 달려온 식당이다. 아주 더운 날씨다. 미얀마는 연중 기온이 10도~37도다. 그런더 한여름에는 체감온도가 50도나 되는 아주 더운 나라다. 특히 만달레이는 평지에 움푹 파인, 산언덕이 파인 분지라서 더욱 덥다. 이곳 식당은 중국인이 주인이다. 만달레이에는 중국인이 많다. 그래서 부자 도시란다. 샤브샤브 뷔페식당으로 많은 식재료를 제공해준다. 식탁에는 네 명씩 자리가 배정되어 있고, 1인당 작은 인버터 전기가스렌지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육수를 담아 올려놓은 작은 냄비가 하나씩 놓여있다. 자기가 먹고 싶은 식재료를 마음껏 담아다가 이 냄비에 익혀서 먹는다. 음식재료는 야채, 고기, 생선, 버섯 등 아주 다양하다. 나는 오징어, 꼴뚜기, 조개, 게, 새우를 주로 하고 돼지고기, 닭고기, 두부, 버섯, 파, 배추, 무 등도 많이 먹었다. 수박, 멜론 과일까지 완벽한 식단이다. 재료를 담아 나르는 하나의 용기도 대단한 아이디어다. 만달레이에는 사업을 하는 화교들이 많다. 이곳이 도심이어서 이런 식당을 만난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하여 만달레이의 수준이 높다. 꺠끗하고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는 시가지다. 지난 10월에 다녀온 중국 서안의 채선당 샤브샤브 메뉴와 유사하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육수로 국물을 부어 주어서 아주 맛있게 잘 끓여 먹었다. 세계여행에서 먹는 즐거움도 하나의 큰 행복이다. 두고두고 생각날 고마운 식당이다.
* 만달레이 쿠도도 파고다
쿠도도 파고다는 민돈왕이 25년에 걸쳐 1857년에 완공한 파고다이다. 729개 파고다 안에 각각 석장경을 넣어 보관해 두었다. 석장경 안에는 부처님의 말씀이 적혀 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책'으로 불린다. 파고다는 미얀마 냥우에 있는 쉐지곤 파고다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피고다 입구에 민동왕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또한 입구에 729개의 석장경으로 인해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도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 오랜 역사를 긴직한 우람한 나무가 있다. 그 주변에는 하얀 작은 사원들이 많다, 그 사원 안에는 불경을 새긴 석장경이 들어 있다. 바간에서 보았던 금빛 쿠도도 파고다 본전과 하얀 불경 보관 사원들이 비경을 이룬다.
* 만달레이 쿠도도 파고다 729개 석장경 보관 하얀 사원들
쿠도도 파고다는 제5차 경전 결집대회를 연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경전은 2500년 전 부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불경을 제대로 필사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729개의 불경을 파내다가 통달한 삼장법사에 대하여 적어놓은 석판들이다. 미얀마어로 기재했다. 쿠도도 파고다는 이런 729개 비석 위에 건립했다. 2013년에 유네스코에 등재 되었다. 하얀 작은 사원들이 729개 놓여 있으니 쿠도도 파고다는 그야말로 대단한 비경을 이룬다. 곁에는 우람한 금빛 파고다 높은 건물이 치솟아 오르고 있다. 오랜 역사를 드러내듯 사원 내에는 큰 나무들도 있다. 석장경 하나, 하나를 사원 하나, 하나에 잘 보관해 두었다. 가이드는 우리 부부를 한 사람씩 주처로 만들어 준다며 부른다. 문을 오픈하여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허락한 사원이 하나 있는데, 그 안으로 한 사람씩 들여보내더니 부처님처럼 양반다리 좌식으로 석장경 앞에 앉힌다. 그리고는 석장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다음에는 쇠창살 문을 닫아준고는, 문 안에 갇혀 있어도 부처라며, 또 한 장의 사진을 찍어준다. 흐뭇한 체험이다.
* 만달레이 궁전과 해자
만달레이 궁전과 해자는 시가지 이동 중에 두 차례 보았다. 버스가 해자 곁의 도로를 달릴 때 끝없이 긴 궁전 건물과해가가 보였다. 현존하는 미얀마 최대의 성이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만달레이 왕궁은 해자를 끼고 발달하여 만달레이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만달레이는 이라와디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이고, 계획 도시답게 바둑판 모양으로 잘 구획정리되어 있다. 양곤은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고, 만달레이는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다. 만달레이 궁전Mandalay Royal Palace을 중심으로 도시는 방사형으로 뻗어있다. 성벽 한 변의 길이가 3.2 km다. 긴 해자가 성벽과 함께 비경으로 흐른다. 너비 70m, 깊이 4,5m 해자가 궁전 사방을 둘러싸고 지키고 있다. 왕궁은 해자로 둘러 쌓인 정사각형의 요새로 만달레이의 상징적인 존재다. 1857년에 수도를 양곤으로 이전하면서 지어진 궁전이다. 가이드는 석가모니가 미얀마에 와서 만달레이에 궁전과 해자를 짓고 수도로 정했단다. 궁전은 2Km×2Km의 정사각형으로 중국 자금성을 본떠 지었단다.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꼼방 왕조의 궁전이란다. 잘 보존되어 있단다. 이 역사적인 궁전을 중심으로 만달레이는 활기차다. 그 동안 영국 침범 등으로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허물어져 1998년 군사정부가 복원 한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규모의 궁전인지 짐작케 한다. 푸른 해자의 물이 탱탱한 미얀마의 하늘과 마주하여 궁전을 보듬어 안고 청청한 비경을 선사한다.
* 만달레이 청명한 하늘 흰구름 비경
미얀마 여행 중에 흰구름을 보는 것은 아주 예사로운 풍경이다. 비행기로 이동할 때 상공의 구름도 저렇게 하얀 구름덩이들이 비경을 이루었다. 때묻지 않은 순수의 땅 미얀마는 하늘까지도 순수하여서 청빛 자막에 흰구름을 명화로 깔아 선사한다.
* 민딜레이 시골 장터
민군으로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이동 하는데 시골 장터가 보인다. 어느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장터인 것 같다. 온갖 물건들을 팔고 있다. 사람들도 많아서 그야말로 아름답고, 소박하고, 옛스런 낭만을 선사한다.
* 만달레이에서 민군으로 가는 유람선 승선
만달레이 이라와디 강변에서 유람선을 타고 민군으로 간다. 선착장 주변이 차량과 상가와 사람들로 복잡하다. 민가, 배, 상가들이 즐비하다. 큰 유람선에 승선했다. 우리 일행 19명만 승선한다. 민군까지는 40분 정도 소요된다. 배의 2층으로 올라왔다. 배에서 물건을 파는 두 청년이 있다. 민군에 들어가서 신뷰메 사원과 민군종, 민군대탑을 볼 것이다. 하늘의 흰구름이 비경이다. 이라와디강을 유람하여서 간다. 이곳 이라와디강은 그 폭이 상당히 넓다. 길이도 2천킬로미터가 넘는 매우 긴 강이다. 배들이 많다. 물은 누렇다. 강바람이 시원하다. 빨래가 널브러져 걸린 강변 마을이 소박한 정경이다.
* 유람선에서 본 이라와디강 풍경
만달레이에서 민군으로 가는 유람선은 이라와디강을 타고 흐른다. 이라와디강은 2천킬로미터가 넘는 아주 긴강이다. 히말라야산에서 발원한 강은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거쳐서 흐른다. 미얀마는 만다레이의 도심을 흐르며 양곤까지 이어지는 강이다. 지금 배가 지나가는 곳은 폭이 상당히 넓다. 뒤로는 만달레이가, 앞으로는 민군이 보인다. 청명한 하늘에는 흰구름이 장관이다.
* 이라와디강 유람선에서 본 민군 풍경
만달레이 시내에서 중식 후 유람선을 승선하여 이라와디 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민군으로 이동한다. 약 40분~50분 소요예상이다. 미얀마의 에야와디 강은 우리나라의 한강 격으로, 미얀마의 젖줄이라 부르는 강이다. 만달레이에서 배를 타고 이 강의 상류 쪽으로 가면 각종 불교유적이 있는 민군에 도착한다. 민군에 가까워지자 우람한 산자락 아래 하얀색의 신뷰메 파고다와 웅장한 민군탑이 아련하게 보인다. 민군은 만달레이 북서쪽으로 약 12Km 떨어져, Irrawaddy강의 서쪽 건너편,사가잉(Sagaing)위쪽에 위치해 있는 영토다. 많은 불교사원, 수도원,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요한 기념탑 등으로 세계인들이 찾는 곳이다. 특히, 민군 종(Mingun Bell)과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민군 파고다(Mingun Pagoda)는 민군을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기대에 부푼 가슴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진다.
* 민군 유람선 선착장 하선
유람선이 민군에 도착했다. 선착장은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나무 판대기를 배와 땅 사이의 물 위에 걸쳐놓고 그 나무판 다리를 건너서 하선한다. 나무판 포기 좁고 흔들거려서 조금 무서운데 양쪽에서 선원들이 손을 잡아 도와준다. 승선할 때도 이렇게 했다. 선착장 주변에는 아이들이 나와 손을 잡아 흙언덕을 이끌고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면 1달러지폐, 혹은 사탕을 주며 고마움을 표현한다.참으로 원시적인 풍경인데, 아름다운 정경이다.
* 민군 선착장에서 신뷰메 파고다로 타고 가는 미니버스
민군 선착장에서 하선하여 먼저 신부메 사원으로 가기 위해 미니버스를 탔다. 4명~6명 정도 타는 차량이다. 한국의 미니 트럭 같다. 미얀마 서민들이 제일 많이 이용하는 교통 수단이다. 픽업트럭과 이를 개조한 미니버스다. 주로 일제 토요타 소형 트럭을 개조해서 화물칸에 양쪽으로 나무 의자를 놓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마을버스 개념이다. 우리 일행도 나누어서 4대의 미니버스로 탔다. 선착장에서 신뷰메 파고다로 간다. 운전사 곁에는 조수가 타고 있다. 앞과 뒤, 옆이 열려있어서 바깥 풍경이 다 보인다. 민국의 소박한 거리와 하교하는 학생들이 시야에 담긴다. 진풍경을 보면 신나는 체험한다.
* 민군 신뷰메 파고다
민군에 하선하여 제일 먼저 탐방한 곳이다. 신뷰메 파고다Hsinbyume Pagoda는 미얀마의 바지도 왕이 왕자 시절 첫번 째 부인인 신뷰메 공주를 기리기 위해 1826년 건축한 백색 파고다다. 이 민군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꼭 보아야할 파고다다. 민군대탑과 민군종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선착장에서부터 민군대탑, 민군종, 신뷰메 파고다 순서로 늘어서 있다. 우리는 선착장에서 제일 먼 거리에 있는 이곳 신뷰메 파고다에 왔다. '흰색 코끼리' 라는 뜻을 가진 신뷰미 파고다는 총 7단으로 건축되어 있다. 새하얀 테라스로 장식되어 있어 기막힌 풍경이다. 바다와 산을 상징하는 물결무늬의 층이 7단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하얀 레이스 주름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형상으로 거대한 삼각형의 파고다가 시야를 채운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아내가 출산으로 죽은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남편인 왕이 세워 주었다는 이 신뷰메 파고다가 가슴 저리도록 뜨거운 사랑으로 다가온다. 정확히 말하면 1816년에 보다우파야 왕의 손자이자 후계자였던 바지도Bagyidaw의 첫 부인 신뷰메 공주가 첫아기를 출산하다가 사망하였다. 바지도는 꼼방 왕조의 3대 왕이 되어서 첫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첫번째 부인 신뷰메 공주를 기리기 위해서 이름도 부인의 이름을 붙여 신뷰메 파고다를 세운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사랑인가. 왕 시절도 아니고, 왕자 시절에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이런 엄청난 규모의 백색 사원을 지어 기리고 있으니, 같은 여자로서 눈부신 사랑에 목이 메인다. 7단의 하얀 주름으로 너울너울 아롱진 사랑, 7개의 골로 줄줄이 내려오는 곧은 사랑, 찬연한 순백의 사랑이 비늘지어 차곡차곡 슬프게 죽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교와 연관지어 7개로 지었단다. 나는 그것까지는 잘 모르지만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담아 올린 거대한 하얀 불탑 앞에서 덩달아 함께 큰 기쁨으로 행복하다. 저 사랑의 탑은 내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 찬란한 사랑의 등불로 내 정원을 밝히리라. 이 불탑은 1836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1874년에 재건되었다. 파란 하늘에 오롯하고 드넓게 자리한 하얀 신뷰메 파고다는 그 어떤 말로도 형언키 어려운 비경이다.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꼭대기인 7층에 오르면 민군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이드는 자유시간을 주었다. 덥고 힘들지만 우리 부부는 7층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신뷰메 파고다의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다. 숲으로 출렁이는 민군의 풍경이 아름답다. 그리고 건너편으로 민군탑이 오롯하게 보인다. 오르내리는 계단이 가파르고 좁아서 힘들지만 신뷰메의 순수한 속살까지 두 눈에 담은 소중한 여정이다.
* 민군 신뷰메 파고다 정상에 올라 바라본 민군탑
신뷰메 파고다 정상에 올라서 바라보니 민군탑이 오롯하게 보인다. 울창한 숲 사이로 웅툭하게 솟아있다. 다 짓지 못한 슬픈 사연이 깃든 불탑이다. 곧 가 볼 것이다.
* 민군 신뷰메 파고다에서 민군탑까지 타고 나온 미니버스
아까 선착장에서 타고 온 미니버스를 또 타고 민군대탑으로 간다. 4명~6명 정도를 태운다. 이곳 사람들은 티셔츠에 긴 치마 모양의 론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우리를 기다리는 미니버스의 남자 청년도 그런 차림이다. 이 차량은 트럭을 개조한 모양이다. 덜컹거리기도 하고 유년의 시골길 달리던 트럭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참 재미있는 미얀마의 교통수단이다.
