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승하하고 순조(純祖, 재위: 1800∼1834)가 즉위한 19세기 이후 조선은 ‘세도(勢道)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말 그대로 유력한 가문이 정치를 주도한 그런 현상은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왔다. 널리 알듯이, 이때의 유력한 가문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였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21세의 이른 나이로 훙서(薨逝- 왕이나 왕족의 죽음)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이름은 대부분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효명(孝明)’이라는 이름대로 그는 효성스럽고 명민했다고 판단된다. 그 명민함의 핵심은 뛰어난 문학·예술적 능력이었다.
탄생과 순조로운 성장
효명세자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純元)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1809년(순조 9) 8월 9일에 탄생했다. 3세 때 이름을 영(旲. 원래 발음은 ‘대’지만 ‘영’으로 부르도록 했다)이라고 정하고(1812년 6월 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7월 6일).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은 세자의 휘와 같다는 이유에서 이름을 ‘이양(履陽)’으로 고치기도 했다(8월 21일).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고(8세. 1817년 3월 11일) 관례(冠禮- 성년식)를 거행했다(10세. 1819년 3월 20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세자의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풍양 조씨와의 국혼
이때의 중요한 일은 국혼이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국혼은 늘 중요하지만, 세도정치가 시작되던 이 시기에는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세자는 부사직(副司直. 종5품 무반)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1819년 10월 11일).
뒤에 신정(神貞)왕후(1808~1890)로 책봉된 그녀는 요절한 남편과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인 고종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고(1863년 12월 8일) 3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등 뚜렷한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이때의 국혼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이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가 세도정치의 한 주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었다. 조만영은 조부가 이조판서 조엄(趙曮. 1719~1777)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를 지낸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었다. 그와 함께 활동한 동생 조인영(趙寅永. 1782~1850)은 순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고 순조 묘정에도 배향되었으며, 추사 김정희와 금석문을 연구하기도 했다.
조만영은 딸이 세자빈에 간택된 뒤 대사성·금위대장(禁衛大將)·비변사 제조·예조판서·어영(御營)대장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을 때는(1827. 순조 27) 이조판서와 어영대장을 겸임해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하는 막중한 권력을 갖기도 했다.
그는 효명세자가 붕어한 뒤 안동 김씨에 밀렸지만, 형조·호조·예조판서·한성부 판윤·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계속 지키면서 풍양 조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효명세자나 왕세손(헌종)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해 풍양 조씨 세도의 군사적 배경을 형성했다고 평가된다.
대리청정과 붕어
추존 문조대왕(효명세자)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綏陵). 수릉이 위치한 ‘동구릉’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조선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현릉,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수릉, 경릉이 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 사적 제 193호.
효명세자는 18세인 1827년 2월 부왕 순조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었다. 뒤에서 보듯이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청정 1년 전부터는 시작(詩作)보다 경세에 관련된 독서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순조에게서 청정을 미리 통보 받고 대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미래의 국왕답게 젊은 세자는 의욕적으로 청정을 시작했다. 우선 일련의 인사를 단행해 안동 김씨 계열을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을 널리 등용했다. 홍기섭(洪起燮. 예조판서 역임)·김노경(金魯敬. 이조판서 역임) 등이 측근에서 보좌했고, 장인 조만영을 비롯한 조인영(영의정 역임)·조종영(趙鍾永. 우참찬 역임)·조병현(趙秉鉉. 이조판서 역임) 등 풍양 조씨 출신도 비중 있게 활동했다. 김정희·권돈인(權敦仁. 영의정 역임)은 조인영과 친구 사이였고, 이지연(李止淵. 우의정 역임)·이기연(李紀淵. 형조판서 역임) 형제는 조만영과 사돈이었다. 호적법을 정비하고 형옥(刑獄- 형별과 옥사)을 신중하게 한 것은 의미 있는 시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이었다. 이전에도 수두(3세. 1812년 10월 18일)와 홍역(13세. 1822년 11월 24일)을 앓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순조롭게 왕자를 낳는 등(1827년 7월 18일 헌종 출생)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1830년(순조 30) 윤4월 말에 각혈한 뒤 며칠 만에 승하한 것이다(5월 6일). 왕실 중흥의 기대를 무산시킨 허망한 결과였다.
세자는 ‘효명’이라는 시호를 받은 뒤(1830년 7월 15일) 익종(翼宗)을 거쳐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에 신정왕후와 합장되어 있다.
뛰어난 문학ㆍ예술적 재능
앞서 말했듯이 효명세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짧은 생애에도 문학과 예술에서 남다른 성취를 이뤘다는 것이었다. 세자는 [경헌시초(敬軒詩抄)], [학석집(鶴石集)], [담여헌시집(談如軒詩集)], [경헌집(敬軒集)] 등의 여러 문집을 남겼다. 거기에는 시조(9수)와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 ‘춘당대(春塘臺)’ 등의 국문 악장을 비롯해 4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시는 연작이 많아 실제 편수는 이것을 훨씬 넘는다.
시는 자연을 감상한 내용이 많은데, 주로 신하들과 그런 내용을 주고받거나 궁궐 내외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에서 풍광을 읊었다. 또 다른 특징은 누이와의 우애를 그린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공주 등 누이동생만 셋이 있었는데, 그들과 각별한 정을 나눴다. ‘사매씨(思妹氏)’는 그 제목처럼 누이를 그리는 마음이 담뿍 담긴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연과 누이를 사랑하는 작품이 많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케 한다.
좀더 중요한 분야는 연회와 관련된 예술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청정한 3년 동안 해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는데, 순조의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 1827)’,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戊子進爵儀. 1828)’,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己丑進饌儀. 1829)’가 그것이다(궁중 연회는 ‘연향[宴享]’이라고 통칭되는데, 그 규모가 큰 순서대로 진풍정〔進豊呈〕·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으로 나뉜다).
효명세자는 이런 큰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만들었다. 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부분은 궁중 무용인 정재무(呈才舞)를 다수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규모와 복식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설정한 정재무를 여럿 창작했다. 해당 연회의 각종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한 의궤(儀軌)에 남아 있는 그런 업적은 그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대규모의 궁중 연회를 거행하는 데 주력한 까닭은 효심의 발로와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세자는 유교의 근본인 예악(禮樂)을 중시하는 덕망 있는 군주의 존재를 널리 알려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아무튼 효명세자는 그런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4년 뒤 순조가 붕어하자 7세의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이 왕위를 이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즉위한 국왕이었다(그 이전에 어린 나이로 즉위한 국왕은 순조〔10세〕·명종〔11세〕·성종〔12세〕·숙종〔13세〕 등이 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본관 안동. 김조순(金祖淳)의 딸)의 수렴청정이 시행되면서 세도정치는 더욱 심화되었다. 서양 열강의 본격적인 동점(東漸)으로 평가되는 아편전쟁(1840)을 6년 앞둔 시점이었다. 조선의 국운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었다.