* 민군의 민군종
신뷰메에서 선착장 방향으로 조금 달려나오니 도로변에 민군종이 있다. 아름다원 사원과 유산한 건물 안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규모로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있는 종이 크지만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 있는 종은 현재는 갈라져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현재 미얀마 사가잉 구 민군에 있는 민군종The Great Mingun Bell은 타종이 가능한 종 중에서는 세계 최대 크기의 종이다. 민군대탑과 함께 제작한 민군 종(Mingun Bell)은 무게가 약 90톤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얀마역사상 가장 길었던 왕조인 콩바웅왕조의 보다파야왕(1782~1819)에 의해 1805년에 만들어져, 민군 파고다에 헌정되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제일 큰 종을 만들기 전까지는 이곳 민군 종이 세계 최대 크기의 종이였다. 무게는 90.52톤이며, 종의 둘레 5미터, 높이는 3.7m로 종 아랫부분 직경이 4.8m에 이른다. 종은 민군동쪽, 이라와디Ayeyarwady강 중앙에 있는 섬에서 주조되었다. 종의 주조작업은 1808년4월 29일 밤에 시작되었다. 무게가 약 107톤의 구리가 종의 주조에 소요되었다. 종의 도리부분에 '왕조 28년, 1810년 3월 23일 주조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는 거의 2년동안의 작업기간을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종의 울림소리를 얻기 위해, 고대 미얀마 전통의 제조법에 따라, 5가지의 금속 금, 은, 동, 철, 납을 합금하여 주조되었다. 종을 주조하는데 쓰인 비용도 엄청난 돈이 들었다. 강을 가로질러 민군 파고다까지의 수송작업에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주조된 종은 1811년 Raft Creek운하로 옮겨져, 종 아래에 2겹의 덮개를 씌운 바지선을 축선한 후, 운하에 물이 찰 정도의 비가 오길 기다려 옮겨졌다고 한다. 종 아래에 두겹으로 된 바지선과 운하가 완성되어, 이제는 강물이 라프트크릭 운하를 채우고, 바지선을 뜨게 하는 우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1811년 드디어, 운하에 강물이 차고, 왕은 친히 강을 채운 배들과 황금빛 바지선을 이끌며 자축하였다. 소형선대에 둘러싸인 종을 실은 바지선은 잘 견디었고, 무사히 종을 운송할 수 있었다. 왕과 왕비, 왕자, 공주, 왕손들, 장관, 국민들이 경사스러운 이날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운송에 동원된 금속 주물공, 목수, 브라민, 기술자, 노동자들 모두에게 많은 돈과 옷감, 장신구등을 포상하였다. 1838년 지진으로 종의 지지대 부분이 부러져 방치되다가 19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되었다. 1982년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한 바퀴를 돌아보니 참으로 모양이 아름답고 거대한 종이다. 제조과정도 어려웠겠만, 운반과정도 그렇게 힘들었다고하니 미얀마의 불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둑해질 무렵 떠나왔다.
* 민군의 민군탑
민군탑 또는 민군대탑으로 부르는 이곳은에 온 것은 민군의 마지막 여정으로 저녁 무렵이다. 만들레이에서 이라와디강을 건너 11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선착장에서는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 부부는 먼저 민군 탑의 마크가 있는 안내판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니 미얀마의 어린 아이가 서서 내려가지 않는다. 이것도 나중에는 고운 추억이겠구나싶어 가운데에 그 귀여운 아이를 놓고 그냥 찍었다. 민군은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인 꽁바웅 왕조의 보도파야 왕(바돈 왕, 1781~1819)이 자신의 왕위 등극을 자축하기 위해 1790년에서 1797년까지 만들다 미완성에 그쳤다. 세계 최대 규모의 탑 건설을 목표로 지은 것이다. 보도파야 왕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 강화와 내부 결속을 목적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탑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리하게 1,000여 명의 노예와 전쟁포로를 동원하며 혹사시켜서 공사를 추진했다. 혹독한 노동에 지친 라카인족 인부 1천여 명이 몰래 라카인 인도 영토인 아쌈(Assam) 지역으로 도망친다. 당시 라카인 아쌈 지역은 보도파야 왕이 당시 영국이 지배하던 인도로부터 빼앗은 영토였다. 인도와 국경 문제로 미묘한 분쟁이 일던 지역이다. 보도파야 왕은 도망친 라카인들을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얀마 군대는 도망자들을 추격해서 인도 땅인 라카인 아쌈 지역을 침범하게 된다. 이에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이 국경 침범을 이유로 미얀마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 결과 꽁바웅 왕조는 비운의 마지막 왕조가 되고 밍군 대탑 역시 건설이 중단된 채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이를 계기로 영국과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탑 건축은 중단된 채로 300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꽁바웅 왕조의 불운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이 지배하게 된 동기가 부여된 서러운 유적지이기도 하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민군 대탑은 지진으로 금이 가고 여러 곳이 허물어져 있다. 그래서 대탑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 불탑은 한 점성술가가 이 탑이 완성되면 왕이 죽을 것이라 예언하는 바람에 완공되지 못한 채 오늘날 까지 남아 있다고도 전해진다. 거대한 외관을 자랑하는 이 불탑은 완성되었다면 건물의 높이가 150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불탑이 되었을 것이란다. 탑으로 오르는 긴 계단이 있다.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나무들 사이로 아름다운 경치가 전개된다. 보도파야 왕이 높이 152m로 만들려고 계획했던 밍군 대탑은 현재 70m 정도의 높이에서 상층부 공사가 멈춰져 뭉툭하게 그대로 있다. 1838년과 1956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탑의 입구 부분과 양쪽 기단 부분이 심하게 금이 가고 일부는 허물어져 버렸다. 지진으로 금이 가고 허물어진 모습이 참으로 소슬하다. 대탑 안에는 촛불을 밝힌 불상이 하나 놓여 있고 노스님 한 분이 앉아서 키키고 있다. 불자들은 시주를 하며 공양을 드린다. 탑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탑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다. 2013년부터 밍군 대탑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붕괴의 위험 때문에 폐쇄가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전탑으로 흙벽돌로 쌓은 탑이다. 멀리서 바라보던 규모로도 컸지만 실제로 탑을 올라보니 상당히 높고 큰 규모의 불탑이다. 내려오면서 중턱 쯤에 설치된 종도 보았다. 미얀마의 슬픔이 서린 불탑이 오늘날은 세계인의 걸음을 부르는 뜻깊은 명소가 되었다.
* 민군탑 앞에서 선착장까지 타고 나온 미니버스
민군탑에서 내려와서 또 미니버스를 탔다. 줄줄이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주 스릴 만점인 마을 버스 같은 차량이다. 그런데 미니버스 뒤에 미얀마의 어린이 두 명이 매달려 타고 있다.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서 바람으로 떨어질까 아슬한 풍경인데 두 남자 아이는 신난 표정이다. 외지의 손님에 묻혀서 돈을 내지 않고 차를 타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선착장까지는 가까운 거리다. 즐거운 미얀마의 교통 체험이다.
* 민군에서 만달레이 가는 유람선 승선
이제 민군 탐방을 마치고 다시 유람선을 승선한다. 선착장은 그리 잘 정비해 놓지 않았다. 흙언덕길을 조심조심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배까지 가는 길도 나무판으로 길게 다리를 놓아준다.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무서운 길이다. 그래도 선원들의 손잡아 주어서 잘 승선했다. 이제 유람선은 만달레이로 간다. 40분~1시간 소요되는 이라와디강의 뱃길이다. 민군이 뒤에서 이방인을 포근하게 배웅한다.
* 만달레이 이라와디강 일몰 비경
배는 점점 민군에서 멀어지고 있다. 배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물과 음료를 파는 청년 두명이 있다. 일행 중 9명이 한 팀이 되어 온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 중 한 분이 맥주를 사서 나누어준다. 더운 날씨로 갈증을 사르는 고마운 손길의 음료다. 시간은 점점 강물 위에서 흐르고, 어느새 태양은 일몰을 준비한다. 해는 붉은 덩이가로 산 사이에 내려 앉으며 찬란한 일몰 비경을 연출한다. 이라와디강과 민군과 만달레이와 강물과 태양이 연출하는 걸작 명화다. 나는 이런 비경 앞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가슴속 정열이 분무하여 온몸이 출렁인다. 2층 뱃머리에서 바라보고, 의자에서 바라보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 만달레이 이라와디강 선착장 도착
유람선이 만달레이 선착장에 도착햇다. 아까 출발했던 그곳이다. 현지 마을 아이들이 나와서 바라보다가 나무판 다리를 아슬하게 건너오는 우리를 보고 마중나와 손잡아 이끌어준다. 나를 이끌어준 아이는 10살 쯤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날 데려다 주고 또 배로 가서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 참 인정 많은 미얀마 아이다. 어스름 저녁 시간이다. 강변에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강변 민가 마을도 있고 정겨운 풍경이다.
* 만달레이 유일한 가로등 거리
선착장에서 저녁식사 식당으로 가고 있다. 영국 정글북 작가의 아들이 만든 곳 '만달레이 가는 길 위'라는 곡을 들으며 간다. 식당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어둡던 거리가 갑자기 버스가 지나가는 어느 길에 가로등이 밝게 켜져 있다. 가이드 말로는 이곳이 유일한 마얀마의 기로등 거리란다. 미얀마도로에는 기로등이 없단다. 양곤에서 호텔 밖의 풍경이 가로등이 없는 어둠의 거리로 그랬다. 이, 그렇구나, 나는 이제서야 양곤의 그 어두운 새벽 풍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곳 가로등 거리는 양곤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중요한 도로란다. 서울의 강남과 같은 거리란다. 조금 달려가니 아까 낮에 지나며 보았던 만달레이 궁전이 보인다. 만달레이 궁전 근처에서 오리고기와 맥주로 석식을 하고 호텔로 간다. 만달레이는 여러 가지로 잘 정비된 도시다.
2017년 11월 26일 일요일 만달레이에서 헤호로 이동, 인레호수, 수경재배, 팡도우 파고다, 인땡유적지 등
* 만달레이 호텔 출발
오늘은 헤호로 간다. 아침 5시 모닝콜, 6시 조식, 6시 30분 출발이다. 새벽 5시경 기상했다. 화장을 하려는데 전기가 나간다. 우리 호텔만 나갔나 했는데 이 지역 모든 곳이 캄캄하다. 한국의 1960년~70년대의 풍경이다. 옛날 집집마다 준비해 두던 촛불과 프래시의 아련한 향수가 떠오른다. 정전으로 캄캄한 풍경을 참 오랜만에 체험한다. 미얀마는 하루에 2회씩 정전된다. 인구가 600만 명인 양곤도 하루에 2회 정전이란다. 그러나 1분 후에 다시 전기가 들어온다. 정전의 이유는 전력관계로 그렇단다. 밖에는 비가 줄줄 온다. 조식을 간단히 했다. 어제 중식으로 샤브샤브 요리를 잘 먹었고, 석식으로 오리고기를 잘 먹어서 아직도 든든하다. 조식 후 사진 찍으려고 오텔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비가 내린다. 아담한 로비다. 이제 만달레이 공항으로 간다. 헤호로 가는 자국기를 탑스할 것이다.
* 만달레이 공항 가는 길
만달레이 공항은 두 개가 있다. 우리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하나, 40분 거리에 하나 있다. 그런데 근거리에 있는 공항은 작고 거의 정지되었다. 원거리에 있는 공항은 국제, 국내선이 함께 있어 크고 우리도 지금 그곳으로 간다. 미얀마는 도시의 역할이 분산되어 있다. 양곤은 경제, 수도 네파도는 정치, 만달레이는 문화를 담당한다. 스님들의 보시는 새벽 4시 30분부터 6시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금 7시경인데 만달레이 시내에 보시 나온 스님이 보인다. 비가 점점 그쳐간다. 미얀마의 1년 5월~11월까지 중 반은 우기다. 지금은 11월 말로 우기가 끝나는 시기다.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검은 사이로 일출이 일렁인다. 강을 2개나 지나간다. 들녘에 숲이 넘실거린다. 미얀마는 135개 부족 중 7개 족에게 자치구를 허락하였다. 소수민족은 산간벽지에서 거주한다. 노예였던 라카인족 1천 명이 인도로 도망간 사건으로 인하여 영국이 미얀마를 정복하였다. 그 당시에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기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지배 당하던 시기에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도 일본과 내통하던 불순한 사람과 라카인이 같은 격이란다. 미얀마는 인도와 라카인족을 가장 싫어한단다. 1948년 미얀마가 독립했다. 그때 버마공화국이 탄생했는데 라카인 부족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이들로 인하여 영국이 침범했기 때문이다. 아웅산 장군이 독립을 주도했지만 그는 독립을 보비 못하고 죽었다. 아웅산은 버마의 어버지다. 일본과 손잡고 영국을 몰아냈다. 그런데 영국 30년보다 일본 3년이 더 고통이라 했다. 아웅산은 터키의 아타투르크, 베트남의 호치면 격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사람이다. 국가마다 애국 영웅이 있다는 사실을 미얀마에서도 듣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만달레이 공항에 진입했다.
* 만달레이 공항 출발
아침에 호텔에서 새벽에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공항에 도착하니 다행히 흰구름과 햇살로 날씨가 화창해진다. 아담한 공항이다. 공항 안으로 들어와서 비행기표를 받았다. 바간에서 만달레이 올 때처럼 좌석이 지정되지 않은 표다. 한국의 버스표 격이다. 비행기 안에 들어가는대로 원하는 좌석이 앉으면 된다. 짐을 부치고 게이트로 가려는데 원래 9시 20분 출발예정이던 헤호행 자국기 비행기가 1시간 지연 출발이란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탑승 게이트는 1층 11번 출구인데 그곳은 복잡하다하여 2층 넓은 자리에 마주 앉아서 담소로 나누며 기다렸다. 그런데 특한 의자가 보인다. 우리나라의 임산부, 어린이, 노약자 지정 좌석 같은 의자에 스님의 모양이 하나 더 추가 되어 있다. 의자 받침대에 스님, 어린이, 임산부, 노약자 이렇게 네 명의 그림이 새겨진 것이다. 미얀마의 불심에 대한 높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국민의식 속에 짙은 불심과 스님에 대한 존경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간에서 만달레이 오는 비행기를 탑승할 때도 공항직원이 스님을 먼저 불러 모셔오더니 가장 먼저 탑승하도록 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배려에 말하지 않는다. 바간에서도 아름다운 정경을 보았는데 만달레이에서도 아름다운 정경을 본다. 공항 마당에 국내선 비행기가 들어와 있다. 국내선 비행기는 작고 날개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있다. 복도 길이 있는 게이트 앞에는 국제선 큰 비행기가 들어와 있다. 그런데 또 20분 지연되어 총 1시간 20분이나 늦게 출발한단다. 만달레이 공항은 일기가 좋은데 헤호공항의 일기가 고르지 못해서란다. 공항 마당의 비행기들을 보며 한동안 쉬고 드디어 비행기를 탑승했다.
* 만달레이 상공
지상은 반듯반듯한 경작지 농토가 많다. 날개 부분에서 빙그링글 돌아가는 프로펠러가 비경이다. 비행시간은 30분이다. 가까운 거리인데 비행기를 티고 가는 것이다. 미얀마의 육로교통이 발달되지 않아서다. 좌석은 2,2제로 KBZ 항공이다. 승무원이 사탕 바구니를 들고 와서 각자 가져가도록 한다. 미얀마 사탕은 순수한 맛이 나서 몇 개 가져다 먹었다. 아름다운 미얀마 자국기 탑승체험이다.
* 헤호 상공 흰구름과 프로펠러의 비경
만달레이 공항에서부터 헤호 공항까지는 30분 소요되는 거리인데 구름이 상공에 많아 비행기가 좀 흔들린다. 기류가 몰려오면 비행기는 구름층을 뚫고 가느라 요동친다. 하얗게 뭉실뭉실 뜬 큰 구름층을 여러 번 지나간다.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하얀 구름이 비경을 선사한다. 이곳 항로는 저공 비행인데도 유난히 흰구름이 많다. 프로펠러는 여전히 힘차게 돌아가며 상공에 맴을 그린다. 우리 부부는 앞부분에 앉아서 프로펠러도 잘 보이고 상공과 지상도 잘 보인다. 흰구름과 프로펠러의 멋진 조화, 잊지 못할 비경이다.
* 헤호 공항 상공
구름이 지나가고 지상의 헤호의 영토가 보인다. 헤호는 산과 물이 많은 도시다. 그래서 지상은 온통 산악지대다. 산을 깎아서 만든 경작지도 보인다. 구릉진 농토가 있고 간간이 민가도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헤호 공항 도착
화창한 날씨다. 아담한 공항 마당에 칙륙했다. 바로 곁에 공항 건물 있어서 걸어서 공항 안으로 갔다. 공항 건물도 실내 풍경도 시골 어느 버스터미널처럼 아담하다. 공항 안과 밖이 모두 작은 규모다. 30km쯤 떨어진 곳에는 인레호수가 있어서 호수를 관광하려는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다. 마을 북쪽에 작은 공항이 있는데 만달레이 항공과 양곤 항공, 미얀마 항공 등이 양곤과 헤호, 만달레이와헤호 노선을 운항한다. 헤호에서 약 40분~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인레호수에 도착한다. 헤호 가이드를 미팅했다. 버스는 역시 45인승 아주 크고 좋다. 19명이 두 좌석에 1명씩 앉아도 자리가 남는다. 사람은 먼저 버스에 승차하고 만다레이에서 부친 짐은 늦게 나와서 공항직원이 버스로 운반하여 실어주었다. 오전 11시다. 예정본다 많이 늦어진 시간이다. 공항주변 사람들이 모두 긴 팔의 두터운 옷차림이다. 우리 남자 가이드도 긴팔 추리닝을 입었다. 낮에는 덥다는데 조석으로는 서늘하단다. 버스가 정차한 정류장 곁에 허술한 화장실이 하나 있다. 장애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나무 아래 앉아서 돈을 받는다. 사람이 나오면 화장실 뒤로 가서 양동이로 물을 담아 화장실로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1960년~70년대 그 모습이다. 시골 터미널 등에서 화장실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주변에 노천상인들이 많다. 저 화장실은 공항 주변 상인들이 사용하고 있다. 가끔씩 버스 손님도 사용한다. 가난한 국가의 서러운 풍경이지만 열심히 사는 정겨운 풍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가는 길
헤호 공항에서 출발하여 인레로 간다. 자연과 종교가 공존하는 헤호다. 헤호(Heho)는 고원지대에 자리한 미얀마의 도시로 여름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는 항상 시원한 날씨와 청량한 공기다. 산악지대라서 신을 넘어서 간다. 산마을의 민가도 보인다. 인레 마을에 가까이 오자 농토가 보인다. 들녘에서 벼를 탈곡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 우리나라의 탈곡 풍경이다. 벼가 느렇게 익어가는 논도 있다.한국은 앙상한 겨울풍경인데 미얀마는 겨울인데도 푸름이 넘실거리는 여름, 가을 풍경이다. 헤호는 많은 사람들이 싼산맥(Shan Mount)에 있는 인레 호수를 가기 위해 찾는 곳이다. 헤호에서는 인레 호수와 인따족, 수경재배, 가내수공업 공방가, 목이 긴 여인 빠다웅족, 실크제조, 담배, 수상사원 팡도우 파고다, 인땡유적지 등을 볼 것이다. 이곳 혜호 공항에서 인레지역으로 약 1시간 이동한다. 그곳 낭쉐 선착장에서 5인승 전용보트로 인따족의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청정호수 인레를 탐방한다. 인따족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수상 가내수공업 단지를 둘러보고, 수상족 특유의 외발 노젓기, 수경재배 현장도 둘러본다. 호숫가 위에 떠있는 수상식당에서 샨주의 특산물 100% 오가닉 토마토와 고추를 시식하며 중식을 할 것이다. 작은 크기의 다섯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며, 끊이지 않는 참배객들의 불사로 공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는 팡도우 파고다도 탐방한다. 목에 무거운 목걸이를 하고 사는 목이 길어 슬픈 빠다웅족 공방도 방문하고 인땡유적지까지 오늘의 헤호 일정은 참으로 독특한 낭만의 여정이다. 참 고맙고 행복한 순간들이다.
* 헤호 인레호수 마을 풍경
헤호 인레 호수 마을에 접어 들었다. 벌써부터 거대한 호수의 물이 시야에 담긴다. 호수변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멀리 큰 산이 병풍처럼 산줄기를 이루며 둘러서 있다. 흰구름과 함께 비경이다. 물가 수로를 따라 민가 마을을 이루고 산다. 호변 마을의 민가 사람들은 물가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빨래 등을 하고 있다. 내 유년의 시골 마을 풍경이다. 물이 안마당으로 흘러드는 집도 있다. 물이 집 곁에서 출렁거리며 사람과 물이 하나로 산다. 길가에는 소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다. 주로 하얀 소들이다. 누렁소도 더러 있다. 소떼가 들녘에서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인레 마을은 인따족 소수민족이 사는 수상도시다. 인따족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 고원지대 호수도시다. 모든 것이 신비롭고 눈과 가승을 활짝 열어주는 미얀마의 행복한 여정이다.
* 헤호 인레 호텔 휴식
먼저 인레 호텔로 왔다. 짐을 풀고 잠시 휴식하고 인레 호수로 갈 것이다. 이곳은 낭쉐마을로 인레호수로 가는 선착장이 가까이 있다. 낭쉐지역은 바간처럼 들어올 때 입장료를 내야 한다. 1인당 13500원이란다. 바간도 그랬다. 입장료는 절대 환불이 없단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보고, 누리고, 탐방하도록 허락해준다. 바간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관광지마다 입장료를 내지 않아 번거롭지 않고 좋은 미얀마의 여행방침인 듯하다. 호텔은 마을 가운데 있다. 호텔 직원들이 버스에 마중 나와서 가방을 날라준다. 우리 부부의 3층 305호실 방에서 커튼을 제치고 보니 소박한 마을 정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마을 가운데 사원도 하나 크게 자리하고 있다. 호텔 앞에는 오가는 마을 주민들이 보인다. 잠시 휴식하고 로비에서 다시 모였다. 걸어서 가면 10분 걸리는 낭쉐 선착장인데 더워서 버스 기사님이 우리를 태워다 주신단다. 선착장 주변은 대형버스를 주차하기 힘들다는데 고마운 배려다. 그래서 선착장이 여러 개 있는데 대형버스가 주차하기 좋은 선착장으로 간단다. 마을의 좁을 길을 따라 보트 선착장으로 간다.
* 헤호 인레호수 보트승선 선착장
인레 호텔에서 버스로 3분 정도 걸려 인레호수의 냥쉐 선착장에 왔다.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50분~1시간 이동하여 인레 호수 수상마을로 간다. 인레 호수는 미얀마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담수호로 길쭉한 모양으로 뻗어 있다. 선착장 대합실 벽에 인레 호수의 지도가 붙어 있다. 정말 길게 북에서 남으로 뻗어있다. 우리는 북쪽의 낭쉐 선착장에서 모터보트를 승선하고 인레호수의 남쪽으로 갈 것이다. 대합실에서 긴 계단으로 내려가니 호수변에 좁은 폭의 긴 모양 보트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호수처럼 긴 모양의 보트들이다. 자연과 수상가옥에서 살아가는 현지 민족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는 곳이다. 벌써부터 그들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인레 호수 외에도 헤호에는 불상들이 모셔진 파고다가 있어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경험할 수도 있다. 오늘의 일정은 모두 인레호수와 함께 보내는 신비와 낭만이 흐르는 흐뭇한 여정이다.
* 헤호 인레호수 보트 승선
모터 보트를 승선한다. 정감어린 배다. 배 한 척에 5명 정원이다. 옛날 우리 나라의 경운기 모터와 동일하여서 소리가 뒤에서 요란하게 난다. 우리 부부는 교포 가이드와 현지 미얀마 여자 가이드 4명이 승선했다. 앞에는 물이 튄다고 남자 가이드가 우산을 받쳐들고 탔고, 뒤에는 모터소리로 시끄럽다고 현지 여자 가이드가 타서 우리 부부를 가운데 앉히고 양끝에서 잘 막아쥰다. 특히 시동 켤 때 더 요란하다. 모든 것이 다 미지의 세계다. 알 수 없는 배이며, 알 수 없는 호수, 알 수 없는 수상마을로 흥겨운 호기심 가득 안고 전진한다. 햇살이 수면에 반사하여 눈부시다. 썬글라스를 쓰고, 모자가 바람에 날려서 스카프로 꼭 매었다. 헤호는 고산지대로 밤기온이 영상 10도까지 떨어져 춥다, 더운 나라라 난방시설이 없어 두꺼운 옷을 꼭 준비하란다. 헤호는 이따가 올 때 저녁 무렵이면 추워서 두터운 옷을 가지고 간다. 호텔방이나 버스 안에는 히타가 있단다. 헤호는 겨울에는 히타를 틀 정도로 서늘한 지역이란다. 삼성 히타가 인기란다. 헤호는 해발 1,328미터에 위치한 산악도시다. 헤호에 있는 인레호수는 200여 개의 소수민족 마을로 구성되어 수상의 삶을 이어간다. 미얀마의 독특한 문화체험 여행지다. 남북 22Km, 동서 11Km 길이의 광활한 호수로의 수상 여정 출발이다. 수상가옥, 수상경작지, 사원, 수상시장, 전통공예공방 등을 보고 올 것이다. 지금 출발한 선착장 주변의 호수는 양쪽 마을이 잘 보이는 좁은 물길이다. 보트가 많이 왕래하여 물빝이 황토색이다. 우리를 태운 배도 힘찬 출발이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가옥 정경
모터 보트는 뒤에서 선원이 조정한다. 그리고 앞쪽은 보트의 뱃머리가 불쑥 치솟아 오르는 형상이다. 뒤편으로 엄청난 물살리 솟구쳐 튀어올라 공중에 분사한다. 아주 특이한 배다. 배가 점점 호수로 나가가 벌써 수상가옥이 보인다. 자가용격의 보트가 집앞에 정박해 있다. 정겨운 풍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식물 비경
호수가 점점 넓어진다. 주변에는 오가는 보트들이 많아진다. 보트가 지나갈 때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물살이 치솟아 분사하며 비경을 자아낸다. 우리의 배도 마찬가지다. 호수변에 수상식물이 있다. 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큰 나무도 있고, 잔잔한 식물도 있다. 이 호수는 관광만 하는 호수가 아니고 인따쪽의 삶의 현장이다. 그래서 주변의 배를 보면 물건을 실어나르는 풍경도 보인다. 이들은 배가 육지의 자가용이나, 버스나 택시 같은 개념이다. 점점 수상 식물이 수경재배지 전개된다. 하늘의 구름은 어찌 이리도 하얗고, 어찌 이리도 찬란하게 뭉실거리는가. 무어라 예찬하면 보담이 될까. 나는 벌써부터 훈훈해지는 가슴이다.
* 헤호 광활한 인레호수 보트 질주
보트가 드넓은 호수의 가운데를 질주한다. 인레 호수Inle Lake는 샨 주(Shan State)북동부에 있는 나웅쉐(Nyaung Shwe)에 있다.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명소다. 유럽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미얀마의 관광지이다.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로 표면적 116㎢이다. 해발 875m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으로 22km, 동서로 11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정 호수다. 우기에는 약 1.5배 정도 늘어나서 남북의 길이가 최대 33km까지 늘어난다. 인레호수의 청청한 물이 청빛으로 하늘과 만나 절창이다. 우람한 산줄기의 길게 감싸안는 산맥과 탱탱하게 투명한 하늘, 그에 더하여 순백의 희디희 흰구름의 춤사위, 청청한 호수가 걸작 명화다. 사진을 찍는 그곳이 모두 명품 예술의 명화를 연출한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넓은 곳이어서, 이곳 호수에서는 여러 곳의 뱃길이 있어 저 멀리에서도 보트가 왕래한다. 물빛도 아주 푸르다. 지도 보았을 때 아주 넓은 공간이 있었다. 호수가 아니라 바다 같은 물이 한가득이다. 한낮의 햇살은 물 위에 장엄하게 분사하고 장대한 호수의 물은 푸름 청청하게 응수하여 진풍경을 이룬다. 나는 한껏 마음이 부플어, 내 뒤에 앉은 남편을 연신 부르며, 저기, 저어기, 여기, 여어기를 보라며 어린애처럼 흥분하고 있다. 남편도, 나도 지상 최대의 환희에 젖어 낭만의 현을 탄다.
* 헤호 인레호수 수경 토란, 토마토, 고추 재배
보트가 수경재배 지역으로 진입한다. 농작물은 토란이 물가에 심겨져 있고, 그 안으로 토마토, 고추가 있다. 막대기를 많이 꽂아 놓았다. 물 위에 그물을 식물 줄기를 얹어 일군 수상 밭이라서 흔들리지 않도록 크로 작은 가둥을 많이 박아두는 것이다. 인레호수도 엄청 넓지만 수경재배지도 엄청 넓다. 보트가 그 수상재배지 사이로 서서히 지나가며 진풍경을 선사한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가옥들
수상 농경지 주변에는 수상가옥이 많다. 육지의 주택 주변에 밭이 있다는 개념이다. 이들은 인레 호수가 땅이고, 수상 경작지가 논이고 밭이다. 끝없이 어이지는 진풍경이다. 미얀마의 하늘 호수에 인따족의 수상 마을은 수상생활을 하며 일생을 살아간다. 인레호수의 사람들은 아이들도 노젓기를 매우 잘 한다. 지금 내 눈앞에도 혼자서 보트를 몰고가는 아이가 있다. 저들은 당연한 일상인데 외인의 눈에만 신비로운 풍경인 것이다. 헤호는 미얀마 북부의 해발 1,328m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22km의 넓은 호수 위에 200여 채의 마을이 있다. 수상가옥은 지상의 집처럼 서로 다르다. 그리고 부자와 가난도 보인다. 잘 지은 가옥도 있고, 허술한 가옥도 보인다. 밭도 일구고, 심지어 사원까지 있는 수상민족의 터전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초가을 정도의 서늘한 날씨다. 참으로 평화로운 정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수경재배
미얀마 인레호수는 수경재배로 유명한 곳이다. 방송에서도 여러 번 방영되어서 나도 많이 보아왔다. 미얀마 여행 중에서 기대되는 신비의 여정이다. 물 위에 대나무를 엮어서 띄우고 그 위에 흙을 뿌려서 토마토나 고추 같은 농산물을 수경 재배한다. 인따족들은 저 호수 위에서 삶 영위한다. 물을 좋아하는 토란을 맨 가장자리에 심었다. 거름은 물 속에서 건져올린 수초나 진흙으로 사용한다. 눈부신 햇살과 호수의 맑은 바람, 천연의 거름을 사용하여 지은 아주 깨끗한 농작물이다. 이런 풍경은 호수의 여러 곳에서 보여준다. 우리의 보트 선장인은 아주 인자하고 잘 생긴 미남이다. 호수를 질주하는 길도 그의 생김새처럼 멋지고 아아한 길로 인도한다. 모든 것이 다 평화 가득한 미얀마의 정겨운 선물이다. 참으로 행복하여서 눈과 가슴이 활짝 열리고, 내 생애의 최고 축복이 부여되는 순간이다. 모두 담아갈게요. 두고두고 이 고운 정경을 사랑하며 기억할게요. 호수도, 수경재배도, 선장님도, 보트도, 인따족도, 수상가옥도 오래도록 내 정원에 모실게요. 이것이 제가 드리는 가장 큰 보답입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치며 인레호수의 절경을 두 눈에 가슴에 담았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 마을
헤호의 인레호수는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 호수다. 이 곳에는 '호수의 아들' 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따족' 이 살고 있는 수상마을이 있다. 미얀마 인레호수는 거대한 물과 함께 인간을 품는 거대한 사랑이 있다. 인간을 위해 100~150가구 정도가 한 마을을 이루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호수 위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가옥뿐만 아니라, 수경재배를 하는 경작지, 전통 공방 등이 있다. 수상마을의 주요 교통수단은 '제티' 라 부르는 배다. 지금 우리가 타고 가는 저트 보트도 있다. 가늘고 긴 배를 외발로 노를 저어 이동하기도 하고 모터 보트로 이동하가도 한다. 인따족은 수상마을에서 수상시장, 경작, 수공예 등 여러 경제생활을 하며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 수상마을은 지상의 어느 마을 못지 않은 풍요가 넘실거린다. 눈부신 비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농경지
헤호 인레호수의 수경재배는 하나의 거대한 농장이다. 나는 티브이에서 볼 때는 어느 한 단면만 보여주어서 후수 한켠에 설치한 수경재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광활하게 전개되는 미얀마 인레호수의 수경재배지는 그게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농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것이 소득을 올려주는 생활의 한 수단이다. 호수 위의 경적을 하는 수경재배지를 쭌묘라고 한다. 쭌묘는 8Km 정도 길이다. 미얀마 물 위의 삶을 일구는 터전이다. 쭌묘는 대나무 기둥을 세운 후 대나무를 엮어 틀을 만든 후 그물을 엮고, 틀 위에 수초과 진흙을 얹어서 인위적으로 물 위에 만든 농토다. 헤호의 인레호수에서 인따족은 수경재배를 하는데 쭌묘에서는 토마토, 고추, 가지 등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물을 재배한다. 미얀마 전역에서 팔리는 토마토의 절반이 쭌묘에서 재배된 것들이다. 수경재배를 통해 토마토, 고추, 가지, 꽃 등을 경작하여 판매한다. 특히 수경재배를 통해 생산된 토마토는 미얀마 전역으로 판매된단다. 우리 부부는 지금 인레호수에서 배를 타고 쭌묘 사이사이를 나아간다. 이제 끝인가 하면 수상가옥이 이어지고, 수상농경지가 이어지고, 호수는 처연하게 인따족의 모두를 수용하고, 이렇게 외인의 탐방까지 허락하고, 나는 지금 어느 우주의 먼 공간에서 마주하는 듯한 꿈같은 신비로운 체험의 순례를 하고 있다. 오래도록 내 노년의 정원에 비추일 축복이다. 행복이다. 건강이다. 사랑이다.
* 헤호 인레호수 중식식당 보트 하선
어느새 보트가 중식식당 앞에 왔다. 우리가 잘 하선하도록 선장은 끝까지 잘 도와준다. 인레호수에서의 1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눈부시게 태우고 여기 왔다. 보트에게, 선장에게 고마웠다. 하선하여 중식식당으로 올라갔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 중식식당
수상식당은 매우 넓은 좌석을 설치해 놓았다.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식사를 한다. 수많은 세계인들이 찾아온 것이다. 주변은 육지의 정원처럼 푸른 식물로 잘 조성해 놓았다. 인레호수는 '호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미얀마의 수상족인 인타(Intha)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살아가는 인레호수 주변은 트레킹 코스도 있다. 중식을 하러 왔는데 밥보다 더 좋은 호수의 생활 풍경에, 나는 뜨거운 낭만에 젖어 호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한다. 남편은 어서 밥 먹자고 부르지만 나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타고 온 보트가 식당 아래의 호수가 물줄기를 분사하며 지나가는 풍경은 기막힌 비경이다. 서로 손을 흔들며 환호한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선사받은 이곳은 축복의 영토라는 생각이 든다. 물이 바로 아래에서 출렁이는데 두려운 생각은 전혀 없다. 물은 사람을 지켜주는 존재로,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그렇게 다가온다. 반나절을 함께 살아온 인레호수가 나에게도 고운 삶의 자락으로 새겨지고 있다. 그러니 자손대대로 살아온 인따족에게는 얼마나 자연스럽고 포근한 둥지겠는가.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더운 기후의 미얀마인데도 여름을 제외하고는 서늘한 기온으로 살기도 좋다. 맑은 물과 드넓은 호수가 풍부한 수산자원과 수경재배로 농산자원을 제공해준다. 오늘 보트를 타고 이곳까지 들어오면서 인따쪽의 삶의 현장을 눈앞에서 많이 보았다. 인레호수에서 수경재배한 고추, 토마토, 가지, 양배추 살은 것, 오이 등이 식탁에 나왔다. 신선하고 향도 좋고 맛 있다. 돼지고기 볶음이 유년시절 마을에서 키운 돼지고기와 같이 고소하고 맛있다. 닭볶음도 맛 있다. 무엇보다도 찹쌀밥은 최고의 인기였다. 인따족 청년 직원이 찹쌀밥을 자꾸 나누어 주어서 실컷 먹었다. 아름다운 식당에서 인따족의 풍성한 대접으로 아름다운 식사를 한 오늘,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훈훈한 사랑으로 품어 가리라.
* 헤호 인레호수에서 재배한 고추와 토마토
인레호수에서 수경재배한 고추와 토마토가 중식식사 메뉴로 나왔다. 맛은 육지에서 재배한 것과 동일하다. 오히려 선선하여서 더 상큼하다. 고추도 매운 맛을 내며 향이 제대로 난다. 보트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그 수상경작지에서 재배한 작물이라 생각하니 더욱 정감이 간다. 물의 체온이 손끝에 뜨겁게 전해진다. 호수는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안따족의 삶을 지탱해주는 신비로운 영토다. 티브이에서만 보아오던 미얀마의 헤호 인레호수 수상생활을 보고, 먹고, 느끼며 재대로 체험하고 있다.
* 헤호 인레호수 중식식당에서 가내수공업단지로 가는 보트
중식식당 수상건물에서 다시 보트를 승선하고 가내수업단지로 간다. 늘 우리가 필요할 때 보트는 와서 고맙게도 정성껏 태워간다. 인따족의 고운 사랑이다. 여전히 인레호수는 파란 하늘과 흰구름, 그리고 수상가옥들, 시ㅜ상식물들로 비경을 이룬다.
* 헤호 인레호수 외발노젓기
헤호 인레호수의 인따족 주민들은 주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인레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독특한 모습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카누처럼 생긴 작고 날렵한 배를 타고 한 발로 배에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발로는 호수 속에 둥근 원통의 그물을 넣었다 빼는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똑바로 선 채 발 한쪽을 들었나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외발로 노를 저으면서 수상가옥에서 생활하는 만큼 모든 교역도 수상에서 이루어진다. 물고기를 잡거나 해초를 수확한 뒤, 수경재배를 통해 수확한 농산물과 기타 각종 물건을 배에 싣고 다니면서 수상에서 직접 물건을 사고 판다. 미얀마 인레호수의 외발로 노 젓기는 세계인에게 크게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색적인 생활방식과 아름다운 호수풍경 때문에 연중 해외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헤호 인레호수 잘 지은 수상건물
인레호수를 보트로 이동하다보면 수상가옥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수상가옥이 여러 종류다. 풀잎으로 지붕을 만든 허름한 집도 있고, 지금 보는 저 집처럼 아주 좋은 재료로 육지의 집처럼 잘 지은 집도 있다. 주로 상가건물이나 학교 같은 곳으로 보이는 건물이 잘 지었는데, 민가로 보이는 주택도 잘 지은 집이 더러 보인다. 이곳 호수 위에도 분명 빈부의 차이는 있다.
* 헤호 인레호수 광활한 농경지
인레호수에서 수없이 보는 농경지다. 크고, 작은 그리고 가까이, 멀리서 쉼없이 보여준다. 인레호수 인따족은 육지의 밭처럼 수상 경작지를 일구어 농작물을 재배하여 먹고 산다. 여러 개의 대나무를 엮어서 밭고랑처럼 물 위에 띄우고 그 위에 흙을 뿌려서 자신의 영토를 마련한다. 그리고 토란, 토마토, 가지, 고추 등 수경재배가 잘 되는 종류의 채소를 재배한다. 이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호수 위에 대나무나 통나무로 집을 짓고 대를 이어 수상생활을 해오던 곳이다. 인따족의 75%인 8만여 명이 이곳 광활한 인레호수 주변에 마을을 이루며 살아간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인레호수를 숙명처럼 품고 수상에서 생을 이어간다. 티크나 대나무를 호수에 깊이 꽂아 기둥을 세운 뒤, 이 기둥을 중심으로 수상가옥을 만들고 산다. 이들은 육지처럼 서로 이웃으로 모여서 기대어 마을을 형성한다.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각자의 생활을 영위한다. 참으로 기이한 문명의 부족생활을 보고 배우는 뜻깊은 여정이다.
* 헤호 인레호수 가내수공업단지
헤호는 미얀마의 고원지대인 산주 타웅지에 형성된 작은 마을로, 200여 개의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는 만큼 실크 공방, 담배공방, 수공예 공방 등 다양한 공방들이 형성되어 있다. 인레호수의 보트를 타고 제일 첫 방문지로 가내수공업단지에서 하선하였다. 여인들이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짠다. 옷감을 짜던 인따쪽 여인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릴 적 베를 짜시던 어머니를 연상 시키는 훈훈한 정경이다. 그리고 여인들이 둥글게 모여 점심식사 하는 모습도 보인다. 미얀마 인레호수의 인따족들이 물레와 베틀을 이용해서 만든 비단이나 무명을 만들어 미얀마 각지에 판매한다. 헤호 소수민족의 섬세한 손길을 볼 수 있는 수공예 공방이다. 또한 그들은 물레와 베틀을 이용해서 가내수공업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곳 인레호수에서 생산하는 무명, 비단, 직조물은 미얀마의 육지상가에서 거래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물레를 이용해 살을 뽑는 할아버지도 있다. 가내 수공업 단지 한켠에서는 연꽃 줄기로 옷감을 만드는 인따족의 연사 수공예 공방도 있다. 여인은 연꽃 줄기를 꺾어서 나오는 즙으로 금새 실을 만들어 보여준다. 그 실로 내 손목에 매어주니 연꽃실 팔찌가 되었다. 이 팔찌는 인레호텔에 돌아올 때까지도 그대로 있을 만큼 튼튼했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곱게 웃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잘 보관해 두었다. 곁에는 아들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엄마를 지켜보고 있다. 인따족 주민들이 손수 만든 제품들을 판매하기도 한다. 인따족과의 소중한 만남이다.
* 헤호 인레호수 가내수공업단지에서 본 호수 풍경
이곳 가내수공업단지 역시 수상 건물이어서 주변은 온통 호수의 물로 가득하다. 하지만 잘 조성된 수상식물과 나무들로 육지의 그 어느 풍경에도 뒤지지 않는다. 좁은 수로에서는 보트 행렬이 이어지 비경을 선사한다.
* 헤호 인레호수 가내수공업단지에서 담배공방으로 가는 보트
인레호수에서는 어느 곳으로 가던 보트를 타고 이동한다. 담배공방으로 가는 물길이 매우 아름답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수상가옥들과 수상농경지 등이 많다. 물은 청정하여서 햇살과 만나 비경을 이룬다. 탱탱한 하늘과 흰구름이 그리는 그림도 명화다.
* 헤호 인레호수 담배공방
여러 명의 여자들이 앉아서 담배 잎가루를 바나나 잎사귀에 싸서 말아서 풀로 붙인 후 자른다.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나진 않는다. 한쪽에서는 담배잎 마른 것을 차곡차곡 쥐어서 묶는다. 꼭 들깨잎 비슷한데 그보다 약간 크다. 미얀마 인레호수에서 잎을 이용해 담배를 수공업으로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무척 큰 담배공방이다.
* 헤호 인레호수 담배공방에서 본 낚시그물
담배공방에서 밖으로 나오니 호숫가에 인레호수의 물고기 잡는 모습을 재현하기 위한 낚시그물을 놓아 두었다. 미얀마 인레호수의 전통 고기잡이다. 한 발로 배에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발로는 호수 속에 둥근 원통의 그물을 넣었다 빼는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그물 안에 목각 물고기도 한 마리 넣어 두어서 우리 부부도 외발노젓기 고기잡는 풍경으로 다리를 한쪽 들어보았다. 외발로 선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좋은 체험을 한 것이 흐뭇했다.
* 헤호 인레호수 담배공방에서 팡도우 파고다 가는 보트
보트를 타고 팡도우 파고다로 간다. 여전히 주변은 야자나무, 바나나 나무 등 식물이 풒성하다. 물이 땅인양 육지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수상가옥들도 모두 평화롭게 놓여있다. 마을을 구성한 곳으로 지나간다. 점점 팡도우 파고다가 오롯한 첨탑을 솟구쳐 비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팡도우파고다 5불상
팡도우 파고다는 인레호수 물 위 인공섬에 있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에 이어 미얀마에서 2위 사원이다. 양곤 쉐다곤 파고다는 미얀마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곳이다. 파웅도우 파고다에는 미얀마 5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면서 금을 붙였기 때문에 둥근 모양이 되었다. 파고다 중앙에 잇는 5불상 주변에는 남자 신도들이 올라가서 금박이를 붙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면서 금을 붙였기 때문에 둥근 모양이 되었다. 미얀마에서 여자는 불상 가까이 가지 못한다. 그래서 남편이 올라가서 5불상 사진을 찍어왔다. 5불상은 정말 뭉툭하다. 그리 크지도 않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불상이 금을 붙여서 저렇게나마 큰 불상이 되었다. 파고다 중앙에는 5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5개 불상이 높은 단에 모여있다. 불상들은 12세기 알라웅시투(Alaungsithu)왕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3개는 부처의 상이고 2개는 부처의 수제자들의 상이라고 한다. 파웅도우 파고다의 불상은 저 모습이 불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처럼 둥근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면서 금을 붙였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이 금을 매우 성스럽게 여겨서 그 금에다 빨간 천조각을 문지르고 그 천을 자전거, 자동차, 트럭등에 매고 다니면 사고를 예방해 준다고 믿는다. 이곳의 가장 큰 축제인 파웅도우 축제 때는 5개 불상 중에 4개를 배에 싣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축복을 빌어 준다. 이 때 가장 작은 불상 한 개는 파웅도우 파고다에 남아서 파고다를 지키게 되는데 이 불상이 남아 있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여러 해 전 축제 기간에 사고가 나서 불상을 싣고 가던 배가 전복되었다. 4개의 불상은 건져내었지만 한 개는 찾지 못했는데, 사공들이 파웅도우 파고다에 돌아와 보니 없어진 1개의 불상이 수초를 뒤집어 쓴 채 제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축제 기간에 반드시 이 하나는 사원을 지키도록 남겨두게 되었다. 사원의 한 구석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온 불교 신자들과 관광객들이 시주하고 간 돈을 전시하고 있다. 미얀마의 불교에 대한진심을 보여주는 곳이다.
* 헤호 팡도우 파고다 내경
* 헤호 인레호수 팡도우 파고다 외경
파웅도우 파고다Phaungdawoo Pagoda에서 나와 부트를 타고 다음 행선지 은세공 공방으로 이동하는데 뒤를 돌아보니 팡도우 파고다가 햇살 조명을 받아 비경이다. 팔각형의 탑이 솟구쳐 오르며 호수를 빛낸다. 미얀마 샨주 인레호수 인공섬에 있는 팔각형 형태의 파웅도우 파고다는 인따족의 불심을 보듬으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 헤호 인레호수 팡도우파고다에서 은세공으로 가는 보트
또 보트를 타고 간다. 인레호수의 인따족 생활 정경을 참 많이도 본다. 참으로 아름다운 호수의 비경이다. 나무를 박아 집을 받치고 있는 풍경이 아슬한데 저들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 가득차 있다.
* 헤호 인레호수 야자나무 숲
호수 위에서 큰 야자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이 있다. 하늘 높이 솟고쳐 오른다. 오랜 나이를 지닌 나무로 보인다. 나무 곁의 집 주인은 아마도 야자나무를 정성껏 가꾸어온 듯하다. 호수의 나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기막힌 풍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은세공 공방
은세공 공방에 왔다. 이곳 미얀마 인레호수의 은공방에서는 목걸이 등을 가공한다. 은을 불에 녹여서 그 물을 틀에 넣고 식히니까 바로 은막대기가 나온다. 큰 물고기, 목걸이를 만드는 남자들도 있다. 섬세한 가공을 하는 남자기공도 있다. 은제품의 물건을 판매하는 상가도 옆에 있다. 가게가 아주 크다. 차와 사탕을 서비스로 준다.은 장신구를 만들어 판매한다. 인따족의 생계수단인데 외인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여서 자꾸 다다가 바라보았다.
* 헤호 인레호수 인땡 유적지로 가는 보트
은공방에서 보트를 타고 20분 정도 걸려서 간다. 저녁 석양이 드리우는 시간이다. 지금 가야 덥지 않다고 한다. 보트는 좁은 폭의 물길을 달려간다. 보트 위에서는 여전히 물을 분무한다. 호수 주변에는 소도 있고, 빨라하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등이 보인다. 저들은 일상생활인데 바라보는 눈에는 멋진 낭만이다. 보트를 타는 것도 보는 것도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 헤호 인레호수 인땡 유적지 마을
인따족의 인뗑유적이 있는 수상마을 선착장에 하선했다. 2천개의 소탑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의 인뗑 유적지 마을이다. 호수 위에는 목조 다리가 놓여 있다. 소를 몰고가는 농부도 있다. 호수변에서는 빨래도 하고, 아이들이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 그 옛날 유년시절의 우리가 겪고 자란 풍경이다. 참으로 정감이 가서 한 동안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외객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의 생활방식 그대로 처연하다. 그래서 거르지 않은 인따족의 생활 실체를 그대로 보는 것이다. 소중한 체험이다.
* 헤호 인레호수 인땡 유적지
선착장에서 마을길을 따라 한 블록을 걸어서 돌아가니 긴 하얀 기둥 터널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의 톨로길을 따라 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온 이곳 인뗑(In Dein) 유적지는 1천년 전 사원들이다. 바간왕조 말기 산족이 세운 불교 유적지로 대부분은 17~18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인레호수에서 독특한 옛 사원을 보는 코스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무너지고, 사원 중앙을 뚫고 솟구쳐 자라는 거대한 나무도 있다. 무너질 것 같은 아슬한 풍경이다. 버려진 사원 근락이다. 사원마다 속에 불상 하나씩 들어앉아 있다. 2000개의 소탑이 만들어 내는 인뗑(In Dein) 유적지 마을인데 우리는 원래의 사원 모습이 그대로 있는 마을을 택하여 왔다. 다른 마을에서는 시주금으로 보수를 하기도 하는데 그곳 사원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단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원들은 보존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 무너질까 염려된다. 풀과 나무들이 사원을 덮치고 있다. 누군가 최초에 세울 때는 거룩한 불심으로 건립했을 텐데 초라한 사원들이 애처롭다. 그런데 또 이면으로는 그로인하여 큰 명소가 되어 외인을 부르며 사랑받고 있다. 저녁시간이라서 더욱 애처로운 정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인땡 유적지에서 보트 승선
인레호수에는 블이 없어 빨라 가야한다는 미얀마 현지 여자 가이드의 말을 들고 선착장으로 급히 이동했다. 석양이 드리우는 저녁시간에 인땡유적지에서 보트에 승선했다. 선장은 서둘러 떠난다.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이제 모두 이별을 고한다. 어두워지면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정든 나무들에게, 물에게, 호수에게, 인따족 사람들에게 안녕, 안녕 고하며 떠나간다.
* 헤호 인레호수 수상 사원
어두워지는 시간에 보트가 지나가는 물길 위에 하얀 사원이 보인다. 매우 크고 아름답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비경이다.
* 헤호 인레호수 빠다웅 족
인뗑유적지에서 나오며 들른 곳이다. 보트가 인레호텔 선착장으로 곧장 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멈추더니 내리란다. 점점 어두워지는데 왜 내리라는 걸까. 주저주저하니, 선장은 우리를 일일이 부축하여 내려준다. 보트에서 잠시 하선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목을 길게 늘인 여인들이 나온다. 인레호수 수상마을 중 한 곳에 자리한 빠다웅족이라고 불리는 집단 거주지다. 하지만, 여기는 홍보관 개념이 강하다고 볼 수 있고, 실거주지는 고산지대에 있다. 처음에는 두 명이더니 점점 더 많이 나와서 웃으며 우리를 맞이 한다. 사진 모델이 되어준다. 기념품 가게인데 시간이 늦어져서 그냥 나와서 서둘러 다시 보트에 승선하하였다. 이제 보트는 우리 부부와 또한 부부 총 4명을 싣고 인레호수를 질주한다. 빠다웅족 여자들은 링을 끼워 목을 길게 늘이고 있다. 목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링으로 어깨를 내려앉게 만드는 것이란다.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잘 때도 풀지 않고 그대로 잔단다. 어두워지는 시간 관계로 서들러 나온 것이 좀 아쉽지만 독특한 부족을 본 것은 매우 흐뭇하다.
* 헤호 인레호수 보트 야간이동 하선
싸늘한 밤의 아슬하고 짜릿한 야간 보트 체험이다. 나는 보트의 맨 앞에 승선하였다. 배의 질주로 인하여 바람이 강하게 불며 파고 들어서 우산으로 막으며 간다. 내 뒤엔 남편이 앉았다. 점점 어둠이 물 위에 내린다. 좁은 물길을 따라 한참을 나오니 광활한 호수다. 수초도 있고, 어둠 속에서 농경지도 보인다. 호수변에 아련한 민가의 불빛도 보인다. 앞쪽 멀리에도 불빛이 있다. 그런데 가도가도 끝나지 않는 호수의 물길이다. 차츰 두려움이 엄습한다. 노련하게 노젓는데 괜한 염려다. 하늘엔 반달과 별들이 총총 떠서 밤 물길을 밝혀준다. 어둠에서도 호수의 물빛은 청청하다. 그런데 4명씩 우리 일행의 5척 보트 중 우리 배가 맨 앞의 선두 배라서인지, 잘 가다가도 물 위에 멈추곤 한다. 고장 났나보다라며 놀랐다. 망망한 밤 호수에서, 바다 같은 광활한 호수에서 흔들흔들 떠 있으니 기울어 물에 잠길까 두렵다. 아직 멀었느냐고 하니까 2Km 남았단다. 도대체 어디가 호수의 끝일까. 점점 호변에 불빛 조명 건물이 많아진다. 그리고 선착장에 도착했다. 우리 보트의 뒤를 이어 줄줄이 들어왔다. 보트 하나는 더 앞쪽의 다른 선착장에 우리 일행 한 팀을 내려주어서, 그 팀은 우리들을 찾느라 애먹었단다. 가이드에게 전화도 안 되고, 호텔에 전화해도 안 받더란다. 겨우 우리 일행을 만나서 안정을 찾앗다. 모두들 죽는 줄 알았다고 웃음반, 두려움반 섞어 이야기 꽃피우는 밤이다. 석식식당이 5분 거리라서 걸어서 갔다. 가이드는 인레호수 보트의 밤 질주로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죽을 죄를 졌단다. 어디 가이드 잘못이겠는가. 우리가 욕심내어 곳곳에서 많이 보아서 그런 것이다. 오늘은 어느 부부 팀 남자의 생일이라고 한국에서 아들이 생일 케익과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자손 선물이 영롱하게 빛나고, 우리들은 축하의 노래를 불러주고 함께 케익을 먹었다.
* 헤호 인레 야시장
헤호의 야간투어다. 자연과 종교가 공존하는 헤호는 미얀마 고원지대인 샨주(州) 타웅지(Taunggyi)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미얀마의 고원지대인 샨주 헤호에는 샨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5일장이 열린다. 석식식당과 호텔은 아주 가깝다. 식당에 오면서 우리의 호텔을 지나왔다. 석식 후 가이드는 인레호수에서 늦게 나와 고생해신 것에 대한 사죄와 보답으로 야시장에 데리고 간단다. 호텔 가까이에 있는 야시장이다. 석식식당에서 길을 건너가니 바로 있다. 잠시 들러서 구경했다. 음식, 옷, 조각품, 담배 등 많은 물건을 팔고 잇다. 한국의 5일 장터격이다. 흙마당에 열린 장터가 정겹다. 밤길을 걸어서 호텔로 왔다. 우리 부부의 호텔 방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참 아름답다. 밤인데도 사원에 불이 켜져 있다. 미얀마는 밤에 사원만 불을 켠다. 모두 헤호 인레 마을의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밤 풍경이다.
2017년 11월 27일 월요일 헤호에서 양곤으로 자국기 탑승 이동
* 헤호 인레호텔 출발
새벽 5시 모닝콜, 6시 조식, 6시 30분 출발이다. 오전 6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한다. 2층이 식당이고 1층이 로비다. 아침에 바라보이는 사원 정경이 비경이다. 우리의 방 305호실은 인레 마을과 아주 접해 있어서 참 아름다운 풍경을 본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2층, 3층에 유숙했던 우리들의 가방을 복도에 내어놓으면 호텔 직원들이 가방을 버스에 실어준단다. 계단으로 이동하여 무거운 가방을 실어다 준다니 거마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1, 2호차로 나누어 타는 관계로 가바이 종종 다른 버스로 가기도 한다. 오늘도 1호차 버스의 가방 하나가 우리 2호차 버스에 갖다놓아서 1호차 가이드가 한참을 찾아 가져갔다. 그래서 가능하면 각자 자기의 가방을 날라야 한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다행히도 우리 부부와 몇몇 일행은 가방을 들고 내려와서 그런 문제가 없었다. 호텔에서 공항까지 멀어서 서둘러야 한다, 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그리고 비행기로 1시간 정도 날아서 양곤으로 간다. 헤호 마을을 지날 때 보시에 나선 스님들이 보인다. 시가지에 오토바이가 많다. 싱그러운 인레 마을의 아침 풍경을 보며 떠난다.
* 헤호 산마을 풍경
헤호공항 가는 길은 산길이다. 헤호는 고산지대라서 그렇다. 운무 서린 산마을 정경이 참 아름답다. 산간지대의 밭과 논도 보인다. 산중에 축사 같은 건물들도 보인다. 산을 넘어서 간다. 크고 작은 산줄기의 준령이 계속 이어진다.
* 헤호 공항 소박한 정경
양곤행 자국기를 탑승하기 위해 헤호공항에 왔다. 1시간 20분 소요된다. 우리나라의 어느 허름한 시골 버스 정류장 같은 느낌이 든다. 수많은 세계 여행객들이 드나드는 공항인데 한국의 1960년~70년대의 허름한 풍경이다.
* 헤호 공항 주변 풍경
양곤행 비행기가 또 1시간 지연이란다. 공항 밖으로 나와서 주변 마을을 산책했다. 큰 가로수, 노란꽃, 닭, 바나나 나무, 사원 등 정겨운 풍경이다. 한국에서 봄에 나물로 먹는 모란 그 노란 꽃들이 많다. 산마을의 해뜨는 정경이 참 좋다. 헤호의 순박한 마을 정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항과 마을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도, 마음대로 공항에서 밖으로 이동이 가능한 것도 진풍경이다.
* 헤호 공항 출발
헤호 공항에서 모자를 샀다. 2달러 상당히 싼 값이다. 천이 마재질이어서 양곤 더운 날씨에 사용하기 위해서다. 여러 사람들이 샀다. 항공직원이 공항 내부에서 스님들을 불러 먼저 보딩을 하도록 해준다. 비행기가 공항 마당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아담한 공항을 걸어가서 탑승했다.
* 양공 공항 도착
양곤 공항에 착륙하니 기내에서도 덥다. 공항마당에서 버스로 공항내로 이동한다. 오늘 양곤의 일정은 로카찬다 사원의 옥불, 한식중식, 전신마사지, 차욱칫타 파고다의 거대좌불, 쉐다곤 파고다의 최대 황금사원, 야경 등이다. 오늘은 정장을 세 번 한다. 즉 세 군데의 파고다를 간다는 것이다. 양곤(Yangon)은 미얀마 최대의 상업도시이며 미얀마 대표도시다. 미얀마의 수도다. 그리고 순수와 황금빛의 도시다. 동양 최대의 황금불탑이자 미얀마의 상징인 쉐다곤 파고다가 있다. 보족 아웅산거리, 차이나 타운 등이 있다. 미얀마의 옛 수도이자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 공원이 있는 잘 어우러진 도시다.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공항 앞에 분수가 솟구쳐 오른다. 외객을 환영하듯 아름다운 정경이다. 주변은 울창한 숲이어서 더욱 절경이다. 양곤 시내 곳곳에서 울창한 나무 군락이 보인다. 숲이 70%라는 도시 양곤에 온 것이 실감난다. 덥지만 나무가 많아 싱그러운 풍경이다.
* 양곤 로카찬다 파고다 옥불
양곤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세계 최대 옥불이 있는 곳이다. 사원 바로 앞 주차장에서 버스에서 내려 맨발로 걸어서 간다. 긴 계단을 올라가니 불자들이 거대한 옥불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천정 부분에 옥불 제작자 그림이 있다. 옥으로 만들어진 불상은 유리상자에 고이 모셔져 있는데, 유리에 빛이 반사되어 불상을 자세히 보기 어렵다. 거대한 옥을 통째로 조각하여 제작한 옥불이다. 이 옥불은 불상을 조각하는 일을 하는 우마웅지라는 사람이 기증했다고 한다. 옥불을 만달레이에서 양곤까지 이동시키는데 11일이 걸렸는데, 이 기간 동안 미얀마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불을 이동하는 모습과 옥불을 기증한 우마웅지가 군부들에게 환영받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을 파고다의 계단에서 보았다. 만달레이에서 양곤까지 세계 최대의 옥불을 옮기는 모습의 그림이다. 로카찬다 사원에서 중식식당으로 갔다. 중식은 한식으로 황복국, 돼지고기, 나물, 수박까지 풍성한 식당이었다. 중식 후 전신마사지는 1시간 30분인데 모두 여자마사지사들이 하며 매우 힘이 세어서 지압을 잘 한단다.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하면 그게 끝이란다. 팁으로 2천원씩 주기로 했다. 2명이 한 방에서 받았다. 나의 전신마사지사는 역시 소녀였는데 상당히 잘 한다. 시원하다.
* 양곤 대사관 거리와 철조망
양곤은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 많이 정체된다. 학교 옆 도로에서도 지체했다. 미얀마의 학제는 1학년~10학년까지 한 학교에서 공부한다. 초등~중학교까지의 과정을 한 울타리에서 공부한다. 운동장의 학생들이 애기 같은데 중학생이란다. 우리가 무슨 중학생이냐고 유치원생 아니냐고 반문하니 현지 미얀가 가이드가 중학생이라고, 미얀나 아이들은 저렇게 작다고 답변해준다. 한국의 7살 정도 아이가 여기서는 12살 중학생이다. 우리의 미얀마 가이드는 이름이 조수모란다. 미얀마의 이름에는 성이 없단다. 이름만 있는데 그는 이름이 조수모란다. 유명하다는 뜻이란다. 이철조망이 담방에 설치된 풍경이 있다, 곳은 인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양곤 변두리다. 버마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이 손이 거칠어서 저렇게 높은 담장에 철조망을 설치했단다. 그런데 저게 마지막 철조망이란다. 앞으로는 절조망이 없어질 것이란다. 철길을 지나간다. 폭이 좁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놓은 철길이다. 대사관 거리를 지난다. 한국대사관, 미국대사관 등 세계 각국의 대사관이 있다. 대사관 담방에도 철조망이 있다. 양곤 대학도 지나간다.
*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 추모비
미얀마 양곤에 한국인이 오는 것은 여행 목적도 있지만, 1983년 10월의 한국관련 슬픈 역사유적이 있어서 오는 곳이기도 한다. 아웅산 국립묘지는 양곤 북부 쉐다곤파고다(Shwedagon Pogoda) 북문의 정면 언덕에 있다. 버스가 울창한 숲으로 진입할 때 이곳이 아웅산 국립묘지임을 알리고 있다. 숲 공원을 한참을 달려온 곳에서 버스가 멈추고 내렸다. 바로 앞에 아웅산 국립묘지가 있다. 오늘은 정기휴일로 문이 닫혀 있다. 한국인의 추모비가 담장 곁에 있다. '아웅산 묘역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라는 안내판이 조국의 사람들을 맞이 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현장이다. 여기서 우리 대한만국 정치지도자들 17명이 북한의 암살폭파로 죽어간 것이다. 담장 안에는 추모기념관이 있다. 역시 휴일로 문이 잠겼는데 살짝 열린 쪽문으로 들어가서 기념관 마당을 보았다. 마당 끝에 순국한 대한민국의 17명 명단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 건물에는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우리를 지켜본다. 기막힌 슬픔의 현장이다. 아웅산 국립묘지와 한국의 추모비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와 인물을 알아야겠기에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아웅산, 아웅산 수치, 1983년 폭파사건 등의 자료를 찾아 공부했다.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Aung San)이 1947년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도중 동생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원과 함께 암살당한 뒤 모두 이 곳에 묻혔는데, 묘지 이름은 아웅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이후 미얀마의 국가 요인이나 유공자들이 묻히는 묘소로서, 매년 이 곳에서는 공식적인 헌화 행사가 열린다. 또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국빈들도 방문 도중 반드시 참배하는 국가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이 묘지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83년 10월 9일, 당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이 묘소를 참배하던 중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이 폭발하면서 한국인 17명,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참변, 이른바 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로는 일반인, 특히 외국인의 참관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이 날 대통령 전두환의 서남아 ·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이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다. 화를 면한 대통령 전두환 내외는 모든 방문예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다. 국내외의 비분과 비탄 가운데 미얀마정부는 한국에 조문사절을 보내는 한편,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 10월 미얀마정부는 아웅산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보고하였다.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으로 역사에 남는 사건이다.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 외무부장관 이범석 상공부장관 김동휘, 동자부장관 서상철,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 재무부차관 이기욱, 주 버마대사 이계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 농수산부차관 강인희,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 공보비서관 최재욱,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김상영,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중이었으며, 첫 방문지에서의 이같은 사건에 따라 나머지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으며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으나 11월 22일 미얀마 검찰당국에 체포된 범인들이 죄상을 밝힘으로써 북한에서 전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애국동건호에 탑승, 밀파했다는 사건전모가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 9일 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 두 테러범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여론의 비난 속에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동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남남협력을 내세운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후 2007년 4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과 미얀마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아웅산Aung San(1915.2.13 ~ 1947.7.19) 은 독립운동가이며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다.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암살당하였다.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 대좌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 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 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민자유연맹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형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1945.6.19~)는 민주국민연맹 사무총장이다. 1945년생으로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Aung San) 장군과 도 킨 치(Daw Khin Kyi) 전 인도 대사의 딸로, 양곤(Yangon)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도 미얀마의 정치가다. 노벨평화상(1991), 유네스코인권상(2002)을 수상했다. 2015년 총선 승리를 이끌어 미얀마의 오랜 군부 집권을 종식시켰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등을 공부하였다. 1988년 영국에서 귀국하여 반독재 시위에 참가하였고, 민족민주연합(NLD)을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변으로 가택연금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계속하여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 실시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에서 NLD가 친군부세력인 민족통일당(NUP)을 물리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간 가택연금과 해제가 반복되었다. 군부 독재에 비폭력 저항을 지속해 온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군사정부의 귀국 방해를 우려하여 영국인 남편과 아들이 대신 수상하였다. 1999년 남편이 암으로 사망할 당시에도 가택연금 상태로 출국 할 수 없었다. 2012년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제도권 정치 생활을 재개하였다. 1995년 민주국민연맹 사무총장이 되었다. 1989년 7월 ~ 1995년 7월, 2000년 9월 ~ 2002년 5월, 2003년 5월 ~ 2011년 11월 세 차례에 걸친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2015년 11월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연합(NLD)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미얀마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외국인을 배우자로 둔 경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미얀마 법 조항으로 인해 2016년 3월 수치 여사의 운전자 출신이자 측근인 틴초(Htin Kyaw, 1948년 1월 4일생)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16년 10월 현재 수치 여사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 자문역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아웅 산 수 치에게 있어서 1988년은 운명의 해였다. 15살 때부터 시작된 30여 년에 이르는 외국 생활 동안 그녀는 학자로서,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운명의 1988년 어머니 킨 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영국에 머물던 아웅 산 수 치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8월 버마에서는 888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버마의 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가 자신들을 위해 행동해주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자 의무였다. 그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40대 중반의 아웅 산 수 치는 안온했던 삶을 뒤로 한 채 가시밭길 같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국민에게 희망의 이름이자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1988년 8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후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직접적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동 한 것은 불과 7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14년 세월 동안 그녀는 버마의 군부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되어 자유를 박탈당했다. 최근에는 그마저도 불안했던지 군부는 그녀를 버마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수감하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권을 잡고 있는 군부세력이 말하는 아웅 산 수 치의 명목상 죄목은 내란죄이다. 그녀가 획책한 내란이라는 것은 바로 군부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다. 버마 전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 산 수 치가 한번 움직일 때 마다 군부정권은 위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군부는 쿠데타라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르게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아웅 산 수 치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치명적이다. 그러기에 군부는 아웅 산 수 치가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웅 산 수 치를 여타 정치범처럼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건국의 아버지이자 군대를 창설한 국민 영웅 아웅 산의 딸이다. 군부 내에서도 아웅 산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드높다. 군부정권 자체의 뿌리이자 명분일지도 모르는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는 군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자유롭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는 존재, 아웅 산 수 치는 그렇게 버마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 기간의 2/3를 감금당한 채 보내야 했다. 감금은 그러나 그녀의 정치 인생의 끝이 아니다. 아웅 산 수 치의 감금은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버마 국민들의 더 강한 지지와 세계적인 명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녀는 영웅의 딸이었지만, 그러나 평범한 인생을 살고자 했던 여인이다.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 아웅 산장군은 버마 국민들에게는 국부와 같은 존재이다. 버마는 1824년부터 영국과의 세 차례 격렬한 전쟁 끝에 패배하여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아웅 산은 버마의 독립투사로 영국과 일본에 무력 항쟁하여 버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그는 1940년대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30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일본과 손잡고 일단 영국 세력을 버마에서 몰아낸 아웅 산 장군은 이후 다시 연합군과 손잡고 버마에 세력을 뻗친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획득했다. 그는 60여 년에 걸친 버마의 식민지 역사를 끝낸 버마 건국의 아버지였다. 아웅 산 수 치는 1945년 6월 19일 아웅 산과 그의 아내 킨 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아웅 산의 이름과 할머니 수 그리고 어머니 치의 이름을 골고루 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버마의 독립을 획득하고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버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은 그 투명한 삶과 업적으로 인해 버마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아웅 산의 유족들은 영웅의 유족으로 추앙 받았고 영웅의 유족답게 살아야만 했다. 1962년 네 윈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웅 산의 미망인 킨 치는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웅 산 수 치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이때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버마식 군부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일했다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오빠 아웅 산 우처럼 떠나 온 조국 버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버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버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아버지 아웅 산에 대한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차 일본 교토에 머문 1년 외에 그녀는 영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계 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 따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조국 버마가 그녀를 불러 들였다. 1988년 8월 8일 아침 8시, 8888항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버마는 26년간 계속된 군부독재와 이에 따른 경제파탄과 인권유린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웅 산과 함께 독립 운동을 했고 독립 후 군부의 수뇌가 된 네 윈은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군부정권의 최고 권좌에 앉아서 젊은 날의 순수한 의기를 잃어버리고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했다. 네 윈과 그를 둘러 싼 군사 독재정권은 식민지 기억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으로 1960년대 새삼스럽게 대외적으로 쇄국 정책을 폈다. 온전한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동양적 가치관과 불교가 습합된 버마식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표방하였으며, 서방사회를 적대시하며 제 3세력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하였다. 시기 적절하지 않은 정책들과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는 경제 파탄을 가져왔다. 버마의 국민들은 폭압과 가난 속에서 질식사할 상태에 이르렀다. 대학생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 영국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때부터 자유와 인권과 독립의 상징이던 공작새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군부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많은 학생들이 군부의 총칼아래 희생되었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에 그 동안 잠자코 있던 버마 국민들은 분노했다. 1988년 8월 8일 8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승려와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8888항쟁이 일어났다. 군부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총과 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그 이상으로 강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갔다. 시민과 학생, 승려들까지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군부의 총칼 앞에 죽어갔지만 시위는 진압되지 않았다.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 잔혹한 군부에 경종을 울리고 선량한 국민들의 대변인이 되어 주어야만 했다. 그 해 4월 버마로 돌아와 오로지 어머니의 간호에만 힘쓸 뿐 정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아웅 산 수 치는 8888항쟁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자신이 버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들은 그녀를 원했다. 국민영웅 아웅 산의 딸이 나서 군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8월 15일 아웅 산 수 치는 정부에 국민들의 요구에 응할 것을 촉구하는 ‘화평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8월 26일 희생당한 시민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양곤의 종합병원 앞에서 몇 십만의 남녀노소 버마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이로써 버마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 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아웅 산 수 치가 정치 일선에 나서자 버마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그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군부도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에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듯 한 제스처를 보였다.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정치와 선거를 약속했다. 시민들이 승리한 듯이 보였다. 아웅 산 수 치는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지사들과 함께 민주민족동맹(NLD)를 창설하고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녀는 전국을 돌며 새로운 버마에 대한 희망을 연설하고 군부 독재의 종식을 촉구하였다. 아웅 산 수 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버마의 장밋빛 미래를 보았다. 잔혹한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민주화에 대한 거센 국민의 요구에 잠시 주춤했던 군부는 아웅 산 수 치의 행보에 당황했다. 군부의 양보는 잠시 궁지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추호도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 몇 차례 순박하고 평화로운 버마의 국민들은 때때로 군부의 이러한 조삼모사격 음모에 쉽게 좌절하기도 하였다. 군부는 이번에도 국민을 기만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웅 산 수 치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졌다. 아웅 산 수 치를 따르는 버마의 국민들은 더 이상 총과 칼로 위협하고 몇 개의 당근정책을 내놓으면 거기에 안주하는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부 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네 윈의 퇴진 이후 신군부의 소 마웅은 다시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동안 소강상태였던 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7월 아웅 산 수 치를 가택 연금하였다. 아웅 산 수 치를 국민들과 격리시키면 시위는 사라지고 군사 독재가 가능 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부의 커다란 오산이었다. 수도인 양곤이나 대도시의 식자층만이 자신들을 반대할 뿐 국민 전체는 아직도 군대를 믿고 따른다고 여긴 군사 정권은 8888항쟁 때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결과는 아웅 산 수 치가 결성한 민주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받아 압승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엄연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오히려 선거결과를 무효화 하고 민주 인사 수 백 명을 투옥하였다. 총과 칼이 설치는 군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거 시기만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 기한으로 연금한 아웅 산 수 치의 가택연금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였다. 한때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했던 버마에는 다시 암흑이 내려 앉았다. 선거에서는 대승리했다. 그러나 오지 않는 봄이었다.
계속되는 버마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아웅 산 수 치다. 선거의 승리도 좌절도 아웅 산 수 치는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 맞았다. 그녀는 단식도 하였고 국제적인 청원도 하였지만 버마 군부는 아웅 산 수 치를 가둬 둔 채 총칼을 휘두르며 요지부동 지금까지 버마를 통치 하고 있다. 그 사이 아웅 산 수 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버마 정부는 아웅 산 수 치의 가택 연금을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시상식에는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아웅 산 수 치의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하였다. 1995년에는 국제적 압력에 못이긴 버마 정부가 아웅 산 수 치를 잠깐 가택연금에서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여전히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을 계속하였다. 1999년에는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가 사망하였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외국으로 나가면 군부가 그녀를 버마 땅으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결국 2000년에 버마 군사정권은 아웅 산 수 치를 다시 가택연금하고 양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2002년 국제 연합특사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웅 산 수 치를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게 했지만 이듬해인 2003년 군사정권은 그녀를 또 집에 가두어 버렸다. 2008년에는 5년 시한이던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하더니 최근에는 그녀의 집에 낯선 미국인이 잠입한 사건을 꼬투리 잡아 그녀를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구금하고 있다. 그녀의 죄목은 ‘공중보안법’ 위반이고 군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5년 형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세계는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버마 당국의 처사를 맹 비난 하고 민주화를 향한 버마 국민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버마 정부에 대해 경제 제재까지 가하고 있지만, 버마 군사정권은 아직까지도 묵묵부답,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 오늘도 총칼로 무장한 채 버마를 통치하고 있다. 수지여사는 아웅산을 보고 찍어준 사람이란다. 수지여사가 실세란다. 막후 세력이 막강하단다. 대통령은 군부독재자 네윈이다. 미얀마가 지금은 세금을 거둔단다. 전에는 없던 세금이란다. 아웅산 폭파사건의 현장인 아웅산 추모탑과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 인물 아웅산 수치 여사의 박물관도 있다. 국립묘지와 한국인 추모비 담장에도 철조망이 쳐져 있다. 살아서는 그렇게 죽어갔지만 죽어서라도 잘 지켜드리자는 의미로 다가온다. 바로 앞에는 쉐다곤 파고다가 금빛으로 찬연한 자태다. 이곳 묘역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여진다. 내 조국 순국사절들의 명복을 빌고 시린 걸으로 떠나왔다.
* 양곤 도심의 호수
양곤에는 호수가 많다. 숲이 70%인 도시라서 그렇다. 대표적인 깐지도 국립공원의 깐지도 호수도 있다. 지금 지나가는 호수는 깐지도 호수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풍경이다.
* 양곤 차욱탓지 파고다 와불
차욱탓지 파고다 에는 와불상 미얀마에서 네번째로 큰 와불이 있다. 길이 67m, 높이 18m 의 67미터의 엄청난 크기의 와불이다. 1907년에 만들었으나 파괴되어 1966년에 다시 만들었다.청색지붕의 큰 사원. 와불 머리는 북쪽, 얼굴은 동쪽으로 드러누운 위치다. 보수하면서 반대로 되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부처상이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우울함을 극복하려고 부처상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기둥이 크도 높다. 발가락도 메니큐어를 빨갛게 칠했다. 얼굴 쪽에서 보면 여자상인데 다리 쪽에서 보면 남자상이다. 정면에서는 전체가 다 잡히지 않아 사진에 담을 수 없다. 발 쪽으로 가서 조망하며 사진 속에 담았다. 오른쪽 끝에 가면 스님 불상도 세워져 있다. 발바닥에 108 번뇌가 새겨져 있다. 발쪽 계단을 걸어 조망대에 올라가서 전신을 바라보았다. 매우 큰 와불이다. 그 위에서는 와불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분홍색의 부처님 발바닥을 칸칸이 나누고 그 안에 금색으로 부조를 새겨 놓았는데, 이는 부처의 108번뇌를 의미한다고 한다. 옆에는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파고다 내부의 벽에는 글자가 빼곡히 써 있는데, 이는 헌금 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한국인의 이름도 찾아 볼 수 있다. 미얀마의 대단한 불심을 증명하는 참으로 거대한 크기의 와불이다. 사원의 건물도 다른 파고다처럼 첨탑으로 솟구쳐 오른 것이 아니고, 와불이 누워있기에 알맞은 크기로 옆으로만 길게 늘인 큰 규모의 건축물이다.
* 양곤 시가지 교통체증
양곤 도로에 차가 많다. 양곤 시내 전역의 교통이 그렇단다. 많이 막힌다. 양곤은 막히면 20분 거리가 1시간 걸린다. 중식 식당 갈 때도 로카찬다 사원에서 겨우 5Km 거리인데 막혀서 예약시간을 넘겨서 갔다. 도착시간을 기약 못한단다. 우리의 이동 거리는 10Km 정도인데 막히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깐지도 호수도 가진 못하고 이따가 그 곁을 지나만 간단다. 쉐다곤 파고다를 지을 때 흙을 파서 언덕을 높이 쌓았는데 그 땅이 가라앉아서 깐지도 호수가 탄생되었다. 깐지도 호수는 영국식민지 시대에 조성한 유럽식 호수공원이다. 호수 공원의 관리원 인건비로 지불한단다. 자국민에게는 입장료가 없지만 외국인에게는 2천짜시, 한화로 2천원의 입장료를 받는단다.거바예 파고다도 못 간단다. 교통체증으로 다 가다보면 비행기를 못 타는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단다. 이런 교통체증을 통해 큰 도로를 다니며 구걸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자가용 운전석에 다가가 돈 통을 내밀겨 구걸한다. 스님 복장으로 보시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도 안 준다. 복잡한 자동차들의 행렬릉 장사진이다. 지금이 오후 4시 40분인데 자동차는 낮부터 이렇게 많이 나오고 교통은 완전 서행이다. 쉐다곤 파고다는 차욱찻지 파고다에서 5분 거리란다. 그런데 그곳은 해질녘에 가야 좋아서 지금 가지 않는단다. 잠시 잡화상가를 들리러 간다는데 차들이 많아서 서행이다.
* 양곤 시가지 푸른 숲
잠시 잡화상가를 전학했다. 미얀마의 곡식, 견과류 등 여러가지를 판매한다. 우리 부부는 조금 일찍 밖으로 나와 양곤 시가지를 살펴보았다. 도로에는 여전히 차가 많다. 도로 양편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줄 서 있다. 양곤은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공원이 어우러져 동방의 정원도시라고도 불리는 미얀마의 중심도시다.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열대의 수려한 나무들이다. 큰 호수도 있다. 미얀마를 상징하는 황금대탑인 쉐다곤 파고다와 함께 미얀마 여행의 핵심지역이다. 복잡하지만 푸른 숲으로 아름다운 거리의 야곤이다.
* 양곤 시가지 풍경
양곤 여행은 이동거리가 그리 길은 것은 아닌데 교통체증으로 많이 멈추고 서행하는 관계로 시가지 풍경을 잘 조망했다. 고층아파트를 건설하는 곳이 더러 보인다. KBZ 항공사와 KBZ 은행은 같은 회사란다. 대한항공과 한진관광이 같은 회사인 것과 같은 격이란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거리의 노변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가게도 많고, 사람도 많다. 상가 앞은 도로변으로 먼지 속에서 불결할 듯하다. 양곤은 미얀마의 옛 수도이자 아름다운 호수와 수목 공원이 있는 잘 어우러진 도시다. 현재 미얀마의 수도는 네피도다. 2006년 수도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양곤이 수도였다. 양곤은 면적 598.75Km2, 인구 약434만명(2010년)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랑군(Rangoon)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하면서 랑군에서 양곤으로 도시명이 변경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미얀마 정부가 공식 수도를 양곤에서 네피도로 옮기기도 했다. 1755년 미얀마의 알라웅파아(Alaungpaya)왕이 몬족의 다곤 마을을 정복하고 그곳을 전쟁의 끝이라는 뜻의 양곤으로 개명하며 다곤 주변에 정착지를 세웠다. 이 도시의 상징은 매년 수만명의 순례자들이 다녀가는 쉐다곤 파고다이다. 이 탑의 역사는 2,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부처의 8가닥 머리카락을 모셔두기 위해 건립했다. 현재 저렴한 노동력으로 많은 기업들이 현지에 공장을 세우며 투자를 하고 있으며, 특히 양곤은 많은 다국적 기업들과 해외 공관이 있다. 그러나 아직 폐쇄적인 정책으로 인해 양곤을 제외하고는 편의시설을 찾아 볼수가 없다. 양곤은 미얀마의 전(前) 수도로 우리에게는 랭군(Rangoon)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1755년 알라웅페야 왕이 남쪽의 ‘다곤’이라는 지역을 정벌하면서 건설된 도시로, ‘분쟁의 종식’이라는 뜻의 ‘랭군’을 영국인들이 영어식으로 부른 것이 ‘양곤’이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양곤 시는 북부에 있는 제2의 도시 만들레이와 더불어 미얀마를 지탱해 가는 도시이다. 행정 수도를 네피도(Naypyidaw)로 옮기기 전까지 미얀마의 수도였으며 행정, 경제, 교육의 중심 도시였다. 양곤의 현재 인구는 약 700~750만 명으로 양곤에 체류하는 한국인 수는 약 1,500~2,000명에 이른다. 양곤은 80% 이상이 녹지, 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숲의 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시내 중심부에 깐도지라는 거대한 인공 호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 지역에도 거대한 인야 호수가 있다. 양곤 강이 시 주위를 휘돌아 안다만(Andaman) 바다로 흘러든다. 안다만 바다와는 30km 떨어져 있으며, 옛날에는 항구 도시로 해상 물류의 큰 축을 차지했다. 양곤은 20~30년이 넘은 오래된 차량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오염이 심했었는데 최근 들어 오래된 차량의 신형 교체로 공기가 많이 좋아졌다. 또 다른 커다란 변화는 최근 몇 년간 차량의 급속한 증가로 양곤 시내에도 교통 정체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양곤의 주요 도로 위로 고가 도로가 건설 중이며, 완성되면 교통 체증도 어느 정도 해결될 전망이다. 또한 양곤 도심에서는 고층 빌딩과 주상 복합 아파트의 건축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미얀마 여행에서 바간, 만달레이, 헤호, 양곤 이 네 도시를 집중적으로 탐방하며 잘 배우고 간다.
* 쉐다곤 파고다 외경
쉐다곤 파고다는 흙을 파서 언덕을 높이 쌓아 지은 파고다다. 그 땅이 가라앉아서 깐지도 호수가 탄생되었다. 황금 파고다다. 미얀마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인 99m 황금대탑이 오롯하다. 쉐다곤 파고다 입구에는 사자상이 두 개 세워져 있다. 파고다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대낮의 밝은 전경은 아웅산 국립묘지에 탐방하던 시간에 바로 그 앞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떄 본 것이 참 다행이다. 쉐다곤 파고다는 입장 문이 여러 개 있는데 아웅산 국립묘지 앞의 문은 북문이다. 초기에 지은 파고다 건물이 보수 중으로 그물망 철골물에 감싸 있다. 그 뒤로 오롯한 불탑이 쉐다곤 파고다의 대표 건물이다. 지금 여기 온 것은 저녁시간이어서 외경을 잘 보기는 어렵다. 파고다pagoda라는말은 포르투갈어 pagode에서 유래한 동양에서 볼 수 있는 탑으로, 특히 불탑, 사원을 가리키는데, 미얀마 양곤 시내의 이곳 웅대한 쉐다곤 파고다가 대표적이다. 쉐지곤 파고다는 미얀마 바간. 바간왕조의 아나우라타 왕이 짓기 시작하였으며 부처의 앞머리뼈와 치아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시가지 북쪽의 언덕 위에는 광대한 정사각형 둘레 426 m의 기단 위에 높이 100m의 황금색 탑 쉐다곤 파고다가 빛나고 있다. 이곳은 불교 나라 미얀마의 상징이며 평일에도 참배자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이제 우리는 파고다 안으로 입장하여 자세히 볼 것이다.
* 쉐다곤 파고다 엘리베이터
쉐다곤 파고다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입구에서 입장하여 2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다. 5층으로 보이는 긴 엘리베이터인데 실제는 2층이다. 원래 이 파고다를 지을 때 높은 곳에 건설하기 위해 흙을 파다가 돋운 언덕에 지어서 그렇다. 불교 사원에, 고난을 수행을 해야하는 사원에 쉽게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약간은 모순으로 보이지만, 세계인의 걸음이 모인는 곳이기에 편의를 돕기 위해서다. 파고다에서의 독특한 체험이다.
* 쉐다곤 파고다의 많은 사원들
계단을오른 후 신발을 모두 입구의 직원에게 맡기고 맨발로 걸어 들어갔다. 아득한 에스컬레이터를 여러 차례 타고 올라가니 드넓은 쉐지곤 파고다 정원에 들어선다. 입장권을 옷에 부착하고 다닌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으며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많이 있다. 부처의 머리카락, 연골, 치골로 지은 사원이다. 그 후 그 위에서 다시 파고다를 건설했다. 금을 붙여서 6만 Kg의 금 파고다가 되었다. 면적이 5헥타아르다. 1,2층 파고다인데 2층에 주요 불상들이 있다. 보리수, 박물관 등을 본다. 거대한 파고다릐 상층에는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다. 그것을 '티'라고 부른다. 한 바퀴 크게 돌며 사원들을 조망한다. 가이드와 15분 간 함께 관람 후에 30분 동안 자유로이 관람한다. 크고 작은 불상들이 곳곳 사원에 많다. 파고다의 주 건물 아래에는 촛불 불꽃이 잔잔하에 일렁인다. 불상을 씻기는 곳도 있다. 맨 처음 지은 사원이 보인다. 보수 중인지 지붕에 바구니 모양의 철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맨꼭대기에는 깃발 여러 개가 꽂혀 있다. 보리수 나무가 크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 형상은 뚜렷하다. 와불도 있다. 범종이 아주 크다. 미얀나에서 민군종 다음으로 두번째 큰 종이다. 파고다 맨 꼭대기의 '티' 사진을 모아 놓은 건물도 잇다. 보석들의 사진 두 장을 담아왔다. 실내에 여러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승리의 광장에는 별 모양으로 조각해 놓았다. 승리의 광장은 전쟁 나갈 때 기도하고 나가는 곳이다. 기도가 가장 잘 이루어지는 광장이다. 탑의 기단 부분에는 64개의 작은 불탑이 탑을 에워싸고 있다. 또 불탑을 중심으로 72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이러한 불탑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불탑 안에는 대리석과 화강암 보도가 있는데, 맨발로만 들어갈 수 있다. 왜 쉐다곤 파고다가 미얀마의 대표 파고다인지 잘 알게 해주는 사원들이다.
* 쉐다곤 파고다의 불상 세안
사원 곳곳에 불상을 세안히는 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사람들은 물을 떠서 부처의 머리에서부터 물을 부어 부처를 씻긴다. 불상에 물을 끼얹으며 부처님을 목욕시킨다. 탐욕을 씻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 부부도 참여했다. 부처를 세안해주며 마음의 위안을, 그리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밤의 조명 아래에서 그윽한 정경이다.
* 쉐다곤 파고다의 촛불
쉐다곤 파고다 아래의 주변에는 촛불이 켜져 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촛불들이 일렬로 줄지어 켜져 있다. 하늘하늘 불꽃을 날리며 찾아오는 이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듯하다. 쉐다곤 파고다를 빛내는 정경이다.
* 쉐다곤 파고다의 보리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 저 보리수는 수령이 29년이다. 지나가던 행인이 떡을 주었다. 부처가 8개의 머리카락을 주었다. 8개의 머리카락을 우칼라 왕에게 갖다주었다. 신적에게 빼았겼는데 다시 그곳에 와 있어서 왕이 세운 파고다다. 높은 곳에 지으려고 평지의 흙을 파다가 언덕을 돋우고 높이 파고다를 세웠다. 그로인하여 생긴 것이 깐지도 호수다. 어둠에서 잘 보이진 않지만 보리수의 형상은 오롯하게 잘 보인다. 참으로 크게 잘 자라서 하늘 우러러 불심을 빛내고 잇다.
* 쉐다곤 파고다의 와불
차욱탓지 파고다에서 보았던 거대한 와불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와불이다. 길게 누운 와불 앞에서 신자들은 기도를 하고 있다.
* 쉐다곤 파고다의 첫 사원
쉐다곤 파고다를 건립할 때 최초로 세웠던 사원이다. 크고 작은 사원들 사이로 오롯하게 솟구쳐 올라 있다. 그런데 보수 중으로 철골조물이 덮혀 있다. 그 모습은 지금보다 아까 낮에 아웅산 국립묘지 앞에서 잘 보였다. 저 사원이 건립된 이후에 많은 사원들이 늘어난 것이다. 의미있는 사원이어서 한 동안 살펴보았다.
* 쉐다곤 파고다의 종
경내 북서쪽에는 무게가 23t이 되는 거대한 종 마하 간다(Maha Gandha)가 있다. 어둠에서 보아도 꽤 큰 종이다. 민군에서 보았던 민군종 같은 모양이다. 미얀마의 파고다에서 많이 보아온 종이다. 미얀마 파고다의 종은 누구나 칠 수 있어서 우리 부부도 그 동안 마얀마 여행에서 여러 차례 종을 쳐보았다. 이곳은 종 둘레에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칠수는 없다.
* 쉐다곤 파고다의 불상
둘레가 4백 미터도 넘는 쉐다곤 파고다를 한 바퀴 돌면서 수없이 보아온 불상이다. 쉐다곤 파고다 기단부 주변에는 작은 탑들이 있으며 각 탑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탑 앞에는 동물과 사람 등의 조형물들이 있다. 각 조형물은 파고다와 탑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원에 크고 작은 불상이 참 많다. 중앙으로 보이는 곳에는 불상들이 더 많이 있다. 신자들은 바닥에 앉아 기도한다. 미얀마 국민들의 불심 그윽한 정경이다.
* 쉐다곤 파고다 정상의 보석들 사진
쉐다곤 파고다의 지붕 맨 위에 치솟아오른 티의 맨 꼭대기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하였고, 바로 아래는 루비, 사파이어로 장식하였다. 너무 높아서 육안은 물론 사진으로도 담기 어려워서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이 잘 보도록 건물 외벽에 걸어 전시하여 놓았다. 실내에도 여러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미얀마인들의 상징물이자 세계 불자들의 성지순례지로, 원래는 금판도 붙지 않았었다. 1990년대부터 관리위원회에서 일반인들에게 금판 기증을 권유하면서 붙이기 시작하였다. 또 미얀마 역대의 왕과 불교도들이 기증한 금판으로 외벽을 장식하면서 화려해져, 지금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뒤덮인 세계적인 불교유적으로 자리잡았다. 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포함해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 2,317개의 루비와 사파이어, 대형 에메랄드가 박혀 있어 해가 뜨는 아침과 석양 무렵에는 온통 황금 빛으로 반짝인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엄청난 보물들이다. 쉐다곤 파고다의 드높은 불심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 쉐다곤 파고다 전경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는 미얀마 옛 수도 양곤의 북쪽 언덕에 있는 거대한 불탑이다. 탑의 나라 미얀마에서도 가장 유명다. 미얀마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부처의 유품과 머리카락이 있는 불교 성지이다. 화려함과 장대함, 그리고 섬세한 조각품들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현지인들도 자존심과 경배의 대상으로 참배를 많이 온다. 쉐다곤 파고다는 약 2,500년 전 부처님 살아있을 때 건립되었다고 추정한다. 버마의 두 무역상인 타푸사와 발리카 두 형제가 직접 인도에 건너가 부처님으로부터 여덟발의 부처님 머리카락을 얻어와 봉안하고 파고다를 건립했다고 한다. 몬족이 미얀마에 세운 페구왕조 때인 1453년에 건설되었다. 둘레는 426m, 높이는 100m이다. 기단부는 정사각형이고, 기단 윗부분은 원뿔꼴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급격히 좁아지는 형태를 취한다. 겉면은 전체가 황금으로 덧씌워져 있고, 내부에는 부처의 유품이 들어 있다. 미얀마인들의 상징물이자 세계 불자들의 성지순례지로, 원래는 금판이 붙지 않았으나, 1990년대부터 관리위원회에서 일반인들에게 금판 기증을 권유하면서 붙이기 시작하였다. 또 미얀마 역대의 왕과 불교도들이 기증한 금판으로 외벽을 장식하면서 화려해져, 지금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뒤덮인 세계적인 불교유적으로 자리잡았다. 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포함해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 2,317개의 루비와 사파이어, 대형 에메랄드가 박혀 있어 해가 뜨는 아침과 석양 무렵에는 온통 황금 빛으로 반짝인다. 경내 북서쪽에는 무게가 23t이 되는 거대한 종 마하 간다(Maha Gandha)가 있고, 탑의 기단 부분에는 64개의 작은 불탑이 탑을 에워싸고 있다. 또 불탑을 중심으로 72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이러한 불탑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불탑 안에는 대리석과 화강암 보도가 있는데, 맨발로만 들어갈 수 있다. 17세기에는 8차례에 걸친 지진으로 일부가 손상되고, 1786년에는 대지진으로 탑의 정상이 일부 무너져 내렸다. 현재는 그 때 그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탑의 아름다움에는 지장이 없다. 탑의 기하학적인 균형미와 섬세한 조각품 그리고 주위의 구조물들은 이 금탑의 존재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높이 99미터에 사용된 금의 양은 약 7톤, 그밖에도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 각종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어 눈이 부시다. 특히, 저녁노을이 질 무렵 쉐다곤 파고다에 오면, 노을빛과 탑에서 나온 광채에 더욱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해가 넘어간 저녁 무렵인 지금 이곳을 탐방한 것이다. 조명이 밝아서 파고다 본 건물도 잘 보이고, 여러 사원들 및 모든 정경을 다 잘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미얀마의 불교에 대하여, 파고다에 대하여 신실한 불심과 정성 등 많은 것을 배웠다.
* 쉐다곤 파고다 승리의 광장
보석 사진이 전시된 건물 바로 앞에 승리의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은 기도를 하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광장이다. 옛날부터 왕들이 전쟁을 하러 갈 때면 이곳 광장에 와서 꼭 기도를 하고 나갔단다. 그때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 승리의 광장으로 부른단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기도를 한다. 광장 중앙에는 별 모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앞에는 파고다 불탑이 솟아 있다. 쉐다곤 파고다는 여러 곳에서 기도하도록 잘 갖추어져 있어서 외국인뿐만 아니라 자국민도 많이 와 있다. 아름다운 뜻이 담긴 승리의 광장에 밤 조명이 영롱하다.
* 쉐다곤 파고다에서 만난 로마 교황
모든 관람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로마 교황이 쉐지곤 파고다에 오셔서 일행과 걸어 다니신다. 바로 눈앞에서 그 분을 보고 만났다. 그 분을 보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이다. 곳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혼잡하다. 그런데 호위병들이 일체 가까이, 또는 정면 접근을 막는다. 미얀마 방문 오신다고 보도가 나와서, 우리는 이미 오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위병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으시며 걸어가실 때 나도 사진 몇 장 찍었다. 교황을 본 것은 생애의 축복이라고 우리 일행은 흐뭇해 하며 자축했다. 타임을 잘 맞춰서 본 것이다. 로마 교황이 오셨다. 눈앞에서 보았다. 큰 축복이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두고두고 기억될 행운이다. 쉐지곤 파고다에서 나와 석식식당으로 갔다. 메뉴는 돼지고기, 닭고기, 야채 오이 등 풍성하다. 미얀마의 마지막 식사로 마무리되는 아쉬운 시간이다.
* 양곤 사쿠라 전망대 야경 조망
미얀마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양곤 시티투어와 야경 조망을 한다. 이곳 사쿠라 전망대로 오며 양곤의 시티투어를 한다. 깐도지 호수도 보았다. 어둠 속이지만 거대한 새 모양의 금빛식당건물이 호수 위에 떠 있다. 깐도지 국립자연공원은 넓은 호수와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곳으로 양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이 일대는 국립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미얀마인은 무료로 들어갈 수 있지만 외국인은 2천짜시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한화로 2천원 정도다. 깐(Kan)은 호수, 도시(Dawgyi)는 왕실이라는 의미이다. 1917년에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럽식 정원이다. 호수에는 거대한 새 모양의 배가 떠 있다. 이것은 힌두신 비슈뉴가 타고다니는 새인 커러웨익(산스크리트어로 가루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공원 내의 조형물이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이다. 어둔 저녁이라 시진은 못 찍었지만 대단한 비경이다. 깐도지 호수의 정원인 로즈가든도 지난다. 그리고 사거리에서 영국 시민지 시대의 주요 파고다였단 술래 파고다도 보았다. 사쿠라 전망대 20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왔다. 한국의 63층 빌딩 같은 곳으로 전망대 건물이다. 멀리 쉐다곤 파고다가 금빛 오롯한 비경이다. 도심은 어두운데 쉐다곤 파고다는 찬란한 조명이다. 바로 창문 앞에 아웅산 보촉거리 불빛이 화려하다. 그 거리에 Junction City 라고 쓴 흰색 건물이 오롯하다. 의류매장이란다.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의 행렬 불빛도 화사하다. 쉐다곤 파고다 반대편 창문으로 가보니 영국 식민지 시대의 정점지역이었던 곳의 술래 파고다가 찬란한 조명으로 보인다. 미얀마에서는 셜파야로 불리기도 한다 그 거리는 셜로드다. . 남편은 커피, 나는 홍차를 주문하여 미셨다 홍차의 맛이 진하고 좋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양곤 공항으로 이동한다. 40분 정도 소요된다. 밤이라서 교통체증이 없다. 잘 달린다. 미얀마와의 아쉬운 작별이 점점 다가온다.
* 양곤공항 출발
밤 11시 50분 인천행 KE 472 대한항공이다. 11시 20분에 보딩타임이다. 전자표로 각자 티케팅하여 이미그레이션을 하고 점검 후 14번 게이트로 올라왔다. 우리 부부는 58A, 59A다. 창가인데 통로쪽이던, 창가쪽이던 나란히 앉을 좌석이 없단다. 앞뒤로 창가좌석이어서 탑승 후 우리 일행과 바꾸어서 58A 58,B로 남편과 나란히 앉아서 왔다. 일행이 모두 짜개진 좌석을 일행들이 잘 조정하여 모두들 잘 조정되었다. 인천공항까지 5시간 30분 소요예정이다. 내일 11월 28일 오전 8시 인천공항 도착이다. 양곤공항은 매우 덤고 사람들이 많다. 기내옷으로 약간 두껍게 바꿔 입었다. 인천공항에 가면 더 끼어 입어야 한다. 남편과 한적한 의자에 휴식하며 생일로 보낸 분이 나누어준 과일을 먹었다. 어둠 속에서 비행기는 정시에 양곤 공항을 이륙하였다. 나는 미얀마에 갈 때 졸음으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영화 '인터루드 인 프라하'를 보았다. 그런데 역시 졸음으로 가물가물 보았다. 그래도 이제 완전히 본 것이다. 미얀마 여행의 여독을 5시간 정도를 휴식으로 풀며 캄캄한 밤하늘을 날아간다. 기류도 없고 아주 편안한 비행이다.
* 인천공항 도착
새벽 시간에 기내조식을 했다. 기장 안내방송이 나온다. 오전 7시 40분에 도착예정이란다. 인천공한 기온은 영상 1도란다. 대한항공 비행기는 정시에 인천공항에 잘 착륙했다. 어둔 밤길을 무사히 날아온 기장에게, 비행기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인천공항은 포근한 편이다. 공항내 선인장들이 예쁘다.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1인당 3700씩 적립된단다. 리무진 오전 8시 버스를 승차했다. 집으로 오며 택시 기사에게 그 동안 한국의 날씨를 물어보니 눈이 왓단다. 우리가 떠나던 날 23일 밤에 하얗게 왔단다. 24일 아침에 보니 설경이더란다. 집에 오니 오전 9시 30분이다. 공주에 사시는 이극래 선생님과 통화했다 . 선생님댁 정원의 사진을 두 장 보내셨는데 하얀 눈 풍경이다. 미얀마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가야하는 국가였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나라였다. 불교국가로 그 어떤 나라보다 파고다가 많을 뿐만 아니라 피고다 하나, 하나에 미얀마 국민들의 진솔하고 소박한 불심이 돋보였다. 그리고 순박한 사람들과 때묻지 않은 자연이 비경을 이루며 주는 큰 선물이었다. 문명이 바람이 아직 스미지 않아 그것을 보기 위해 유럽 등 세계인듸 걸음이 고이는 나라다. 우리 부부는 이제는 세계여행을 마감짓자 하면서도 그 문을 닫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행복한 비경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또 세계로 나갈 것이다. 사는 날까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늙음을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세계탐방하며 잘 살 것이다. 이건 남편과 내가 살아가는 공통적인 생활철학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는 문학이 존재한다. 문학과 여행, 그것은 우리 부부에게 그 어떤 보약보다도 더 좋은 건강행복의 청량제다. 죽는 날까지 문학과 여행은 우리 부부 곁에서 함께 갈 소중한 목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